클럽 에피소드 1 : ‘계단 끝에서 그를 사다’ written by. 조반유리 승훈은 열 일곱 살 때 소년원을 다녀왔다. 별 거 아닌 이유였는데, 동네 사는 깡패 녀석을 팼던 것이 그 이유였다. 왜 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또래 쯤에 흔히 있는 다혈질에 혈기 왕성한 질풍노도..뭐 그런 것 때문이었나. 아무튼, 돌아와 보니, 부모님은 이혼하시겠다고 말했다. 원래부터 딱히 사이도 안 좋았기에 승훈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아니라 신들이 이혼하겠다고 해도 그는 먹고 살길 만이 고민일 뿐이었다. 승훈이 사는 곳은 서울에서 아직도 가장 가난하다는 동네였다. 그 동네는 수없는 계단을 올라가야 끝이 보이는 집들, 즉 달동네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승훈은 그 달동네와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낡은 아파트에 살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거기 살았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느 쪽도 승훈을 맡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는 홀로 아파트에 남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압구정동에서 가장 유명한 호스트 바에 취직했다. 역시 이유같은 건 별로 없었다. 그냥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내세울 거라곤 반반한 외모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무 살 이후로, 승훈은 그 전의 자신의 모든 기억들에서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자신은 스무 살을 기준으로 그 이후로만 존재하는 화려한 호스트 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머물고 있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 동네였다. 가끔 출근하기 위해서 차를 몰고 나오다 보면, 달동네로 올라가는 계단 끝에 누군가 앉아 쉬고 있었다. 몹시 더운 여름 날, 곧잘 그러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강지윤’이라는 이름이었다. 그가 집을 비운 어머니 대신 슈퍼에 반찬꺼리를 사러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주가는 슈퍼는 바로 그 긴 계단의 끝에 있었다. 지윤과는 그저 어린 시절부터 조금 아는 사이다. 좁은 거리였고 몹시 더웠으므로, 승훈은 가끔 차를 멈추고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곤 했다. 그렇다고 지윤을 특별히 생각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윤은 달동네에서도 그저 왕따였고, 자신은 이 동네를 뜨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언젠간 떠날 가난한 동네였기 때문에 승훈은 그저 변덕을 부린 것이었다. 그가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떠나면, 자신의 차 백밀러로 지윤이 계단에 여전히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주 그랬지만, 그 사실을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 계절이 여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도 가끔 잊곤 했다. 한마디로 승훈은 그냥 이 동네에서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외제차에서 내려, 자신의 허세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준 것이었다. 사실 기억하기에는 지윤이 너무 초라했고 아무 의미도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다른 세상에 살겠다는 야망으로 너무나 가득차 있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누구나 지금보다 나은 현실을 꿈꾼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잠시 자신이 비열하고 인간 이하이며 나쁜 사내가 된다고 해도 전혀 후회가 없다. 어차피 성공하고 나면 모든 것은 잊혀진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 임승훈은 압구정동 호스트 바 Ananomi에서 가장 잘 나가는 호스트 중 하나였다. 그는 이 일을 천부적이라고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즐기는 부익 계층에 속했다. Ananomi 는 고급 샹들리에와 융단으로 장식된 실내 내장과 수입 원목으로 짜여진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Ananomi는 한국에서 가장 괜찮고 품격있는 호스트 바 중에 하나라고 여겨질 공간이다. 승훈은 그 안에서도 가장 수려한 외모와 늘씬한 몸, 그리고 조금은 방탕해 보이는 라이프 스타일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가진 수완 중에 하나, 즉 그토록 새끈한 외모에 조금은 거칠어 보이는 묘한 매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인기는 그의 건방짐과 걸맞게 명성이 자자한 편이었다. 호스트 생활 2년 째, 스물 둘의 승훈에게 만약 강지윤이라는 복병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필시 더욱 그 생활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삶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 호락 넘어가 주질 않는다. 언젠가 그 지지리도 간난한 동네의 계단 끝에 앉아 자신이 내민 아이스크림을 먹던 그 인간. 강지윤이 갑자기 이 호스트 바 Ananomi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Ananomi에서 가장 거칠고, 비열하고 이기적이고 그러면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임승훈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 자리를 좀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1. 누군가 등뒤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접시를 깼다. 이제 스물 두 살이 된 승훈이 그 소리에 아직 적응이 안 된다. 그는 짜증 섞인 듯 머리카락을 몇 번 거칠게 긁어 버린다. 이럴 때 뒤돌아보면 정말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 골백번을 참고 있다. 접시를 깨뜨린 녀석이 누군지는 뻔하다. 바로 몇 달 전에 신입으로 들어온 스물 세 살짜리 서비스 맨 '지윤'의 행동이다. 이른바 강지윤. 뭐 하나 잘 난 거 없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그저 승훈을 따라 덜컥 취직해 버린 머저리 같은 인간. 그것이 지윤을 대하는 승훈의 방식이다. 한마디로 지윤은 날마다 승훈의 일상을 치고 들어와 괴롭히는 촌뜨기 얼닭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제대로 좀 할 수 없어!?" 어릴 때부터 지윤의 그런 모습을 보아온 승훈은 아예 존댓말이란 씨로 말아먹듯 내동댕이친다. 그에게는 지윤이라는 존재 자체가 늘 짜증이 났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호스트를 할 기질은 아예 보이지 않아 싹수 노랗게 포기해 버린 인간이 접시도 하나 제대로 못 나른다. 아주 환장하겠다. 움찔. 그러나 조금 언성이 높아진 승훈의 태도에도 금방 마음이 움츠러드는지 그 볼품없는 외양을 한껏 움찔거리며 지윤이 부지런히 깨진 접시를 담았다. 부글 부글 거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승훈은 지윤의 팔꿈치를 휙 잡아당긴다. "창고 안에 빗자루 있거든, 강지윤. 그냥 대충 쓸어 담지 그래? " "............아..." 뭐가 도대체 '아'냐... 승훈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허찬 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등을 휙 돌렸다. 정말 한 두 해도 아니고, 노는 물이 달라서 서로 못 봐주는 사이가 될 것 같다. 2. 엄밀히 말하자면 강지윤은 임승훈의 친구 형이다. 기껏해봤자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지윤은 어린 시절부터 골목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었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그 집안 살림 때문에 날마다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지윤의 동생이자 승훈의 친구인 ‘지석’은 별로 그 일을 문제삼지 않았지만, 형인 지윤은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놀림을 당한 것은... 자신에 대해 아무런 변명도 할 줄 모르는 머저리가, 바로 지윤을 바라보는 승훈의 시각이다. "지윤이 좀 잘 교육 시켜봐, 임승훈. 니가 그래도 우리 클럽에서는 잘 나가는 인물 중 하나잖아?" 프런트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던 사장 대철이 한마디 힐끗 던진다. 그 말의 저의를 잘 알고 있다. 호스트 생활 2년. 어느덧 어른들의 규칙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만큼 속물이 되었다고 욕해도 상관없다. 처음부터 속물인 인간이 어디에 있나. 승훈은 지금 Ananomi의 가장 잘나가는 호스트 중 하나다. 잘 나간다는 것은, 손님들의 호출이 많고 돈 벌이가 짭짤하다는 의미다. 이른바 바 안에서 같이 파트너를 해 주는 1차를 떠나서 2차 3차까지 불려다니면 그 만큼 팁도 많아진다. 대철에게 매일 상납하는 실제 거래액 외에 나머지 부수입은 모두 승훈 자신의 것이다. 그만큼 그는 Ananomi에서 인기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재수 없는 인간이 나타난 것은 바로 몇 달 전의 일이다. 승승장구하며 여자나 남자 모두를 거머쥐고 즐기던 삶에서 갑자기 촌닭의 보호자같은 역할로 하락해 버렸다. 승훈은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엇보다 성질이 났다. 일주일 전에 지윤이 그야 말로 산 사오년 전에 유행이 끝난 허름한 잠바를 입고 꾸부정하게 Ananomi의 입구에서 쭈빗거린 것이다. 그가 입고 있던 중년 잠바, 가짜 메이커를 생각할 때마다 승훈은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왔다. 입구에서 지윤이 찾은 사람이 다름 아닌 승훈이었다. 승훈은 지윤의 동생인 지석과는 그런대로 친한 편이었다. 지석은 자신의 형에 대해 별 말 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순수해서 마음이 아픈 형..이라고만 말하며 삐딱하게 웃곤 했다. 그들 모두에게 지윤은 동네 뒷골목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때 국물 흐르는 아이..라는 것이 거의 사실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강지윤이 떡하니 Ananomi의 입구에서 승훈을 찾았다. 그리고는 못내 당황해하는 승훈과는 상관없이 그 초라한 행색으로 떠듬 떠듬 일자리를 달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결론은 그것이었다. 어머니와 단 셋이 살았던 지윤에게서 지석이 바로 군대에 입대한 것이다. 지윤은 정말 일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기가 막힌 승훈을 향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며 그가 덧붙였다. ‘믿을 것이 너 밖에 없어서..’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승훈은 갑자기 짜증과 분노가 차오르는 기분이 되었다. 그 날 이례로 그의 기분은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린다. ********************** 만약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고... 지윤이 문득 나타나서 일이나 잘 했으면 승훈이 그렇게까지 짜증을 내진 않는다. 그러나 어린 시절 동네나 학교 모두의 '왕따'였던 강지윤이 일이라고 썩 잘하는 종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생색 내기 식으로 소개 시켜 준 일이 바로 Ananomi의 룸서비스 일이었는데, 그는 어지간한 서빙도 제대로 못하기 일쑤였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벌써 몇 번 째 접시를 깨는지 , 혹은 술 종류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임승훈도 그다지 인내심 깊은 편은 아니었지만, 쉽게 쉽게 자라온 편이라서 이런 종류의 일에는 짜증이 났다. 아니 돈 쉽게 잘 벌고 인기 호스트 2년차인 자신이 왜 이 촌닭의 뒤치다꺼리를 해야하는지, 그 자체가 이미 이해가지 않는다. 휘익- 머리를 성가시듯 쓸어 넘기며 승훈은 룸의 문을 열었다. 아직 손님들이 올 시간이 안됐기 때문에 룸 안에서는 다른 녀석들이 담배를 피며 농담을 즐기고 있었다. 승훈이 들어서는 순간, 그 찡그린 듯한 인상에 다들 조금 의아한 눈초리였고, 이내 무슨 이유인지 생각났다는 듯 규철이 힐쭉거린다. "그러지 말고 아예 호스트로 만드는 거 어떠냐, 임승훈? 그 새끼 내가 보기에 인물은 꽤 반반하던데.............." 하아~라고 승훈은 짧게 쓴 웃음을 짓는다. 아직 초저녁인데 벌써 피곤해 진다. 오후 4시에 출근해서 이것 저것 준비하고 오픈함과 동시에 손님들의 예약을 받는 그로써는 지윤의 존재자체가 계속 걸리적거리는 거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이름을 팔고 Ananomi에 취직했으니 절대 빠져 나갈 수가 없다. 정말 말 그대로 체면도 있고 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취직시킨 거지만, 한마디로 부글거린다. 이제는 자신보다 호출이 한참 덜 들어오는 규철마저 이 일에 비웃듯 하얀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규철과의 묘한 라이벌 의식을 생각하면 그 일은 더욱 성질이 난다. "강지윤이 호스트를 하느니 내가 성을 간다, 김규철." 승훈이 이를 갈 듯 툭- 한마디 내 던지자 규철의 옆에 있던 서유가 막 웃음을 터뜨린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내가? 아니면 강지윤이? 하긴 나도 내 꼬락서니가 갑자기 우스우니 할 말 다 한 거다. "넌 좀 혼나 봐야 해, 임승훈." 왜 그랬을까. 그 순간에.. 아마 갑자기 싸움이라도 벌일 듯, 반짝이는 눈동자로 즐겁게 응시하는 규철 때문이었을까. 혹은 녀석이 던지는 그 건방진 말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승훈은 그 순간에 원하지도 않는 말을 불쑥 내 뱉고 말았다. "내가 떠나면서 강지윤을 대타로 남겨 놓고 나가면 속이 시원하겠냐?" 한 눈에 보아도 값비싼 양복을 셔츠를 갑자기 둘둘 말아 올리며, 승훈은 규철을 향해 비웃었다. 그런다고 니가 다시 지명도 1위가 될 거 같아? 오라..너 같은 새끼가 이 세계에서 그래도 일 순위라도 되고 싶은 게 꿈인가보지? 규철은 자신에게 실적 1순위를 빼앗긴 것이 아쉬운 것이다. 물론 승훈의 말은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비꼬임에 불과했다. 문제는 규철의 반응에 있었다. 그는 승훈의 제안이 몹시 흥미롭다는 듯, 달콤하게 미소지으며 불쑥 앞으로 상체를 내민다. "재미있겠는걸? 해 볼 수 있으면 한번 해보시지, 임승훈" “깝치지 말고 니 손님 관리나 잘 해라.” “이건 어때, 그럼? 니가 예전부터 애태우고 있던 내 손님, 원주연을 너에게 넘길게. 땡기는 제안 아냐? 너 정도의 속물이라면 틀림없이 끌릴텐데?“ “.......-!!!!!!!” 그것은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규철이 주연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룸에 있던 호스트들의 눈이 일순 그에게 쏠린다. 장난처럼 웃고 있던 녀석들의 얼굴이 조금은 진지해진 것이다. 승훈도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다. 예사롭지 않은 제안이다. 원주연이라면, 우리나라 제 일의 기업 손녀라고 Ananomi에 소문이 쫙- 났다. 그녀가 입는 옷에서 들고 있는 가방까지 명품이 아닌 것은 전혀 없었다. Ananomi가 있는 압구정동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그녀의 부와 세련됨은, 모든 호스트들과 손님들의 탐미 대상이었다. 그 뿐이면 좋을텐데. 그녀는 재력에 알맞은 미모와 지적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보다 더 감질나는 여자도 없다. 실질적인 Ananomi의 넘버 원인 임승훈이 그녀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은 규철보다 늦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규철의 손님이었다. 대부분의 메인 손님들이 승훈에게로 넘어온 것과는 달리 이 유명하고 특별한 손님은 언제나 상냥하고 고급스럽게 미소지으며 규철을 룸으로 불러 들였다. 한마디로 지금 규철이 꺼낸 제안은 승훈으로 하여금 동물적인 승부욕과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동시에 부채질 한 것이다. 승훈의 이름을 빌미삼아 이 곳에 기생하는 어울리지 않는 지윤과 그 대단한 주연을 서로 바꾸자는 제안과도 같다. 말 그대로 승훈은 주연을 짝사랑 하고 있는 충동적인 십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였을까. 갑자기 승훈은 크게 웃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다른 녀석들도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비튼다. 규철의 한 쪽 눈썹이 휙 올라가는 것을 자세히 쳐다보며,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눈길로 승훈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치 포커 판의 판돈을 높이듯 말이다. “.........주연 받고 너의 아우디 더. 강지윤을 Ananomi 최고의 호스트로 만들어주지.“ “아니. 그건 내 아우디까지 걸기에는 너무 쉬운 일이야. 내가 보기에 재능은 충분히 있다구. 만약 내 아우디 승용차가 가지고 싶으면 한 가지를 더 걸기, 임승훈.“ “재능? 하.. 니들이 녀석을 몰라서 그래. 난 강지윤이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구. 그 녀석은 어떤 수를 써도 계속 왕따인 게 당연해. 그런 식으로하면 내기 판돈이 너무 커지는 것 같은데..” “자신없으면 지금 그만두고, 그럼. 강지윤을 Ananomi 의 일급 호스트로 만들어. 그리고 난 한 가지 더 제안할게. 그 녀석이 너에게 반하게 만들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그리고 나서 차는 거지. 넌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비열하고 속물적인 인간이잖아?“ 마지막 규철의 반격에 승훈이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기가막혀서 웃음이 절로 세어나온다. “...........반하게 만들라구? 말도 안돼. 그런 녀석은 백 트럭 쯤 갔다줘도 싫다.“ “왜? 자신없어? 얼마든지 니 걸로 만들 수는 있잖아? 너는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놈인데, 그깟 녀석하나 반하게 못 만들어? 그리고 강지윤이 임승훈에게 반했다 한들, 니가 가질 것도 아니잖아? 당연히 버리는겠지, 너 같은 녀석은.. 그러니깐, 지윤이를 일급 호스트로 만들어. 그리고 너에게 반하게 하면 되지. 그러고 나면 차는 것 까지는 문제 없잖아?“ “.........................”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게 안 좋은 조건이 아냐. 아우디 승용차의 가격을 생각해보라구, 임승훈. 거기다가 원주연도 걸었어, 나는.“ 결국 그렇게 된 것이다. 거래는 그런 식으로 성립되었다. 초라한 인간 강지윤을 Ananomi의 일급 호스트로 만들어내고, 자신에게 반하게 만든다. 그러면 승훈은 원주연과 규철의 아우디를 한꺼번에 가질 수 있다. 반대로 지윤이 일급 호스트가 되지 못한다면, 승훈이 무릎을 꿇고 Ananomi 가족 전체 앞에서, 규철에게 압구정동을 떠난다고 맹세해야 한다. 이것은 정말 비열하고 속물적이며 또 한편으로 계산적인 내기였지만, 승훈은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단 강지윤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을 뿐이다. 3. 강지윤은 문제적인 인간이다. 승훈은 화를 참지 못하고 담배 끝을 질근 질근 씹는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도대체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뭔지가 궁금해진 거다. “너는 자세부터 좀 고칠 수 없냐? 왜 그렇게 구부정하게 다니는 거야? 누가 널 때리기라도 한대?“ 부드럽게 염색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거칠게 쇼파 아래를 걷어찼다. 룸 안에 불러들여진 지윤이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으로 쇼파 안 쪽으로 더욱 몸을 움직인다. 그래봤자 도망갈 곳도 없는 녀석이 말이다. 내가 왜 그런 내기를 했을까. 승훈은 욕을 퍼부으며 담배를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오늘의 영업을 마쳤을 때, 승훈은 피곤에 가득한 눈으로 지윤을 룸에 불러들였다. 원하는 것은 명품의 가치를 지닌 주연과 규철의 아우디 승용차, 그리고 납작해지는 규철의 자존심이다. 자신은 다른 건 다 참아도 지고는 못 참는 성격이다. 축구 경기만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지면 테이블을 뒤집어 업는 게 그의 승부욕인 것이다. 더군다나 어딘가 딴 세상에서 온 듯한 귀족적인 미모의 주연이 걸린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오늘부터 당장 내기에 착수한다. 주어진 기간은 한 달이다. 길어봤자 그렇다는 것이다. “강지윤.” 보다 딱딱한 어조로 비꼬듯이 부른다. 그러나 녀석은 반응이 없다. 반응이라고 해봤자, 승훈이 부를 때마다 움찔거리는 녀석의 태도다. 말을 잘 들어줘야 할텐데.. 라고 생각하며 승훈은 쇼파에 앉은 지윤앞에 무릎을 구부리듯 몸을 낮춘다. 눈동자가 들여다 보일 정도의 거리가 되자, 녀석은 당황한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자세히 본 적은 없지만, 사실 얼굴 자체로 보면 그렇게 볼품없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마른 느낌을 주는 몸에 한 몇 년 전에 유행한 아저씨 잠바, 그리고 발목까지 밖에 오지 않는 후줄근한 청바지 때문에 드는 느낌이다. 살도 찌지 않은 몸이니만큼,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이다. 눈을 들여다 볼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눈매나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이목구비만은 단정하고 반듯하다.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잖아.. ..승훈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지윤의 시선을 마주치려는 의도였지만, 역시 실패다. 가까워지는 승훈에 겁을 먹은 듯, 녀석은 점점 더 몸을 뒤로 사리고만 있다. 쇼파 끝까지 가면 어디로 도망갈지 문득 궁금해진다. “잘 들어, 강지윤.” “..드..듣고..있어....” “말 더듬거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형 한심해 보여.” “.................” 입술을 비틀며 비웃는다.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문득 새로운 모습이다. 조금 흐릿한 룸의 조명으로도, 그의 잘 뻗은 콧날과 긴 속눈썹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재미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승훈은 짓궂은 태도로 그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흔히들 누군가를 위협할 때 쓰는 방식이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예상 외의 반응을 보였다. 바로 손바닥 아래에서 움찔- 작게 요동하는 기분이 느껴진다. ‘눈을 맞춘다’라는 짧은 행동,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친밀감 넘치는 행위에도 금방 겁을 먹는다. 지윤의 동생인 지석은 형이 많이 맞고 자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태어나서 이십여년이 넘게 살았지만, 이렇게 한심한 녀석은 본 적이 없다. 그가 늘 어릴 때부터 땟국물이 흐르고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승훈은 그가 뒤로 몸을 뺄 수록 더욱 짜증이 났다. 성미가 급한 자신으로써는 그의 이런 태도에 조금의 동정도 없었다. 그에겐 지금 어떻게 하면 주연과 아우디를 얻을 것인가의 문제밖에는 생각할 것이 거의 없다. “너, 호스트 할래?” 마침내, 진지하게 의견을 물었을 때 갑자기 손 바닥 아래 목덜미가 소름이 돋는다. 그 어리석은 반응에 승훈은 목 너머로 작게 상대를 비웃는다.조금만 더 다듬으면 가망성은 있다. 아주 구제불능의 얼굴은 아니다. 그러나, 이 쭈삣거리고 자신감 없는 한심한 태도는 여전히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승훈의 그 짧은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하며 머뭇거린다. 인내심이 바닥나는 바람에 그의 목덜미를 좀 더 힘주어 잡을 때야, 한숨처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웅얼거리듯, 의미없는 대답이다. “..호..호스..............트...?..” “돈 많이 벌 수 있다구, 강지윤. 내가 보장하지. 지금 하는 것처럼 그렇게 볼품없이 안 돌아다녀도 돼..“ 그러나 여전히 머뭇거리는 기색이다. “내가 키워줄게, 형. 세상에 믿을 건 나 밖에 없다며?” 마지막에는 좀 더 잔인해졌다. 자신이 심한 말을 하고, 그를 언제나 심하게 대한다는 걸 알면서도 승훈은 주저없이 단호하게 비웃었다. 아주 꼬마 때부터 그는 늘 이 모양이다. 누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한들, 반격할만한 의지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지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기껏해야 접시 나르는 일 하려고, 나에게 일자리를 구걸했던 건 아니잖아, 그렇지?“ “........-!!!” 구걸이라니. 그건 어찌보면 가장 강력한 수치감이다. 더군다나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지윤의 동생, 그리고 자신의 친구 지석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그 혈통을 조금은 떠올리듯, 그가 잔인한 그 한마디에 번쩍 고개를 돌린다.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둥그런 눈 모양이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확히 자신을 꿰뚫어본다. “.....!........” 그러나 이번에 놀란 것은 어쩌면 지윤 만이 아니었다. 웬지 모르게 쿵- 하고 마음 속에서 짧은 충격이 횡경막을 치듯 내려앉은 것이 오히려 승훈이다. 놀란 듯 크게 뜨여진 둥근 눈은 조금 예상 밖이었다. 맑은 갈색 눈동자가 갑자기 망연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눈동자 어디에도 일말의 의심같은 것은 없었는데, 긴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만이 조금의 음영을 더하듯 눈동자를 둘러싸고 있다. 승훈의 제안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묘하게도 그 모습은 조금 지윤을 생소하게 보이도록 조종했다. 그것은 갑자기 걷던 길에서 십만원 짜리 수표라도 건진 것처럼 일종의 싸한 쾌재를 부르게 만들었다. 갑자기 조금 놀란 까닭에 승훈은 아무런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마구 말들을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지석이가 제대할 때까지 억지로 기다릴 필요도 없고 말야. 조금만 노력하면 멋진 옷들과 약속들, 그리고 손님들이 기다린다구. 강지윤. 형은 친구도 없잖아? 그 나이에 친구 하나 없다니..정말 쪽팔리지 않아? 기껏해봤자, 동생 친구에게나 일자리 구걸하러 오고 말야. 만약 내가 하라는대로 하면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사귀게 해 줄게.“ 이성적인 판단없이 흘러나온 말들이지만, 이 역시 잔인하다. 마치, 평상시 자신이 지윤에 대해 느끼고 있는 생각을 드러낸 것 같아 속이 조금 뒤엉켰다. 그러나 할 수 없잖아..라고 조금은 자기 위안을 할 뿐이다. 누가 뭐래도 그에게 친구가 없고 늘 따돌림을 받은 건 역시 자신의 탓이다. 이처럼 겁을 집어 먹고 떠는 듯한 태도에도 그 원인이 있는 거다. “.........너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럽게 눈을 떼지 못하는 승훈을 향해, 잠시 마른 침을 삼키며 그가 되묻는다. 그것은 딱히 질문이라기 보다는 그냥 확인과 같은 한마디다. 밀어붙이면 말을 듣는 성격. 그것이 한심스러운 강지윤의 본능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승훈의 사고는 한 0.5초 정도 정지했다. 마치 생각에 잠긴 것처럼,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해 살며시 내리깐 그의 속눈썹을 음미한다. 사로잡힌 불쌍한 날짐승처럼 파닥이는 손바닥 아래 감촉을 즐긴다. 왜 인지 스스로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그래, 나처럼.” 나처럼, 아주 많은 여자들에 둘러싸이게 해 줄게. 원한다면 끝발 날리는 압구정동 날라리들과도 명함을 교환하게 될거야.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쥐고 그들의 상대가 되어 줄 수도 있고, 그 사실에 쾌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부와 얼굴로 값어치를 메기는 거지. 속물적이라고? 속물적이지 않은 인간은 또 어딨어? “...............” 대답하지 않은 채, 지윤이 짧게 한숨쉬며 다시 고개 돌린다. ‘알겠다’라는 표시와 같다고 승훈은 깨달았다. 그 둥그런 눈동자는 다시 쿵- 하고 승훈의 갈비뼈를 한 대 치듯, 똑바로 쳐다보았지만 이내 눈길을 거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에 승훈은 팔꿈치부터 저릿해왔다. 그 바람에 그는 마치 물건을 다루듯, 지윤을 잡은 스스로의 팔을 재빨리 걷어낸다. 석연치 않은 찝찝한 기분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찝찝함은 설명할 길이 없다. 승훈으로써도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너무나 순식간에 밀어내듯 팔을 걷었기 때문에 밀쳐진 듯한 자세로 지윤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본다. 조금 전의 선명한 눈길이 아니라 다시 눈에 뭔가 한 겹 씌워진 듯한 멍청한 표정이다. 그럼 그렇지...라고 속으로 몇 번 욕설을 퍼 부은 후에, 승훈은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강지윤은 아마 압구정에서 가장 별볼일 없는 특이한 호스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힘을 내 볼 생각이다. 그 대단한 원주연은 이 압구정동에서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인 것이다. 그런 여자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주연과 자신과 걸어가면, 모두가 자신들에게 ‘한 폭의 그림’ 같다라고 말할 것이 뻔하다. 그리고 그 여자의 재력 정도라면 자신은 이제 ‘겉모양’만 그럴 듯한, 이 호스트 생활을 때려치우고 크게 한 몫 챙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정도면 승부를 걸어볼 만 하다. ****************** 그래도 역시다. 승훈은 지윤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이토록 참을성이 없다는 걸 깊이 생각하는 중이다. 역시 지윤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깊게 후회하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다짐을 되새기려 애썼다. 뭐니 뭐니해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능사다. 규철도 인정했듯이, 그가 그다지 말도 안 되는 얼굴이 아닌 만큼 돈들이고 공들이면 뭔가 한 껀 나올지도 모른다. 승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휴일날 오랜만에 집을 나선 것이다. 대개의 경우 승훈은 휴일에는 절대 집에 있는 편이다. 매일 같이 외출에다가 노동을 해야 하는 것도 힘든데, 휴일까지 돌아다니는 것을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여자든 남자든 섹스 상대가 있을 때도 그는 휴일에는 절대 집을 선택했다. 그런 자신이 모처럼 휴일에 집을 나선 것이다. 그것도 일요일은 영업을 하고 월요일에 쉬는 그들을 위해서 가게가 다 문을 연 오후 5시에 말이다. 처음 들어선 것은 헤어샵이었다. 머리 모양을 바꾸고, 그에 알맞은 옷을 사는 게 먼저다..라고 철칙을 가지고 있는 승훈이다. “못 보던 얼굴이네? 승훈군 친구?“ 이상하잖아..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며 단골 미용사가 웃는다. 그의 손에 들려진 머리 빗에 촛점을 맞추며 승훈은 어깨를 들썩였다. 미용사가 비웃는다해도 할 말이 없다. 세련되게 갈색 피부로 태운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본다. 모 가수가 선물한 값비싼 롤렉스 시계가 6시를 가리켰다. 지루한 까닭에 목을 이리 저리 움직이며 그는 잡지를 들척인다. 저쪽에서 머리 손질이 끝나려면 한참 멀었다. 다짜고짜 예약해 놓고 지윤을 끌고 와서는 ‘세련되게 바꿔주세요.’라고 요구했지만, 단골 미용사를 믿는다. 아마, 승훈이 처음 머리를 한 곳도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자신이 한 선택을 비교적 신뢰하는 편이었다. 단 한가지, 저 머저리 강지윤에 관한 것을 빼면 말이다. “다 됐어, 승훈군!” 흡족한 표정으로 손을 닦으며 미용사가 나왔다. 이른바 헤어디자이너라고 부르는 게 맞는 표현일테지만, 승훈은 언제나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게 편한 타입이다. 그는 짧고 오만하게 ‘수고했어요.’라고 말하고 자켓을 집어 들었다. 카드로 그어도 어차피 지금의 자신에겐 몇 푼 안 되는 돈일테다. 누가 그랬던가. 한 국가에서 절대 망하지 않는 사업을 하고 싶다면 성(性)에 관련된 것을 하라고. 아마 자신이 지금까지 한 가장 멋진 선택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직업을 가진 것이다. 물론, 그래도 언젠가는 그만두고 더 높은 계급 상승을 꿈꾸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직업은 다음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과도 같다. 자긍심 정도는 가지고 있다. 카운터에 다가서며,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일단 지갑을 꺼냈다. 그러자, 헤어디자이너는 뭐가 즐거운지 조금 크게 웃으며 승훈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다. “확인 안 해 봐도 돼?” 확인이 뭐가 필요할까. 그래봤자, 강지윤이 어디가는 것도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마지못해 고개 돌린다. 디자이너의 어깨 너머로 조금 밝아진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뭔가 눈꼬리에 걸릴 듯 말듯, 미려하게 스쳐간다. 가뜩이나 눈매가 날카롭다는 주의를 듣는 승훈이었지만, 조금 더 가늘게 뜨고 관찰하듯 그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응시한다. 아마 헤어샵의 밝은 조명과 아직 지지 않은 해도 한 몫 더 했을지 모른다. “마음에 들어?” 그런 건 당사자에게 묻는 것 아닌가..라고 떠올리기도 전에 나풀거리는 뭔가의 실체를 깨달았다. 밝게 염색한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흔들었다. 이전의 강지윤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사람을 보는 환영이 들었다. 약 한 시간전까지 지윤은 답답할 정도로 마구 자란 머리카락을 무거울 정도의 검은 색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밝게 물들인 머리카락은 그의 부드러운 이마 선과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또렷한 눈매를 살려낸다. 승훈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맑은 피부라고 그 날 룸에 단 둘이 있을 때도 느끼고 있었지만, 실제로 디자이너는 그의 갸름한 턱선을 잘 살린 머리 스타일로 바꿔 놓았다. 색감도 적당했고, 스타일도 있어보인다. 승훈은 뭔가가 목에 탁- 걸린 기분이 들어 잠시 헛기침을 한다. “승훈군 친구라고 해서, 좀 더 신경 썼어.” 승훈이 뭔가 곤란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자 디자이너는 웃음을 만면에 띄우며 어깨를 들썩였다. 마치, 이것이 최선을 다한 거야.. 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좀 이상하잖아? 저 친구라는 사람은 승훈군과 어울리지 않아.“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워낙 어릴 때부터 달랐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나이들면서 지윤은 더욱 자신을 꾸미거나 스스로에게 손 대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의 그는 어딘가 모르게 빛이 난다. 다만 언제나 도망치는 듯한 그 표정만 빼면 말이다. “어울리지 않아요?” 저 한심한 인간과 내가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승훈은 빙글- 몸을 돌렸다. 사실은, 방금 든 이상한 당혹감에서 등을 돌린 것이다. 디자이너의 항변은 그가 헤어샵의 문을 열고 나갈 때야 비로소 발꿈치에 떨어졌다. “어울리지 않아, 승훈군과. 지윤군은 좀 더 사랑스럽고 순수해 보여...“ 놀리는 듯한 어른의 말투. 승훈은 지윤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시동을 건다. 아까 침을 잘못 삼킨 듯, 목에 걸린 가시같은 답답함은 쉬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 그들이 승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밤 10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헤어샵을 나온 이후로도 내내 승훈은 지윤을 데리고 압구정동을 돌아다녔다. 큰 샵에서 소문난 스타일 샵까지....아마 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발바닥 아프게 돌아다닌 것이다. 돌아올 때 그들은 손에 다 쥘 수도 없을만큼의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승훈군에게 그것은 ‘고작’이지만, 지윤에게는 나름대로 ‘너무’라는 양이 될 것이다. 그는 여전히 눈도 마추지 못하고 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 사면....... ...나..나중에 너한테 어떻게 갚아.....” “갚는 건 바라지도 않아.” 조금 마른 체형이지만, 키는 절대 작지 않다. 아마 그 구부정하고 이상한 자세만 고치며 그는 괜찮은 몸을 가진 사내다. 문제가 있다면 쿨한 몸매를 갖춘 자신보다 훨씬 나긋해 보이는 목선이나 허리선이다. 어깨 선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승훈이 단단한 몸을 가진 것에 비해, 그는 상대적으로 말라보일 뿐이다. 눈짐작으로 그의 몸을 재어 보며 승훈은 닥치는대로 옷을 샀다. 명품이라는 것을 누차 강조하며 그에게 몇 번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몹시 귀찮은 일이지만 필요했다. 일급 호스트가 되려면 그만큼의 눈높이와 자존심도 필요하다. 그것이 쓰레기라구?...아하.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해도 소용없다. 그 눈높이를 돈 주고 사려는 인간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갈..........게.” 승훈이 아무 말 없이, 피곤한 표정으로 아파트 문을 열자 여전히 쇼핌백을 소중히 감싸 들며 그가 말한다. 그 자신감 없는 한마디에 승훈은 와락 짜증이 났다. 아무래도 피로와 억지스러운 스케줄 때문이다. 그리고 샵에 갈 때마다 종업원들이 낯뜨겁게 내보내는 ‘사랑스러운 분이네요. 승훈군보다 어려요?’라고 묻는 그 찬사 때문이다. 사랑스럽다니.. 말도 안 된다. 물론 이름높은 헤어디자이너가 그의 얼굴에 어울리는 머리스타일로 바꾼 것은 인정한다. 또한 지윤의 얼굴이나 몸이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엉망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제 아무리 길고 날 뛰어도 원래 놀던 바닥이라는 게 있다. 그들은 뻔한 장사속으로 입에 침도 안 묻힌 채,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다. 혹시나 지윤이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정말 ‘사랑스럽다, 혹은 멋지다’라고 착각하지나 않을지....사실은 거슬린다. 승훈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몹시 심드렁하게 쇼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자신은 아무리 보아도 답이 안 나오는 인간 강지윤일 뿐이다. “밥 잘 해?” 대뜸 묻자, 지윤이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다. 어쩌면 알아차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지윤과 거리를 걸을 때, 이상하게도 자신은 발걸음이 매우 빨랐다. 평소대로라면 그 스타일에 맞게 그는 결코 빨리 걷는 편이 아니다. 갑자기 문득, 이 신경쓰이는 존재와 쫓기는 듯한 기분, 그리고 한편으로 내기를 하게 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젠장..이라고 입술을 깨물며 승훈은 속으로 몇번 욕을 내던진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번 있는 휴일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클럽에서 일하는 몇몇 녀석들과 놀거나 혹은 손님 들 중 속궁합 잘맞는 파트너를 만나서 한탕 즐겁게 즐겨도 시원치 않을 그런 휴일이다. 그런데 이 녀석 때문에 곱지 않은 시간을 다 뺏겼다. 이 가망성 희미한 일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자신도 짜증이 났고, 무엇보다 이 일의 원인이 된 당사자에게 가장 화가 났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자신이 지금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다는 것이다. 속을 할퀴는 듯한 짜증 때문에 더 잔인해진다. 원래부터가 자신은 저질이고 나쁜 녀석이었지만, 강지윤의 어리숙하고 초라한 행색은 그것을 더 부채질하는 것이다. 괴롭혀주고 싶은 거야.. 라고 생각했다. 이런 부류의 녀석들을 보면 잔인할 정도로 비웃고 괴롭혀주고 싶을 만큼 자신은 저질인 녀석이다. 이른바 강지윤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인 것이다. “하긴, 형이 잘 하는 게 뭐가 있겠어.” “..........밥..밥 정도는...........” “혹시 알고는 있지, 형?” 은근하게 놀리는 투로 승훈은 입을 열었다. 자신이 뭐라고 한마디 꺼낼 때마다 뒷걸음치기에 바쁜 그를 보며 심술궂은 생각이 주리를 틀었다. 일부러 잔뜩 입술을 비틀며 승훈은 넌지시 비꼬아댄다. 아아..공격하고 싶다. 그를. 삐뚤어진 근성으로 상처 주고, 내 눈 앞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생활이 부담스럽다. 그가 내 눈 앞에 나타나면서부터 말이다. “아까 샵에서 사람들이 형보고 ‘예쁘네, 사랑스럽네’ 한 것들.. 물론 귀담아 듣고 있는 건 아니지?“ “..................”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하긴, 그런 칭찬을 받고 자랄 인간도 아니다. 아니, ‘예쁘다’라는 게 같은 사내로써의 칭찬으로 받아들일 일이라면 말이다. 승훈은 ‘멋있다’라는 말을 듣는 쪽에 속한다. 날카로워 보이는 생김새도 그렇지만, 우락부락하지도 않은데 강해보이는 눈매가 일단 그렇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짓밟게 되어 있다. 자신 역시 그런 룰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구, 강지윤. 주제파악 정도는 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 형이 내 돈으로 머리하고 좀 바뀐 것 뿐이어서 사람들이 입바른 소리 하는거야.“ “..........아...알아...” “그래, 당연히 알아야지.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그럼 그것도 알고 있겠네? 오늘 말야..“ “...............” 얼굴부터 해서 목덜미까지 점점 더 붉어진다. 수치감을 느끼는 것이다. 살아있으면 이런 말들에 굴욕감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승훈은 자신이 그를 도발하듯 잔인해지는 것에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괴롭히고 싶은 이유가 있다. 도대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저 답답한 태도와 멍청해 보이는 눈매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일부러 빨리 걸은 거 알고 있지, 형?” “.........아.....” 짧게 신음을 흐리듯, 그가 더욱 뒷걸음치며 쇼핑백을 꽉 끌어안는다. 그러나 이 정도의 막무가내 공격에도 그는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은근히 더 솟아오르는 심술을 느끼며 승훈은 나른하게 웃었다. “나랑 같이 다닐 때, 절대 옆에서 붙지 마.” “.....................” “오늘 내가 일부러 빨리 걸은 건 그런 의미야. 형이랑 압구정동을 돌아다니면 쪽팔린다구. 나 같은 유명인이 형같은 사람하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손해인지 알아?“ “..........-!!!!!!!!!!!!” 일순 그는 숨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살며시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잠시 쌕쌕거리는 숨을 쉬며 그는 말없이 도망치듯 현관문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승훈은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 정도 자존심 구겨지는 말에 반응이 없다면 애당초 가능성 없는 것이다. 호스트이든 뭐든,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긍심이다. 긍지..말이다. 상품으로써의 긍지. “..........알겠어.” 희미하지만 조금은 선명한 대답. 뒤 끝이 살짝 떨리는 듯한 그 대답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그를 고스라니 드러냈다. 잠시 숨을 삭히는 것처럼 심하게 턱을 떨던 그가 재빨리 현관을 열고 뛰쳐나간다. 쿵-하고 문이 세차게 바람으로 닫힐 때까지, 승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며 쇼파에 앉아 있었다. 왠지 지금 상처 가득한 날짐승의 추락을 본 것 같아, 문득 마음이 싸하게 죄책감을 입을 기분이다. 웃기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죄책감 말이다. 그리고 배가 몹시 고팠다. 4. 일단 스타일의 변화는 조금 성공한 것 같았다. 더 거슬리는 일이 있다면, 출근하기 전에 항상 전화로 지윤을 코디해야 한다는 것일 뿐. 그러나 머리 모양에서부터 발끝까지 역시 자신은 센스가 있는 인간인 걸 다시 확인받는다. 그런 식으로 날마다 체크 해 대고 잔소리를 해 대는 동안 꼬박 일주일이 흘렀다. 그 일주일 동안도 승훈은 자신이 나쁜 남자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성질을 내도라도, 지윤이 반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정도는 더욱 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주일 쯤 뒤에는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막 출근해서 출근계를 체크하는 동안 사장이 입구에 들어섰다. “이야~..날이 갈수록 더더욱 몰라보겠는걸?” 자동차 키를 돌리며 들어오던 사장은 짧게 휘파람을 불렀다. 지윤을 룸서비스 맨에서 호스트로 이동하겠다고 말했을 때, 사장의 비웃음에 비하면 다소 속시원한 결론이다. 규철이 출근할 때는 조금 더 그 만족감이 깊어졌다. 규철은 조금 삐딱하게 웃었지만, ‘역시, 대단한걸’ 이란 식으로 승훈을 쳐다보았다. 쓰윽- 짙은 눈썹을 밀어올리며 승훈은 그에 응수했을 뿐이다. 사실은 예약 명단에 올라와 있는 대기표를 보느라 지윤은 그에게 딴 전이다. 오늘 예약에 그가 있었다. 언제나 ‘그’ 보다는 ‘그녀’를 선호하는 자신이지만, 요새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 바로 롤렉스를 선물한 그 문제의 어린 가수다. 나이가 이제 21살인 그 녀석은 이 계통의 온갖 화려함은 다 보여주듯 과연 눈부신 존재였다. 녀석이 가진 성에 대한 집착과 난잡한 놀이기술은 아마 소속사에서도 눈감아 주는 것 같았다. 가끔 엄격하게 생긴 매니저와 함께 대동했는데, 녀석이 클럽에 들어오는 날은 매니저는 주로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편이다. “강지윤...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규철이 마치 놀리듯 웃으며 귓속말을 건넨다. 그리고는 고개 너머로 승훈이 찌푸린 채 집중하는 예약표를 들여다 보았다. “흐음... 오늘 니키 예약있어?“ 가수의 이름이 바로 니키였다. 가끔은 롤렉스라고 놀림감처럼 부르기도 했지만, 그의 가수로써의 예명이 바로 니키다. 본명이 뭔지는 아무도 관심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미국땅이나 외국물을 한번도 먹어본 적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제, 그만 니키는 포기하지, 김규철.” 원래대로라면 니키는 규철의 손님이다. 나긋한 인상과 달콤한 눈매, 그리고 이 바닥에 오래 구른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는 절묘한 색기. 니키는 고 또래의 연예인답게 가늘고 탄력성 좋은 몸을 가지고 있다. 어찌보면 누군가 개발시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성감대와 절묘한 섹스 테크닉. 바로 돈을 주고도 하룻밤 즐기고 싶은 상대가 니키다. 그런 니키를 규철은 호스트 일급으로 자리잡은 승훈에게 이년 만에 빼앗기고 말았다. 어쩌면 그 때부터 였을지 모른다. 둘 사이에 이상한 라이벌 의식이 생긴 것은. 지금은 원주연이라는 여자를 놓고, 그리고 그 때는 니키라는 녀석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묘한 라이벌 의식. “니키는 이미 예전에 포기했어, 임승훈. 그 녀석의 난잡함을 당해낼 수가 없다구.“ “..흠..그럼 왜 남의 예약에는 관심을 갖는 건데?” “왜라니? 뻔하잖아? 예쁘기만 입혀놓으면 뭘 해? 강지윤을 누가 지명해주는데? 넌 쟤의 가치를 뭘로 팔건데? 상품을 만들고 꾸미는 게 다가 아니라구. 진열대에 전시해야지. 가장 잘 팔리게 말야.“ 니키의 예약에 들떠있어서 몰랐다. 자신이 이곳에서 그렇듯, 강지윤도 이젠 하나의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이 때론 경매와도 같아서 누군가 가치를 높여주지 않는 이상은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것도 말이다. “오늘 룸에 데리고 들어갈 거다, 김규철. 니가 걱정할 일 아냐.“ “아하~ 니키와의 그 난잡한 쇼에 저 순진한 청년을 구경시키겠다구? 그게 너의 방식이냐?“ “어차피 받을 충격이면 미리 겪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경험해야 할 일이면, 남이 하는 걸 보면서 따라하는 게 훨씬 낫고 말야.“ 그 쯤에야 주의가 지윤에게로 기울어졌다. 지윤은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듯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오늘은 조금 더 나아보인다..라는 것이 다소 유행에 엄격한 승훈의 견해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변화를 즐기는 눈치였다. 조금은 젊고, 어리고, 또 한편으로 호기심과 호감이 동한 호스트들이 즐겁게 떠들며 지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저런 관심도 생전 받아본 일없는 지윤이다. 녀석은 왠지 조금은 부끄러운 듯 피하면서도 살짝 웃었다. “......!.........” 갑자기 쿵- 하고 뭔가 귓전에 떨어진 기분이다. 승훈은 말없이 그 모습을 노려보며 예약명부를 쥐고 있었는데, 순간 누군가 걷어찬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알았다. 녀석이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이 몹시 거슬리고, 기분 나빴다. 샐샐 웃으며 자기에게 아부를 해도 될까 말까한데, 언제나 겁먹은 표정만 짓는다. “.........멋지네.” 규철이 씁쓸하게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웃는 순간의 표정이 뭐라고 말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환한 웃음이 눈가로 퍼져갔는데, 가늘게 샐쭉해지는 눈초리가 어딘지 야해보였다. 그러면서도 쑥스러워하는 듯한 그 표정은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은밀하게 유혹하게 적당하게 달아나는..그런 느낌 말이다.어쨌든 아주 짧은 순간에 드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승훈은 이내 까맣게 잊었다. 그러나 규철은 ‘거 봐라~’라는 식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말했지, 임승훈.” “.................” “너는 한번 당해봐야 한다고.” 쿵쿵- 거슬리는 신경소리가 머리를 울려댄다. 다른 호스트 한 녀석이 뭐라고 저질스런 농담을 입에 담자, 멀리 떨어진 지윤이 더욱 입매를 둥글게 그리며 다시 웃었다. 역시 이유를 모르게 쓸쓸한 듯한 미소였고, 또 부끄러운 듯한 흐트러짐이다. 승훈은 아마 그 순간에도 한번 겪었듯, 짧게 니키에 대해 살짝 잊고 있었다. 그리고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목이 마른 것이다. ***************** “쟨 뭐야?” 오늘은 왠일인지 니키와 매니저가 함께 방 안에 있다. 지윤의 겁먹은 듯한 표정을 보면서도 승훈이 싸늘하게 어깨를 밀다시피 같은 방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매니저는 가까이서 처음본다. 물론 처음 볼 때부터 사람을 깔보는 듯한 눈길은 여전했지만, 오늘은 까만 썬그라스 아례에 그 단호한 시선을 감추고 있다. 니키도 보기 드물게 예쁜 녀석이지만, 매니저도 한 인물 한다. 불만은 없지만, 딱히 재미있다는 듯 턱으로 지윤을 가리키며 니키가 양주를 한 입에 턴다. ‘쟨 누구야’라고 묻지 않는다. 말 그대로 ‘쟨 뭐야’라고 물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상품이기 때문이다. 상품에 인격이라는 건 거추장스러운 단어다. “새로 들어온 호스트야.” 승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니키의 옆에 주저앉는다. 얼핏 보니 시간으로 치며 밤 11시를 훌쩍 넘겼다. 이대로 니키는 새벽 한 두시까지 마시다가 호텔로 가자고 조르거나 혹은 룸에서 끝짱을 볼지도 모른다. 늘 있어왔던 일이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인데? 예쁘네. 뭐.. ..내 타입은 아니지만.“ 니키는 안기는 것을 선호하는 쪽이다. 그것도 이제는 펠라라든지 그런 가벼운 패팅에는 전혀 만족을 못 느낀다. 마치 내도록 발정난 암코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온갖 자극적인 것들을 찾아 헤맨다. “야, 너 앉아!” 반말로 대뜸 소리를 지르며 니키가 지윤을 윽박질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승훈은 가만히 있는다. 당연히 자신이 니키 옆에 앉으면 지윤은 매니저 옆에 앉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이 촌닭 쑥맥은 어쩔 줄을 모르며 두려운 표정으로 입구에서 버티고 있다. “바보 아냐? 이젠 Ananomi 에서 대충 얼굴만 보고 뽑는가 보지?“ 무대에서 어린 팬들의 환호성을 받는 아이돌 스타 답지 않게 힐쭉거리며 니키가 웃었다. 이럴 때의 니키는 어딘가 어린애 같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손님이고, 승훈은 상품이다. 상품이 손님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룰은 세상에 없다. “앉아, 강지윤.” 승훈이 짜증난다는 듯 말하자 그 때서야 쭈삣거리며 매니저 곁에 앉았다. 여전히 과묵한 매니저는 썬그라스 너머로 표정도 보이지 않은 채, 술잔을 들어 올린다. “헤이~ 이봐..너 할 줄 아는 거 뭐 있어?“ 어쩌면 니키가 좋은 이유는 니키와 자신이 같은 과의 속물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같이 유치할 정도로 이기적인 속물. 저질의 대명사들 말이다. 니키는 한 눈에 지윤이 짜증스럽고 거슬리며 또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보다 약하고 괴롭혀도 좋다라는 걸 알게 된 모양이다. 승훈의 넥타이 매듭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며 니키는 깔깔거리듯 지윤에게 물었다. 맞은 편의 지윤은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꼭 엊그제의 일처럼 시선을 마주치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그에게는 이 단순한 유희가 너무나 자극적일 수 있다. 갑자기 승훈은 궁금해졌다. 과연 지윤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은 뭐가 있을까. 성에 대해 아는 것은? 섹스에 대해 알거나 겪은 일은? 입이나 맞춰 본 일 제대로 있을까? 그 망할 놈의 떨고 있는 듯한 움추림 외에 녀석이 할 줄 아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 “쟤, 말 못해?” 니키가 답답한 듯, 그리고 비웃듯 승훈의 얼굴을 가까이 하며 물었다. 목이 성감대인 녀석은 벌써 목언저리가 야릇한 색기로 물들어있다. 잔뜩 돋아있는 소름이 애무를 기다린다. 어서 사내의 거친 혀가 쓸어가고 물어뜯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제 단 물이 오를 때로 오른 녀석이다. 혀를 내밀듯, 살짝 목선을 따라 쓸어가며 키스해본다. 이런 식의 자극을 녀석은 좋아했다. 하물며 자신보다 약하고 힘없는 지윤같은 상대 앞에서 즐기는 놀이라면 더욱 자극적일게 뻔하다. 승훈은 니키의 욕구를 읽어냈다. “정말 Ananomi에서 바보를 뽑았나 보네. 한국말 못해? 얼굴만 좀 반반하면 뭘 해?“ “.........................” “...보통은 이렇게까지 말하면 뭐라고 손님 비위라도 맞춰야 하는 거 아냐? 야, 임승훈. 쟤 내보네. 기분 나빠. 지가 뭔데 여기서 순진한 척 물 흐리냐? 아하.. 천하의 승훈이도 눈 많이 낮아졌다. 저런 쑥맥하고 놀고 있게...“ 승훈이 혀로 목을 다듬을 때마다 조금 숨 찬 신음을 흐리며 니키는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매니저는 말없이 술만 마신다. 하긴, 어디 한 두번 봤겠는가. 불쌍한 것은 지윤 뿐이다. 그는 이번에는 정말 어쩔 줄 몰라하며, 측은할 정도로 시선을 황망히 돌린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키스를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까지 잔뜩 붉어졌다. 어쩔 줄 모르고 도망가려는 듯한 기색이 엿보인다. 그걸 깨닫자마자 불쑥- 더한 심술이 승훈을 사로잡았다. 그는 니키의 상의 안으로 손을 마구 밀어넣는다. 마치 드러내놓고 벗은 것처럼 탄력있는 몸이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아..우........” 야릇한 신음이 니키에게서 흘러나온다. 연예인답게 화려하게 물들인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채, 입을 벌린다. 마치 뒤에 앉은 승훈에게 응답하듯 고개가 살짝 젖혀지며 촉촉하게 입김을 쏟아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요부처럼 화끈한 표정이다. 그 순간의 신음 때문인지 지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매니저가 여전히 표정없이 묵묵부답으로 술잔을 기울이자, 승훈은 그 순간 지윤을 향해 냉정하게 미소지었다. 이젠 떨어져 나가, 강지윤. 정말 내 생활의 지긋 지긋한 벌레같아. 너는. 아니면 좀 보고 배워. 너도 밖에 나가 살면서 스스로 독립할 정도의 인간은 돼야 하지 않아? “이게 니가 할 역할이야, 강지윤.” “.........-!!!!!!!!!!!!!!!!!” “니키라고 하지, 이 녀석은. 이 녀석이 어떻게 하는지 잘 보라구, 이 머저리. 돈을 받을 정도의 상품이 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안 그래?“ 라고 말하며 승훈은 왠지 잔뜩 비틀어지고 엉키는 심보로, 지윤의 머리를 확- 잡아당긴다. 붉은 혀가 낼름 거렸다. 목 너머까지 타액이 진득하게 넘어가는 딥 키스를 퍼붓자, 오고가는 혀의 야한 놀림이 지윤에게도 똑똑히 드러났다. 강도가 강해질수록 그 곤혹스러운 표정이나 떨림이 생생히 와 닿는다. 어딘가 주춤거리면서도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 압권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절대 약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되는 게 세상의 법칙이다. 그런데도 강지윤은 그 단순한 룰도 모른다. 이른바 ‘허세’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도 모를 정도의 바보다. 그러자 자꾸만 내면에 숨겨 놓고 있는 야만적인 기질이 자신을 에워싼다. 이른바 약육강식의 파괴본능이다. ‘믿을 것이 너 밖에 없어서..’라고 말하는 덜 되고 한참 바보같은 친구의 형에 대한 잔인한 보복심리다. 세상에 자신과 같은 녀석을 믿는다니, 그런 바보같은 말은 처음 들어봤다. 나는 당신이 Ananomi 입구에 나타났을 때부터 화가 났단 말야, 이 멍청아. 당신이 쪽팔려, 부끄러워. 제발 정신 좀 차려...라고 점점 더 그 야만성은 뾰족한 칼날을 세웠다. 삐뚤어졌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마디 더 해주고 싶어진다.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안 삐딱해졌나. 당신에게는 야만적인 본능이라는 게 이유도 되지 않을만큼 허울좋은 세상이 있단 말인가. 바로 저 인간처럼 말이다. 강지윤. “으응.................좋아.” 야릇한 신음 내며 입술을 떼자 상기된 니키가 흡족하게 가르릉거린다. 붉고 타액으로 반질거리는 입매가 고혹적이다. 힐끗, 승훈은 마치 ‘잘 봤지?’라는 눈길로 싸늘하게 지윤을 돌아보았다. 니키도 즐겁다는 듯 함께 응시한다. 한마디로 둘 다 유치해지든 말든 잔인할 수 있는거다. 그게 야만적이라는 거다. 아무 것도 마음에 두지 않을 정도의 이기심이란 얼마나 파괴적이며 냉소적인가. “잘 봐, 강지윤.” 지윤은 역시 부들 부들 떨고 있다. 표정없는 매니저는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단단한 상체에 팔짱을 끼고 있다. 지윤이 주먹을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마디가 다 하얗다. 승훈은 그 모습을 똑바로 노려보며 니키의 허리를 가만히 들어올린다. 일종의 신호처럼 니키는 승훈의 무릎 위로 자리를 옮겼다. “...아응..............아............” 낯 간지러울 정도의 신음이 실내를 울린다. 호텔까지 직행할 여유도 없을 것 같다. 발정기를 맞은 이 암코양이는 가뜩이나 색기어린 허리를 비틀며 마구 마찰을 가해댄다. 꽉 맞물린 아랫도리에서 열이 일었다. 옷도 벗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마치 성애로 보여질 수 있는 모든 색기를 도발해 냈다. 그 야생적인 교접에의 욕구는, 바로 강지윤이라는 인간의 부들거림 때문에 더욱 강도를 더해간 것이다. 잔뜩 놀란 듯한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둥그렇게 커진 채 시선을 떼지 못한다. 아마 너무 놀래서 눈길을 피하는 걸 잊었나보다. 공포스런 장면에서 흔히 그렇듯..대단한 충격과 두려움이 치고 올라오면 그것은 이상스러운 기대심리로 돌변한다. 극의 공포에서는 극의 쾌감이 느껴진다. “.........여기도.........만져 줘야지.........” 니키의 스웨터를 걷어 올리자, 이미 빤짝 솟아오른 유두가 드러났다. 새삼 새로울 것도 없는 밋밋한 사내의 가슴이건만, 조금 덜 된 청년같은 녀석의 돌기는 분홍색 빛을 띄고 있어 더욱 색감을 더한다. 니키가 승훈의 무릎에 앉은 채 양 손을 들어올려 머리 뒤의 승훈을 끌어 안듯 요동쳤다. 그 바람에 드러난 상체는 수월하게 만지작거릴 수 있다. 승훈은 능숙하게 겨드랑이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며 니키의 한 쪽 유두를 입안에 물었다. 혀를 굴릴 때마다 또한 적나라하게 지윤에게 엿보이도록 일부러 말이다. 남은 한 손으로 짜릿하게 꼬집자 안긴 녀석은 흥분에 달한 샛된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승훈이 녀석의 옆구리를 혀로 핥으며 지윤을 향해 똑바로 명령했다. “니 옆에 앉은 분에게 똑같이 해드려, 강지윤. 니키가 하는 거 잘 보고 있지?“ “...............-!!!!!!!!!” “그게 니가 할 일의 전부야.” 살짝 벌어진 지윤의 입술이 보였다. 도톰한 입술은, 내내 충격을 참기 위해 깨물고 있었던 듯 아래가 부풀어 있다. 냉랭한 자신의 말투에 뭔가 상처를 입은 것 같다. 그가 이를 악물었는데, 그 바람에 달아오른 얼굴은 반대로 하얗게 점점 질려갔다. 그 때 내내 말없이 술을 마시던 매니저가 벌떡 일어섰다. 여전히 그 잘난척하는 딱딱한 말투와 표정없는 태도로 약간 거구의 몸을 일으켜 상당히 비지니스 적으로 입을 연 것이다. “그럼, 이 녀석은 내 차례인가, 임승훈?” “................!” “정말 간만에 쓸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지윤이라고 불렀지, 방금? 까 놓고 말해서, 내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녀석보다 괜찮은 녀석이군. 이런 이중적인 이미지는 본 적이 없어. 자네 눈이 삔 거 아닌가, 임승훈? 너무 막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은 지윤을 괴롭히는 데만 집중해 있었나보다. 저 거추장스러운 매니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니키가 교묘하게 아랫도리를 파고들자, 승훈은 갑자기 울컥하고 속이 뒤집어진다. 자신의 잔인한 말들에 하얗게 질린 지윤을 쏘아본다. 일어선 매니저를 불안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살짝 기울어진 옆 모습의 턱선에서 목선까지 이상하게도 아슬아슬한 기분이 느껴졌다. 투둑- 니키는 이미 그들이 안중에 없었다. 바쁘게 자신의 넥타이를 벗겨낸다. 매니저가 흡족한 표정으로 씽긋 웃으며 덧붙였다. “모처럼의 서비스인데 내가 거절할 리가 없지. 내가 데리고 나가면 되는 거지? 쇼는 니들끼리 충분히 하라구. 나는 이 쪽 미인으로 충분하니깐.“ 매니저는 소리없이 웃으며 다소 격렬하게 지윤의 팔목을 잡아당긴다. 아무리 상품이고 또 그에 걸맞게 교육시키는 승훈이었지만, 순간적으로 부아가 치밀정도로 제멋대로인 매니저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빈정대는 듯한 미소를 썬그라스 아래로 지으며, 매니저는 하얗게 위태로운 지윤을 끌고 나갔다. 워낙 저 녀석은 근력이 부족하니..라고 스스로에게 둘러대고 있지만, 승훈은 순간 또 다시 니키를 밀어낼 뻔 했다. 쿵-하고 두번째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지윤이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부글 부글...승훈은 니키의 어깨를 조용히 밀어냈다. 뭐 어쩌고 어째? 이 쪽 미인으로 충분해?? 내가 그를 막 대한다구? 아니, 지가 뭔데 참견이란 말인가!!!!!! ************************ 뭔가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갑자기 니키와의 격렬한 섹스를 기대하며 들떠 있던 자신이 바보라도 된 기분이었다. 더 엉망인 것은 바로 니키 자신이었다. 녀석은 갑자기 ‘하기 싫어졌어’라고 말하며 무릎에서 물러나 앉았다. 이런 일은 한번도 없다. 자신들은 지금까지 즐기는 일에 있어서는 최고의 속물들이었다. “쟤 이름이 뭐냐?” 이번에는 좀 더 침착해진 표정으로 니키가 물었다. 어느 새 잘 피우지 않는 담배까지 물고 말이다. 누가 뭐래도 아이돌 스타인 녀석이다. 가수이기 때문에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담배를 삼가한다는 직업의식이 있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기분이 상해서는 연기를 화하게 내뿜는다. “강지윤.” “Ananomi 에서 새로 내놓은 상품이냐? 쓸만한데?” 어디가? 도대체 사람들마다 다 왜 이 모양이지..라고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승훈 역시 담배를 빼 물었다. 그 망할 매니저와 지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저 녀석이 널 좋아해?” 갑자기 더 엉망이 된 것은 니키의 이 난데없는 질문 때문이다. 호스트 주제에 무슨 심각한 감정이 개입될 리 있다고,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단 말인가? “이거 왜 이래? 우리가 뭐 진지한 거 봤어?” 인상을 잔뜩 구기며 대답하자, 니키는 콧웃음친다. “저 녀석이 너 좋아하는 거 아냐? ........난 그런 줄 알고 적당히 쇼 한 건데?“ “무슨 말이야, 도대체!” 안주로 나온 과일을 입에 담는다. 서걱거리는 모래가 씹히는 기분이다. “아까 저 녀석 모른다고 말한 거 거짓말이야. 룸서비스 했었지?“ 니키는 더 이상 ‘재미없어’라고 말하며 발을 탁자 위로 쭉 펴고 누웠다. 어딘가 모르게 찌들고 지쳐있는 표정이다. 이럴 때의 니키가 제일 좋았다. 이른바 말귀가 통하는 상대다. “그래, 룸서비스 했었어. 몇 달동안.” 저런 녀석을 눈여겨 본 사람도 있구나..라고 승훈은 낭패감을 느꼈다. 저렇게 모두에게 민폐이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거슬리는 왕따따위에게 말이다. “누가 뭐래도 미인이잖아, 그렇지?” 니키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웃었다. 21살이 보여주기에는 굉장히 타락한 미소다. 너랑 나는 노는 물이 같아..라고 속삭이며 승훈은 기분이 완전히 다운되었다. 미인이야?........강지윤이? 왜 모두가 그렇게 말하지? 이목구비가 좀 서늘하고 예쁘다는 건 나도 알겠는데...그 녀석은 머저리라고..벌레. 귀찮아 죽을 정도로 떼어 놓고 싶은..그런.. “저 녀석..........” 승훈의 기분을 읽듯이 눈을 가늘게 빛내며 니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 녀석.. 니가 이 룸에서 다른 녀석들과 즐길 때마다 문 앞에 서 있었어. 마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보듯이. 내가 왜 규철이 룸에서 나와서 너를 지명했는지 알아? .......저 녀석이 이 방문 앞에 계속 서 있었거든.. 그래서 나도 이 방안이 궁금했던 거야. 그 볼품없는 옷차림과 전혀 꾸미지 않은 촌스러운 스타일로 말야.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 “강지윤 저 녀석... 너 좋아해.“ 니키는 잔뜩 삐딱해져있다. 온통 일그러진 눈동자에는 어딘가 모를 상실감이 가득 담겨있다. 답답해진다. 어른의 표정을 하고 있는 아이처럼 니키를 동정하게 된다. “나도 까 놓고 말하자면... 저 녀석 사랑스러운 얼굴이야. ........생긴 건 여자같지 않은데.. 그렇다고 뭐 또 딱히 남자같지도 않고. 아이같지도 않고 어른같지도 않은 중간의 느낌...“ “..................” “....한번쯤 안아보고 싶게 생기지 않아? 뭔가 미묘한 느낌이라구. 어딘가 버림받은 것처럼 서럽게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도망치려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서 괜히 더 사람 속 뒤집어 놓게 야하게 생긴 입술이나 눈매는 더 그렇고.. 항상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그런 녀석 말야.“ “.................” “..혹시 모르지. 우리 매니저가 지금쯤 꼬득이고 있을지. 너 우리 매니저 알아? 그 녀석.. ...상품으로 만들고 내놓는데 천부적인 녀석이야. 너도 호스트에 천재적이지만, 그 녀석도 남다른 더듬이가 있거든. 특히 사내 녀석들....저런 이미지 좋아하잖아? 이중적인 느낌 말야. 마치 성녀와 악녀가 뒤섞여 있는 듯한 이미지.“ 잔뜩 달아오를 정도로 젖은 눈길로 바라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람 환장하게 도망가버리지...아랫도리 후끈한 녀석치고 그런 색을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 있어?..라고 니키가 경멸하듯 입술을 비틀었다. 갑자기 명치 부근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또 대책없이 그 목소리가 마구 울려댄다. ‘믿을 것이 너밖에 없어서..’라고 한심하게 들려대는 그 답답한 목소리. ‘그만’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만큼 술이 다급해졌다. 결국 승훈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잔뜩 집어 입안에 모조리 퍼다 부었다. 녀석은 잘못 알고 있다. 자신은 스스로도 믿지 못한단 말이다. ************************ 세상에 그 유명한 니키를 상대로 술싸움을 벌이다니. 아마 세간에 알려지면 대서특필 될 만한 일이다. Ananomi의 일급 호스트 임승훈과 연예계 뒷골목의 일인자 니키가 만났는데 둘이서 술만 마시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웃기게도 둘이서 한번도 벌려본 적 없는 그 진득한 술판을 섹스 대신으로 열중하고 있을 때,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매니저가 들어왔다. 갑자기 술이 확 - 깨는 기분으로 승훈이 그를 날카롭게 응시하자 그가 천천히 썬그라스를 벗으며 미소지었다. ‘난 강지윤이라는 물건에 굉장히 관심있어. 나에게 파는 건 어때?’라고 마치 흥정처럼 가볍게 웃는다. 어림잡아 서른 줄은 되어 보이는 이 탄탄한 사내에게 승훈은 급기야 모든 울분이 확- 솟구쳤다. 어떤 일이 있어도 손님을 패서는 안되는 규정을 지켰어야했는데.. 매니져의 옷차림에서 살짝 뒤틀린 넥타이, 그리고 그 빈정거리는 듯한 사업가의 말투, 그러면서도 여유있는 어른의 태도. 그 모든 것들이 속 뒤집어지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정신없이 니키와 부어 마신 술도 단단히 한 몫했다. 이날 이 때까지 받은 스 트레스가 한꺼번에 뚜껑 열린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욱-하는 기분에 주먹을 내밀었다. 힘차게 휘두르는 순간, 매너져의 손놀림도 본능적인 방어가 시작되었다. “넌 어린애냐? 스물 둘이나 먹어서?” 매니저는 씽긋 웃으며 승훈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꽉 감싸쥐는 그 동작은 언뜻 보기에는 별거 아니었지만, 막상 마주한 승훈에게는 거대한 벽처럼 단단했다. 일순 분노와 낭패감으로 머리 속이 이글거린다. 술에 취하고 감정에 억눌린 까닭에 마음만 더 폭풍처럼 갈라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 임승훈. 그 녀석 나에게 팔아. 관심이 있거든. 너희들이 말하는 가격 이상으로 흥정할 생각이 있다. 일종의 스카웃이라는 거야.“ 그 비아냥같은 말에 승훈은 으르렁거린다. “팔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냐. 갑자기 당신 왜 그러는데?” “말했잖아. 사실은 내쪽에서 관심이 있는 거라구. 내가 잘 키울 생각 있다. 안심하고 맡겨. 그 녀석의 가치는 내가 정할 거다.“ 승훈은 그의 말에 ‘씨파..’라고 대답했다. 룸 밖에서 벌써 우왕좌왕거리는 룸 서비스맨들이 느껴진다. 여차 하면, 눈치껏 방안으로 뛰어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호스트로써의 자신의 점수가 까내려간다. 일단은 진정해야 했다. 승훈은 흩어진 옷깃을 바로 세우며 다시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지윤을 팔아 넘기라는데 그것도 제 가격보다 높게 쳐 준다는 데 , 자신이 판단할 꺼리는 별로 없다. 의외의 결과 아닌가. 자신과 지윤은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메인 것처럼 인 식된 것, 이 중간에서 이득을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단, 아직은 물이 좀 덜 익었더군.” 매니저 역시 승훈의 공격으로 풀려진 옷 차림을 툭툭- 털며 냉소적으로 웃는다. 뭔가 얄밉도록 놀리는 눈길로 승훈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이미 술이 떡이 된 니키를 일으켜 세웠다. 뭔가 초조해진다.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던진 말을 이해 못하겠다. 승훈이 인상을 있는대로 구겼지만, 상대방은 씽긋 웃으며 룸의 문고리를 잡을 뿐이다. “교육을 더 시키란 말이다, Ananomi 의 일급 호스트 님. 내 말길을 잘 알아들을텐데? 좀 더 나긋 나긋하게 만들어 주란 말야. Ananomi 출신이 그 정도 밖에 안된다면, 너무 쑥맥같잖아? 그 정도.......밖에?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저 녀석 지윤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승훈이 다시 벌떡- 엉망진창된 술기운을 털며 일어서는 순간, 니키와 그의 매니저는 재빨리 복도 밖으로 몸을 피한다. 이미 나이 서른을 훌쩍 넘긴 매니저는, 니키를 엎듯이 옆구리에 걸며 뒤로 돌아보았다. 어느 덧 복도에는 사람들이 이 소동에 몰려와 있었고, 카운터에서는 놀란 사장이 승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쥐고 잠시 엉뚱한 이 분노에 당황하고 있을 때, 매니저는 마지막으로 최악의 공격을 던졌다. “니가 시킨 일이잖아, 그렇지? 승훈군.” “...................” “니가 분명히 지윤이에게 나를 접대하라고 말했잖아? 술값과 접대비는 충분히 지급했다구, 나는..“ “............!!!!!!!!!!!!” ************************* 사람들이 모두 퇴근했다. 이미 아침 6시를 훌쩍 넘겼다. 대부분은 아마 4시 쯤에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만약 승훈도 할 수 있다면 여느 때처럼 같은 시간에 퇴근했을 터였다. 그러나 대신 그는 Ananomi의 룸에 혼자 남아 아직도 남은 술을 훌쩍였다.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지윤이 들어올 거라고 알고 있었다. 서비스 맨들에게 미리 말해놨던 것이다. 분명히 지윤이 돌아오면 자신이 남겨진 걸 전하라고 말이다. 하긴, 그렇게 말한 것에서 이미 두 어시간은 흘렀지만 말이다. “..........퇴근........안 해?.....” 여전히 자신없는 목소리. 승훈은 가물 가물거리는 눈동자로 천천히 그를 올려다 보았다. 자신의 꼴이 너무 우습다. 기껏 제대로 된 녀석으로 만들어놨더니 이게 선배 호스트를 뛰어 넘으려 한다. 기분이 상한 것이다. 니키의 매니저 때문에라도 상당히 기분이 저조했다. 오늘은 Ananomi의 체면을 생각해서 참았지만, 다음 번에 마주치면 유혈사태가 날지도 모른다. 건방진 놈. 매니저나 이 녀석이나 마음에 안 든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형?” 승훈이 나른한 비꼬듯이 목소리로 묻자,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한 그가 뒷걸음쳤다. 정말 꼴보기 싫다. 저 뒷걸음치는 버릇!!!! 승훈은 다소 휘청이는 걸음이지만, 벌떡 일어나 그를 한 손에 낚아채듯 자리에 앉혔다. 어깨를 꽉 잡아 누르는 순간, 그 위협적인 태도에 질린 듯 고개를 돌리며 몸을 뒤로 뺀다. 주저하지 않고 승훈은 다시 조금 멀어지려는 몸을 바짝 가까이 끌어당긴다. 그러면서 속으로 계속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정신차려, 임승훈. 이게 무슨 꼴불견이야. “하하.. 우리 지윤이 형. 왜 그렇게 긴장하는데?“ “........기..긴장하는.....게..아니라........” “그 어른스런 매니저랑 무슨 일 했어? 좋았어? 내가 아까 시킨 대로 잘 서비스 해 드렸어?“ 순간적으로 그의 눈동자가 경악하듯 크게 떠진다. 승훈의 조소어린 말을 듣자마자 까만 동공이 미친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쇼파에 앉은 채로 꽉 잡아당기는 손목 때문에 자신의 손바닥 아래로 부들거리는 손목이 느껴졌다. “묻고 있잖아, 형? 내가 손님이라고 생각해 봐. 아까 매니저에게 했던 것처럼 말야.. 처음부터 잘 가르쳐 준다고 했으니깐, 지금부터라도 해 줄 수 있단 말야.“ “..아..아무 일도..........없었어....” 왜 녀석이 갑자기 젖어있을까. 혹은 흠뻑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갑자기 생각이 그런 쪽으로 미쳤다. 다소 퇴폐적인 조명이 주는 음험한 기운과 습윤한 본능. 그런 것들 때문에 시각에 잠시 혼돈이 왔다. 깨끗해 보이고 오점 하나 없어 보일 정도로 그를 꾸며 주었다. 과연 승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 Ananomi의 비싼 조명 아래에서 지윤의 얼굴은 묘한 빛을 띈다. 설명할 길 없는 타락의 유혹. 아마, Ananomi 라는 곳에서 성을 매개로 팔고 사며, 즐거움과 흥정하는 그 분위기에 그토록 걸맞은 그 미묘한 색기 말이다. 심하게 추궁한 것도 아닌데,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 아랫입술이 승훈을 광폭하게 만들었다. 내가 너를 때리기라도 했냐..라고 다그치고 싶어졌다. 광기가 허리를 치고 올라온다. 척추까지 바들거리며 떨 정도로 손 아래 잡힌 사람은 겁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일종의 유희처럼, 변덕처럼 이 모든 일이 다가왔다. 한순간의 욕구와 아까 니키에게 마저 풀지 못한 욕구. 그런 것들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 녀석이 달라 보이다니...인간 임승훈은 완전히 미친 거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둑한 공기 안에서 그는 자극적이다. 바싹 얼굴을 밀어 붙이자, 움찔 거리며 몸이 반응을 일으켰다. 놀라고 겁을 먹은 상대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취기가 밀려 나온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럼 안 돼지, 형. 아무리 보고 들은 게 없어도 니키가 그렇게 몸소 보여주기까지 했는데, 그 정도로는 안 된단 말야?“ 마치, 손 아래 붙잡힌 지윤을 맘껏 조롱하듯 승훈은 지윤의 관자놀이에 얼굴을 바싹 붙였다. 두근 두근 거리는 야릇한 체향이 솟아 나온다. 무슨 향수지?.......그렇게 세련된 명품을 즐기는 자신조차 짐작하기 힘든 향이다. 이상스럽게도 속에서 물렁거리는 뭔가가 치고 올라온다. 승훈은 문득 기가 막힌 한숨과 함께 아무 생각없이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미묘한 향기다. 약간의 짭짤한 땀냄새에 섞여서 흘러나온 그 미려한 향은 설명하기 힘들게 몽환적인 기분을 안겨준다. “........그냥...산책을 좀..대화도 조금 나누고.........” 대뜸 목에 얼굴을 묻는 승훈에게 당황했을까. 뭐라고 더듬 더듬 그가 변명을 해 댄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승훈은 전혀 이 쯤에서 양보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화풀이 같은 욕정이 필요했고, 아마도 그 원인이 된 지윤이라는 당사자가 손아귀에 잡혀 있는 한 마음껏 발산하겠다는 잔혹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묻고 있는 목덜미는 니키의 그것과는 다르게 깨끗하고 순종적이 빛을 띠고 있다. 그것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게 오히려 더 음란해 보였다. 마치, 맑고 흔들림없는 연못이 있다면 손을 양껏 집어 넣어 흩트리고 싶은 아이들의 욕구처럼, 그것은 지극히 본능적이고 야생적인 충동이다. 승훈은 망설이지 않고 혀를 내밀어 그 깨끗하고 유려한 목선을 핥았다. 꽉 붙들고 있는 그의 몸에서 훅- 하고 숨을 들이키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묘한 기분을 준다. 그 깨끗한 반응이 왠지 더 자극적이다. 자신이 너무 찌들었거나 굴러다녀서 그럴까. 이 기대하지 못한 소극적인 반응은 더욱 충동을 부채질한다. “.....놔줘.............” “형, 나 좋아해?” 오른 쪽으로 입술을 비스듬히 걸치며 묻는다. 니키의 말 한마디가 자신의 기분을 더욱 망쳐놓았다. 감히 저 따위가 누굴 동경하고 누굴 좋아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생색은 다 내듯,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서..’라고 말하며 관심과 기대를 구걸한단 말인가. 승훈은 몹시도 삐뚤어진 표정과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으며 키득거렸다. 이 질 낮고 나쁜 행동에 우뚝- 지윤이 얼어버린다. 이미 술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고 컨디션이 나빠질 대로 나빠진 승훈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를 쫓아내고 싶다. 이젠 더 이상 거슬리거나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규철의 비웃음이나 니키의 놀림을 받을 것도 없이..그 내기의 댓가로 주연과 아우디 승용차를 얻어, 이 바닥을 떠나 생각이다. 새로운 계급으로 올라서고 싶다. 그건 강지윤같은 인간이 자신을 좋아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해 줄 수 있는 것?..바로 떠나주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에 오점이 안 남게 말이다. 제발... “형..어딜 도망가? 형 따위가 정말 나 좋아해? ..하하..영광인걸?“ “........나..나는.............” “가만히 있어, 강지윤. 좋아해준다니, 처음부터 더 잘 가르쳐 주고 싶은 생각이 들잖아? 선생인 내가 친절하게 알려준다는데, 감사하게 받을 줄도 알아야지.. 안 그래?“ 너무나 악랄하게 비꼬았던 탓인지, 상대는 지나치게 충격받은 모양이다. 휘익- 하고 승훈의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한채 어른거리는 승훈의 시선을 한순간 밀어내며, 놀라운 속도로 그가 일어선 것이다. 필사의 노력처럼 순식간에 도망간다. 그러나 승훈은 룸 문 앞에서 그를 간신히 붙잡았다. 광기에 사로잡힌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다. 잡힌 손바닥 아래에서 손목이 파닥거린다. “아하~ 정말 좋아하나 보네..사람 미치겠군.. 그만한 일에도 대답을 못해, 강지윤?“ “.............-!!” 그래.. 이제야 비로소 그가 보인다. 한꺼번에 숨을 들이쉬는 놀란 얼굴. 점점 커다랗게 뜨는 눈동자와 떨리는 아랫입술...바로 그런 것들. 그러나 그가 뭐라고 말하는 것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승훈은 휙- 남은 한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양주병과 잔을 치워버렸다. 와장창- 하고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몸이 이미 진창 된 것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다. 그런 태도가 못 마땅하면서도, 더욱 승훈은 숨을 쉴 수 없었다. 자신은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지금 스스로가 뭔가 서두르고 있고, 한참 시달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역시 이런 쫓기는 기분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렇게 광폭하게 밀려오는 충동을 처음 느꼈기 때문에 제어할 요령이 없다는 것이다. “......!!!!!!!!” 마치 난폭하게 밀어붙이듯, 떨리는 그의 몸을 탁자위로 집어 던진다. 쿵-하고 등이 테이블에 부딪치자, 몹시 아픈 듯, 지윤이 팔을 얼싸안고 일어서려 애썼다. 그러나 승훈 쪽이 더 빨랐다. 그는 재빨리 팔을 탁자에 집어 마치 덮치는 것처럼, 위에서 지윤을 내려다보았다. 그 바람에 도망갈 방법을 놓친 지윤은 무척이나 당황한 듯 계속 승훈을 올려다본다. 반대로 승훈은 취기 어린 승리감에 도취되어 짜릿하다. 그는 도망갈 곳 없어진 불쌍한 영혼을 놀리듯 윽박질렀다. “날 좋아하냐고 물었잖아?” “....................” 마치 주정처럼 난폭하게 되묻는 자신이다. 그런 승훈에게 지윤은 전에 없이 고집스럽게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 돌린다. 더 이상은 못참겠다. 아슬 아슬하게 돌려버린 그의 고개에서 자꾸 시선이 사로잡힌다. 깨끗한 옆 모습에서 턱..그리고 목으로 떨어지는 관음성을 자꾸 자극해댄다. 쿵- 하고 지윤이 다시 깜짝 놀랄 정도로 자신이 짚고 있는 테이블을 거칠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다. 이것이 미친 욕구라고 해도 상관없다. 언제나 겁먹고 버림맞은 강아지처럼 자신을 훔쳐보던 이 초라한 인간..이 벌레같은 인간이 한번도 겪은 적 없는 엄청난 욕정을 잡아 당겼다. “대답하기 싫다 이거지? 하아..상관없어. 형이 나를 좋아하든 말든 난 관심없어. 웃.기.지.마. 강지윤.” “...................?....” “내가 관심있는 건, 형이 얼마나 비싼 가격으로 Anonami의 제품이 되는가 하는 것 뿐이야. 얼마나 비싸게 팔릴 건가 하는 문제라구. 형이 비싸게 팔려야 내가 이 바닥을 뜨지. 잘 들어, 이 머저리. 아까 그 매니저.. ...그 인간은 형의 친구가 아냐. 고객이라구, 고객. 손님이야, 손님. 정말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거 아냐?“ “.........-!!!!!!!!!!” “손님에게 어떻게 하는 건지, 정말 눈치도 씨를 말라 먹었군, 강지윤.” 지윤이 뭐라고 변명할 듯, 승훈의 광폭한 눈동자를 보며 잠시 입술을 달짝인다. 이미 그 전부터 부글거리기 시작하던 마음이 그 눈동자에서 극에 달했다. 달싹이는 입술의 작은 떨림에 사로잡혔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굶주린 짐승처럼 그의 입술만 쏘아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승훈은 그 시선을 절대 거둘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 된 거다..라는 의식이 끊임없이 이성을 두들겼다. 그럼에도 승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느닷없이 시선으로 쓸어가듯 그의 입술을 흩어 보는 것이었다. 묘한 빛을 띠며 겁을 먹은 입술에 숨이 막혔다. “.........승훈..........아..이제 그만 집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혹은 쫓기는 기분은 비단 자신만이 아니었다. 큰 테이블 위를 팔꿈치로 딛고 겨우 뒤로 달아날 듯 떠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아래에 눌려 있던 몸이 반항하듯 잠시 뒤척이며 간절하게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괘씸함과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그는 있는 힘껏 조소의 미소를 지으며 지윤의 영혼을 상처 내기에 급급해졌다. 갑자기 흉부를 압박하는 이 갑갑함이 참을 수 없어진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그에게 키스하고 있었다. “.........훅-.........” 지윤이 잔뜩 당황한 숨을 들이키는 순간, 승훈은 잡아먹듯 덮친다. 가뜩이나 경험이 없는 상대라는 걸 잘 알면서도 이 충동적인 본능을 억제할 수 없다. 승훈은 거칠게 지윤의 겁먹은 입술을 열어 다급히 혀를 밀어 넣는다. 으응- 하는 가는 항의가 튀어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삽입에의 절절한 욕구처럼 한순간에 지윤의 입안에 침입하고 말았다. 잔뜩 움추린 녀석의 혀를 찾아 억지로 감싸고 앞으로 밀어 올린다. 혀 뿌리가 닿을 만큼 깊숙이 얼굴을 묻자, 지윤의 턱이 벌벌 떨렸다. 거친 손 끝을 올려 턱을 잡고 타액이 세어 나오는 그 간헐적인 숨막힘을 무시해 버린다. 이정도로 막무가내인 자신의 잔혹성에 치가 떨린다. 마치 스스로를 인간실격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주스러웠다. 그러나 하고 싶다. 마치, 사춘기 시절에 몰래 본 도색 잡지의 그것처럼, 온 정신이 난잡한 욕구에 사로잡혀 이성을 점점 밀어낸다. 이 사람이 조금만 계산적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믿는다’라는 말 따위를 해서 사람을 들쑤시고 신경쓰이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내기에만 신경쓰기에도 벅찬데, 승훈이 지금 원하는 건 한 가지 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느냐고 다그치고 싶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아냐고 소리지르고 싶다. 그를 수치스럽게 하고 싶다. 엄청난 파멸감에 시달린다. 자신을 기막히고 피곤하게 만드는.. 그러면서 이상스러운 표정으로 손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점점 사랑을 받는 이 별 볼일 없는 영혼을 둘로 찢고 싶다. 그리고 나서 이기심과 파멸의 욕구, 격렬한 자기애와 인간 이하만 남은 자신으로 채우고 싶다. “.........앗!....................” 아까부터 몹시 신경에 거슬리던 도톰한 아랫입술을 잘근 잘근 씹었다. 질감좋은 미끈한 느낌이 혀를 자극해댄다. 어쩔 줄을 모르며 고개 돌리려던 지윤도 그 쯤에는 아예 대 놓고 자신의 가슴을 마구 밀어낸다. 사내의 아랫도리를 자극하는 듯한 그 묘한 저항은 끊임없이 승훈의 머리 속을 야한 상상들로 게워냈다. “.......그만............” 쏟아지는 울음같은 간청을 못들은 척, 이미 흥분에 사로잡힌 승훈은 그의 상의를 벗겨냈다. 바로 자신이 골라준 명품 ‘제냐’ 셔츠다. 마치 그 고급스런 옷이 뜯겨나가듯 우두둑- 손가락 사이에서 단추들이 떨어져 나간다. 요동을 치는 지윤의 저항은 점점 더 거세어진다. 근력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못 미친다는 판단은 역시 옳았다. “가만히 있어, 강지윤.” “........하지만...!!......” “..가만히 있어. 얌전히 있으라구..” 승훈은 재빨리 벗겨낸 그의 반라에 얼굴을 묻었다. 니키에게서 나는 향과 다르다. 뭐라고 설명할 길 없이 취한 기분에 그는 거칠게 옷을 벗겨 냈다. 손으로 휘젓듯, 자신을 막는 기운을 느꼈지만 상관없다. 도대체 언제부터 강지윤 따위가 자신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우욱..........” 전혀 남의 손을 타 본 적 없는 깨끗한 가슴. 그 어귀에 부드럽게 빛을 발하는 유두를 탐욕스럽게 노려보다가 입에 물었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가 허리를 비틀며 날카롭게 떨어댄다. 승훈의 사포같은 혀가 타액으로 반질거릴 때까지 꼭지를 괴롭히자, 이내 양손을 들어 스스로 숨을 끊듯 입을 가렸다. 그러나 승훈은 그의 가슴 돌기 주변 부분을 손가락 두개로 도톰하게 꼬집듯 들어 올린다. 그 바람에 더욱 도드라진 유두는, 혀로 쓸어내고 입 안에서 할짝거려지는 모진 애무를 받아야 했다. 지윤이 스스로 억누르려 하는 소리는, 자꾸만 신음처럼 저항처럼 손바닥 사이로 세어나왔다. 거칠게 빨아 올리는 동안 흐느낌은 조금 더 짙어진다. “소리 내는 것부터 연습해야지, 형.” 꽉 닫혀진 다리를 있는 힘껏 벌리며 승훈은 올라타듯 그의 허리 아래를 장악했다. 값비싼 양복 버클이 벗겨지는 소리에 충격을 크게 먹은 듯 그가 벌떡 상체를 일으킨다. “제발........” 속옷 사이를 파고드는 난폭한 손길을 잡으며, 지윤이 마지막으로 애원하듯 숨을 할딱인다. 승훈은 피식 웃으며 잠시 멈춰진 손을 강하게 밀어 넣었다. 순간적으로 사로잡힌 불쌍한 시선. 그 애절한 애원의 눈길. 당혹감과 수치심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몸과는 대조적으로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인간 이하로 취급받는 굴욕감이란 이 바닥에서 항상 느끼는 감정이다. 승훈은 싸늘하게 웃으며 허벅지 사이에 완전히 오그라든 그의 페니스를 꽉 움켜쥐었다. “우욱.........” 자신을 만류하기 위해 일으키던 상체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힌다. 역시 타인의 손을 타 본 적 없는 처녀림처럼 굉장한 자극이다. 깨끗한 무언가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이 기막힌 가학의 쾌감은 성적인 자극 이상이었다. 쥐어진 손에 힘을 가하고, 마치 아래 위로 흔들 듯 강도를 더하자 그 때마다 움찔거리며 그는 허리를 흔들었다. “그만...제발.........” 드러난 유두위로 점점 선명한 색기가 발산된다. 승훈은 아래쪽으로 향한 손을 계속 움직이며 재빨리 그의 쇄골부터 가슴 돌기까지 핥아 내렸다. 간혹 깨물 듯이 이빨을 세워 씹어대자, 이젠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손바닥을 올려 흐느낌을 참는 강지윤이다. “일주일에 혼자서 몇 번이나 해?” 성적으로 예민해져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승훈은 얼굴을 바싹 붙이고 짓궂게 물었다. 뜨거운 숨결이 귓전에 닿자, 어깨를 잔뜩 움추린다. 그렇지만, 이미 승훈의 손 안에 들어온 그의 분신에서는 신경이 꿈틀대며 물기를 머금었다. 승훈은 일부러 웃는 듯 소리내며, 안간힘으로 피하려는 그의 귀 안에 혀를 밀어 넣는다. 순간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신에게도 아찔할 정도로 날카로운 신음이 꽉 참던 그에게서 튀어 나왔다. “아흑-!!” 귀가 예민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몸이 서서히 달아오른다. 어떤 탈출구도 찾지 못할 정도로 가련하게 부들거리는 이 몸에 이상하게도 천천히 친절한 동정이 느껴진다. 처음이구나..라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 것이다. 어린 시절에 동네 으슥한 골목 어귀나 공사장에서 형이나 또래 녀석들과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콩깍지 까기라는 야한 게임도 해 본 적이 없겠구나..라 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불쌍해보인다. 자신은 동정심이라고는 눈씻고 돌아봐도 찾을 수 없는 비열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사정에의 욕구가 배출의 경로라는 것도 모르는 이 사람. 자신보다 한살이나 많은 친구의 형. 기껏해야 시장에서 싼 값에 산 덜떨어진 아저씨 잠바나 입는 이 남루한 녀석에게 욕정을 발한 것이다. 고개를 들던 잔혹성이 바르르 떨리는 이 애닮은 몸짓 때문에 사그라 들었다. 승훈을 보지 않으려는 듯, 그리고 느끼는 것을 애써 참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불쌍해 미칠 지경이다. “..........핫-!!!!!!!!” 자지러지는 숨막히는 비명이 겨우 목 너머에서 튀어나온다. 그에게서 숨김없이 전해지는 성애의 자극을 느끼며 승훈은 별 생각없이 그의 페니스를 속옷에서 꺼내고 말았다. 공기 중에 드러난 하반신은 처음 느끼는 이 난폭한 쾌감을 상징하듯, 지윤을 눈물로 글썽거리게 만들었다. 쌕쌕거리며 쏟아지는 뜨거운 숨결. 벌벌 떨리는 갸름한 턱. 애절한 눈빛과 당혹감으로 범벅된 수치심 가득한 시선. 드러난 다리를 넓게 벌린 채, 승훈은 몸을 살짝 뒤로 뺀다. 그의 두 다리를 끝까지 벌리자 배에 닿을 듯 움찔거리는 녀석의 페니스가 깨끗한 빛을 띠고 눈에 걸렸다. “...아윽..........” 목이 또 다시 꺽이며 소리를 있는대로 죽이는 지윤이다. 승훈이 자신의 페니스를 덥썩 삼키듯 입으로 빨아들인 것이다. 입의 점막을 이용하여 부드럽게 혀로 핥고 음미해댄다. 허리를 자꾸 비트는 그의 반응은 도망가기 위한 것인지, 혹은 본능적인 화답인지 알 길이 없다. 승훈은 정성껏 그를 애무하며 손가락을 뒤로 돌렸다. 그의 양다리를 잡아 무릎이 꺾일 듯 세우자, V자로 벌려진 다리 사이에서 비밀스러운 입구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안돼...................”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지윤이 쑥맥이라고 해도, ANONAMI에서 무슨 일들이 가끔 벌어지는지. 니키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이 방에서 다른 누군가를 안을 때에도 녀석은 곧잘 문 밖에서 이 모든 소리들을 듣고 있었다고. “여기를 이용해서 고객을 기쁘게 해 드리라구, 강지윤.” 애널을 풀어주듯 만지작 거리자 숨쉬기 힘든 듯, 그가 글썽거렸다. 거부하듯 꽉 닫은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자신의 손바닥 아래 숨은 그의 분신은 끝없이 움찔거렸다. “이렇게 벌리고... 허리를 잘 흔들어서 말야. 고객들이 원한다면 최상의 서비스를 해주라구.“ ..라고 말하며 승훈은 급하게 자신의 허리띠를 푼다. 마치 아기들의 기저귀를 채울 때 그렇듯, 그의 긴 다리를 들어 올려 인정사정 없이 무릎 접은 채 걷어 올렸다.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기자 분홍색 페니스에서 튕긴 물기가 애널로 이어지는 은밀한 부위까지 적시며 흘러 내렸다.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꽉 잡고 그 부분에 혀를 내밀어 빨아들인다. 우욱- 하는 꽉 막힌 신음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허리를 욱씬거리듯 떨며 승훈의 눈 앞에 은밀한 모든 곳이 드러났다. 아마 그토록 당황하고 충격을 먹은 것같은 녀석의 눈에도 이 모든 것이 보일 것이다. 자신이 어떤 부분을 핥고 있고, 관찰하고 있는지가 말이다. 아무도 손 댄 적 없는 깨끗한 눈망울이 온통 젖은 채, 애원으로 숨을 헐떡인다. 놔달라는 건지, 아니면 어떻게든 해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신음마저 참기 힘든 듯 입술을 깨문채, 가끔 은밀한 모든 부분을 핥는 승훈의 혀에 움찔거렸다. 그 바람에 승훈은 정체모를 동정심을 조금 더 발휘하여 상대의 몸을 만져갔다. 낭심에서 애널까지 이어진 외음부의 고리를 천천히 혀로 핥아갔다. 지윤으로써는 이 쾌감마저 고통스러운 듯 천천히 흐느꼈다. 한숨처럼 신음이 짙어질 때 쯤에야, 나긋해진 입구에 대고 승훈은 보통 사람보다 조금 큰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아악!!!!!!” 빡빡해지지 않고 고통이 덜하도록 지윤 자신의 것으로 촉촉이 적혀놨지만, 역시 부족했던 것이다. 겨우 뿌리까지 밀려 넣었을 때, 고통에 찬 어깨가 자신의 아래에서 부르르 떨고 있다. 본능적으로 몸을 빼려는 어깨를 꽉 잡아 자신 쪽으로 붙이며 승훈은 울고 있는 입술을 겹쳤다. “참아..” 이게 니가 할 일이야..라고 말하며 승훈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엄청난 압박감 때문에 고통스러운 듯 움츠러 든 녀석의 페니스을 다시 쥐자 몸 아래가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피스톤 질을 해대자, 살과 살이 마주치는 야한 소리가 룸을 가득 채웠다. “.......아....” 부지런히 피스톤질을 해대는 승훈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목이 꺽이듯 그가 허리를 가볍게 튕긴다. 마치 뭔가에 놀란 듯 일어나는 반응이다. 뒷머리카락을 꽉 쥐고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들자, 그 눈길이 선명하게 행위를 자극한다. 눈동자가 눈물로 젖은 채, 다소 망연히 쾌감에 떨리고 있었다. 무언인가 녀석의 몸 안에서 크게 반응한 것이다. 부들 부들 떠는 몸이 정처없이 밀착되어 오고, 하반신이 맞물릴 정도로 닿아 버렸다. 단단한 자신의 복부를 가까이 대고 피스톤 할 때마다 움직이자, 그의 발기한 것이 한번씩 쓸어진다. 앞과 뒤에서 전해지는 그 충격에 사로잡힌 눈동자가 피하지도 못하고 승훈을 향해 멍하니 열려 있다. 눈물이 글썽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음란한 욕구로 충동질 당한 살 냄새가 가득 담겨있다. “우욱.........”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속도를 높이는 승훈이었다. 기가 찰 정도로 죽이는 기분이다. 다소 꽉 죄여주는 이 엄청난 압력은 승훈의 것을 끊을 듯 감싸고 있었다. 매니저와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하나에서 열까지 온통 지윤이 처음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뜨거운 점막이 환장할 정도로 승훈의 사내를 움켜쥐고 사로잡았다. 그의 내부는 믿기지 않게 음란했다. 이런 것들에 너무 익숙한 어떤 이들보다 훨씬 더 빡빡하게 죄여오며 머리가 띵할 정도로 두근거리게 만든 것이다. ....맙소사..라고 가늘게 탄식하며 승훈은 자신의 아래에서 온통 젖은 채 흔들리는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작은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향락으로 이미 가득찬 지윤의 내부는 승훈을 비웃듯 아찔하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결합된 채, 승훈의 움직임에 맞춰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그였지만, 가끔 허리가 한번씩 튕기듯 반응해 온다. 승훈으로써는 잠시 뇌가 멈출 정도로 강렬한 기분이었다. “................히이ㅅ-!!!!...................” ....문득 한참 황홀감과 최상의 쾌감이 스쳐갔다고 생각한 동시에 복부에 긴장감이 사르르 풀렸다. 그의 내부를 자신의 것으로 가득채운 충족감에서 겨우 해방된 것이다. 문득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으로 털썩..몸을 내렸을 때, 테이블 위로 이리저리 튕긴 그의 사정물도 보았다. 어디선가 이 향락적이고 물씬한 욕망의 향 이상으로, 콧끝을 아리는 체향이 자꾸 느껴진다. 힘이 쭉 빠진 자신이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깨끗하고 아름다운 목덜미에서는 향기가 계속 몽롱하게 젹셔 온다. 뭘까.. 라고 곰곰이 생각하기도 전에, 승훈은 그만 잠들어 버렸다. 다시 출근한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웠을 때, 룸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자신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지윤은 없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이번에야 말로 도망갈 것이라는 승훈의 예상을 깨고 지윤은 다음 날도 가게에 나타났다. 이제는 제법 배웠을테니깐..이라고 말하며, 승훈은 그에게 이제부터 룸에 혼자 들어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잔인한 줄 알지만, 그렇다고 딱히 자신이 지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뭔가 해 줄 마음도 별로 없지만 말이다. 대신 승훈은 사장에게 말해서 자신의 예약 중에 몇 개를 지윤 쪽으로 넘겨주었다. 비교적 조용하게 노는 스타일의 손님만 뽑아서 말이다. 처음 며칠은 그가 데리고 룸에 들어갔고, 일주일 쯤 지났을 때, 지윤은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는 손님들과도 어느 정도 안면이 익은 호스트가 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물론 두 사람 사이에 별 다른 변화는 없었다. 여자라면 신물이 넘어 올 만큼 안아봤고, 남자들도 제법 안고 안겨본 경험이 있는 승훈이 새삼 신경 쓸 리 만무하다. 또한 그는 상대방의 기분까지 챙겨줄 정도로 아량이 넓지도 않다. 그런 자신이 라는 걸 지윤도 알고 있을 테다. 이제와서 뭔가 더 그를 배려한다는 건 웃기는 일이다. 각자 따로 룸에 들어가고, 나날이 변화하는 듯 태를 벗는 지윤의 모습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승훈도 그 날의 광기는 거의 잊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을 심보였다. 규철과의 내기에서 이기는 것만이 중요했다. 어떻게든 원주연같은 멋지고 아름다운 여자와 엮이는 게 그의 목표일 뿐이다. 왜 그 날과 같은 일이 터졌는지는 스스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사실 생각이 깊은 타입도 아니지만 말이다. 혼자서 룸에 들어서게 된 지윤도 이제는 자체 예약 손님들이 제법 늘었다. 그리고 점점 더 승훈의 눈에 보기에도 아슬 아슬할 정도로 세련되어 졌다. 무엇보다 늘씬한 몸으로 걸을 때마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보는 사람의 눈길을 잡았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듯한 어려보이는 얼굴과, 깔끔하고 섬세한 윤곽들도 단단히 한 몫 했다. 그는 정말 몰라볼 정도가 되었다. 어딘가 항상 애처로운 듯한 상냥한 눈. 비록 자신을 돌아볼 때는 두려운 듯한 눈길로 변해서 곧잘 속을 뒤집어 놓지만, 그 상냥한 눈동자도 변함없었다. 정말 놓치기 힘든 순수한 아름다움이라고 때 늦게 Anonami 사장은 극찬을 해댔다. 그리고 승훈은 그런 사장과 다른 호스트들을 옆에서 열심히 비웃었다. 그리고 승훈은 점점 성질이 나빠졌다. 자기 자신이 그것을 곧잘 느끼고 있었다. 어찌보면 그가 내기에서 점점 이기고 있는 상황인데도 왜 이렇게 화가 느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금세 지났다. ************************** 그리고 어느 날, 승훈은 겨우 그와 계단끝에서 마주쳤다. 한 중년의 여성 기업가가 Anonami 의 입구를 나서고 있었다. 그 녀는 이제 규철의 손님에서 지윤의 손님이 되었다. 그녀의 운전사가 재빨리 문을 연다. 이곳의 오래된 단골이자, 매너 좋은 이 사업가는 떠나기 전에 자신을 접대한 지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이미지야. 이 바닥에서는 보기 드물게 상큼하고 조용한 느낌이군.” 조용하고 상큼한?...승훈은 말없이 자신의 손님을 배웅하고 들어오는 길에 멈춰섰다. 지윤 역시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나서고 있었다. 입구에서 승훈과 마주치자, 뒤로 살짝 몸을 뺀다. 중년 여 사업가는 Anonami 사장 에게 지윤을 애찬하느라 정신없었다. 그 와중에 비틀- 잠시 술에 겨운 듯 지윤이 휘청거렸다.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허리를 감싼 것 은 그저 본능이다. 그러나 그 찰나에 흠칫- 바로 그 때의 반응처럼 지윤이 허리를 비틀며 놀랜다. 두려운 듯한 눈동자가 자신의 아래에서 새끈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승훈은 무심결에 그의 귀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아주 오랜만의 감각이다. 계속해서 성질을 부릴 정도로 뭔가 초조하던 신경이 이 둔한 인간의 몸에 닫는 순간 조금 누그러졌다. 손을 뻗을 때마다 흠칫 놀라는 게 제대로 느껴진다. 그 순간 생각났다. 마치 며칠 전에 있었던 그 얼얼한 아랫도리의 감각이 말이다. 그때도 지윤이 마찬가지로 도망가지 않았다면 아마 그 일을 벌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승훈은 순간적으로 내밀었던 손을 당황하며 거둔다. 지윤이 무방비 상태의 조용한 시선으로 그런 자신을 돌아보았다. 잠시 멍해진 쪽은 승훈이었다. 내가 지금 이 인간을 데리고 뭘 하는 걸까..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격식있는 Anonami의 마중 인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혼자서도 장사 수완을 발휘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승훈의 치를 떨게 만들었던 그 멍한 대답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러나 손님들에게는 인기를 높이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의식해서 그러는 것도 아닐텐데, 가끔 지윤은 요새 피곤한 듯 옷 첫 단추를 풀어 가볍게 목을 털곤 했다. 그가 술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어릴 때 지석과 둘이서 장난 삼아 술을 그에게 먹이고 밤새 토악질 하는 것을 깔깔대며 놀리기도 했었다. 문제는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나서, 최근의 그가 보이는 행동들이 자꾸만 나른한 뭔가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자연스러운 물기 오른 듯한 표정이나 가끔 살짝 입술을 벌린 채 멍하니 상대를 응시하는 습관,..그런 것들이 손님들의 애를 닮게 만들었던 것이다. 승훈은 자신 쪽에서도 가끔 도발당하는 기분이었다. 룸이나 주방에서 가끔 마주치는 그를 볼 때마다 싸하게 근육이 긴장하곤 했는데, 그것은 지윤 쪽에서 질린 표정으로 겁먹고 도망가는 듯 할 때마다 더욱 짙어졌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한결 나았다. 지윤이 최근에 지명도가 높아진다 한들, 승훈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고, 또한 지윤은 아직 Anonami 이외의 곳으로 호출 된 적이 없다. 그 말은 결국 승훈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지윤이 호스트로 키워지고 있다는 말이었고, 그 때문에 승훈은 조금 안도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자신이 가르쳐 준대로 몸을 움직여서 손님과의 관계를 만들고 흥정해야 할 일이 생긴다는 게 이 세계였지만 말이다. 어디까지나 절품처럼 느껴졌던 생생한 뜨거운 내부, 그 질끈거리는 죄임을 아직도 떠올리는 것은 아직 자신뿐이니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은 그에게 조금의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껏 치솟고 있던 팍팍한 신경은 조금 누그러들었다. 역시 내기에 이기고 있는 것이므로, 자신은 이 상황을 즐겨야 하는건지도 모른다. 5. 휴우..라고 짧게 한숨을 쉬며 지윤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겨우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룸서비스 맨에서 호스트가 된 뒤로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퇴근시간이다. 빌딩 용역 업체에서 일하는 어머니는 그 일이 끝나면 다시 대형마트로 일을 하러 가신다. 당연히 밤 11시나 되어야 퇴근하시고, 나머지 집안 일들은 출근하기 전에 지윤이 대개 알아서 하는 편이다. 때문에 막 퇴근한 자신은 항상 잠든 어머니의 모습만 확인할 뿐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일에 요령이 없지도 않다. 자연스럽게 동생을 돌봐왔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다듬어 온 요리 솜씨라든지 그런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Anonami 에서는 그런 수완을 발휘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허둥지둥 거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려 해도 절로 그곳에 가면 바짝 긴장해버린다. 어찌보면 Anonami 라는 상징성이 임승훈라는 이름과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어리석다는 걸 알지만 매번 그렇다. 항상 그 때문에 잔인하게 놀림의 대상이 되어버리지만, 지윤은 피할 수 없는 덫처럼 무의식중에 승훈에게 긴장한다. 그리고 그 긴장이 항상 자신으로 하여금 더 할 수 없는 무기력증과 주저함을 생산한다. 털썩- 낡은 의자 위에 몸을 앉히며, 그는 곧 새벽이 오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오늘은 어쩌면 이대로 잠들지 않고 출근해야 할지도 모른다. Anonami에서 그저 서비스 일을 할 때보다는 한결 수월해졌다고 가끔은 위로하려 애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때보다 몸은 편해졌는지 몰라도 마음은 항상 긴장 상태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이 체질에 맞지 않는 일을 계속 유지하려는 뻣뻣한 자신의 신경에 있다. 자신은 승훈처럼 사교성이 좋다든지, 말빨이 강하다든지 그렇지도 않다. 임승훈은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한 동네에서 자라고 자신의 동생 지석과도 친구 사이다. 워낙 가난했던 살림 탓에 곧잘 남루하게 해다녀 놀림을 받던 자신과는 달리, 지석은 굉장히 떳떳한 편이었다. 그런 동생이 군대를 가고 나자, 그저 집에만 앉아 있는 것도 더 이상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는 인간인 승훈을 찾아간 것이다. 가진 기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승훈처럼 멋지게 해 다닐 수 있는지도 전혀 몰랐다. 그저 일자리가 필요했다. 승훈 역시 어릴 때는 지금보다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짓궂거나 저절이지도, 혹은 사악하지도 않은 개구쟁이였다. 날마다 동네나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이 동네에서 말을 걸어온 인간이 바로 임승훈이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둘 중 아무도 승훈을 맡지 않은 이후로 조금 삐딱해진 것은 맞지만,..어디까지나 지윤은 승훈을 믿는 편이다. 그는 청년으로 자라면서 더욱 다른 세계 사람처럼 해 다녔다.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외제차를 모는 청년이었고, 또한 유일하게 마치 연예인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가끔 슈퍼를 다녀오는 지윤이 승훈과 마주칠 때면 가볍게 인사를 했고, 그럴 때마다 떨떠름한 표정이지만, 승훈은 그래도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쩔 수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지윤은 피로한 머리를 잠시 벽에 기댔다. 자신이 여자아이들처럼 승훈을 보며 두근거리기 시작한 게 아무리 욕먹을 짓이라 하더라도 이미 어쩔 수 없잖아..라고 포기한 단계인 것이다. 그는 지윤이 동생과 어머니를 빼면 유일하게 서로의 내력을 알고 지내는 관계였다. 자신의 외양과 나약한 심성이 그의 강한 성격에 비해 얼마나 비웃음꺼리인지 알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가끔 몹시 더운 여름 날이면 친절하게 차를 멈추고, ‘덥잖아, 형’이라고 말하며 동네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줬던 것이 바로 그였다. 그 친절을 자신만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비록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정작 본인은 그런 기억을 하나도 할 줄 모른다는 걸, Anonami 에서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본성은 착한 녀석이었는데, 알고보면 그에게도 삶이 좀 가혹했던 탓이거니..하고 지윤은 늘 이해하려 애썼다. 문제는 그가 다가오 거나 말을 걸면, 그 어떤 짜증이 녀석에게 배여 있어도 속수무책 다리가 후들거리는 자신의 유치한 감정에 있다. 그 어떤 일을 당해도 좋으니, 승훈이 속한 세상 만큼 멋진 곳에 자신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말도 안되는 바램이 문제다. 승훈은 지윤에게 동경..그 자체였다. 혹은 그 이상이었다. 자신이 그를 어떤 시선으로 생각했는지, 가끔 얼마나 필요로 하고 또한 든든하게 생각하는지 알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른 인간관계가 거의 없는 지윤으로써는 그와 같은 감정을 품는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울 뿐이다. 아마 승훈 쪽에서 알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참으려하고 숨기려 하다보니, 승훈의 앞에서는 여러차례 실수와 바보같은 행동만 거듭하는 것 이다. 휴우..하고 다시 짧게 한숨쉬며 지윤은 셔츠도 벗지 않고 잠시 비몽 사몽을 헤매고 만다. 오후 4시가 되기 전에 출근해야 한다. 비록 같은 동네에 살지만 한번도 태워준 적 없는 승훈이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거리를 걷는 일이 생긴다면 절대 나란히 걷지 말라고. 그 말은 지독하게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지만, 곧 그를 이해했다. 하긴 자신이라도 자기처럼 초라한 몰골의 사람과는 같이 다니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승훈에게는 언제나 빛이 나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절대 잊지 못할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의 감정을 알아채린 것 아닐까..라고 걱정이 되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일이 터져 버렸다. 며칠 전에 그가 이상하게 술에 취해서 자신을 다그쳐 세운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가끔 별 친분 없는 사이끼리라도 어울리다가 한번씩 말을 건네는 동네 녀석들의 음탕한 농담들. 그리고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흔히 친구 녀석들이 빼앗기거나 자기들끼리 자랑삼아 떠드는 그런 이야기들. 딱 그런 상상으로만 한번씩 해 본 낯 뜨거운 관계를 가지고 말았다. 관계를 가졌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휘둘렸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다음 날 승훈 쪽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할 때야 비로소, 지윤은 마음을 쓸어 내렸다. 그가 자신을 안아 놓고도 모른 척 한다는 걸 기뻐해야 하는지, 혹은 섭섭해 해야 하는지도 전혀 몰랐다. 지윤은 그저 자신이 그를 어떻게 기대하고 바라보든 그 쪽에서는 별 거 아닌 일로 치부된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만약 그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승훈은 자신을 쫒아낼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의 빛도, 기대도, 일꺼리도 없어진다는 것이 지윤의 한결같은 긴장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가 그 일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게 어쩌면 잘 된 일 같았다. 아니,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기 때문에 그 쪽으로 결론 내렸을지도 모른다. ‘나를 안았잖아..’라고 물을 수도 말할 수도, 따지는 것도 옳지 않다. 사실은 승훈 정도라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었을테고, 그 들 중에 누구도 자신처럼 그 일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승훈의 입장에서 보면 ‘촌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촌스럽고 테크닉도 없는’ 자신이라는 말을 듣기 싫었기에 지윤은 그 날 아침에 몰래 빠져 나왔던 것이다. 그에게서 ‘너는 섹스도 못하냐?’따위의 말을 듣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게 처음이었지만, 만약 그가 그렇게 말하면 이번에는 정말 무너질 것 같았다. 항상 자신을 벌레처럼 바라보는 눈길 중에서 유일하게 무관심 했던 것이 바로 임승훈이다. 무관심 쪽이 훨씬 견디기 수월했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 그를 찾아간 것이다. 더 이상 경멸의 눈길을 받는 것이 싫었다. 자신만을 빼 놓고 세상이 돌아간다는, 그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고달펐다. 언제나 사람들의 냉대만 받아온 자신으로써는, 그저 지금의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사람들 둘러 싸인 생활이 좋았다. 한편으로 몹시도 가진 것 없고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을 조금은 인정하듯 바라봐주는 Anonami 의 그들에 감사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슬펐다. ************************* 그러나 문제는 날이 갈수록 승훈이 더 지독해진다는데 있었다. 호스트라는 직업이 지윤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는데, 그는 작심이라도 하고 이 길로 몰아세우듯 지윤을 좀 더 가혹하게 대했다. 그는 지윤이 호스트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거의 곁에 있지 않았다. 예약도 따로 받았고, 서로 손님도 달랐다. 그러나 사장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지윤에 관련된 일은 언제나 승훈에게 보고가 먼저 들어갔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이제 거의 마주치지 않지만, 간혹 불려간다든지 혹은 혼나게 되는 일도 생기곤 했다. 가장 견디기 힘들 때는, 손님에게 실수라도 하는 날이었다. 어떤 손님들 앞에서는 그저 잠시의 유흥이면 괜찮다. 노래를 불러준다 든지, 혹은 술을 따라주고 술 대접을 한다든지, 하소연을 들어준다든지....그것이 Anonami 의 매상과도 곧잘 연결되기 때문에 실제로 지윤은 전보다 배의 월급을 받고 있다. 거기까지라면 참을 수 있다. 처음 손님들은 비교적 매너가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관대했으며 지윤이 아무 것도 놀 줄 모른다는 것을 잘 이해했다. 그리고 무리한 요구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위 이름값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유명도가 이뤄지자, 원치 않는 손님들도 곧잘 예약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윤의 입장에서보면, 자신을 후원해주고 키워주려는 승훈의 노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또한 Anonami 라는 절대적인 바의 이미지도 고려해야 했었다. 그렇게까지 철이 없고 무능력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게 되자 새로 예약되는 손님들은 가끔 너무나 저질이었다. “하지만, 그게 니 일이야.” 마침내 못 참겠다는 듯, 지윤이 어떻게든 둘러대고 룸을 빠져 나오자 승훈이 말했다. 자초지종을 묻던 사장이 다른 룸에 있던 승훈을 불러낸 것이다. 지윤은 몹시 긴장한 입을 겨우 열어, 방금 자신을 예약한 룸에서 20대 날나리 청년이 성관계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 때 승훈은 잠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인상을 썼지만, 곧 차갑게 자신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런 것도 제대로 못하냐.’ 라는 식의 표정이었다. 지윤은 항상 그런 눈길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만..두고..싶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지윤은 빠르게 덧붙였다.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 관계가 너무나 아프다든지, 혹은 참기 힘든 모욕이라든지 그런 것들 보다 사실은 심적인 이유라는 것을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원하지도 않은 관계를 갖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비록 니키라는 사람과 승훈이 그런 것을 나누는 걸 얼핏 보았지만, 그 때의 생생하던 쇳소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마치 자신의 갈비뼈를 둘로 나누는 것처럼 질끈대며 울리던 그 욱씬한 느낌 말이다. 마음 어딘가를 쇠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쇳소리가 가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 지윤으로써는 서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런 관계를 갖는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승훈과의 일은 그게 승훈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다 그에게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적어도 원하지 않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건 그만 두고 싶었다. 그러나 승훈은 오히려 지윤을 비웃듯 콧웃음 쳤다. “너는 이제쯤해서 몸값이 슬슬 올라갈 때라구, 강지윤. 나약한 소리하지마.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줬잖아? 누구나 이 바닥에서는 한번쯤 겪을 일이야.“ ...그리고 온 몸의 핏기가 한번에 발끝으로 빠져 나가는 기분이다. 갑자기 어지럽다. 먼 발치에서 동경하던 승훈의 삶 안에 이런 것들이 있었다. 물론 그걸 이해하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어차피 겪고 말 일이고 직업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견 디기 힘들었다. 떨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자, 승훈이 기막힌 듯 팔짱을 꼈다. “이제 앞으로는 질릴 정도로 겪게 돼, 그런 일. 상대방은 니가 원하든 아니든 그런 거 안 따져. 그 사람은 지불을 하고 너를 사는 거란 말야. 그리고 너는 제대로 된 댓가를 받고 그걸 파는 거고. 그게 싫으면 이 일 못하는 거야.“ “..........................” 그래도 망설이고 거부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탓일 거다. 승훈이 그런 기다림은 짜증이 난다는 듯, 머리카락을 북북 쓸어올리며 잘생긴 미간을 흐리고 있다.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이다. 그는 화가 나고 짜증이 날 수록 더욱 지독하게 상대방을 몰아세우는 습관이 있다. 지윤도 사실 여러번 당햇다. “들어가, 강지윤. 아니면 여길 떠나든지.” “...................” “..제발, 이 만한 일로 날 좀 성가시게 하지 말라구. 나 좋아한다며? 어떻게 그런 몸으로 날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 “가서 그 손님에게 좀 더 배우고 오라구. 니키 정도는 좀 할 수 없어? 그 녀석 봐. 누가 보든 안 보든 그렇게 잘 하잖아? 그런 녀석도 돈을 내고 하러 오는 판에, 이 깟 일로 사람을 귀찮게 만들어?“ 그래...이깟 일. 니키라는 그 사람도 있었다. 승훈은 그에게 매우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때 니키를 안고 있었다. 반대로 자신에게 할 때는 정말 말 그대로 선배로써의 교육이라는 걸 알려주듯, 얼굴을 잠시 흐리고 있었다. 역시 난 안되는 거야..그런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거야...라고 생각하며 지윤은 목이 콱 메인다. 이상스럽게 위태로운 울컥함이 목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버티다가는 꼴사나운 일을 벌릴 것 같아 빠르게 뒤 돌아섰다. 승훈이 카운터에 뭐라고 말하고 암실과 같은 룸으로 같이 따라 들어왔다. 마치, 지윤이 정말 제대로 호스트 일을 해 내는지 감시라도 할 정도로 차갑고 무표정한 눈빛이었다. ********************** 지윤이 나가버렸다고 생각했는지 인터폰으로 언성을 조금 높이고 있던 손님은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허리를 잡아 당긴다. 본능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듯, 승훈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표정없이 앉아 손님의 비어 있는 양주를 채우고 있었다. “역시 요새 한창 물이 오른 녀석이라고 하더니 앙탈도 수준급이군. 강지윤이라고 했나? 그렇게 얼굴 보기 힘들다는 승훈군도 같이 들어왔군. 지윤군이 실례한 댓가로 서비스가 있는가보지?“ “......................” “지윤군이 그렇게 테크닉의 대가라며? 생긴 것만 봐도 사내 놈들 홀딱 서게 만들고는 언제나 마지막은 거절이라고 다들 그러던데... 그래도 손님 봐 가면서 그렇게 해야지, 지윤군..안 그래?“ 이 사람이 젊은 청년이지만 대고객이라는 건 잘 들었다. 그래서 사장도 몇 번이나 주의를 줬다. 만약 자신없으면 처음부터 그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이다. 사장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음에 분명하다.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한들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다. “자, 제대로 해 보라구.” 오만한 청년은 쇼파에 편하게 몸을 누이며, 자신의 다리사이를 벌렸다. 고급 양복으로 삐죽이 솟아오른 사내의 흔적이 보인다. 어쩔 바를 모르며 지윤이 허둥거리자, 승훈이 다시 차가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그런 것도 일일이 가르쳐줘야 하냐..하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사내의 버클을 풀며 승훈은 말없이 고개를 묻었다. “............!!!!!!!!” 비록 자신에게 할 때도 알고 있었지만, 승훈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은 처음보았다. 그는 단단한 흉기같은 남자의 양물을 손에 쥐고 입으로 한번 핥았다. 그리고는 재촉하듯 얼음장같은 눈으로 지윤을 돌아보았다. 청년은 벌써부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즐기고 있다. 안돼..라고 짧게 애원하듯 고개를 흔든다. 지윤의 그런 행동이 거슬린다는 듯 승훈이 입술을 비틀며 미소짓는다. 다시 한번 거듭되는 이 한심하다는 기분이 싫어서 지윤은 테이블에 올려진 양주를 갑자기 벌컥 들이마셨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된 것이다. 엄청난 알콜의 도수가 뇌를 압박했다. 가물거리는 바람에 잠시 눈을 깜박이자, 승훈이 주머니 안에서 뭔가를 꺼내어 자신의 입 안으로 재빨리 밀어넣는다. 목 너머로 알약같은 것이 하나 흘러내렸다. 약이다. 말그대로 약이다 . 그리고는 사내에게 들리지 않게 승훈은 나지막히 지윤의 귓전에 속삭였다. “너를 팔아.” 소름이 확 끼친다. 귀가 예민하다는 것을 승훈 때문에 처음 알았다. 승훈이 자신의 귓뿌리를 삼키듯 입안에 넣어 한번 굴리며, 손목을 사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한마디 도발 때문인지, 혹은 조금 전에 함부로 들이마신 양주 때문인지..그도 아니라면 승훈이 밀어 넣은 약이 이유였는지.. 도무지 알길이 없지만, 하복부가 천천히 긴장되었다. 열이 바싹 오르고 손바닥이 타들어갈 정도로 호르몬이 분비된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지윤을 향해 승훈이 등 뒤에서 자신의 상반신 쪽으로 손을 돌렸다. 그는 그대로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푼다. 말 그 대로 상품처럼 된 것이다. 그는 ‘너를 팔아.’라고 말했고, 지윤은 단순한 도구처럼 다루어졌다. 휙- 셔츠를 벗겨냄과 동시에 답답해진 사내가 지윤의 머리를 낚아챈다. 악- 하고 짧은 신음을 내기도 전에 머리가 그대로 아래로 향했다. 엉겹결에 조금 전의 승훈처럼 무릎을 꿇고 청년의 허벅지 사이에 놓여진다. 지윤은 반쯤은 미칠 것 같고, 또 반쯤은 포기한 심정으로 그것을 입에 물었다. 몹시 만족스러운 듯한 소리가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츄읍..하고 입 안의 점막이 청년의 것을 감싸쥐느라 소리를 낸다. 그와 동시에 뒤 쪽을 손을 돌린 승훈이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벗겨낸다. 마치 네발로 기는 짐승처럼 공기가 와 닿는 속피부에 몸이 움츠러 들었다. 그러나 손님의 손이 가차없이 자신의 들려진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더 높이 쳐 들라는 신호다. 그는 굉장히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 것은, 아무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던데..........기대가..돼...” 딱 한 사람 있다. 바로 지금 뒤에서 관찰하듯 물러선 사람 말이다. 지윤은 울컥하는 뭔가를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청년의 것을 빨아 들였다. 그것은 살점 덩어리처럼 무형의 점액으로, 지윤에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지금 이 곳에 없는 것처럼 도착 상태에 빠진 것이다. 약 때문이다. 그때야 비로소, 지윤은 승훈이 무슨 약을 먹였는지 깨달았다. 자신은 경험해 본 적 없지만, 몸을 젖게 만들고 타인의 손길을 기대하게 만드는 약이다. 애널이 저절로 움찔거린다. 손님으로 온 청년이 장난처럼 웃으며 자신의 하복부에 술을 끼얹었다. 차가운 물기지만, 역시 달아오른다. 동시에 승훈의 손가락이 뒤를 파고든다. 손으로 양쪽을 잡아 구멍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앞에서 당하는 사람의 충격같은 것은 고려하지도 않고 주름을 손가락으로 피듯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좀 더 높이 들리기 위해 그는 양 쪽으로 지윤의 무릎을 잡아 벌렸다. 이런 수치감과 굴욕감은 처음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음란한 자세 때문에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어지러웠다. “...아윽................” 한참 되는 펠라 때문에 숨이 막힌 지윤의 눈꼬리에 본능적으로 물기가 맺혔다. 그것을 아무런 표정없이 혀로 핥아주며, 승훈은 여전히 자신의 애널과 음낭을 손으로 쓸어갔다. 약과 술, 그리고 승훈의 손길이라는 삼중 고통에 시달리며, 지윤의 몸은 제 3자가 있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음란한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낭패감이 느껴졌다. 그로써는 자신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런 자극들에 쇼크를 받았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엎드려.” 기침을 콜록이는 지윤을 향해 청년이 말했다. 말 그대로 기듯이 지윤은 그의 말에 따른다. 손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런 것은 지금의 기분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승훈이 옆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녀석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상상도 해 본 일이 없지만, 바로 이렇게 자신을 팔라고 그가 부추겼다. 그 순간, 그는 정말 악랄한 악마 그 자체로 보였다. 테이블 위로 올라간 채, 네 발로 엎드리자 은밀한 부위가 더 속속들이 보여졌다. 승훈이 다가서서 자신의 어깨를 꾹 눌렀다. 머리와 어깨가 탁자에 닿고 무릎을 구부린 채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벗겨진 몸은 청년의 시선에 공개되어야 했다. 약은 점점 신경을 갉아먹고 이성을 송두리째 뺏어갔다. 오직 뺨에 와 닿는 차가운 테이블의 느낌만이 생생하게 전달될 뿐이다. 모든 것이 자신과는 이상하게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허리 좀 흔들어 봐. 얼마나 흔들리는지 보고 싶거든.” 청년이 뒤에서 다가와 조금 전 승훈이 했듯, 엉덩이 양 쪽 살점을 잡고 쫙 벌렸다. 역시 촉촉한 공기가 가장 부끄러운 곳에 와 닿는다. 태어나서 이런 곳을 남에게 보여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새 두뇌를 장악한 약기운은 그것을 즐기듯, 애널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사내의 눈에도 승훈의 눈에도..그것은 분명하게 보여질 것이다. 마치 넣어달라고 애원하듯 움직이는 그 점막의 움직임 말이다. 너무나 수치스러워 지윤은 뚝뚝- 눈물을 흘렸다. “흔들라고 하시잖아, 니가 얼마나 음란한지 보여드려.” 그러나 들리는 것은 낮고 표정없는 목소리. 이 지독한 일을 낯선 이에게 당하도록 재촉하는 목소리. 지윤은 이를 악물고 물기 흐르는 얼굴과는 상관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마치 동물처럼 취급되어진다. 흔들 때마다, 이미 약기운으로 발기한 자신의 것이 마치 조르듯 함께 흔들렸다. 음탕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시키는 악랄한 행위다. “이렇게까지 조르니, 어쩔 수 없이 해 줘야 겠군..그렇지, 승훈군?” 청년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자신의 뜨거운 것을 입구에 놓는다. 지윤이 발악을 하듯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굵은 삽입물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흠뻑 젖은 자신의 애널을 깊이 통과했다. “아앗-!!!!!!!!!!!!!!” 기절할만큼 아득한 비명을 질렀다. 그대로 낯선 이에게 관통 당한 것이다. 열기가 가득한 그것은 지윤의 내부로 들어와 안을 휘저어 놓았다. 그리고는 탐욕적으로 피스톤 질 해대기 시작했다. 상대의 표정도 보이지 않고, 삽입당하는 장면과 부위까지 고스라니 승훈에게 노출당한 채, 허리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은 상품인 것이다..라는 것을 이제야 분명히 깨달았다. 아무리 예의바른 손님이라도 상품의 인격을 따지는 이는 없다.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저 청년의 배출을 위해 쓰이는 물건이나 도구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 나왔다. 최악이다. 쾌감은 느껴지지만, 머리 속에 이는 불꽃은 없었다. 그저 엄청난 자극, 그리고 손님의 가학적인 욕구에 함께 말려들어간 피가학적인 반응일 뿐이다. 그대로 청년은 자신을 안아 들었다.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안아든 자세로 쇼파에 앉는 바람에 연결 된 채, 마치 위에서 자신이 그를 삽입하는 듯한 자세가 된다. “자,잘 보고..있으라구, 승훈군. 내가 첫 손님이었다고 소문 좀 내 줘..” “........!!!!!!!!!!!!!!!!” “...아우...아윽...이 녀석 최고잖아! 역시 그 돈을 낼만한 가치가..있어...아윽...굉장히 죄여오는 걸.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 ...사실은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할 수 있겠군..“ 이대로는 고개를 돌릴 수도, 승훈의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지윤은 그저 쾌감에 완전히 지배당한 눈동자로 멍하니 그를 쳐다본다. 마치 앙탈 부리던 지윤을 범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듯, 청년은 지윤의 접혀진 무릎을 높이 들어올리며 양쪽으로 가득 벌렸다. 조금 전의 상황보다 더욱 완전히 승훈에게 삽입당하는 부위가 보여진다. 조금만 시선을 내리면 자신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사내의 굵은 물건이 자신의 입구를 뚫고 들어왔고, 애널의 탄력성 있는 근육은 그것을 반기듯 잔뜩 붉게 확장하여 감싸고 있다. 축축한 물기가 그곳에서 세어나와 쇼파를 더럽힌다. 몹시 만족스러운 듯한 청년의 헐떡임이 등 뒤에서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지윤은 머리 속이 완전히 하얗게 비워졌다. 그는 그저 캄캄한 어둠 속처럼 이 모든 것이 느껴진다. 그 속에서도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동자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안고 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선명하고 은밀한 눈동자였다. ********************** “.........우욱..........”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토해내고 말았다. 가뜩이나 술에 약한데다 워낙 지독한 짓을 당해서 엄청나게 속이 울렁거렸다. 청년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지윤은 그대로 달려 나왔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겨우 옷을 챙겨 입고 화장실 벽에 기대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낸다. 투툭...눈물이 온통 얼굴을 덮었다.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누군가가 등을 두드린다는 걸 깨달았다. 힘없이 몸을 돌리자 승훈이 복잡한 얼굴로 자신의 등을 두들겼다. “..........우욱...........” 다시 게워낸다. 먹은 것도 없이 양주만 주르륵 세어 나왔을 때, 겨우 하얀 가루들이 눈에 보였다. 약 가루였다. “지독했어, 그렇지?” 조금 진정되자, 승훈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지독했다구?...생각조차 못했던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지윤은 몸이 계속 떨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댓구하고 싶었지만, 속에서 밀려오는 기묘한 슬픔 때문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덜덜 떨리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쏘아보며 승훈은 다시 자신을 돌려세웠다. “너에겐 심한 짓이었어.” “..........우욱..........”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씩 겪는 일이야.” “.........................” “...이래도 나처럼 되고 싶어?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고 싶냐구...” 누구나 한번 겪는 일이야?... 지윤은 말없이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비워낼 것도 없어서 속이 쓰리다. 그러나 토한다고 아래가 비워지진 못한다. 아직도 남아 있는 끈적거리는 사내의 흔적이 허벅지 사이로 흘러 내려왔다. 그만, 정신이 온전하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말 뿐이다. ..........하지만 정말 누구나 여기 사람들이 겪는 일이라면... 이라고 생각하며 지윤은 겨우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도 눈물이 범벅된 얼굴이라서, 승훈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른거린다. 목 위로 넘어 오는 뜨거운 숨덩이를 겨우 삼키며, 지윤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에게 생각만큼 그다지 한심하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내내 그것을 관찰하고 재촉해 놓고는 이제와서 발 빼기 바라는 이 악랄한 사내에 대한 분노다. “..너도 겪었..어?..” 쓰게 웃으며 승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작게 ‘처음에..’라고 말했다. “요령이 생길거야, 강지윤. 저런 녀석들을 다루는 요령 말야. 결국...여기 녀석들은 한번씩은 저런 식으로 다 팔려. 그게 자신을 판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상품을 팔지만, 여기 사람들은 몸과 유희를 판다는 것만 다른 거지.“ “........내가 떠나길 바래?........” 겨우 한번 다시 묻는 질문에 갑자기 승훈이 빳빳하게 굳었다. 뭐라고 말하기 힘들게 어려운 표정이다. 지독한 일을 당한 것도 자신이고, 그렇게 시킨 것도 승훈이었지만, 어찌 울 것같은 표정은 그가 짓고 있다. 그러나 곧 승훈은 냉철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 “...남아서 일류가 되어 주길 바래.” 지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도 눈물이 끝까지 따라 흐른다. 정말 몹쓸 꼴을 보인다..라고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상체를 들썩였다. 이렇게 길게, 또 대화다운 대화를 하게 된 것은 정말 처음이다. 비록 그 대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우습지만 말이다. 또한 그런 일을 시켰지만, 등 뒤에서 단단하게 자신을 받치고 있는 승훈 탓에 조금 안정이 되었다. 정신없이 몽롱하게 겪은 저질스러운 경험이지만, 그래도 현실에 눈 떴을 때는 자신을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여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지윤은 마침내 조금 더 차분해진 목소리로 승훈에게 말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 “..내가 아니었더라도 그 방의 누군가는... ..그 일을 겪었을 거란 말이야..그렇지?..“ “..................” “..내가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녀석이 같은 취급을 당했을 거야... 바로 그 말이지?...“ “....................” “...그럼..다행인 거네... ..다른 녀석들이 아니라 내가 당해서... ..나는 Anonami 의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기 때문에...“ 목이 메어서 말이 뚝 끊겼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한 순간 훅- 하고 숨을 들이키던 승훈이 강하게 등 뒤에서 주저앉은 자신을 끌어 안았다. 값비싼 양복 셔츠. 문득 멘솔 담배 냄새가 조금 배여 있는 그 팔이 자신의 얼굴과 어깨를 전체로 감싸듯 끌어안은 것이다. 그것은 이유는 모르지만, 뭔가 마음 을 징-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지윤은 그 햇살 냄새나는 셔츠에 얼굴을 묻고 조금 더 울었다. 오늘 처음으로 더듬거리지 않고 승훈에게 말할 수 있었다. 6. 규철이 얼굴을 들었을 때, 승훈은 뭔가 어려운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시간까지 퇴근하지 않았다니 조금 놀랬다. 규철이 보는 승훈은 언제나 깔끔하게 즐기고 놀고, 그리고 저질스러운 농담을 잘 하지만, 자기 일은 알아서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장난스런 내기 하나가 승훈과의 관계를 바꿔논다는 걸 별로 생각진 않았다. 다만 그를 볼 때마다 뭔가가 마음에 안 들고, 어딘가 공허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내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승훈이 아무리 잘난 호스트라고 해도 아직 어리다. 한참을 이 바닥에서 구른 자신과는 아직 상대가 안된다. 내기야 어찌되었건 아직 한 주가 남아 있었다. 다만, 내기 이후로 강지윤이 정말 일류 호스트답게 변화한 외모는 멋졌던 것 같다. 하마터면 규철 자신도 깜박 그를 가지고 싶을 뻔 했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 예상 밖으로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은 조금 어리지만,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임승훈이 생각에 잠겨?...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생각보다는 하반신이나 주먹이 더 앞서는 스타일이다. 아무튼, 그 녀석이 규철의 앞에서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말투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실버 룸에 있던 장우준이 언제 나왔냐?” 대뜸 묻는다는 게 조금 전까지 방탕하게 즐기던 한 손님의 퇴실 시간이다. 장우준이라...생각해보니 문제가 많은 녀석이다. 그런 저질 따위를 손님으로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 여자 손님 중에도 별의별 사람이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남자 손님들은 더욱 심각한 편이었다. 그들은 가끔 사회에서 당하는 열등감을 자신들에게 풀듯, 사회적인 이 계약 관계에 거침없이 변태 짓을 저지르곤 했다. Ananomi 에 오래 있어온 규철이 알고 있는 장우준. 그 역시 거물급 정치가 집안의 아들로 이곳에서는 썩 인식이 안 좋은 편이다. “장우준? 조금 전에 나갔어. 걔 한번 오면 진을 다 빼 놓는 거 알잖아? 근데, 왜? 주방에서도 오죽했으면 치를 떨던데?“ 무심결에 대답하며 양복 자켓을 집어 올리자, 갑자기 승훈이 씽긋 웃었다. 이상하게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웃음이다. 규철은 순간 송골이 묘연해졌다. “쓰레기 버리러 같이 갈래?” “............!” 직감적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장우준이 뭔가 승훈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몸 담아 온 이 세계의 규칙상 그렇다. Ananomi 안에서는 손님이 최고다. 그들은 그 영업 시간 만큼만 물건이다. 그러나 지금 막 그 시간이 끝났다. 그들은 인간으로 복귀했다. “무슨 일인데?” 또 누굴 불러 모아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규철이 승훈을 향해 진지하게 되묻는다. 이 녀석은 가끔 다른 놈들이 쓰레기를 버릴 때 같이 있곤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실은 그 비싼 양복을 버리는 일이 싫어서일지도 모르지..라고 농담처럼 규철은 그를 야유하곤 했었다. 그런 녀석이 직접 제안하는 일인 만큼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장우준이 새끼가 지윤이를 범했다.” “...........?.......” 그런 일이라면 별로 심각한 건 아니다.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다 그쯤은 각오하고 하는 게 이 일이다. 처음에야 마지못해 관계를 갖지만 한 두 번 하고 나면 요령을 익히게 된다. 더군다나 천하의 승훈이 선생으로 있다면, 지윤은 좀 더 수월하게 그 일들을 배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굳이 나서다니 조금 이상하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정을 짓자, 승훈은 날카롭게 웃으며 덧붙인다. “내가 보는 앞에서 했거든.” “.......!.......” 그 때서야 ‘아하..’라고 짧게 탄식하며 규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쓰레기다. 저질이다, 저질. 사실대로 말하자면 가끔 호텔 같은 곳으로 불러다가 3p 며 4p까지 즐기는 인간들은 대해왔다. 그래도 강지윤에게 그랬다니 머리가 절로 돌아간다. 그것도 임승훈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문득 다른 녀석들에게 알리기 위해 몸을 돌리는 규철을 향해 승훈이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한번 혼나 봐야 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냐...김규철.” “..........................” 라이벌의 웬지 씁쓸한 어조를 들으며 규철은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겪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심장이 송두리째 빠져 나가는 기분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 쓰레기 버리러 가 볼까..라고 규철은 기지개를 폈다. 오늘의 쓰레기는 장우준. 그리고 재활용 봉투도 없는 최악의 폐기물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까, 그 새끼..사실은 규철도 벼르고 있었다. 콰앙- 하고 갑자기 개인 사물함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규철은 알고 있었다. 오늘 실버룸이 비워졌을 때, 누군가가 그 안을 난장판으로 부셔 놓았다. 손님 중에 그런 일을 할만한 인간은 거의 없다. 아마도 지금 자신의 등 뒤에서 차가운 표정으로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저 녀석. 어리고 혈기 왕성하며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저 라이벌이 그 안을 온통 부셔 놓았을 것이다. 규철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머지 동료를 모으기 위해 로비로 걸어 나왔다. ************************** 그 날은 아침이 되어서야 승훈은 집에 들어섰다. 자신이 새벽에 아파트로 들여놓은 지윤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 골아 떨어져 있다. 승훈은 피묻은 셔츠를 둘둘 말아 쓰레기통으로 던진다. 그리고는 말없이 동이 터오는 창을 등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왜 삼류세계에 속한다고 경멸한 지윤을 자신의 아파트에, 그것도 자신의 침대에 재웠는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속이 부글거리고 화가 치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머리 전체가 쿵쿵- 울려대는 기분에 양 손으로 가만히 이마를 감쌌다. 무심결에 뒤에서 지윤이 뒤척인다. 이 곳에 옮겨 온 후로 정신이 가물거리는 그를 정말 깨끗이, 심지어는 장우준이 배설해 놓은 곳도 잔인하다 시피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깨끗이 씻어 줬건만 결코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우준을 흠씬 짓이겨 놓은 지금까지도 잠들지 못할 만큼 이상한 기분이다. 후우..라고 답답한 듯 한숨을 쉬자, 지윤이 작게 끄응- 하고 소리낸다. 마치 대답하는 것 같아, 무의식 중에 승훈은 웃었다. 그리고는 따뜻한 품을 찾듯 말없이 잠든 몸을 가까이 끌어당긴다. 이 사람을 최고의 호스트로 만들겠다고 내기했다. 그때는 무척이나 자신만만하고 야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비록 그 앞에서는 전혀 흔들림 없었지만, 그래도 이 순간 지윤의 몸을 끌어당긴 자신에게서 뭔가 변화가 인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씁쓸하면서도 뭔가 심각하게 쫓기던 그 기분과 비슷했다. 그는 자신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이 사람이 말이다. 자신은 할 줄 아는 게 호스트 밖에 없어서 이 딴 것 밖에는 못 가르쳐준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라도 최고가 되면 그런 짓은 당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그래서라도 그를 최고로 만들고 싶었다. 적어도 그건 사실이었다. 그가 ‘떠나길 바라냐’ 라고 결국 물었고, 자신이 ‘남아달라’라고 말했다. 일류가 되어 달라고 말했다. 그건 결코 내기 때문이 아니었다. ************************ 어쩌면 위기가 기회라고...그 일이 있은 후로, 지윤은 승훈 때문에 흠칫거리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지금도 승훈이 느끼기엔 너무나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나마 꽉 끌어안던 그 탄력있는 몸은 움찔거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손님이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서 주방에 들렀을 때, 승훈은 최근 자신의 머리 속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 그 실체와 마주쳤다. 바로 강지윤 말이다. 엊그제까지 정말 저주할 정도로 인생의 벌레라고 생각한 그 녀석이 주방의 저녁을 기다리며 친절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라, 서비스 맨들에게 말이다. 그 미소에서 빛이 난다. 아련하고 차분하고, 절절한 미색이 감돈다. 승훈은 그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 자신을 마음껏 비웃었다. “승훈씨도 지금 비는 타임? 저녁 같이 챙겨요?” 주방 아줌마가 기다리는 지윤과 자신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한다.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해서 지윤을 돌아보자, 자신을 발견한 그가 조금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좀더 격렬하게 뛰어 올랐으므로 욱씬거린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것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돌려버리는 그 은밀한 회피에 있었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겁이 난다든지, 혹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조금 더 다른 이유 같아 보였다. 뭔가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을 보였고,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을 들켜 버렸기 때문에 피하려는 안타까운 느낌이다. 승훈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에 스스로 놀래며 주방을 향해 고개 끄덕였다. 저녁은 어쨌든 먹고 볼 일 아닌가. **************************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승훈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숟가락을 거칠게 내려 놓았다. 룸에 둘이 앉아 저녁을 먹을 정도면, 뭔가 산뜻한 느낌이 들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산뜻한 기분은커녕, 이렇게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라면 답답해서 음식이 안 넘어간다. 무척이나 신경쓰인단 말이다. 그 숙인 고개 때문에 뽀얗게 드러나는 목덜미며, 다른 것들도 너무나 신경 쓰였다. 손을 대면 어떤 감촉인지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로도 무수하게 다른 녀석들과 난잡하게 즐겼는데, 이상하게도 지윤과의 일은 떠올릴 때마다 아찔해진다. 그것이 다른 녀석들보다 훨씬 이 인간에게 신경쓰이는 점이다. 다른 관계들이 침대를 벗어남과 동시에 천천히 뇌리에서 사라진다면, 이 사람을 안았던 감촉이나 그 생경하고 신선한 반응들, 또한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가 흐느끼던 알싸한 흐트러짐은 굉장히 또렷하게 감각에 남아 있다. 잊을만 하면 떠오르고, 잊을만 하면 자극해대는 것은, 필시 이 도망가려는 듯한 태도와 관련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그렇게 나랑 눈도 마주치기 싫으면, 아예 떠나는 게 어때?“ 역시나 묵무부답. 그 지독한 일을 당하고도 여기 남아 있겠다는 게 고집인지 객기인지. 그렇게 무시하던 한 사람에게서 강렬한 오기를 보는 것 같아, 그 때도 굉장히 가슴 저렸다. ...가슴 저렸다. 미치겠다. 이런 기분은 느낀 적도 없고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도 다른 녀석들처럼 ‘거래’는 성립되지 않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형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이제 알았을 것 아냐.” “...................‘ “..그럼, 이제 나를 믿는 것 따위는 집어치우고 떠나. 아니면, 지금도 잘 나가고 있으니, 이제 적당히 일류로써의 대접을 받던지.“ 실제로도 그는 요새 가장 잘 나가는 호스트가 되어 간다. 이제는 승훈의 넘버 원 자리는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것도 강하고 세련된 자신의 매력이 아니라, 이 사람의 어딘가 슬프고 순수해 보이는 듯한 미소. 전혀 약한 몸도 아닌데, 그 웃음만큼은 어딘가 부러질 것 같으니 환장하겠다. 몇 십년을 보아온 자신이 이렇게 느끼는데, 손님들이라고 환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환장이겠지만 말이다. “........니가 남으라고 했잖아.” 고집스럽게 고개 숙이던 지윤이 혀를 차는 승훈을 향해 그 순간 얼굴을 들었다. 딱 시선이 얽히는 기분을 깨달았다. 이 역시 말로는 표현이 모호하다. 난사한 감각이다. 승훈은 왜 손님들이 지금의 그에게 환장하는지 조금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언젠가 니키가 말했듯, 바로 그 뿌옇게 잡히지 않는 실체같은 기분을 안겨준다. 그는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는 것처럼 이상하게 투명했다. 모든 손님들과 Anonami 의 호스트들도 그를 좋아했다. 그가 친절하기도 하고 너무나 조용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신비하고 사랑스러운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를 잡고 싶다..라는 기분이 들만큼, 그는 자꾸만 도망가는 기분을 안겨준다. 그러나 사실은 언제나 이 세상이 그를 따돌렸고, 버려왔다. 실제로 그가 현실 속에서 빛나는 시선을 가지고 있을 때, 아무도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자신조차도. 그래서 그의 미소가 슬프다는 건 바보라도 다 안다. 그런데도 그게 답답해서 늘 부아를 내고 성질 부렸다. 하지만 그는 요새 인기 상승세를 달린다. 이제는 확연하게 색기가 발하는 도톰한 아랫입술은 붉고 가운데가 갈라진 듯한 기분을 주었다. 또렷한 눈매는 정말 간혹 이따금씩 자신을 쏘아보지만, 거의 대부분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그가 미소지을 때조차, 정말 웃고 있는 건지 아닌지 가끔 혼란이 들었다. 밝게 나풀거리는 갈색의 머리카락이 작고 선이 섬세한 얼굴을 잘 감싸며 흔들거린다 . 그런 모습 때문에 ‘사랑스럽다’..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승훈은 요새 가끔 그 말에 동의한다. 그 때 장우준에게 심한 꼴을 당하고 토악질을 해대는 그를 갑자기 충동적으로 끌어 안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미칠 것처럼 마음이 난도질 당하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또한 그렇게 잘나가던 자신이 그만큼이나 타락한 기분도 처음이었다. 타락이라는 것도 자신이 즐기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그는 장우준이 이 사람을 안았을 때, 광폭하게 뜯겨지는 잔혹함을 스스로에게 참으라고 강요해야 했다. 그가 시킨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끝까지 인내하려 했다. 마지막에 못 참게 되었을 때는, 마치 자신이 그를 안고 있는 것처럼 달콤하고 쾌감에 사로잡힌 눈동자가 응시할 때였다. 그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짜릿한 시선이 신경을 두들겼다. 정신적인 착란에 빠질 정도로 황홀한 눈동자였고, 완벽하게 욕정에 사로잡힌 채 교성을 간간히 흘리는 그는 지금까지 승훈이 보아온 그 누구보다 갖고 싶게 만들었다. 수치심과 교접의 욕구에 범벅이 된 혼란스러운 표정은 요새도 가끔 꿈 속에 출몰했다. 승훈은 이 세계에 살아오면서도 그만큼 난잡한 꿈은 최근 들어서야 겨우 꿔 봤다. 그 눈동자는 ‘나를 사줘....’라는 듯한 완벽한 기분을 자신에게 선사했지만, 그 순간의 승훈은 그를 살 수도, 지킬 수도, 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심장이 튕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깨달았다. 원주연..그 여자를 가지고 싶다는 내기에 앞서, 이 사람의 영혼이 나만큼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정말 비열하고 이기적이며 최악의 인간이다. 일급의 호스트라면 적어도 자신보다 나은 인간이어야 한다. 강지윤처럼 말이다. 그가 화장실 바닥에서 뭐라고 설명할 길 없이 뭉클한 그 눈동자를 보였기 때문이다. 비로소 승훈을 똑바로 쏘아보는 듯한, 눈물 가득한 시선으로 여전히 슬프게 웃으며 입을 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 당했을테니, 그래도 다행이다.. ’라고 말했을 때, 승훈은 하마터며 그를 그 자리에서 가지고 싶었다. 그가 호스트가 된지 어느 덧 2년. 이 치열하고 밑바닥같은 허세의 직업 속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강지윤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 며칠 뒤에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밥만 열심히 먹고 있는 거다. 굳이 자신에게만 아니라면 그럴 리도 없는데, 아직도 두려워하는 표가 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을 피해 고개 숙이고 움추릴 때마다 왜 화가 나는지 이번에는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제발, 한번씩은 나 좀 쳐다 보고 말해라, 강지윤.” 버릇없이 반 말하는 자신을 향해 놀란 눈동자가 다시 접시에서 고개를 든다. 아름다운 시선이다. 가슴이 울컥할 정도로 갈비뼈를 제대로 압박하는 미묘한 눈동자다. 승훈은 똑똑히 알게 되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어렸다면, ‘제발 얼굴 좀 보여줘.’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 오늘은 여자 손님이다. 역시 재벌 3세로 외국물 먹고 들어온 초 날라리다. 가끔 TV 에 얼굴을 비추는 단역으로 나온다. 그녀는 곧 스타라도 될 것처럼 Anonami 에 올 때마다 온갖 건방을 다 떨었다. 그런 그녀는 승훈과 동갑이다. 니가 스타가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승훈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승훈씨, 요새 새로 들어온 사람 구경 좀 시켜줘.” 역시 그녀도 지윤을 보지 못해 안달이다. 장우준의 일이 있고나서, 승훈은 필사적으로 지윤의 손님들을 추리고 또 추렸다. 왜 그러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다만 그는 ‘나에게도 약간의 양심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이라고 말하며 규철을 향해 어정쩡하게 웃었을 뿐이다. 장우준은 얼굴이 개죽이 되도록 얻어터졌다. 사실은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 선에서 규철이 말렸다. 한동안은 얼굴 비추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줘서 어느 정도 기분이 나아졌다. 대신 그들은 지윤의 손님을 아주 정중하고 즐거운 대상으로만 뽑아놨다. 사장도 그에는 딱히 불만이 없었다. 어차피 그도 지윤의 순수한 미소에 조금 꺼림직해 하는 사람이었다. 이 바닥에서 놀면 한 두어달이면 다 변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곧잘 있었지만, 승훈은 그런 상대의 뒷통수를 가볍게 날렸다. 이상하게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강지윤은 변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믿어졌다. 그와 자신은 다르다. 자신은 엉망이고 최악의 사내이지만, 지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 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아잉..승훈씨...그 지윤이라는 사람 말야. 그렇게 예쁘다며....“ “..............” 승훈은 웃으며 말없이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른다. 속으로는 온갖 십원짜리 욕이 다 동원되었다. 그녀도 사실 지윤을 지명하고 예약했지만, 승훈이 알아서 자신 쪽으로 돌려버렸다. 지윤이 규철처럼 라이벌 의식을 가지지 않는 게 천만 다행이다. 까닥하다간, 이제 지윤과도 주연을 사이에 두고 싸워야 할지 모른다. ........잠깐, 누구를 두고 싸워? 내가 왜?.. “승훈씨 전화~” 여자가 좀 더 역겨운 애원을 펼치기 전에 서비스 맨 중 하나가 인터폰을 걸어왔다. 승훈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전화기를 든다. 외부에서 그를 찾는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휴대폰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 나다, 지석이.= 그리고는 꽤 오래된 친구의 음성을 들었다. 지윤의 동생이자, 자신의 친구. 즉, 지윤과 지금 이 곳에서 이런 식의 관계를 만든 당사자다. = 우리 형, 거기서 일하냐? = 한동안 승훈은 가만히 수화기만 부여잡고 있었다. 녀석이 휴가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당당한 성격답게 ‘나같은 놈 가도 반겨주냐’ 라고 묻는 여전한 놈이라는 것. 그것을 깨달았을 때, 지석이 방문하기로 약속이 잡혔다. **************************** “어머니가 형 얼굴 못 본지 꽤 됐다고 그래서 말야. 확인차 들렸지. 군인이라고 박대하지 마라.” 지석은 밝게 웃으며 건강하게 그을린 팔을 내민다. 가볍게 악수하고 등을 치자 룸 쇼파에 앉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 형이 너를 찾아올 거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형이 어릴 때부터 굉장히 조용했잖아. 이런 일을 할 거라곤 꿈도 못 꿨어.“ 그건 승훈도 역시 몰랐던 일이다. 오랜만에 가벼운 맥주를 마시며 오징어를 찢었다. 친구라면 적어도 밖에서 만나고 싶지만, 녀석이 굳이 형의 안부를 물을 겸 이 곳으로 찾아왔다. 할 말이 별로 없다. 그 당당하던 지석도 곧 죽어 감싸고 보호하던 자기 형이다. 그런 지윤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자신도 최근에야 천천히 느꼈으니..그 이전에 자신이 퍼부은 지독한 모욕감과 수치감, 그리고 엄청난 일들은 딱히 변명할 꺼리도 안 된다. “그래도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 형 좀 잘 부탁해.” 지석은 이 곳이 어떤 가게인지 모르는 것 같다. 마치, 지윤이 처음 찾아왔을 때 그랬듯이, 그들이 사는 가난한 동네에서는 동네 슈퍼만 해도 가장 큰 가게다. 그리고 자신도 그 동네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에 산다. 이혼한 부모님 중 어느 누구도 그 집과 자신을 갖지 않겠다고 말해서 굳이 몇 년동안 혼자 남은 공간이다. “...우리 형은 네가 보기 좋은가봐. 나야 친구니깐, 너의 그 시커먼 속을 다 안다만..“ 지석이 맥주를 마시며 호탕하게 웃었다. 몇 십년의 시간 동안 유일하게 남은 친구가 이 녀석이다. 이상한 일이다. 자신은 인기인 아니었나? 왜 돌이켜 보니 남은 친구가 이 녀석 뿐인가. “너처럼 살고 싶어하는 녀석들이 우리 동네에도 꽤 있지. 우리 형..순수해서 아마 그걸 대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알지?“ “....................” “니가 그래도 꼬맹이 때부터 우리 형제들이랑 친하게 지내준 유일한 인간 아니야. 그 때도 행색은 초라했지만..난 우리 형이 항상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아무리 더러운 곳에 살아도 맑거든. 그지? 저러다가 결혼은 제대로 할까 걱정된다.“ 결혼이라.. 그래, 강지윤이 결혼하면 볼 만 하겠군.. 갑자기 속이 따끔거린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라고 생각하며 승훈은 담배를 빼물었다. 달칵- 오래된 지포 라이터를 꺼내 자신에게 불을 붙이는 지석이다. “아참..이 라이터 기억나냐? 17살 때, 니가 소년원에 끌려가니 뭐니..이랬을 때 말야. 그거 생각 안 나? 너 우리 형 놀리는 녀석 흠씬 패 놓고는 고발 당했잖아. 그 때 형이 니 생일이라고 넉달 동안 용돈 아껴서 산 라이터잖아, 이거. 니가 당체 무신경한 녀석이라서 대뜸 나한테 줘서 그렇지만 말야.“ “............!!!!!!!!!” “하긴 우리 형도 그거 보면서도 아무 말 안 했지만 ..” 그런 일이 있었나. 자신은 왜 스무 살 이전의 일들이 이렇게 기억이 나지 않을까. 사실은 그 시절로부터 너무 매몰차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아무 것도 그를 이해하고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지석과 지윤만이 인사라도 나누는 사이였다. 그 치열했던 십대 이후로 승훈은 생각을 깊게 하지 않았다. 생각이나 감정이 깊어진다 한들, 결과는 언제나 뻔했다. 아마, 그 때 지윤을 괴롭히던 녀석을 때린 것도 별로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였을 거다. 딱히 지윤이 불쌍하든지, 혹은 그와 친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그 동네에서 불량스럽게 건들거리는 상대방이 너무나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 불량스런 녀석이 괴롭히는게 지윤이 아니었더라도 승훈은 마찬가지로 거의 반 죽일 정도로 녀석을 팼을 것이다. 그런 걸 아직까지 기억하는 이 형제들도 대단하다. 강지윤. 설마 그런 저런 일들 때문에 나처럼 되고 싶다고 좋아하는 건 아닐테지. .그럼 정말 바보다. “...너같은 놈을 딱히 믿는 건 아니지만...” “................” “..하하..그래도 우리 친구잖아, 이 새꺄. 우리 형 좀 잘 부탁해, 알겠지?“ 승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내 지석은 별 표정 변화 없이 군대 휴가가 너무 짧다느니, 연예인은 많이 오냐느니 ..의미없는 농담만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몇 마디 말로 오해가 풀렸다. ‘잘 부탁해’ ..라고 지석이 말했다. 그건 그 긴 시간 동안 지석에게 처음으로 들어본 말이다. 강지석은 지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Ananomi 가 어떤 곳인지 똑똑히 알고 찾아온 것이다. 6. 니키와 그의 매니저는 원래부터 Anonami에서 유명 인물이었다. 단, 그 매니져가 니키를 떼어 놓고 이 곳을 찾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검은 양복을 입은 건방진 그 매니저가 오늘은 홀로 Anonami로 들어섰다. 로비에서 그는 전혀 망설임 없이 카운터를 향해 사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 자리에는 마침 신문을 읽고 있던 승훈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니키의 메인 매니저 윤 원엽이라고 합니다. 오늘 강지윤씨 예약이 되어 있을텐데요.” 순간,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승훈은 말도 안돼..라고 중얼거리듯 카운터의 사장과 곤혹스러운 듯 나타난 지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장은 최근에 다시 지윤의 예약건을 항상 자신에게 맡겼다. 그런데 오늘 니키의 매니저가 지윤을 예약했다는 건 전혀 몰랐던 일이다. 빈정대는 듯한 웃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지윤의 팔꿈치를 잡아 당기는 매니저를 보니 더욱 속에서 천불이 난다. 승훈은 다짜고짜 카운터로 고개를 숙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사장님. 강지윤...저 인간 예약은 제가 관리하겠다고 했잖아요.“ “.....니키와 녀석의 매니저라면 이 바닥을 주무르고도 남을 고가의 손님들이야, 임승훈.”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혹시나 그가 질 나쁜 손님이 아닐까..라고 몇 번이나 들락거리는 룸서비스 맨들을 잡았지만, 그들은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마주 보고 앉아서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이라고 전했다. 승훈은 자신을 이렇게 바짝 신경 마르게 하는 지윤에게도 화가 났지만, 매니저인 윤 원엽에게 가장 화가 났다.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이 세상에 강지윤 같은 인간이 믿을만한 사람은 몇 없다. 자신이 아무리 지윤보다 어려도 그 정도는 잘 안다. 승훈은 자신의 손님을 일부러 빨리 따돌리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방금 서비스 맨 중 하나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매니저가 나갔다고 알려온 것이다. 넓은 주차장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잔뜩 있었다. 그는 그 중에서 항상 니키가 타고 다니는 검은 승용차를 확인했다. 니키는 부자집 녀석이고 매니저도 비슷한 부류의 냄새가 난다. 주차장 앞에는 지윤도 있었다. 손님이 떠나기 때문에 배웅을 나온 것이겠지만, 승훈은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썼다. 몹시 빠른 걸음으로 차에 다가 섰을 때, 승용차는 시동을 걸고 창을 조금 내렸다. 그리고는 지윤을 향해 뭐라고 말해고, 지윤은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승훈은 그 말까지 듣지는 못했지만, 이미 기분이 바닥을 향했다. 그리고니는 떠나려는 차의 창문을 움켜쥐듯 막아섰다. 이런 식은 정말 실례다. 사장이 알면 거품을 물 일이다. 승훈 자신도 스스로에게 충분히 당황하고 있었다. “뭐지?” 건방진 매니저 원엽이 삐딱하게 웃으며 묻는다. 그 태도도 몹시 거슬렸다. 일부러 신경을 돋우듯, 상대방을 계속 아랫사람 취급한다. “강지윤 군을 만나시려면 먼저 저를 통해 예약하십쇼, 앞으로.” 그러자 매니저가 갑자기 피식 웃는다. 잘생기고 사내다운 표정이었다. “니가 무슨 권리로?” “..........!!!!!!!!” 지윤이 이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했음이 분명하지만, 승훈은 그 건방진 매니저의 반문에 더욱 기가 막혔다. 무슨 권리라니... 지윤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은 건 다 자신의 공이었단 말이다. “동네 친구의 권리로요.” 그럼에도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음에 너무나 화가 났다. 속이 할퀴는 기분이다. “재미있군, 승훈군.” 매니저는 마침내 크게 웃었다. 마치 마음껏 조롱당하는 기분이다. 스무 살 이후로 이런 기분 또한 처음이다. “왜 자네가 나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설 만한 권리가 있으니깐요.”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걱정 할 일 없을거야.” “.................” “...앞으로 Anonami에서 지윤군을 만날 일은 없을테니 말야. 적어도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안 만나. 나는 자네가 아니거든.” 갑자기 쿵- 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매니저는 매우 통쾌하게 웃으며 승훈이 매달려 있다는 것도 잊은 듯 차를 조금씩 앞으로 몬다. 어쩌면 크게 다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승훈군.. 자네가 이렇게 나설만한 사람이라면, 좀 더 잘 대해주라구.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기회를 노리는 녀석들이 많을테니 말야.” 그리고는 그가 조금 차를 세우더니,, 다시 유쾌하게 덧붙였다. 승훈은 자신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칠 뻔한 검은 차를 내려다 보며, 한번 격렬하게 발로 걷어찼다. 지윤이 재빨리 다가와 그런 그를 잡아 당겼다. “성질 좀 죽이고 살아. 젊은 녀석이...”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닙니다.” “하긴.. 자네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니키에게 알려주면 재미있어 할거야, 아마.“ 검은 승용차는 그 말과 함께 사라졌다. 남은 것은 마치 잡아먹을 듯, 지윤을 노려보는 자신 뿐이다. “저 새끼랑 무슨 이야기 했어?”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닌데 몇 시간 씩이나 룸에 붙어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바로 룸에서 노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승훈은 속에서 부글거리는 이 느낌, 바로 저 사내가 어떤 시선으로 지윤을 보고 있는지 뻔히 아는 이 기분에 머리 끝까지 혈압이 솟구쳤다. 지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그냥 화가 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기분을 전달하고 싶은데, 자신도 딱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뿐이다. 이것 또한 환장하겠다. “..........데뷔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중이었어.” 데뷔? 그 때서야 정신이 확 깬다. 그 때 니키도 같은 말을 했었다. 자신의 매니저는 사람을 갈고 상품으로 만드는데 천부적이라고. 그 리고 그런 감각으로 지윤을 찜한 것 같다고 말이다. .......화가 났다. 일개 호스트에서 최고가 되느니, 그게 훨씬 낫다는 걸 자신도 안다. 그런데도 화가 났다. 자신은 그에게 ‘연예게 데뷔’ 따위의 일들을 해 주지 못한다. 아니, 강지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니가 연예인을 해? 웃기지마, 강지윤” “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 “진짜 미치겠네. 그 녀석에게 시간을 준 게 어느 정도 협상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잖아!” “손님을 어떻게 거부해!” 마침내 지윤도 조금 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화가 났다기 보다는 승훈의 말도 안되는 트집 때문에 난감한 기색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은 왜 붉혀! “거부해, 앞으로.” “니가 하지 말라며...” “내가 하지 말라든 하라 그러든!!........” 승훈은 그 순간 숨을 조금 돌린다. 또 그 이상한 미소다. 뭔가 투둑- 하고 심장 끈이 부러질 듯한 그 웃음. 마치 화 난 자신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짓지만, 시선을 돌리며 피하려 하는 애타는 기분. 언제나 자신을 초조하게 만들고, 철없는 아이처럼 옭아매는...그 비밀스러움. 이럴 때의 그는 정말 막대할 수 없어진다. 아니, 딴 세상 사람 같아서, 자꾸 잡을 수 없게 희미해지는 기분이라서 속이 먹먹해진다. 그래서 화가나는 것다. 이런 표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형...” “...................” “.......앞으로 내 말에 신경쓰지 마.” “...............” “........내가 뭐라고 해도, 형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 “..................” “...형이 이제 Anonami에서 가장 잘 나가는 호스트니깐 말야. 이젠 내 말 들을 것도 없어.“ 이상하게 조용해진 자신의 음성 때문일까. 문득 그가 고개들 들었다. 묘한 색기를 띠는 목덜미가 시야에서 떠나며 자신의 선명한 시선을 드러낸다. 다시금 승훈의 난폭한 시선을 사로잡은 입술이 달싹이며 뭐라고 말을 꺼냈다. 낮은 목소리여서 귀를 기울여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믿을 사람이 너 밖에 없어서...............” 승훈은 그만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서, 난폭하게 지윤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퇴근해 버리자’ 라고. *********************** 그렇게 이상한 일로 서로 불편해 하며, 퇴근하던 길이었다. “괜히 이 시간에 들어가 어머니랑 지석이 깨우지 말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한번도 차로 데려다 준 적이 없다. 심지어는 길거리를 걸을 때도 같이 걷지 말라고 심하게 말했다. 그러나 승훈은 담배를 문 채, 다소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장우준이에게 당한 날 이후로 두 번째다. 몹시 놀란 눈으로 지윤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태워줄게.. 라고 말했을 때도 그는 역시 이런 눈동자였다. 한마디로 기분이 안 좋았다. 내가 그렇게 잘못 살았나..라는 게 요새 새록 새록 드는 생각이다. 빌어먹을..이라고 욕하며 승훈은 아파트 문을 열었다. “......나 갈아입을 옷도 없고.........” 그리고 불을 켜는 순간, 새벽에 부딪치던 그 야한 목덜미가 다시 눈에 드러왔다. 그는 마치 지금 자신이 몹시 더럽다는 듯이 굉장히 주저하며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승훈은 그저 말 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숨이 막혔다. 일생동안 들이마신 산소가 일제히 폐로 흘러드는 기분이다. 여전히 얼굴을 피한 채, 천천히 단추를 푸는 그 손놀림에 애가 탔다. 아무 일도 아닌데, 어떤 것도 없었는데, 그 욕망은 허벅지 사이를 슬금 슬금 기어올라 허리 아래를 지끈하게 울려댄다. 견딜 수가 없다.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얼굴을 보여주는 시간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라는 갑갑함을 견딜 수가 없다. 도대체 그가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는지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갑자기 확- 그대로 승훈은 그 손목을 잡아 당겼다. 무방비 상태로 피곤에 젖은 지윤이 이번에도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본다. 승훈은 순간적으로 그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이 광적인 답답함을 가시게 해줄래..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사람을 잘 믿고, 속을 줄도 속일 줄도, 그리고 자신을 방치할 수 있는지 화가 났다. ....사실은 그를 안고 싶어 미치겠는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승훈아.........” 이름을 부르는 순간, 짜릿하다. 승훈은 또다시 복잡한 마음이 된다. 그리고는 거친 손놀림으로 턱을 잡아 억지로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제발 얼굴 좀 보자, 얼굴 좀!.. “겪고도 몰라, 강지윤?” 그리고는 이상한 곳에 화풀이를 한다. 동공이 큰 눈동자가 확연히 떨리며 자신을 담고 있다. 그 커다래진 시선에 온통 자신만 담겨 있음이 확인되자, 그 때서야 조금 부드러워진다. 마음이 놓인 거다. 아이같은 기분에 스스로 울컥거릴 정도로 이 가파른 신경을 조절할 수가 없다. “호스트로 일하면서도 그걸 몰라, 형?” “...............?...” “...사람을 믿지 마. 특히 이런 눈동자를 가진 사내 녀석들 말야.” “....................” “여자도 믿지 마. 형에게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난 그녀들 말야.” 그리고 나도 믿지마..라고 들리지 않을 정도로 덧붙이며, 그는 격하게 지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감았다. 매끄러운 피부가 느껴진다. 날마다 잔인하다시피 아랫도리를 달구던 그 야한 꿈들. 딱 한번 맛본 뭉클한 체향과 조절하지 못할 흥분들. 그것들이 생생히 손가락에 걸린다. 지윤이 훅- 하고 숨을 들이마쉰다. 그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새침한 듯 젖어있고, 그러면서도 연일 계속되는 피곤을 이기지 못해 눈 아래가 보폼하게 부풀어 있다. 손가락으로 가장 연한 그 눈 아래 살걏을 한번 쓸어본다. 설명하지 못할 기대감으로 심장이 마구 오르내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강지윤 때문에 심장을 걱정했는지 스스로도 웃겼다. “.........내가 좋아?......” 이렇게 심한 짓을 해도...........?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아래가 와 닿았다. 이번에도 역시 어쩔 줄 몰라하며 시선을 내리깐다. 그 모습에 애가 탔다. 정말 미치게 만든다. 손에 잡힐 것 같았는데, 어느 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 조금 전의 표정이다. 자신을 담던 눈동자가 사라졌다. 승훈은 바싹 마른 침을 삼키며 열이 나기 시작하는 얼굴을 그의 머리카락에 묻는다. 여전히 좋은 향이 났다. 이제야 알겠다. 향수가 아니다. “.....강지윤..........” 이름을 부르자, 당혹감에 가득한 그가 난처한 듯 한숨 쉰다. 이 정도로 달아오른 사내라면 이제쯤은 눈치채야 한다. 정말 달아나야한다, 그는. 제발 제대로 도망가줬으면 좋겠다..이제 눈에 띄지 않고 걸리적 거리지 않고, 거슬리지 않고...자신의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몰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허겁지겁 그에게 입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그 때처럼, 항상 이런 식이다. 언제나 정신없이 탐하고 또 탐해도 뭔가 부족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쫓기는 느낌을 받는다. 그 아랫부분이 도톰한 입술. 살짝 관능적인 느낌을 주지만 깊은 미소를 가끔 만드는 이상한 힘의 입술. 어떻게 하면 송두리째 삼킬 수 있을까를 생각할 뿐이다. 정말 이상해졌다. 정신을 차리기엔 지금 너무 다급하다. 도장을 찍듯 꾹 내리 누르고 마구 빨아들이자, 답답해진 상대가 급하게 벗어나려 애썼다. “...그만.........” 그리고는 정말 온갖 힘을 다해서 벗어나고 싶은 듯, 자신의 몸을 밀어낸다. 힘껏 엉키던 혀를 빼내며, 그의 입가에 묻어나온 타액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닦아낸다. 무심결에 멍하니 자신을 언제나 인간 이하로 만든 입술을 바라보았다. “이젠.........” 지윤이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점덤 뒷걸음 친다. “..이젠 이런 거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할 수 있어...” “................-!!!!!!!!!!!!!!!!” 맙소사.......라고 승훈은 짧게 탄식했다. 정말 갖고 싶은 건데, 그는 오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기가 찬 까닭에, 승훈은 잠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천천히 열까지 세고 나서 숨을 몰아쉰다. 그는 정말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한 적이 드물었다. 겨우 입을 뗄 때 쯤에는 정말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그게 아니라..’라고 몇 번이나 아이를 가르치는 것같이 스스로에게 답답한 기분 때문이다. “..아냐, 지윤이형..” “.............” “..지금은 그냥 안고 싶은거야....” 그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런 말을 하다니..자신은 정말 최악의 인간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너무나 뻐근했다. 그렇다, 최악. 그래서 승훈은 잠시 놀란 듯한 지윤의 어깨를 확- 끌어 당겼다. 강하게 안고, 더욱 강하게 안고,더 이상 틈도 없고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끌어당긴다. 최악의 인간이 만나고 싶은 최상의 관계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여전히 수치심을 느끼는 듯한, 매끄러운 몸에 입술을 댄다. 닿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쫓기는 기분을 왜 매번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승훈은 지윤의 몸을 천천히 만지며 그 짜릿한 전율을 만끽할 뿐이다. “...........불 좀............” 불을 꺼달라고 가느다랗게 말하지만, 승훈은 짓궂게 미소지으며 턱부터 빨아 들이듯 입을 맞춘다. 부드러운 살이 닿아 흠칫 놀라지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반응이었다. 이 견딜 수 없는 순수한 반응이 결국 악랄한 마음마저 미안하게 만들었다. “...제발............불 좀........” “.........뭐?” 안들리는 척. 승훈은 선이 미끈하고 날렵하게 잘 빠진 그의 쇄골을 혀로 핥으며 여유를 찾기 위해 애썼다. 여전히 이 몸은 부들거리지만, 결코 질리지 않는 상상이었다. 그의 양 다리를 벌려 그 사이에 몸을 놓으며, 한 쪽 다리를 하기 쉽도록 자신의 허리에 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아직 두렵고 부끄럽다는 걸 겨우 이해했다. 천천히 벗은 상체에서 고개를 내리며 단단한 복부, 그리고 양껏 벌려진 다리 사이를 애무했다. 힘껏 삽입되는 순간의 이 질끈한 죄임도 여전하다. 훅- 하고 그가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그것은 애처로울 정도로 작은 흐느낌도 동반한다. “.............으응.........”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에 입을 맞춘다. 힘껏 물어 뜯듯, 그 미려한 목선을 빨아들이자, 둥그런 자국들이 군데 군데 남기 시작했다. 불을 꺼달라는 가는 애원이 지속되었지만, 승훈은 환한 불 속에서 그 흔적들을 천천히 관찰 중이었다. “.........아앗...앗!.....” 몸이 연결된 채 움직이기 시작하자, 붉은 입술이 안타까운 신음을 토한다. 승훈은 ‘뭐야, 아직 익숙하지 않잖아..’라고 놀리듯이 작게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 쪽에서도 여유란 찾을 수 없었다. 땀에 젖은 얼굴을 흔드는 요동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승훈은 언제나 처럼 갈증나는 기분으로 정신없이 그 얼굴에 입술을 묻는다.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을 찾아내어 피하려는 얼굴을 꽉 쥐고 거칠게 입 맞춘다. 혀로 치열을 쓰다듬고 두드리듯이 입 안을 자극할 때마다, 애널에서 점막이 수축했다. 그의 입구가 함께 자극을 받는 듯 수축하고 이완했다. 그 때마다 생생하게 삽입된 승훈의 것에도 그 느낌이 전해져 온다. 그것이 몹시 좋았다. 물기가 질퍽이고 공기가 살짝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계속된다. “........아읏...앗!..아앗!!....”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내부가 더욱 달끈거리며 자신을 에워쌌다. 그 안에 있는 것이다..이 사람의 안에서 미친듯이 사정하고 싶다....라는 욕구로 머리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잔뜩 확장된 그의 입구에 자신을 힘껏 찔러 넣었다가 다시 조금 물러섰다. 계속 되는 동작에 그의 몸 안에 숨어 있는 성감대를 찾아낸 것이다. 그 쾌감이 너무나 강렬하여 거의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멍한 얼굴로 그가 전율했다. 맞닿은 허리에서 떨림이 일었다. 수치심 때문에 입술을 꽉 깨물고 있지만, 그의 것이 촉촉히 젖어 승훈의 손아래에서 움찔거린다. 힘껏 쥐고 그 아래 부분에서 연결된 곳까지 섬세하게 어루만지자 결국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힛-!!!!!.................” 울음이 섞인 샛된 비명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머리가 돌 정도로 색스러운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미친듯이 자신을 요구하 는 내부의 움직임도 더욱 음란하게 움직인다. 못 참겠다는 듯, 지윤이 손을 들어 자신의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물론 그렇게 피할 수록 더욱 심술궂어 지는 승훈이었다. 그는 일부러 지윤이 느끼는 부분의 주변만 교묘하게 찔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제발.............” 한숨처럼, 흐느끼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가 갈라진다. 승훈은 힘껏 몸을 다시 움직이며 이 절정이 두려운 듯 달아나려는 그의 어깨를 꽉 잡아 당겼다. “............아앗!!..........” 그 상태로 원하는 부분을 마음껏 눌러준다. 그리고 앞 쪽의 손도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자 마침내 그가 손을 얼굴에서 치우며 자신 목에 양팔을 뻗는다. 아직은 주저하는 듯한 그 양 손을 자신의 몸에 걸기 쉽게 잡아당기며 승훈은 만족스럽게 상체를 그 에게 정확히 맞물렸다. 드디어 닿았다. 온 몸이 틈도 없이 맞닿아서 견딜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원하는대로 승훈의 탄탄한 복부에 페니스를 쓸어가게 만들어주자, 맞닿은 그의 목에서 울음같은 작은 탄성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얼굴..을 보여 달라구....” “................앗!..아앗!...으응.......” 그 전율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흠뻑 젖은 채, 당황하면서도 쾌감에 어쩔 줄 모르는 그 반응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렇게까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 미처 자신도 깨닫지 못했다. 천천히 닿았다가 떨어지는 반복 운동을 계속하자, 마침내 비명이 들려온다. 필사적으로 참으려는 애닮은 순수조차도 너무나 아름다워 마침내 승훈은 포기했다. 절정으로 눈 앞이 흐려지고, 머리 속이 쿵쿵 울리는 이 격한 쾌감 속에서 그는 속삭였다. 자신의 목소리도 듣기 힘들 정도로 바싹 갈라진 채 그의 할딱이는 얼굴 위로 키스하며 입을 연다. “..그렇게 소리를 참고 싶으면.. ..내 어깨를 깨물어..“ ..마침내 눈물과 쾌감으로 젖은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의 몸에 견딜 수 없어 얼굴을 묻자, 어깨 쪽에서 짜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승훈은 이렇게 머리 속이 온통 심장인 듯 두근거리는 관계는 처음이었다. 어깨의 통증마저 바꿀 수 없는 쾌감이었다. 덕분에 모든 곳이 흠뻑 젖어 버렸다. ********************** 문득 눈을 떴을 때, 한 낮이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남아 있어....” 잠이 덜 깬 눈으로 승훈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일찍 퇴근해 버렸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너무나 다급하게 지윤의 손을 끌어 차에 태웠다. 잔뜩 부시시한 머리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아침 9시다. 4시에 출근하니, 아직은 한참 남았다. “.........널 믿어.” 다시 스르륵...피곤에 젖은 눈을 감았을 때, 누군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바로 그다. 강지윤. 얼마전까지 그렇게 내쳐 버리고 싶어 짜증이 났던 그 존재. 그리고 어제밤에는 뭔가에 홀린 듯 그렇게나 닿고 싶어 미칠 것 같았던 바로 그 존재. 조금 전의 상황을 얼핏 보니, 자신은 그의 무릎에 머리를 놓고 자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앉은 그대로였는데,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생각해보니, 어제 밤에 잠들기 전에 온 몸이 벌겋게 달아 올라 부끄러움에 치를 떠는 그를 억지로 욕실로 밀어 넣었던 것 같다. 같이 섹스를 하고, 같이 잠들자.. ..도대체 그런 것을 원했던 상대가 몇이나 있었는지, 승훈은 그 많은 관계들 속에서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잠든 이 무릎이 편하다는 사실이다. 잠결에 일부러 손을 뻗어 미끈하게 잘 빠진 그의 다리를 더듬거렸다. 그것을 조용히 만류하듯, 그가 손을 치운다. 그래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조용한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도 편해서, 승훈은 저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져든다. 그의 몸이 저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다시 손을 뻗어 허리를 꽉 안은 채 잠들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 그는 그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그의 무릎은 여전히 자신이 벤 채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여전히 그에게 닿고 싶었다. 그 사실을 잠든 그를 내려다 보며 겨우 깨달았다. 이번에는 자신 쪽에서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한 줌 들었다가 가만히 내려 놓는다. 이대로 깨우지 않고 출근해야 겠다..라고 생각했다. 잠든 누군가를 본다는 게 이렇게 마음이 뻐근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7. 새로운 손님이라고 호출을 받았을 때, 마침 예약표가 비워 있었다. 승훈은 지윤을 찾는 손님에게 일일히 사과했다. 사장의 얄팍한 눈길도 무시한 채, 그는 모처럼 여유를 찾아 예전같이 느긋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그리고 밤 늦게 쯤, 누군가 예약이 비어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했다. 그는 별 생각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룸으로 들어섰다. 그때까지 그는 모든 감정의 종합 세트를 맛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하루. 그러나 뭔가 설명할 수 없게 뼈 아득히로 몰려오는 이상한 상실감, 웃기고 유치찬란한 죄책감. 또한 관자놀이가 두근거리는 미묘한 격정,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해주고 싶다는 정체모를 열정. 그는 그 많은 감정들을 적절히 끌어 안은 채 룸을 열었다. 이런 감정들이 이렇게나 많이 이기적인 자신에게 숨어 있었다니 정말 놀랄 노릇이다. “규철씨가 오늘은 선 예약이 있다고 해서요.” 그리고는 조금 멍해졌다. 앞을 쏘아보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몸이 노곤했다. 눈 앞에 누군가 앉아 있다. 바로 그녀. 계속해서 규철에게서 어떻게 빼돌릴까를 고민하던 바로 그녀, 원주연이다. “안녕하세요, 원 주연이라고 합니다. 우리 서로 얼굴은 익었죠?” 그녀가 맑게 웃었다. 압구정동의 명품 Anonami 안에서도 가장 명품 한주연. 그리고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명품 사내 임승훈. 둘은 서로를 그저 잠시 응시했다. 이건 뭐가 잘못된 걸까..라고 생각하며 승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잠시 당황한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주연이 살짝 미소지었다. “앉으세요, 승훈씨. 인사하고 싶었습니다.“ 규철이 무슨 생각으로 그녀의 예약을 양보한 것인가..라고 의심이 들 무렵, 승훈은 무의식중으로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 양주 뚜껑을 돌렸다. ****************************** 일급 호스트에 걸맞는 일급 손님. 언제나 원주연은 압구정동에서 그런 존재로 유명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그저 술 상대가 필요했을 뿐, 더 이상의 접대를 원하지는 않았다. 이제 나이 스물 여덟이라고 이야기 하며 그녀는 웃었다. 상당히 매너가 있고, 조용한 고객이다. 다른 이들과 가끔 동행하곤 했는데, 오늘은 그저 혼자 찾아왔다. 그녀는 딱히 규철이 자신과의 예약을 깨버린 것을 탓하거나, Anonami를 탓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녀를 입구까지 배웅하고 들어왔을 때, 긴 생머리의 여자 향수 냄새가 사라지기도 전에 지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출근하지 말라고 일부러 안 깨운 건데, 기어이 출근하는 그 오기에 감탄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갑자기 얼굴을 보지 못한 이 하루가 얼마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는지 말이다. 이렇게 벽을 마주한 듯한 막막한 답답함은 처음이다. 승훈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신 옆에서 카드를 체킹하는 규철에게 퍼부어댔다. “왜 그랬지?” “뭘 말야?” 원주연 말야..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연결해 준거야....라고 인상을 찌푸리며 승훈은 팔짱을 꼈다. 지윤에게도 사줬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메이커 ‘제냐’ 표 캐주얼 양복이다. 길고 잘 빠진 자신의 몸을 감싸는 이 자본의 천박한 기운은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유혹인 것이다. “김규철..너 말야.. 아직 우리의 내기가 다 끝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지윤이 일급 호스트가 된 것도, 내가 떠난 것도, 어느 쪽도 아닌데.. 왜 갑자기 주연과의 예약을 나에게로 미뤘지? 니가 그럴 녀석도 아닌데 말야.“ “뭐 괜찮아. 니가 이겼다고 생각해, 임승훈.” 별 다른 말없이 규철을 쓱- 출퇴근 기록계에 싸인을 하며 윤이 나는 바닥을 구둣발로 한번 찼다. 그 바람에 성질이 오른 승훈이 휙-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본다. “내가 이기다..니?” “..니가 이겼어, 임승훈. 거의 절반은.. 강지윤이 지난 달 Anonami 의 실적에서 1위가 됐어. 그리고 녀석이 연예계에서 데뷔 제의를 받았다는 소문 다 났어.“ “..연예계로 간다고 결정 난 거 아냐.” 다시 규철이 피식거린다. 그래, 생각났다. 그 매니저.. “가든 안 가든 그런 제의를 받는다는 거 자체가 엄청난 거야. 안 그래? 모두가 사실은 어떻게 하면 이 생활을 때려치울까 고민하잖아? 멋져 보이지, 겉 모습만은..“ “함부로 말하지 마.” 규철이 뭔가 약을 올리는 듯한 태도로 말했기 때문에 승훈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여전히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웃었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임승훈. 너도 사실은 여기를 떠나고 싶어하잖아?“ “.................” “..사실대로 말하자면, 니가 원주연을 노리는 이유가 그거잖아? 어떻게 하면 그녀를 잘 휘둘러서 가게라도 하나 내 볼까..하는 속셈 말야.“ “입 닥쳐, 김규철.” 둘은 이 곳이 룸이 아니라, 공개된 로비라는 것도 잊은 듯 서로를 진하게 노려봤다. 규철 쪽에서는 손님과 미래를 모두 빼앗긴다 는 기분 나쁜 마음이 존재했고, 승훈 쪽에서는 지윤과 자기 자신등등의 복잡한 마음이 단단히 한 몫했다. 규철은 물러서지 않고 조금 언성을 높였다. “아우디는 아직 멀었어, 임승훈. 만약, 지윤이가 연예계로 떠나 버리면, 우리 내기는 내가 반쯤은 이긴거다. 그렇지?“ “.........안 떠나. 그 사람은 내 말대로 할 거야.” “웃기는 소리. 그건 니 바램이고. 나같아도 당장 그 매니저랑 손 잡을 거다. 아무튼, 넌 지금까지는 내기의 반만 이긴거야. 원주연도 그걸 인정하는 의미여서 너에게 준 거고..“ 갑자기 모든 것이 허탈해졌다. 자신이 지금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다. 아니, 솔직히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런 식의 이해타산적인 모든 관계를 원했던 게 아니다. 주연의 호출을 받기 전에도 복잡했던 머리가 이제 조금 개운해진다. 언성을 높였기 때문에 조금 나아졌는지도 모른다. 지금 원하는 건 한 가지 밖에 없다. 지윤이 보고 싶다. “다음에 이야기 하자, 김규철.” “왜? 지금 이야기 하면, 네 녀석의 그 비열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탄로날까봐? 뭐, 어때? 어차피 강지윤을 빼고는 모두가 알고 있다구.. 니가 내기 때문에 그 녀석을 호스트로 만들고, 같이 잤다는 거 말야. 오늘도 강지윤 목에 키스 마크 잔뜩 만들어 출근시켰지? 너같은 인간이라면, 그건 분명히 우리한테 보여주려는 목적.....“ 그리고 퍽- 승훈은 이성을 잃고 주먹을 뻗었다. 날카로운 주먹이 녀석의 턱을 세게 침과 동시에 가뜩이나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놀라며 뛰어 들었다. 규철은 씩씩거리며 잘생긴 얼굴을 찌푸린다. 역시나 분이 풀리지 않은 승훈이 규철의 멱살을 잡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규철을 더 때리지는 못했다. “............................” 지윤 때문이었다. 애당초 룸 쪽에서 등을 돌린 채, 주의하지 않고 규철을 상대한 것이 잘못이다. 아까 주방 쪽으로 들어갔으니 지윤이 곁에 없으리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다. 이들이 모두 그 ‘내기’에 대해 까맣게 잊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때 이 싸움의 원인이 된 지윤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거구나......” 역시 왜 그랬는지 모른다. 승훈은 규철의 멱살을 재빨리 놓아버리고 지윤에게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보건, 보지 않건 신경도 안 쓰였다. 그 하얗게 질린 얼굴,..평상시에는 눈도 잘 못 마주치는 그 시선..그런 것들이 정확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고, 사람들은 당황했다. 누군가 지윤을 데리고 들어가려 했지만, 그가 조금 강하게 그 손을 뿌리쳤다.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니었고, 웃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의 살짝 찌푸린 얼굴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쿵- 하고 승훈의 심장이 멈췄지만, 그는 당혹스러운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훔쳤다. 그리고는 몇 초 이상 흘러갔을 때, 조용히 눈을 들어 승훈을 쳐다보았다. “.......내기에 이기면 뭘 갖는 거였어?” “...................” “...원주연이라는 그 여자랑.. ...아우디?..방금 규철씨가 이야기한 그거?.. ..참..아우디가 뭔지도 모르지,..나는...“ 아아...뭔가 그가 크게 화를 내거나, 혹은 소리를 지르거나, 또는 자신을 팼더라면 속이 더 시원할 뻔 했다. 그런데 그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마치, 승훈의 죄책감과 그 이유모를 질끈거림- 이번에는 그것이 너무 심해서 침을 삼키고 숨을 쉴 때마다, 찌잉- 하고 갈비뼈를 힘껏 밀어내는 듯한 그 욱씬함... 마치 그런 것들 마저 이해하고 있다는 듯 그는 조용히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정도의 목소리는 되었다. “.........그 여자 갖고 싶었어?” “............” “........아우디라는 승용차 많이...... 비싸..?..... 너도...못 사?.. ...나도 못 사주겠네...그럼....” 그리고는 그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한심한 듯, 그가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잠시 웃었다. 미소를 지었는데, 그 순간에도 승훈은 속 이 욱씬거리는 바람에 잠시 상체를 가눌 수도 없었다. 마치, 중세의 기사가 긴 창으로 푹- 찌르듯, 그 강렬한 아픔은 희석되지 못했다. 겨우 한 걸음 다가서자, 흠칫- 언제나의 버릇처럼 그가 뒷걸음쳤다. 다만, 이전과 같이 어쩔 줄 모르며 취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승훈이 아무리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방금 것은 정말 확연한 지윤의 거부였다. ‘가까이오지마 ’라고 말하는 단호함이다. 사람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사장이 나왔다. 지윤이 그 쪽을 잠시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Anonami 의 문을 잡는다. 승훈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지윤은 세번째로 자신의 눈 앞에서 이 문을 닫을 것이고,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 15초 정도 망설이는 듯한 뒷모습이 조금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울거나 소리지르거나 여전히 자신을 흠씻 패 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만이 지끈하게 승훈을 괴롭혔다. 그 때 쯤에 지윤이 말했다. “....난..........예전부터 니가 좋았어...” “......................형..” “니가 정말..좋았어. 나에겐 의미 있는 너의 어떤 행동이.. 너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어...“ “.....................” “...나에게 잘 대해 줘서 고마워...모두들...” “..형!.............” 너무 쥐어짜듯이 불러서 승훈은 그 순간 목이 아팠다. 얼굴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등을 돌린 그 모습 때문에 숨이 막힌다. 닿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어제 밤이 떠올랐다. 자신과 같은 인간 이하를 사랑해준다는 게 어떤 건지 오늘 낮에 처음 알았다. 그가 손을 내밀어 겨우 자신을 안았을 때의 그 뭉클한 관계는 성적인 것 이상이었다. 그를 놓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자, 내기같은 것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를 거슬려 했는지 미치도록 후회했다. 자신이 한풀 꾸며놓은 강지윤보다 이전의 강지윤을 더 사랑했다. 그는 그 가난한 동네에서 유일하게 맞고 다닐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가난한 동네에서 유일하게 한 여름에 자신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던 가장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소년원에 갔다오고, 부모님이 이혼한 사이,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아는 체 해 주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거리를 걸을 때, 뒤 쳐져서 오라고 말했다. 같이 걷고 싶다는 이 강렬한 욕망은, 결코 자신의 신분이 높아지더라도 해 줄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떠나지 않기를 바랬다. 정말 그렇게 원했다. 뭐라도 좋으니, 그가 떠나지 않기를 바랬다. 이렇게 울고 싶을 만큼 아픈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자신은 인간 이하라고, 이기적이고 비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항상 맞았다. 자신이 한 짓을 아무리 후회해도 이 사람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 지금 떠날 거라 는 찌르는 듯한 아픔은 가셔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와 닿고 싶었다. 다른 누구보다 그를 원했다. 항상.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하필이면, 지금. 하필이면, 이때. “......있잖아..”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빙글- 몸을 돌렸다. 승훈은 자신이 얼마나 멍청할 정도로 아프게 그를 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손 댈 수도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신을 억눌렀다. 그는 상처 입었다. 그리고 자신이 상처 입혔다. 자신은 이 사람이 인생에서 겪은 어떤 악랄한 것 보다 더한 상처를 너무나 쉽게 선택했다. 그러나 그가 방금 몸을 돌려 다시 자신을 쳐 다보았다. 너무나 절박해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승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말 해 줄 게 있어.” “................지윤이 형...” “...널 언제나 믿을 만한 인간이라고...생각했어.....” “........형!!!....” 엉망이 될 정도로 울컥함이 밀려 나왔다. 이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믿었다. 바로 지금처럼 처음 Anonami 에 나타났을 때도 말이다. 그리고 그는 조금 더 슬퍼 보였다. 지윤이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눈을 깜박거렸는데, 순식간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보기 흉하게 울지도, 혹은 그 이상 흐느끼지도 않았다. 마치 언젠가 그 화장실 바닥에서 보여줬던 그 사랑스러움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소리없이 울었다. 그 자신도 울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뻔했다. “나에게 옷도 사주고...친절하게 해줘서 고..마워. 난 믿는다는 말 한마디만 했는데.. ...넌 그 모든 걸 다 해줬어..” “.................” “...이 일을 한번쯤은 하게 해 줘서 고마워. ..나 참 바보 같았다는 거 ..잘 알아.. 뭐든지 잘 하지 못해서 너를 화나게도 만들었고..“ “.........아냐...” “...미안해. 잘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안..됐어. 참 바보같아..나는..나도 아는데...“ “..아냐....” “...니가 그런 내기 한 것도 ...이해해. 넌 아우디도 가지고 싶고, 그 여자도...어울리니깐 갖고 싶었을 거야.. ....난 그 중에..하나도 해 주질 ...못해.. 너에게 짐만 된다는 거...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아냐!.......” “아우디가 뭔지도 모르고.. ...아르마니..니...롤렉스니..제냐니... ..난 그런 거 몰랐어..미안해.. 난 다만 니가.. 뭘 입고 있든, 뭘 걸치고 있든 한결같은 사람으로만 보였어. 니가 입은 옷같은 건...내겐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니가 입는 옷들보다 너 자체가 항상 더 멋져보였어....나는..“ “.............아냐..그런 게...” “...난...노력했는데도 .. 여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깜박했어... ..니가 진작에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눈치를 줬겠지만..내가 미련해서 미처 몰랐어.. ..미안해....“ 하느님...이라고 작게 말하며 승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슴 쪽 통증이 너무 심해서 그는 지윤을 말릴 수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말도 붙일 수 없었다. 자신이 삼키고 싶던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짝 웃고 있었는데, 언젠가 가슴을 툭-하고 한대 친 것 같던 그 미소였다. 아주 먼 곳의 사람처럼 그가 승훈을 향해 웃었다. 미소지을 때마다 습관처럼 가늘어지는 그의 아름다운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끄러웠지..?...” “.........-!!!!!!!!!!!!!” “...................미안..해.. 부끄럽게 할 생각은 전혀....없었어... 날 귀찮아하게 만들 생각도 ... ...전혀 없었어..“ “.............강지윤!!!...” “나 때문에 부끄러웠던 것.. ....정말.. ..............미안해...” 그리고 문이 닫혔다. 한순간 그 곳에 존재했어나 싶게 갸름하고 눈물 젖었던 아름다운 얼굴이 사라졌다. 목 너머로 넘어오는 엄청난 통증 때문에 승훈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속에서는 수천가지 비명이 갑자기 동시에 튀어나왔다. 그는 자신이 부끄러운 인간이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아픈 말은 생전 들어보지 못했다. 8. 규철은 상처난 턱에 반창고를 발랐다. 승훈에게 맞은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건만 아직도 상처가 가시지 않는다. 그 날 이후로 임승훈은 인간도 아니었다. 그러니깐, 규철이 알던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규철이 Anonami 에 출근해서 예약부를 꺼내드는 순간, 승훈이 나타났다. 어딘가 조금 살이 빠진 모습이 그 일주일 동안 얼마나 술을 퍼 마셨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은근히 녀석이 측은했다. 처음부터 이 내기는 자신이 부추긴 것이다. 사실 이렇게 되기를 바랬지만 말이다. 그가 조금은 정신 차려주길 바랬다. 호스트 생활은 길어야 10년이다. 승훈처럼 20살에 시작했어도 30살이 되면 내리막길에 접어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규철의 나이 이제 스물 다섯이다. 그는 승훈이 겪을 만한 일은 벌써 앞서서 겪었다. 그에게는 승훈의 이기심이 철없는 오만함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미끼를 던졌는데, 녀석은 역시나 그 성격답게 걸려들었다. 하필이면 왜 지윤이었는지 Ananomi 사람들은 다 안다. 꼼꼼히 흩어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인지, 그리고 그런 지윤이 비록 해 다니는 건 압구정에 걸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마나 순수한지 죄다 알고 있었다. 바로 임승훈만 빼면 말이다. 아주 예전에 지윤이 승훈의 룸 앞에 서 있을 때마다 마음에 걸렸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승훈이 다른 사람과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면서도 굳이 그 방 앞에 서 있는 그가 안타까웠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리고 나서 규철은 그가 점점 더 대단해 보였다. 아무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제서야 지윤이 허름한 잠바를 입고 Ananomi에 나타났을 때를 규철은 떠올렸다. 지윤은 정말로 승훈을 믿었던 것이다. 자신의 꼴이 어떻든, 승훈이 자신을 돌봐주리라는 걸, 혹은 취직을 시켜주리라는 걸..믿었던 것이다. 그가 왜 대단해 보였는지 알았다. 그만한 믿음은 쉽게 가져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결국, 임승훈도 그런 지윤에게 휘말릴 것이라는 걸 규철은 알았다. 왜냐하면, 훨씬 전에 바로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놓쳤다. “..........형.” 승훈이 오랜만에, 정말 너무나 오랜만에 자신을 형이라고 불렀다. 규철이 응시하자, 녀석이 피곤 가득한 안색으로 로비 쇼파에 털썩 주저 앉는다. 그리고 상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어 깍지를 낀 채 진지하게 말했다. “...찾아 갈 수가 없어..” “...............” “...난 용기가 없어...” “.................” “......난............” 너무나 최악이야..라고 승훈이 침을 잠시 삼킨 채 천천히 말했다. 자신이 너무 밑바닥같고 쓰레기 같고, 최악으로 느껴져서 찾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랑이 가끔은 거울과 같아서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비춰준다는 걸 나이 스물 둘의 일급 호스트 임승훈이 겨우 알게 된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인정해야 할 게 너무나 많아지는 거다. 그것이 아무리 추악한 내면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랑이는 게 가끔 그렇다. 승훈이 담배를 꺼내더니 쓰게 웃으며 불을 붙인다. 엄연히 말해서 룸이 아닌 로비에서는 금연인데 이 녀석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다. “..미칠 것 같아...” “......미쳐, 그럼.” “...얼굴이라도 확인했으면 좋겠어............” “........차라리 미쳐라, 새꺄......” 그 끔찍한 고통을 천천히 기억해 내며, 규철은 승훈의 어깨를 툭- 하고 한 대 건드린다. ************************ 비가 내렸다. 지윤은 공사장에서 새로운 일꺼리를 찾았다. 용역업체에 근무하는 어머니가 이번에는 도와주었다. 그런 부탁까지 하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또 다시 집에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은 건 싫었다. 비가 내렸기 때문에 공사장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 일당은 깎이지만, 괜찮았다. 사실은 일주일 동안 온 몸이 너무 뻐근해 미칠 것 같았던 것이다. 호스트로 지낼 때보다 마음만은 물론 편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더 슬펐다. 지윤은 입술을 깨물고 우산을 펴 들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밤 늦게 돌아오실 테고, 아직 오후 3시도 되지 않았다.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고 김치 찌게를 끓일 생각이었다. 비가 얼마나 몰아치는지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하긴 대부분은 출근하거나 등교할 시간이다. 그리고 가난한 동네의 계단을 자꾸만 오르내리는 자신과 같은 사람은 이 동네에 남아 있는 토박이 들이다.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도 점점 늘었다. 승훈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집이 철거 대상에 들어간다. 철거반에서 매일 같이 동네를 들락거렸다. 자신과 어머니는 지석이 제대하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하긴..지금은 계단조차도 버겁다. 어떤 날에는 집에까지 올라야 하는 이 계단이 너무 길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가끔 계단에 앉아 쉬곤 했다. 이 동네 하나 밖에 없는 슈퍼는 계단의 가장 아랫쪽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슈퍼에 들렸다가 계단을 오르는 길에 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가 이 길에 앉은 자신을 향해 뭔가를 내밀었다. 지윤은 한 손에는 우산을,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는 슈퍼 봉지를 꽉 쥐었다. 뭔가를 필사적으로 기억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지금 기억하면 안돼..라고 스스로를 향해 골백번도 되새겼다. 기억해 내면 끝이다. 무너질 거다. 무너지면 안되는데....지석과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곧 철거에 들어갈 집을 생각해서라도 자신은 언제나 일어나 힘을 내야 하는데.. 그래서 결국은 계단의 중간에서 잠시 멈춰섰다. 계단에 앉지는 않았지만, 멈춰서는 정도까지는 괜찮았다. 한참 오르다 보면 아래를 내려다 보는 이 기분이라는 게 있어서 정 든 계단이었다. 항상 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는 자신과 지석을 놀리곤 했었다. 아무도 어릴 때부터 같이 놀아주지 않았고,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말했다. ‘저 동네 애들과 놀지마’ 라고. 그 중에서도 더욱 가난했던 자신은 더욱 더 따돌림을 받았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겨우 좋아졌다. 승훈이 사준 옷을 입고 슈퍼에 가끔 들리면 사람들이 전부 말했다. ‘우와~ 강지윤, 취직했나 보네. 요새 윤이 나.’ 라고.. 바로 그 우러러 보는 사람들을 갖고 싶어서 승훈은 그 여자와 차를 원했는지 모른다. 그럴 거다, 아마. 모두가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싶어한다는 걸 자신도 잘 안다. 지윤은 멈추던 걸음을 옮기며 다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벌써 몇 년 동안 입고 있는 아저씨 잠바를 다시 입었다. 가짜 메이커라고 승훈이 말하며 비웃었다. 괜찮았다. 누가 만들었는지 따위는 그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비록 승훈에게는 그게 중요했겠지만 말이다. 승훈이 사준 모든 것들은 그날 새벽에 고스라니 아파트 입구에 갖다 놓았다. 그것들을 갖고 있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자신 역시 승훈처럼 생각했었다. 호스트 이든 뭐이든..‘일류’가 된다는 건 멋진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가 그런 속물적인 내기를 했다는 걸 탓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역시 조금 더 많이 슬프다. 사실은 아주 많이 .. 견딜 수 없이 .. 왜 그를 부끄럽게 했을까..라고 이후에도 종종 생각해보았다. 자신을 그렇게 부끄럽게 여겼다면, 진작 알려줬으면 좋았을텐데.. 괜히 Anonami 에 취직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그를 힘들게 했다. 지윤은 다시 비오는 계단에 한 걸음 내딛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집 까지는 이제 몇 발자국 안 남았다. 계단을 다 오른 것이다. 숨이 차서 쌕쌕 거려 본다. 혹시나 어릿한 고통 때문에 발을 잘못 놓을까봐 열심히 아래만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누군가 낯선 이의 발이 집 앞에 보였다. “.....................!.........” 하마터면 봉지를 놓칠 뻔 했다. 가까스로 손을 꽉 쥐자, 그 낯선 발이 천천이 움직였다. 그는 슬레이트 지붕에 겨우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잠시 딴 세계 사람처럼 멀게 느껴졌다. “...니 꺼.....다 돌려줬는데...............” 지윤은 우산을 꽉 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발 끝부터 저릿하게 떨려온다. 그가 집 앞에서 비켜줬으면 좋겠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자신의 집을 찾아온 적이 없다. 그가 비켜줘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윤에게는 아직도 그가 여기 있다는 게 믿을 수 없다. 보통 때라면 출근하기 위해 이 시간에 나서야 하는 그다. 임승훈 말이다. “...돌려 받으려고 온 게 아냐.” 승훈 역시 한참 있다가 말했다. 뭔가 바뀐 것 같아 한참을 찬찬히 들여다 본다. 비로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두근거려서 아팠다. 그가 어서 떠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집 안으로 들어갈텐데 말이다. “.......형...” “.......................”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정말 어쩔 줄을 모르는 마음이 들어 항상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놓고도 뻔뻔스럽게 그에게 가서 일자리를 달라고 말했다. 자신과 같은 별볼 일 없는 인간의 몰골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지금도 속이 따끔거리고 콧날이 시큰거린다. 자신은 몰랐다. 행색이 그렇다고 남들이 자신을 손가락질 한다고 생각도 못했다. 그러니 그런 취급을 받아도 싸다. 언제나 바보같다. 뒷걸음치는 자신을 향해 그가 발걸음을 옮긴다. 뒤 쪽의 계단, 앞 쪽의 그를 번갈아 바라보며 지윤은 혼란에 빠졌다. 그런 자신 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강지윤... ......너에게 팔렸잖아, 나는..“ “............-!!!!!” “....지윤이..........형....-!!” 그가 처마 밑에서 몸을 내밀어 천천히 다가오자, 그만 견딜 수 없어졌다. 지윤은 우산을 팽게치고 반대 방향으로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계단, 그 높고 미끄러운 계단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도망가야겠다..라고만 생각했다. 그 때문에 너무 아파서 이젠 싫다. 아파서..아프고 힘들어서, 미안하고 부끄럽고 자신이 미련하고 슬프다. 사실은 정말 견디기 힘들게 슬프다. “.....강지윤!!!!!!!......” 휘청- 언젠가 Anonami 의 계단에서도 그가 이런 식으로 잡아 준 적이 있다. 자기 몸도 잘 간수 못할 정도로 바보 같은 자신을 이렇게 잡았다. 든든하고 햇빛 냄새 나는 팔뚝. 비싼 양복의 결 좋은 청결한 향이 묻어나는 그 팔뚝.. 뒤에서 강렬하게 끌어 안아 한치의 틈도 주지 않던 그 팔뚝.. “................돌아가....” 그 높은 계단에서 떨어질 뻔 한 자신을 이번에도 그가 잡았다. 주저 앉은 채, 지윤은 둥그렇게 몸을 말았다. 뒤에서 그 때처럼 강렬하게 끌어 당겼지만, 마음이 너무 힘들 것 같아 애써 고개를 돌린다. 앞쪽으로만 푹-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에게 표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바보같은 모습만 늘 보여주는 게 너무나 미안하다. “.....형...” “....승훈아............비 와...” “...지윤이 형...” “..집에 가라..” 비 맞잖아...라고 말하면서 지윤은 계속 떨려왔다. 그가 이렇게 가까이 몸을 붙여오면 항상 이렇다. 그는 세련되고 얼마든지 이런 관계를 겪어왔을텐데..매번 이런 모습 밖에 보일 수 없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바보같은 강지윤..매번 이럴 때마다 울고 싶다 . 가볍게 몸을 떠는 것은 어쩌면 비 때문인지도 모른다. 뒤에서 끌어아는 그가 가볍게 한숨을 쉰다. 비 속으로 그 뜨거운 숨결이 귓볼에 닿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손이 앞쪽으로 쑥- 뻗어 온다. 턱을 잡아 자신 쪽으로 억지로 돌리는 기분에 거세게 고개를 흔든다. 그러나 그 손길은 매번 그렇듯 또한 거침이 없다. “.....내가 최악이었어.” 억지로 그렇게 고개를 돌려세운 채, 승훈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지윤은 여전히 눈길을 피한 채 멍하니 빗줄기만 쏘아보았다. 견딜 수 없을 것같다. 그러나 다시 무겁게 한숨쉬며 그가 중얼거렸다. “나 좀 봐주면 안 돼?................... 나.. ..겨우 찾아왔는데...“ “.............-!!!..........” “...나 좀 소독해줘.” 찾아왔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찌를 듯 누르는 바람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바람에 딱 정확하게 눈동자가 마주친다 . 뭔가 변한 것 같은 승훈이다. 눈동자도 잘생기고 수려한 외모도..그 모든 것도 여전한데, 무척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잡은 팔도 변해 있다. 그는 자신에게 마구 윽박지르며 입혀대던 그 양복을, 그 셔츠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아주 오래전에 산 듯한 스웨터를 그리고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상하다. 출근도 안 하고 그는 뭐하는걸까. “난..항상 나에게 말하고 형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지..” “.................” “...자신의 값을 매기게 만들라구.. 손님과 고객들에게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는 하나의 상품이 되라고 말야. 기억하지?..“ “.............” 아주 희미하게 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너무 많이 와서 그가 말할 때마다 입김이 연기처럼 와 닿았다. 그리고 추웠던 몸이 맞 붙은 곳에서 조금 온기를 피운다. 승훈의 눈길도 변해 있었다. 언제나 무섭고 날카롭던 그 눈초리가 조금 미묘하게 부드러워져 있다. 가끔 이런 눈길로 그가 니키를 보는 것을 아주 예전에 알고 있었다. 원주연이라는 그 여자의 옆 모습을 이런 눈길로 힐끔거리던 걸 자신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자 정말 어쩔 수 없어졌다. 그는 마치 지금 곧 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윤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그 때 그가 말했다. “...나는 이년 동안,... 내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는 일만 생각해 왔어. 내 가격 말야..“ “...............” “..알아. 나는 저질이야. 최악이야. 이기적이고 나 자신만 생각해. 어떻게든 가장 비싼 값에 팔리고 싶다고 생각해왔어. ...하지만, 그래서.. 형이... ..강지윤이 필요해.... 생각해 보니, 형 만큼 날 비싸게 사 준 사람은 없었어.“ “.........-!!!.............” 두근 두근 거린다. 그가 뭔가 더 말할 듯 입을 달싹거린다. 빗방울 때문에 그의 입술도 붉게 달아올랐다. “..나 좀 소독해 줘, 강지윤...” “.................” “....나 Anonami 그만 뒀거든.” “...........!!!!!!!!!!!!” “옷도 차도 다 팔았어. 가진 것도 없어. ...내 값어치는 이제 .... ....형이 매겨줘야 해.“ 그는 여전히 울고 싶은 듯,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지윤은 그런 그의 표정보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비가 오기 때문이다. “..내 가격은 강지윤이 이미 다 지불했어. 형은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을 때도...“ “.................” 빗 소리가 타닥거리는 발걸음 같다. 기다리던 사람의 발걸음..바로 그것. “...나 자신도 나를 믿지 않을 때도, 나를 믿어줬어.. ..난 몰랐어.. ..그게 가장 내 가치를 높여줬다는 걸 말야..“ “...........승훈아...” “...형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가격으로 날 ..샀어. 나를 믿는다고 말해줬잖아.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어. 태어나서 그렇게 값비싸게 날 사준 사람은 없었어. ..그러니깐.............“ 비가 내리는 계단이었지만, 주저앉았다. 둘 다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니깐, 날 가져.” “................” 너무 많이 울어서 목이 아파왔다. 승훈이 가만히 손을 잡는다. 슈퍼의 검은 비닐 봉투를 자신의 손에서 빼앗아 들었다. “ 날 살 정도의 가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형은 부끄러운 사람 아냐.. 그런 사람은 정말 부자야...그렇지?“ “.............” “..난 형이 부끄럽지 않아.. 난.. 강지윤이...참을 수 없이 자랑스러워...“ 한참을 비가 내렸다. 그래도 계단 끝에 두 사람이 앉을 자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 부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승훈이 조금 웃었다. 그는 어딘가 살이 살짝 빠지고 더 탄탄해진 모습이다. 어떤 옷을 입고 있던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그는 임승훈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자신이 산 승훈이라고 그 스스로의 입으로 말했다. 그리고도 한참 비가 내렸다. 계단 끝에 마주 앉아 꽉 쥔 손으로 그가 이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가끔 얼굴 좀 보여줘, 형..” “.............” “.........가끔 형이랑 나란히 서서 걷고 싶거든.” 계단 끝에서 그가 말했다. 그리고 한 시간 쯤 지나 뒤에 두 사람은 계단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다. 바로 그 비 내리는 계단이었다. 지윤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앙금처럼 슬펐다. 측정할 수 없을만큼의 아주 조금만 ...그래도 비오는 날의 계단, 그 값어치, 아이스크림의 달콤함 만큼은 행복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뿐이라도 딱 좋았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참 많은 계단을 여러번 밟아야 했으니 말이다. ************************* 그곳에 계단이 있었는데, 이제 쯤은 철거될지도 모르는 집들이 한참 계단 양 옆에 계속 늘어서 있다. 가끔 사람들은 잊고 지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그곳이 추억이 될 수도 있고, 또 희망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그곳에 Anonami 라는 호스트 바가 있는데, 그곳에는 가끔 자신이 인생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잔뜩 차려입은 브랜드가 자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 역시 사람들이 잊고 지낼 때도 있지만, 그곳 역시 사람이 있는 곳이고 그래서 갖가지 감정과 기억들이 공유되는 공간이다. 모두에게 이따금 ‘자신의 값어치’ 를 알려주는 존재. 그 눈물겨운 묘한 만남은 바로 그 계단 끝과 최고의 호화스러운 바 사이에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당신이야.’라고..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가끔 바뀌었다. 꼭 누구들처럼 말이다. 힘겹게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 지칠 때라도 누군가는 그 끝에서 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봐, 당신을 믿어.’라고 말해 주곤 했었다. 그 값어치 때문에 결국 누군가와 또 다른 그의 상대방은 서로를 교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계단 끝에서 그를 산다. 수백번을 오르내리는 까닭은 그 만남을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줄로 표현하면 딱 이렇다. ‘계단 끝에서 ... ....그를 사다.‘..라고. -end- 클럽 에피소드 2 : 비우 written by. 조반유리 한국의 열 여덟. 특히, 한국의 열 여덟인 남학생들은 욕과 조사로 이뤄진 특이한 커뮤니케이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친구 아니다’ 라는 말을 무서워하기도 하며, 한편으로 ‘내 친구이다’라는 말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런 그들 중 하나에게 바로 이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즉 한국의 열 여덟, 그 중에서도 친구 관계 좋기로 유명한 ‘계가윤‘이 조금 전에 그 말을 들은 것이다. ‘너는 이제 내 친구 아니다.’ ..이렇게 정색을 하고 가윤에게 말한 인간은, 다름 아닌 그의 십 팔년 된 친구 강지협이다. 또한 그들은 한 집에 둘만 사는 룸메이트 였던 것이다. 비록 십 팔년 전부터 딱히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두 사람은 외모에서 성격까지 모든 것이 거의 달랐다. 키는 둘다 비슷했지만, 어딘가 차갑고 깨끗한 이미지의 가윤은 수학과 과학을 잘했다. 모범적이고 우수하며 지적인 느낌..그것이 바로 계가윤의 그 동안 이미지다. 반면, 강지엽은 그와 십년이 넘는 친구였지만, 공부하고는 전혀 담을 쌓았다. 그는 몸으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체육 특기생을 목표로 훈련 중이었다. 외모도 가윤과는 달리 조금 더 단단한 느낌이었다. 가윤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지만, 지협에게는 골치덩어리였다. 다른 녀석들에게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곧잘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비웃곤 하는 고약한 친구. 어릴 때부터 항상 그 녀석에게만은 놀림을 당하며 살아왔다.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은 딱 두 개 밖에 없었다. 하나는 같은 집에 산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미우니 고우니 해도 18년 동안 서로를 골려먹었다는 사실이다. 허나 미운 정도 정이라고.. 이 고약하고 얄미운 친구 계가윤은 그래도 강지협에게는 친구였던 것이다.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다르던 아니던, 똑똑하고 지적이며 수려한 이 친구 녀석을 속으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런 자신이 오늘 계가윤을 진하게 노려보며 18년 만에 처음으로 이를 갈듯 선언했다. 너는 이제부터 내 친구 아니다...라고. <프롤로그> “너는 이제 내 친구 아니다.” 보통은 ‘너랑 친구 안해, 새꺄!’ 혹은, ‘십새꺄, 너랑은 쫑이다!’라고 표현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녀석이 조금 다른 표현을 썼다. 조금 더 진지하고, 뭐랄까..조금 더 나이들고, 그리고 건조하면서 뭔가를 참듯이 꽉 쥔 주먹으로 말이다. “너는 이제 내 친구 아니다, 계가윤” 학교 옥상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가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지협 쪽을 한번 힐끗 쳐다볼 뿐이다. 반듯한 이마, 조금 성가시게 폴락거리는 머리카락. 가윤의 그런 점들은 18년 동안 축복이기도 했고, 덫이기도 했다. 아무려면 뭐 어떤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8년 지기에게서 방금 ‘친구 아니다’라는 어마 어마한 말을 들었다. 가윤은 교복 주머니에 손을 꽂고, 즐겁다는 듯 지협을 향해 씽긋- 웃는다. 지협은 그 순간 늘 그렇듯, 소름이 돋았다. 깨끗한 얼굴로 시원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친구도 많고, 인기도 많은 계가윤이다. 물론 지협은 지난 십년이 넘도록 녀석이 얼마나 얄미운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적어도 남이 봤을 때는 뭐 하나 부족한 거 없는 녀석이다. 그런 가윤이 뭐가 아쉬워서 그 짓을 하는 걸까. 호스트 말이다. 호스트. 아니, 녀석은 말이 좋아서 그걸 ‘호스트’라고 표현했지, 따지고 보면 남창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금 지협이 가윤에게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계가윤. 지협의 18년 된 친구, 그 시원하고 서늘한 눈매로 웃는 맑은 얼굴의 가윤이 늘 그렇듯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찌보면 날라리 같아서 그렇지, 한결같았던 친구 지협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뭐, 마음 내키는대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이것이다. 지협은 가윤에게 ‘이제 너와의 십팔년 친구 사이는 끝이다’ 라고 말했고, 가윤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것이다. ‘그래~ 마음내키는대로’ 라고.. 그 흔한 주먹다짐도 없이, 늘 둘 사이에 난무하던 욕설도 없이, 18세에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공포가 일었다. 친구를 잃은 것이다. <1> 쿵-하고 소리가 나도록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지협은 침대 위로 과감히 낙하했다. 교복도 벗지 않고 짜증이 난다는 듯 머리카락을 북북- 쓸어 넘기며 그는 면 이불에 얼굴을 부비적거린다. 가윤이 주말에 빨아 놓은 깨끗한 세탁 냄새가 났다. 이런 식의 섬유세제 냄새가 나는 녀석이 바로 가윤이다. 오늘로써 친구사이를 완전히 정리한 그 녀석, ‘계가윤’말이다. 십팔년 친구, 이년간의 룸메이트. 지극히 짓궂은 성격, 싸늘하고 침착한 웃음, 짜증날 정도로 잘난 척 하는 그 얄미운 녀석! 녀석에겐 18년 동안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그런데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문제의 시작은 간단했다. 누군가가 가윤을 압구정 뒷골목에서 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소문이 마구 겹쌓인 채 흘러 다녔다.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가윤이 그렇다는 것은 굉장한 의외였다. 쾌활하고 잘 노는 자신과는 달리, 가윤은 모범적이고 청결한 이미지다. 십 팔년 동안 항상 그랬다. 가윤이 의외로 얄미운 구석이 있고, 성격이 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정도로 오랜 친구였던 자신만의 판단이다. ‘계가윤이 아르바이트 해? 넌 같은 집에 살잖아? 혹시 들은 이야기 없어?’ 친구 녀석들은 당연히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가윤의 이미지가 워낙 학교에서 좋다보니 대 놓고 묻기 힘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가윤의 룸메이트인 지협에게 묻는 것이 그들에게 쉬웠다. 그러나 지협도 그런 말은 녀석들에게 처음 들었다. 계가윤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그것도 보통의 알바가 아니라, 법에 걸리는 범법행위이자 이상야릇한 아르바이트? 같은 집에 살아도 워낙 공통점이 없는 둘 사이다 보니, 그리고 그 공통점 없이도 18년 간 무난하게 지내온 사이다 보니, 그런 깊은 대화까지는 못 나눈지 오래다. 그 아르바이트라는 게 결국 호스트 일이냐? 아직 미성년자가?..라고 지협이 따지고 물은 것은,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5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 5개월 동안 지협은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고 관찰하다보니 밑도 끝도 없었다. 매일 밤 늦는 가윤과, 가끔 새벽이면 어디론가 나가는 듯한 그의 모습. 그 느낌.. 왜 예전에는 잠만 잔다고 몰랐을까..하는 죄책감마저 들고 말았다. 그래서 마침내 대 놓고 확인해 볼 결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도 가윤은 어느 날처럼 시원한 미소로 얄밉게 웃었다. 그러나 지협은 서늘한 미소로 웃고 있는 그를 무시한 채, 다짜고짜 옥상으로 끌고 올라갔다. 계단으로 마구 밀어당기는 녀석에게서는 늘 청결한 세탁의 향이 우러났다. 그러니 더 믿을 수 없다. 깨끗한 얼굴, 깨끗한 미소, 그리고 한편으로는 잘생긴 외모와 잘 뻗은 팔과 다리. 마주보면 한 치의 어긋남도 거의 없을만큼 키도 같은 그들은, 아무리 그래도 십년이 넘도록 친구사이였다. 가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곧잘 미스테리 했지만, 그래도 좋은 사이를 유지해왔다고 여겼다. 이런 잘난 척 하는 고까운 녀석과 18년씩이나 같이 지내는 거 아무나 못할 일이다.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를 거쳐 같은 고등학교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그 계가윤이 십년 내도록 변함없는 상큼한 대외용 미소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나 아르바이트 해.’ 그 순간, 지협에게는 자신의 발끝이 천천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남창이야?’ ‘남창 아냐, 호스트야. 뭐..니가 느끼기에는 별반 다를 바 없겠지만...’ ‘............왜?.........아니, 도대체 왜?’ 한국의 십 팔세들은 욕을 굉장히 잘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 중요한 느낌, 그리고 시리도록 뭔가 애간장이 타는 진지한 상황에서는 그들도 욕을 할 겨를이 없다. 욕이란 본시 약간의 과시와 약간의 허세용이다. 지금은 그 허세와 과시를 할 틈이 없는 거다. 또한 지협은 가윤을 만난 이례, 이렇게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물론 가윤은 욕을 잘 안하는 성격이었지만 말이다. 어딘가 삐딱하게 웃으며 자신을 놀려대면 놀렸지, 함부로 욕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강지협...’ ‘넌 임마, 너네 집 가난하지도 않잖아? 니가 성적이 안 좋아? 니가 뭐가 모자라? 굳이 알바를 하고 싶다면, 새꺄, 조금 더 다른...‘ ‘강지협..’ 얼굴이 시뻘게진 자신이 뭐라고 따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가윤이 못 말린다는 듯 상큼하게 말하는 순간,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너, 나 안을 수 있어?’ ‘............!!!!!!!!!!!!’ ‘..아니면, 나한테 안길 수 있어?’ 호스트라고 해서 나이든 여자들에게 돈 받고 적당히 주흥을 맞춰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계가윤 입에서 나온 질문이 걸작이다. 그것도 뭔가 즐겁다는 듯, 정색을 하고 그렇게 되물은 것이다. ‘너 나 안거나 안길 수 있어?’..라고. ‘내...내가...너한테 왜 안...겨!!!!!!!!!’ ‘..거 봐.’ ‘그리고....내가 왜 너같은 사내 새끼를 안아!!!!, 이 십새꺄!! 정신 좀 차려!!’ 계가윤은 소리높여 웃었다. 얄미운 미소다. 언제나 상큼하게 웃는 얄미운 녀석. 지협이 충혈된 눈동자를 깜박였다. 흥분 때문이었다. 어느 새, 가윤도 웃으면서도 답답하다는 듯, 교복 앞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당황한 지협을 향해 느긋하게 입을 연다. 그 순간, 무척이나 비웃는 기분이 든 건 또 왜였을까. ‘난 너 안고 싶거든.’ ‘..........-!!!!!!!!!!!!!!!’ ‘난 너에게 안기고 싶거든....’ ‘............!!!!!...........닥쳐, 이 좇같은 .....................’ ‘사실 니가 아니라도 상관은 없거든. 그런 게 나니깐... 취향만 비슷하고 나랑 비슷한 종족이면 누구라도 상관없어.‘ 그 순간, 지협은 가윤을 포기했다. 아니, 포기 당했다. 녀석의 그 얄미운 웃음, 얄미운 목, 얄미운 상반신, 얄미운 손목, 얄미운 몸으로부터 강하게 시선을 피했다. 십 팔년 동안 헛것이었다. 성격이 좀 안 좋고 잘난 척 하는지는 알았지만, 저런 새끼인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남자라도?’ 조금 얼빠지게 묻는 자신을 향해, 가윤이 맑게 웃었다. 마치 놀란 자신을 매번 놀릴 때 그 표정처럼 통쾌하다는 듯한 웃음이다. 언제나 순식간에 부아가 치미게 만드는 그 .. 얄미운 웃음! ‘당연히 남자라도 돼, 강지협. 내가 지금 한 말이 그거잖아?’ ‘그..그런거라면.. ..에..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거라면 굳이 호스트가 아니라도...‘ ‘뭐, 어때? 돈도 벌고 몸도 즐기고? 맨날 공부만 하며 살기에도 지루하잖아?‘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그럼........너는 이제 내 친구 아니다. 계가윤.’ 정말 목울대로 넘어오는 뭔가 울컥한 기분을 꽉 다스리며, 지협은 간신히 던진 한 마디였다. 포기당했다. 스스로 포기한다든지 뭐 그런게 아니라 아주 일방적으로 포기당했다. 가윤이 자신에게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녀석이 남자도 좋아한다고 해서 한 말이 아니다. 그 방법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걸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폭탄선언하며 즐기는 녀석의 성격도 이젠 못 견디겠다. 그러나 계가윤은 언제나 계가윤이다. 자신의 십 팔년 지우. 가윤은 함껏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천천히 되새기듯 시선을 잠시 피한다. 비록 그 순간은 한 몇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녀석은 다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한 채, 여유가득한 웃음을 만든다. 그 포기에 수긍한 것이다. 친구가 아니라고 엄청난 선언을 했는데, 그 선언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인정한 것이다. ‘그래. 뭐, 마음 내키는대로~..‘ ********************* 그렇게... ‘넌 이제 내 친구 아니다’ 라고 말하고 일주일 쯤 흘렀다. 그리고 같은 학교, 같은 집에 사는 그들로써는 몹시 생소하게 냉전의 분위기를 맛보고 있었다. 아니,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는 얄미운 가윤이 어떤 기분인지는 전혀 모르겠다. 녀석은 변함없이 밤 늦게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왔고, 그리고 또한 아무 내색없이 다음 날 아침이면 등교길에 나섰다. 언제나 같이 학교로 향하던 발걸음은 둘 사이에 엄청난 거리를 남기며 떨어졌다. 아침이면 이어폰을 꽂은 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학교로 향하는 가윤의 등줄기만 진하게 노려볼 뿐이다. 물론, 아무리 노려보아도 그 계가윤이 뭔가 설명해 줄 리 없다. 십팔년 된 친구 관계도 깨끗하게 끝낸 천하의 가윤이니 말이다. 그렇게 시원하게 끝장 낼 거라면 뭐하려고 지금까지 친구했는지 모를 일이다. 거 참..애당초 그 긴 시간동안 그래도 친구라고 그 지랄같은 성격을 받아준 자신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협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아야 하잖아..라고 투덜거리며 그는 가방을 들어올렸다.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을 준비하는 자신과는 달리 이과 계통인 가윤과는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렸다. 두 사람이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두 사람 모두에게 친한 양 쪽 부모님들 때문이다. 가윤에게는 아버님 한 분 밖엔 안 계신다. 그것도 잦은 해외출장으로 별로 한국에는 계시지 않았다. 또한 지협의 부모님은 주소만 서울 쪽으로 해 놓고, 부산에서 회 장사를 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지협의 부모님은 가윤을 믿고 있는 것이고, 가윤의 아버지는 지협을 믿고 있는 것이다. 가윤은 공부를 잘했고 침착한 성격이었으며, 자신은 체육을 잘했고 쾌활한 바보였다. ‘쾌활한 바보’라는 말은 바로 가윤이 즐겨 쓰는 표현 중 하나다. 이제는 같은 집에 살아도 둘 사이에 그런 말 들을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얄미운 새끼...... 도대체 어쩌려고....” 쾌활한 바보는 가방을 어깨에 고쳐 메며 혼자 중얼거렸다. 체육특기생 지망자들이 방과 후에 자주 훈련용으로 들리는 ‘휘트니스’ 클럽에는 벌써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입구에서 음료수를 뽑는 찰나에, 그들 중 하나가 반갑게 어깨를 툭- 치며 인사한다. “야아~ 쾌활한 바보~” 이마를 살짝 찌푸리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나영이 보인다. 진나영. 바로 한동안 지협이 헤벌레 거리며 매달리던 그녀. 자신처럼 테니스를 전공하는 그녀는, 잘빠진 몸매에 괜찮은 성격을 가진 여학생이었다. 교복 치마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그 다리에 얼마나 침을 흘렸는지!..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윤이 옆에서 얼마나 비웃는 미소를 지으며, ‘바보. 하반신만 있는 열혈청년’이라고 놀렸는지!!!!! “자꾸 그렇게 부르지마.” 요새는 컨디션이 안 좋거든...이라고 둘러대며 지협이 웃었다. 사실은 나영이 그 별명을 알고 있는 것도 가윤 때문이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부터 나영을 점찍었었는데, 그만 그녀는 가윤을 더 좋아했다. 지금도 그 상황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는 지협이 가윤과 그나마 친구사이었기에 뭐든지 이해하려는 차원이었을뿐. 자신은 입학 이례 계속해서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저울질 당해왔다. “가윤이는 잘 지내? 수업 끝나면 요새 잘 안 남아 있던데?” 나영의 질문에 눈에 띄지 않게 양미간을 흐리며 지협은 대충 얼버무렸다. 지금이라도 백번 그녀를 가윤에게 양보해 줄 마음이 있다. 녀석이 그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 사이를 접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사실, 이런 생각 자체도 짜증난다. 내가 뭐하러 그런 녀석따위를 염려해야 한단 말인가. 그 -!!! 성질나도록 잘난척하는 여유만만한 녀석을! “.......가윤이..요새 정말 그 이상한 아르바이트 해? 아이들이 그렇게 수근거리던데..그게 진짜야?” 뭔가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 있던 지협에게로 나영이 그 말을 던진 것은 복도를 돌아 갈 무렵이었다. 코너를 돌아 트레이닝 장소로 향하기 직전, 그녀가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꺼낸 말이다. 그 순간, 두뇌의 다른 활동이 일시에 정지하기 이르렀다. ..상관없고 싶다. <2> 그러나 그 ‘상관없고 싶음’에 도무지 참여해주지 않는 게 바로 계가윤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새벽 3시를 아우르는 이 시간!.. 지협이 이 시간까지 깨어 있다는 것은 거의 신비에 가까웠다. 그는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배게에 머리를 대자마자 1분안에 잠드는 경의로운 생명이었다. 그러나 그가 올려다보았을 때, 시계는 거의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쯤에야, 비로소 문을 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달칵. 그리고 샐샐샐....청바지 끌리는 소리. 누구의 발소리인지 몸짓인지 모르는 바 아니다. 지난 2년간 뻔질나게 들어왔던 소리며, 지난 십년이 넘게 함께 얼굴 맞대고 살아온 심술궂은 친구의 발소리다. 이 곳은 본래부터 둘 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나마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낯선 감정이 어느 날부터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래도 긴 시간 유지한 ‘친구’라는 이름의 담이 이상한 방식으로 부서진 것이다. 비록 친구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심하게 마음에 걸린다. 지협은 심호흡을 깊게 내쉬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거실의 어두운 밤 안으로 녀석이 흠칫 놀란 채 물컵을 들고 있었다. “너무 늦잖아?” 주방의 불을 켜며, 지협은 잠이 쏟아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북북 긁었다. 자신은 뭔가 표현하고 말하는 것이 가윤처럼 잘 되지 않는다. 가윤은 머리 좋은 녀석이고, 똑똑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바보’라고 놀리며 얄밉게 웃어도 좋은 친구라고 여겼다. ‘친구가 아니다’ 라고 말한 건 어디까지나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가윤에 대한 악랄한 공격이었다. 그것은 최후통첩이었고, 그렇게 했을 때, 가윤 쪽에서 조금의 양보를 해주길 바랬던 거다. 호스트를 그만 두던지, 아니면 최소한의 납득이 갈만한 설명을 해주던지.. 그러나 가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어떤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친구가 아니다...라는 말에 ‘그래’라고 웃으며 대답했고, 등을 돌렸으며, 혼자 등교하고 혼자 하교했다. 어디까지 가나 두고보자..라고 결심했건만, 여태까지 두 사람은 그 날 이후 말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다. 원래 얄미운 녀석이었지만, 그건 긴 시간 친구로써의 동경 조금과 잘난 녀석에 대한 약간의 질투..그런 것들로 적당히 위장된 또래다운 감정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겉보기 얄미워도 본 바탕은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지협이다. 그러나 이 정도면 졌다. 다른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열 여덟살의 어린 호스트라니...그러면서 생글 생글 웃으며 상대방을 아이보듯 야루는태도라니!!!!..더군다나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니!!!!!!!!! 도무지 그 자세가 괘씸해서라도 화가 치미는 것이다. 친구?..친구고 뭐고 없다. 오늘부터 사과처럼 강판에 갈아 마실 이름이 바로 ‘친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윤은 역시 계가윤이다. 그는 씩씩거리는 지협을 향해 무척 상냥하게 대답했다. “무슨 상관이야, 잘생긴 바보?” 그리고는 잠시 놀랬던 눈동자를 거둔 채, 물 컵에 다시 입을 대고 키득거린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흠칫 놀라는 표정에서 어딘가 모를 피곤함이 엿보였다. 녀석이 놀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너에 대해 떠들고 있다구, 계가윤. 정신차려.” “그러든지 말든지, 니가 무슨 상관이냐니깐? 친구 아니라며?“ 가윤의 검은 머리카락이 기분 좋은 듯 찰랑거린다.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정갈해 보이는 얼굴, 그 수려함에도 짜증이 났다. 필시 자신이 엄청난 눈동자로 노려보고 있을텐데도, 가윤만은 그 표정에 기 죽지 않는다. 원래 이런 녀석이다. 워낙 꼬맹이때부터 같이 자라온 게 그 이유다. 성난 자신이 재미있다는 듯 목을 갸웃거리며 가윤은 키득키득 웃었다. 저 얄밉도록 기생 오라비 같은 얼굴을 한번 칠까..라고 주먹을 꽉 쥐자, 녀석이 다가오며 어깨 위로 손을 걸었다. “이런 식으로 매번 지니깐 안 되는 거라구, 강지협.” “...........치워.” “니 입으로 친구 아니라며? 그러면서 뭘 그렇게 신경 써? 이건 니가 먼저 다시 말 건거다, 알지?” “입 닥쳐, 술 냄새 나.” 녀석이 다가오자, 훅-하고 술냄새도 함께 다가왔다. 계가윤이 술을 마시다니...친구 녀석들과 선생들이 알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교복도 벗지 않은 낭창한 몸이 술주정을 부리듯 찰싹- 달라붙으며 깔깔거렸다. 언제나 자신을 놀리는 재미로 사는 정말 얄미운 이 성격! ..그러나 놀리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십 팔년 된 친구가 호스트를 한다고 선언해서 놀리는 일은 정말 재미없다. 전혀 재미없다. “학교에서....” 술 때문에 몸에 열이 오르는 듯, 교복 넥타이를 풀며 가윤은 자신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언제나 이 딴 식인 건 녀석도 마찬가지다. 마이 페이스..오직 그 뿐인 정말 싫은 녀석. 누구에게나 깔끔한 미소를 보이며 친절하게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친구고 뭐고 지 배알 땅기는대로만 행동하는 지랄같은 이 성격!!! 더군다나, 자꾸만 엉키려 하는 이 습관은 단순한 주정 같은데도 몹시 거슬렸다. 오라, 이제는 술까지 예사로 마신다 이거지.... “학교에서 소문 다 났대. 오늘은 심지어 나영이까지 물었다구, 너에 대해서..” “.........나영이?.........걔가 누구야?.. 아~.. 강지협군을 밤마다 발딱 일어서게 하는 그 여자~ 확실히 섹스는 잘 하게 생겼어. 다리도 미끈하고 가슴도 팡팡하고~“ 마치 언제는 죽도록 친했다고, 자신의 어깨에 비스듬히 한 팔을 걸고 아무렇게나 깔깔거리는 그가 미치도록 얄미웠다. 왜 뭘 해도 이렇게 고약하게 구는걸까. 지협은 가뜩이나 잠이 오는 까닭에 성질을 내며 자신의 몸에 지탱하는 녀석의 팔꿈치를 확- 잡아 당겼다. “정신차리고 똑바로 말해, 계가윤. 그렇게 속물적으로 말하지 말고...“ “속물적인게 어때서? 니 말대로 내가 밤마다 하는 일이 그런 건데, 이제와서 깨끗한 척 굴 필요가..........“ 그 순간, 지협의 뚜껑이 확- 열렸다. 무심결에 그는 팔을 휘둘렀고, 아주 짧은 찰나에 손바닥 아래로 미끈한 피부가 아프게 와 닿는다. 한번도 가윤을 때린 적이 없다. 때릴 만한 일도 없었다. 둘이 서로를 패가며 싸운 적도 없다. 애당초 그럴 일이 생길만큼 서로 진짜 상처 낸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찰싹’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 직후였다. 자신이 방금 가윤의 뺨을 때렸다. 그로부터 한 5초 정도 흘렀다.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말없이 서로를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녀석은 놀란 것 같지도, 혹은 화 난 것 같지도 않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으니 말이다. “....................아프잖아?” 조금 전까지 너무할 정도로 깔깔거리던 그 녀석. 계가윤이 문득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만지며 씽긋- 웃었다. 녀석이 점점 손도 못 쓸 정도로 악질이 되어 간다는 것과, 또 자신이 녀석을 때렸다는 두 가지 사실에 어안이 벙벙한 지협이 오히려 당혹할 지경이었다. 맞은 쪽은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듯, 태연하게 자신을 움켜진 지협의 팔을 깨끗이 풀어 놓는다. 그 침착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맞은 쪽도, 잘못한 쪽도 분명 저 녀석인데, 왜 그 깔끔한 얼굴에 남은 손자국으로 자신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 십새야...” “.........?” “..머리 좋은 니가 아무리 우습게 생각하고 좇같이 날 비웃어도.. 나영이는 내가 좋아하는 녀석이야.“ 보다 진지하게 말하자, 녀석이 ‘아하~’라고 짧게 탄식하며 다시 샐샐거린다. 부어오른 뺨과는 대조적으로 삐딱한 미소다. 갑자기 그 미소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18세인 자신이 욕으로 허세를 부리는 대신에, 이 녀석은 미소로 허세를 부리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허세일까. 무엇을 위한 위장이며, 무엇 때문에 아니꼽다는 듯 히죽거리는걸까. ....도대체 이 녀석과 지낸 그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에, 녀석이 이 딴식으로 웃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 일까. “그럼, 강지협.......” “......?........” 여전히 그린 것같이 미소지으며, 가윤은 마침내 교복 넥타이를 휙- 하고 풀어버렸다. 남은 한손으로 답답한 듯 셔츠 앞자락을 풀자, 섬세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갑자기 지협은 순간적으로 뒷걸음쳤다. 무언가 침묵과 같이 공격받는 위협을 느낀 것이다. 머리 나쁜 자신으로써는 설명하기 힘든 종류의 위협이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나는 것을 힐끗 쳐다보며, 녀석이 묘하게 웃었다. 조금의 무방비같이 씁쓸한 미소..설명할 길 없이 정체모를 그 이상한 웃음. 그리고는 조금 전보다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럼, 강지협............” “...........” “......그 여자에게나 잘 하라구. 니 여친이 될 여자말야.“ “.................” “...친구도 아니라면서 나 같은 거한테 신경 쓸 필요 없어.” “..........친구 아냐.” “..그러니깐,..넌 단순한 놈이니깐 한 가지 일에나 신경 써. 내가 밖에서 뭘 하든 니 알 바 아니잖아, 그렇지?“ 꼭 그럴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흡사 더러운 걸 피하는 듯한 자신에게서 상처 받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밤. 처음으로 지협은 온 밤을 꼴딱 샌 채, 학교에 등교해야 했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다! ************************** 그리고 망할 놈의 키스마크. “야, 너 계가 놈 목에 있는 멍자국 봤어?” 담임의 지루한 종례를 끝내고 지협이 가방을 드는 순간, 다른 반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1학년 때 가윤과 자신과 같은 반이었던 이태라는 녀석이다. 말 많고 시끄러운 이태 새끼. “진짜?” 이태의 그 호들갑에 지협은 다소 사납게 가방을 어깨에 둘러맨다. ‘씨바, 좇같네...’라고 중얼거리자, 일순 분위기가 세-하게 굳었다. 이태가 쫑알거린 ‘계가 놈’이란 다름아닌 계가윤이고, 목덜미의 멍자국은 바보 아니면 다 알정도의 키스자국이다. 오늘 등교할 때 보았다. 교복으로 결코 가릴 수 없는 목덜미에 나 버린 그 보라색 흔적을. 보라색보다 조금 붉은 빛을 띈 그것은 절대 벌레에게 물린 자국도, 혹은 맞은 자국도 아니었다. 한국의 18세, 혈기 왕성하고 욕 잘하며 ‘친구’라는 커뮤니티를 가진 그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바로 그 자국! 망할 놈의 키스마크. 갑자기 울화가 솟구치는 자신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힐끔 힐끔 눈치를 보며 떠들기 시작했다. “우아..그거 좇나 세게 빨아들여야 남는다고 하던데...” “그래, 여러번 해줘야 남는다구~” “씨바, 그 잘난 척 하던 계가 놈이 누구랑 그랬다는 거야, 도대체? 인기도 졸라 많네, 그 새끼... 하긴, 인물은 꽤 되니깐..그래도 어떤 여자가 용감무쌍하게 계가 놈한테 그런......“ “야야~ 여자 아니래. 얘들이 그러는데, 남자가 한..” 그 때쯤에 지협은 정말 거칠게 교실문을 닫고 나섰다. 등 뒤에서는 지협까지도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쳐다보며 지들끼리 떠드는 무리들만 남았다. 그들에게서 들려오는 말들은 단편적이어서 가희 짐작하기 힘든 대화였다. 주로, ‘졸라’ ‘씨바’ ‘우웩’ ‘진짜?’ ‘남자랑 빠구리도 해?’ ‘구라치지마, 십새꺄..’ 등등의.. 흔히들 할 수 있는 18세, 한국의 남자새끼들에게의 전형적인 커뮤니케이션. ‘좇’에서 시작해서 ‘좇’으로 끝나는 한결같은 녀석들이거늘..이제 그들에게 조금 상식 밖의 대 사건이 터진 것이다. 동경이든, 충격이든, 구역질이든 뭐든...전혀 예상 밖의 그 무엇! ********************** 트레이닝을 대충 끝내고 라켓을 집어 들었을 때, 나영이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왔다. 새삼 그 표현이 생각났다. 친구를 잃으니 여자가 생겼다..라고. 가윤의 문제가 종종 화젯거리가 되는 요새 이전에, 나영이 이렇게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입을 연적은 별로 없었다. “넌 괜찮아?” 저녁 햇살이 나영의 어깨 위에 부딪쳤고, 코트에서는 공 튀기는 소리가 밝게 울렸다. 대학교 코트를 빌려 곧잘 연습하는 그들에게 이 공간은 미리 맛보는 에덴과도 같았다. 단 하나, 얄미운 친구에 대한 염려만 빼면 말이다. “뭐가 괜찮아?” 다소 시큰둥한 자신의 대답에 나영이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진다. 보나마나 ‘가윤’에 대해 묻고 싶은 그녀다. 아서라, 여자여. 그 녀석은 18년 친구인 나도 속일 정도로 속물인 인간이라니깐. 완전히 타락했어. 정말 엉망이라구! 그러나 나영은 지협의 공포스런 외침에도 상관없이 보다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가윤이 그럴 녀석 아닌 거 같은데, 니가 뭐라고 알아봐야 할 거 아닌가? 너랑 그래도 제일 친한 친구잖아?“ “안 친해. 그리고 그 녀석 생각보다 밥맛이야. 니들은 몰라, 그 새끼가 얼마나 .......” “..........?........” 말을 꺼내다 다시 입술을 꽉 깨문다. 뭐라고 말 못하겠다. 녀석이 밖에서 웬갖 짓을 하건, 자신과는 이제 결별한 인간이다. ‘친구도 아니다’라는 그 어마무시한 말도 샐샐거리며 피해간 인간이다. 지협은 내심 궁금해하는 나영을 보며 그냥 쓰게 씨익- 웃었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소문이 쌓여질수록 이런 종류의 일은 공격적이 될 게 뻔했다. 하다못해 십팔세가 되도록 보지도 듣지도 못한 ‘따’가 되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며 지협은 나영보다 더 무겁게 한숨을 쉰다. 테스트가 끝날 때까지 절대 입에 대지 않겠다는 담배..그 미련한 한 모금이 눈에 거슬릴 정도로 그리워진다. “나영아, 우리 달 말에 영화나 보러갈까?” 지협은 아무런 생각없이 대뜸 내뱉었다. 말 그대로 머리 속에 지끈거리는 뭔가를 잊기 위한 도피같은 제안이었다. 나영이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하더니 이내 씽긋- 웃는다. 일종의 찬성이다. 역시 연인을 얻기 위해서는 조금 쓰지만, 친구를 외면해야 할 때도 있다. ********************** 그렇게 두 주가 흘렀다. 예상했던 대로 가윤의 그런 행동과 더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뒷담화들은 이제 곧잘 입에 오고 내리는 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다. 가윤 자신이 그걸 느끼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행동이 앞서는 지협으로써는 이상한 위기의식 정도야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식으로 떠들어대던 녀석들 중 일부가, 곧 진지한 거슬림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이 된 키스마크부터 해서, 곧잘 이상한 흔적들을 달고오는 가윤이 오히려 문제였다. 하려면 표를 안 내던지...라고 속으로 욕설을 씹어 넘기며, 지협은 어지간하면 관여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니, 사실은 가윤 쪽에서 관여할 여지를 만들지 않았다. 언제나 지협의 말투를 놀리며 녀석은 되려 비웃는 얼굴이다. 다른 녀석들에게는 친절하고 성격 좋기로 한 계가윤이, 왜 자신에게는 그토록 엉망이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쯤에 사건이 터졌다. “계가윤이 지일이한테 터졌대!!!!!!!!!” 누군가 지협의 반 문을 힘차게 열고 소리쳤다. 남학생 반과 여학생 반이 나눠진 그들로써는 가끔 눈에 띄게 싸움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성적 좋고, 성격좋고 - 물론 지협에게만 빼고- 친절한 계가윤이 그런 일에 끼여들 리가 없다. 끼여들 꺼리가 있다면, 바로 요새 녀석이 하고 다니는 요상한 행동과 바로 그 문제의 알바에 있는 것이다! “야, 너 안 가봐, 강지협? 문을 열고 들어온 녀석이 앉아 있는 지협을 향해 소리친다. 가윤의 반에 있는 남지일이라는 녀석. 주먹이 매섭기로 전교에서 소문난 녀석이다. 또 그 녀석의 꺼림직한 눈동자는 어떤가. 사고 잘 치고, 문제 많기로 유명한 녀석이다. 지협은 어찌해야 할까..라고 생각하며 일단 끄응- 하고 허리를 일으켰다. 자신의 입으로 ‘친구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어지간히 걱정은 든다. 더군다나 한 두달에 한번 정도 올라오시는 부모님도 이제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은근히 눈쌀을 찌푸리는 사이, 지협은 자신과 가윤의 반을 쭉 이어가는 시멘트 복도 위를 조금 빠르게 걸어갔다. 이미 저 쪽 구석에 한 패로 둥그렇게 모여든 녀석들이 보인다. 여학생 반에서도 아이들이 일제히 뛰어 나왔다. 하느님 제기랄..나영이도 눈이 동그래진 채, 싸움터로 향하고 있었다. 퍽-하는 둔탁한 주먹질 소리. 한 눈에 보아도, 입이 찢어진 가윤과 턱 끝이 붉은 지일이 보인다. 오라, 지일은 가윤의 면전을 향해 어퍼컷을 매겼고, 가윤은 지일의 턱을 올려지는 화려한 필살기를 보인 것이다. ..........만은, 어쨌든 싸움은 말리고 본다. “야,!!!!!!!!!!!” 대뜸 인파를 헤치며 큰 소리 치는 지협에게로 아이들의 시선이 일순 몰려든다. 절반 대 절반이다. 그러니깐, ‘십새꺄, 방해하지 마’ 라는 시선 절반과, ‘그래, 강지협 너라도 좀 말려라’ 라는 시선 절반. 지협은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계윤의 멱살을 쥐고 있던 덩치 좋은 지일도 같이 눈매를 날카롭게 만들며 이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체육을 하는 자신이 그런 눈길이나 몇 번의 주먹질에 끄떡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지협은 단단한 상체에 팔짱을 끼고 웃기다는 듯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너, 남지일.. 그 새끼 놔.“ “씨바, 좇같은 게 어디서 놔라 마라 씹쌍질이야!” .........역시 우리나라의 무서운 18세 중 많은 수가 특이한 커뮤니케이션을 갖는가보다. 아무리봐도 가윤이 먼저 지일을 때렸을 리는 없고, 보나마나 저 녀석이 시비를 건 거라고 생각하며 지협은 조금 삐딱하게 웃었다. 아니, 그 녀석 왜 건드려? 니들이 싸울만큼 뭔가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나 지일이 지협의 매서운 시선에 멱살을 놓고 바닥에 침을 탁- 뱉는 순간 뭔가 명치에서 답답하게 걸린다. 지일은 자신의 패거리 쪽으로 걸어가며 지저분하다는 듯, 가윤의 상반신을 손으로 떠밀어 버린 것이다. 잠시 가윤이 휘청거렸다. 하얀 교복 셔츠가 심하게 구겨져 있었고, 넥타이는 둘 다 어디 팽개쳤는지 모르겠다. 그 때 바로 지일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니가 이 녀석 서방이라도 돼? 요새 이 녀석 때문에 반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아?“ “...........-!!!!!!!!!!!!” 서방이라니.. 장난으로가 아니면 아무도 그런 말 쓰지 않는다. 지협은 짙은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서늘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집어드는 가윤과 지일을 번갈아 쳐다본다. 뭔가가 있다. 이들이 싸운 것은 그냥 또래들의 치기어린 다툼이 아닌 것이다. 지일이 그 생각에 쐐기를 박듯, 모여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지협을 비웃었다. “너랑 이 녀석이랑 친하다며, 강지협. 그럼 니가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이 녀석 때문에 이 반 얘들이 모두 에이즈에 걸리면 어떻게 해? 그 땐 니가 책임질래?“ “.............-!!!!!!!!!!!!”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다. 질끈거리는 명치 부근의 통증이 흡사 갈비뼈가 나갔을 때의 아픔과 비슷하게 다가왔다. 그래..라는 생각이 먼저 든 것이다. 결국 그 소문들 때문이구나..라는 빠른 판단으로 지협은 가윤을 향해 노려보듯 시선을 돌린다. ‘제발, 이젠 정신 좀 차려, 이 새꺄....너 정말 그러다 따 당하면 어떻게 할래..’ 라는 엄격한 눈길이었다. 그러나 가윤은 헝크러진 머리카락, 그 사이로 손을 꽂아 아무렇지도 않게 쓸어 넘긴다. 그리고는 다시 집어든 교복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며 아무런 표정없는 시선으로 남지일을 쳐다보며 씽긋- 웃었다. .....웃어? 니가 지금 웃음이 나와, 이 천하의 재수없는 계가윤!!!!!!!!! “저 녀석은 내 친구 아냐, 남씨..” 가윤이 천천히 입을 열자, 갑자기 싸한- 물길을 공격 받은 듯, 세상이 얼어붙는다. 싸움에 의해 가빠진 숨결 때문인지, 조금 할딱거리는 호흡을 잠재우며 가윤이 피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쓰윽- 닦아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못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분명한 어조로 웃으며 덧붙였다. “........저 녀석은 내 친구도 아니라구, 남씨. 친구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냐.“ 저 새끼가!!!!!!!! 일순간, 지협은 가윤을 때릴 뻔 했다. 이 난동과 싸움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볼 여유도 없이 그는 주먹을 쥐고 상반신을 바람처럼 뻗은 것이다. 만약, 그 순간 나영이 뒤에서 말리듯 셔츠를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필시 가윤을 때렸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지윤은 핏기 배인 도톰한 아랫입술을 비스듬히 올리며 웃었다. 그 생생한 놀림같은 웃음에 치가 떨린다. 오냐, 그래..이제 진짜 친구 아니다. 내가 두번 다시 니 걱정같은 거 하나 봐라. 어디 두번 다시 니 이름을 내 입으로 담는가 봐라. 기껏 걱정되어 찾아왔더니, 뭐 어쩌고 어째? “....그래, 남지일.” 지협은 조금 뒤로 물러섰다. 나영이 뭔가 겁에 질린 것처럼 지협의 팔꿈치를 꽉 잡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 속이 뒤집혀서 머리 속이 온통 헤집어 진다. 마침내, 그는 조금 차가운 듯한 인상을 주는 가윤의 눈매를 똑바로 노려보며 마찬가지로 똑똑히 대답했다. “그래, 남씨.. 니가 뭘 잘못 알았나본데...“ 지일이 다시 못마땅하다는 듯, 가윤을 노려보았다. 아마 가윤이 ‘사내 녀석들과 잔다’라는 소문이 이제 단순한 장난같은 소문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꼭 필요하다고 우기는 ‘희생양’ 그러니깐 ‘왕따’와 같은 핑계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여기 모여 있는 모두가 그걸 걱정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 중에서도 지협은 가장 어중간한 경계선이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윤의 표면적인 오랜 친구이자, 룸메이트 인 것이다. 지협이 있는 한, 그들 중 누구도 가윤을 정말 ‘왕따’ 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협 역시 그런 것 때문에 가윤이 보다 조심이라도 했으면..하는 게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완전히 판가름났다. 이번에도 가윤 쪽에서 먼저 자신을 포기했다. 믿을 수 없다. 내가 그렇게 죄를 많이 지었나..도대체 내 어디가 어릴 때부터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나쁜 새끼.. 씨파, 지랄 난장 쳐 먹을 새끼... 언제나 얄미운 얼굴, 얄미운 미소, 얄미운 목, 얄미운 손목, 얄미운 몸!!!!!!!!!!!!!!!!!!!!!!!!! “.........난 저 녀석 친구 아냐.” ..라고 지협이 말했다. 역시 한 10초 정도 정적이 흘렀고, 다섯 번 눈을 깜박인 지일이 그 말에 조금 흡족하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공식적인 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윤이 자초한 것이다!! 반면 지일을 몹시 재미있다는 듯, 비아냥 거렸을 뿐이다. “..불쌍한 호모 새끼........ 봐라, 니 절친한 친구도 등 돌리잖아, 이 십새꺄....“ 거짓말. 이 자리에서 먼저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한 게 바로 가윤이다. 지협은 나영이 ‘말도 안돼...’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쿵쾅 쿵쾅 뇌를 짓이길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돌아서기 전에 잠시, 그 공식적인 단절에 이 쪽을 바라보던 녀석이 떠올랐다. 아주 약간...........남들은 전혀 모르지만, 십팔년 지우인 자신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너무나 미묘한 변화. 녀석의 얼굴이 조금 핏기 가신 듯 창백해졌다. 그리고도 너무나 대조적이여서 선명한 붉은 핏줄기도 덩달아 보였다. 녀석은 입술에서 피를 스윽- 닦아내며 말없이 자신을 향해 웃은 것이다.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얄미워 죽겠다. 왜 갑자기 이 모든 일을 엉키게 만든단 말인가! 왜 늘 계가윤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만 그토록 엉망인 인간이란 말인가!!!!!!!!! *******************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심지어, 지협이 여느때처럼 밤 늦게 집에 들어왔을 때조차도 가윤은 그곳에 없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여느 때처럼 별 탈 없다는 거짓말로 둘러대고 깜박 잠이 든 게 아마 새벽 서너시였을 것이다. 그 때까지도 지협은 약간의 피로감과 걱정, 그리고 분노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오늘 밤만은 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잠이 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아침에 부랴 부랴 부은 눈꺼풀을 떴을 때,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계윤이 어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녀석은 그 난리를 친 학교에도 오늘 등교하지 않았다! 오후 늦게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계윤의 담임이 자신을 호출할 때쯤에야 지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얼굴을 보지 않은 부모님께 거짓말하듯 적당히 말하고 나오는 순간, 교무실과 마주보는 창 밖으로 굵은 빗줄기들이 연신 쏟아져 내린다. 학교는 수업을 시작했는지 복도 끝까지 지나치게 조용했다. 지협은 정말 오랜만에 수업을 째듯, 건물 입구까지 걸어 나왔다. 설렁 설렁, 교복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걷는 자신은 어딘가 넋이 빠진 듯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대로 그는 수업이 마치는 종이 울릴 때까지 한참, 건물 입구에서 바깥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보고 있었다. .........자신은 가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둔하지도, 혹은 바보도 아니다. 다만 얄밉기 짝이 없게 문제를 회피해가고, 천재들이 곧잘 그렇듯, 샐샐 웃으며 남을 비웃지만 않는다면 더 적극적으로 이 난관을 해결할 용기도 있다. 갑갑한 마음에 차가운 손바닥을 이마에 올려 여러번 쓸어내린다. 살면서 이만큼 가윤의 목을 조르고 싶었던 일은 정말 없었다. 어디에 있던지 오늘 찾아내기만 하면 정말 끝장을 보고 싶을만큼, 지협은 코너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한창 수업을 받고 있을 나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위반인지는 알지만, 그녀에게 문자라도 보내면 마음이 편해질까..라는 생각이 속절없이 든다. 비가 내리는 날은 트레이닝 외에 연습이 더 없다. 갑자기 뭉그러진 하루의 일상, 무너져버린 일상의 편안함이 눈 시릴 정도로 그리운 오후였다. <3> 가윤은 압구정동 호스트 바 Ananomi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곳 사람들은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것을 모른다는데 있다. 사촌 형의 전공책과 학번으로 나이를 대충 속였다. 그것이 안 좋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행여 단속이라도 뜨는 날엔 미리 알게 되기 때문에 편했다. 고급사람들을 상대하는 고급 요정은, 그래서 계윤이 선택한 마지막 보루였다. 어제 처음으로 Ananomi 에서 손님과 2차를 뛰었다. 한마디로 난생처음 외박을 한 것이다. 아마 같이 사는 녀석은 자신이 안 들어왔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게 뻔하다. 그럼에도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그 손님으로부터 도망 나온 오늘 오후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바보같은 강지협은 자신이 없으면 우산도 챙겨가지 못할텐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쓰디 쓴 위장액이 거꾸로 솟는 것 같은 웃음이다. 가윤은 옷과 머리에 묻은 빗줄기를 털어내며 Ananomi의 입구에 들어섰다. 집으로 돌아가거나 늦게 학교라도 가 볼까 생각했지만, 이미 한번 잘못 이탈한 젊음의 궤도는 수정될 줄 몰랐다.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Ananomi 밖에 없었다. 달칵..둔탁한 문소리를 내며 아무도 없는 빈 룸에 앉는다. 구석 구석 젖은 곳에서 뜨거운 몸의 열기와 맞물린 채 하얀 김이 서렸다. 가윤은 아무 생각없이 손바닥을 쥐었다 풀었다를 서너번 반복했다. 그 때 쯤에 바로 규철이 들어섰다. 자신이 Ananomi에 오는 것을 규철이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혹은 룸서비스 중에 하나가 찔렀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Ananomi의 가장 고참 호스트 중 하나이며 가장 돈을 잘 버는 호스트 중 하나인 김규철의 안색이 별로 편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윤은 규철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눈에 띄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제발...’이라고. “계가윤.” 규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잘못한 일들, 혹은 Ananomi에 거짓말 한 것들을 그가 이제 알아낸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지금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정말 싫다. 그러나 상대방은 자신의 맞은 편 쇼파에 털썩 몸을 앉히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미 입을 열고 있었다. “너 어제 작업 갔었지?” 작업이란 2차를 의미한다. ‘전투복’으로 갈아입어..라고 손님이 말한다면, ‘2차 갈 준비를 하자’라는 말과도 같다. 즉, 그냥 술 따르고 적당히 유희를 맞춰주는 것을 떠나서 말그대로 섹스를 하러 간다라는 것과 같다. 그래, 규철의 말이 맞다. 어제 Ananomi에 온지 처음으로 가윤은 2차를 따라나섰다. 한마디로 작업을 갔었다. “오늘 니 손님에게 항의 전화가 왔었어. 매니저가 두손 빌어 사과드렸지.“ “.................” 가윤이 혼자 쉬는 룸에 규철이 들어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2차를 따라나섰을 뿐, 가윤은 Ananomi라는 일급 호스트 바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도망쳐 버린 것이다. “왜 도망쳤지?” “..................” “..경험이 없어서?.........상대가 남자라서?......” “.............” 규철이 셔츠 주머니에서 래죵을 꺼내 불에 붙였다. 아마 찰칵-하고 고급 라이터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그 희미한 불빛으로 그가 쓰게 웃는 입매가 언뜻 보였던 것 같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가윤이 즐겁다는 듯 웃고 있자, 규철도 마주 대답하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짧게 덧붙였다. “아니면, 니가 미성년자라서?” “............-!!!!!!!!!!!!!!” “것도 아니면, 니가 좋아하는 다른 녀석이라도 생각나디? .......니가 보기엔 여기가 놀이터냐?“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규철은 웃는 눈동자였지만, 동공 너머의 영혼은 유리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두근‘- 하고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 뛰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 계가윤.” “......형.........” “너 한번만 더 여기에 발 들이밀면 학교에 전화한다, 이 십새꺄....” “.........규철이 형!!.......” 어른들의 고급 양복. 그 옷깃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윤이 다소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갑자기 뭔가 참으려 할 때마다 식도 부근에서 어른거리는 이 절규같은 비명은 곧잘 내부를 할퀴고 지나간다. 속이 따끔거리고 아픈 상태다. 호텔에서 Ananomi 까지 오는 동안 맞은 비와, 방금 규철이 꺼낸 한 마디에 머리 속의 핏기가 잔뜩 빠져 나간 것 같았다. 뭔가 자신을 부르는 가윤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들렸는지, 규철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찌푸리는 것처럼 안색을 달리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눈길이 변한다. 가윤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위 쪽에서 일어나는 통증이 심리적인 것 이상으로 정말 아팠던 것이다. 망할 놈의 위통. 얼굴을 조금 묘하게 찡그리는 사이, 규철은 안색을 살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짧고 건조하게 웃었다. “..가윤아.” “................” “........왜 우냐?....” “.........-!!!!!!!!!!!!” 울고 있는지 몰랐다. 가끔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다는 의식이 너무나 짙어져서 이제 어느 시점까지 와 있는지조차 짐작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내일부터는 자신을 보자마자 주먹부터 휘두를 것 같은 규철이 낮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한대 콩-하고 쥐어박았다. ******************* 술은 마실 수 있겠지..라고 말하며 규철이 맥주를 두어 개 가지고 왔다. 미성년자인지 몰랐을 때야 양주를 곧잘 쓰리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가차 없었다. 예약 받은 손님도 있을텐데, 흠뻑 젖은 자신에게 타올을 내밀며 그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에 삐딱하게 웃으며 놀리듯 되묻는다. “그래서... ...결국 열 여덟 먹은 계가윤이 나이까지 속이면서 이 짓을 하려는 이유가 같이 사는 그 친구 때문이라 이거지?” “...친구 아니예요.” 가윤이 담배에 손을 가져가자, 규철이 손등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린다. 뭔가 ‘보호받고 있다’라는 기분이 조금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김규철은 확실히 Ananomi에서 가장 세련되고 오래된 호스트다. “친구든 뭐든, 안기고 싶은 건 사실이잖아,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 할 수 없잖아요...라고 말하며 가윤이 안 들리게 얼굴을 붉히고 투덜거린다. 규철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거라도 하면 테크닉이라도 좋아질까봐? 테크닉 좋고, 죽여주게 섹스 잘한다고 아무나 안을 수 있으면 왜 모두가 이 짓을 안 하는데?“ 점점 놀리는 듯한 말투에 가윤은 조금 싸늘하게 웃으며 댓구했다. “...테크닉이 좋아지든 아니든, 그 녀석은 나 안 안아요.” “...그렇기도 하겠지.” “세상에 여자들이 모두 사라져서 여자들의 제국과 남자들의 제국이 따로 생긴다고 해도..” “..그건 너무 삭막한 상상이군.” “..그래도 그 녀석은 나 못 안아요. 세상에 남아 있는 인간이 유일하게 하나 뿐이고,.. 그 하반신 바보새끼가 발정기를 맞는다해도..“ “..어린 놈이 못하는 말이 없군.” “..그래도 그 녀석은 절 안지 않을 거예요.” “........그 녀석 수도승이냐? ...세상에 너 밖에 안 남았으면 그래도 재고의 여지가 있는 거 아닌가? 너무하네, 그 친구..“ 조금 전에 규철이 자신에게 ‘왜 우냐’라고 물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이유, 그러니깐 막 짓눌린 것처럼 압력을 가하던 상반신의 억한 감정이 불쑥 튀어 나온 것이 지나지 않았다. 휴우-라고 짧게 한숨을 쉬고, 가윤은 조금 미소지었다. 언제나 지협이 녀석 앞에서만은 잘 지을 수 있는 그 위장같은 미소처럼 이번에도 입 끝이 단단하게 말려 올라간다. “.........난 그 녀석 친구니깐요. ..그것도 같은 사내 녀석.. 어릴 때부터 얼굴보고 자라온 동네 불알친구..이니깐요.“ “......그럼 더 해줘야지.” 규철이 그 아슬아슬한 미소를 힐끗 쳐다보며 마음에 안든다는 듯 투덜거린다. 가윤은 그의 어린애같은 불만에 조금 하하 거렸다. 약간의 취기와 조금 우울한 날씨..뭐 그런 것들이 단단히 한 몫 했던 거다. 보통 때 같으면, 아무리 미성년자라는 걸 들켰다고 해도 규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 사실은, 아무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목욕도 같이 했고..” “..상대에 대해 많이 안다는 건 좋은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 녀석은 잘 되어가는 여자친구도 따로 있어요.” “..그건 좀 문제군. 정정당당해야지.” “........그러니깐요. ..아무리 정정당당하게 내가 몇 십년을 옆에 붙어 있어다 한들.. ......그 녀석이 그 오래된 친구를 새삼 다르게 볼 리가 없죠. ..더군다나 전 여자도 아닌걸요.“ 그건 복수다. 어떻게 보면, ‘친구’..그것도 몇 십년간 잔인할 정도로 이어져 온 그 관계에 대한 복수. 원하지도 않았는데, 줄곧 그 이름이 강요되어 온 사회에 대한 복수. 혹은 그것을 용납하지도 않은 이 사회에 대한 삐뚤어진 자해극. 처음에는 전부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바보같은 녀석과 호호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18년의 무게만큼의 자꾸 삐그덕 거린다. 녀석의 여자..그런 것이 생길 거라고는 신경도 안 썼었는데, 거기서부터 모든 사이의 틈이 벌어진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계속 나영이 이야기를 해왔다. 결국 나영이 가윤 자신에게 더 호감을 갖는 것은 그 성격좋은 바보 녀석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닌 것이다. 이제 틈은 더욱 벌어졌고, 심지어 엊그제 녀석이 자기에게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진심으로 ‘친구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때는 조금의 쾌감마저 느껴졌다. 그래, 난 니 친구 아냐, 친구같은 거 정말 싫어...잘 됐네..라고 생각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사이, 덩치 좋은 녀석의 등 뒤로 대롱 대롱 따라나서는 그 여자, 나영이도 함께 보였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기분이 이토록 추락하는지 미처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녀석의 무대에서 자신이 기껏해야 오래된 친구, 그 조연의 역할로 머무른다는 게 이렇게 패배감 느껴지는지도 미처 몰랐다. 어차피 이젠 잡아줄 사람도 없다. 친구를 사랑하느니, 혹은 자신에게는 숭고한 우정, 그 이상의 것도 없는 그런 녀석을 사랑하느니..스스로에게 가혹한 체벌을 가하는 쪽이 훨씬 쉬웠다. 가윤에게 있어 십팔세의 늪은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쪽과 다른 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나영처럼 될 수 없다. 그것은 슬프고도 두려운 일이다. 바로 스스로에게 언제나 ‘포기할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기분 때문이다. 이년 째, 날마다 그 넉살좋은 녀석이 헤헤거리며 ‘오늘은 나영이가 말이지..’라고 말했을 때의 기분 같은 건 정말 엿먹는 맛이었다. 녀석은 순수한 우정에 기대어 털어 놓는 유쾌한 속마음이었지만, 날마다 가윤은 속에서 유리사금파리가 춤추는 기분이었다. 녀석은 자신의 여자에 대해 매일같이 떠들어댔다. 반면에 자신은 얼마나 갈비뼈 아래가 너덜 너덜해졌는지, 아직도 제대로 숨을 쉰다는 게 간혹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이번에는 녀석이 등 돌려주길 바랬다. 제발..그 성격좋은 녀석이 ‘이젠 내 친구 아니다’라고 말해주길..얼마나 얼마나 빌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린 아무런 연관도 없이 모르는 사이다.‘..라고 체념 당하는 순간, 정말 고문과도 같은 이 5년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4> 이건 역시 십 팔세의 늪이다. 돌아갈 곳이 뻔하다는 바로 그 ‘늪’. 결국 규철의 엄격한 몇 마디 경고로 인해, 가윤은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뭔가 작심하고 가출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지협이야 워낙 '유쾌한 바보'다 보니 이런 종류의 일에 크게 쓰지 않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녀석이 실내 트레이닝이라도 끝내고 돌아오려면 밤 9시를 훌쩍 넘겨야한다. 지윤은 그 사이에 집으로 들어와 어두운 거실의 불을 켜고, 간단히 샤워를 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몸을 깨끗한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는 사이, 마치 비밀을 캐는 사람처럼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린다. 좀처럼 보기 힘든 성급한 그 행동에 놀라기도 전에 알아차렸다. 녀석이다. 십팔년의 친구, 지나한 룸메이트, 강지협. 바로 '도대체 이런 녀석이 뭐가 좋을까.'라고 스스로도 한심하게 늘 생각했어야 했던 그 상대. 유쾌하고 잘생긴 바보 강지협. 녀석은 잠시 환한 거실 불에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리다가 주방 쪽에 서 있는 가윤을 힐끔 보았다. 역시나 조금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둘 다 공식적으로 '친구도 뭐도 아니다'라고 말한 그 힘겨운 사건을 떠올리는 듯, 크고 단단한 손바닥을 들어 잠시 머리를 쓸어 올린다. 한동안 거실 이 쪽 끝과 주방에서 마주 보는 듯, 서로 멈춰버렸다. 녀석은 뭐가 잔뜩 불만이 어려 있고, 한편으로는 뭔가 불분명한 시선으로 욕을 낮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이내 가윤에게는 아무런 볼 일이 없다는 듯 차갑게 등을 돌리며, 냉정하게 말문을 열었다. "계가윤.. ...너는..............." "나 귀 안 먹었어. 그렇게 이 악 물고 이야기 할 필요 없어, 잘생긴 바보." "장난치지마. 이 새꺄. 니 눈에는 니 오래된 친구인 강지협이 호구로 보이냐? 니가 밖에서 남자를 껴안든, 여자를 껴안든,.. 니 몸을 팔든, 뭔 더러운 짓을 하든 그건 니 사정이지만............" "...........내 사정이지만?" 차가운 금속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지협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려는 걸음을 잠시 멈춘다. 입으로는 웃고 있고, 말로는 장난스럽게 되받아치지만, 가윤으로써는 그 냉혹한 등에 조금 숨이 막혔다. 거절당하는 것이 싫어서, 혹은 혼자만 상처에 베이고 피투성이가 되는 게 싫어서 이런 관계를 자초했지만, 조금 전처럼 녀석이 경멸과 한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볼지 몰랐다. 자신이 아는 강지협은 그렇게 냉혹한 녀석이 아니다. 냉정하기는커녕, 무르고 물러 터져서 언제나 가윤의 얄미운 잔꾀에 잘 속아 넘어가는 잘생긴 바보.........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날카롭고 또 벌레처럼 쳐다보는 친구의 눈길은 처음 보았다. 그건, 장난 식으로 '넌 나 안을 수 있냐? 난 그렇게 되길 원하는데?'라고 물었을 때보다 더 정도가 심하다. ...........하긴, 강지협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라고 가윤은 생각해왔다. 녀석은 성적이 좀 안 좋고 천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과 굉장히 사교적이고 인간적이며 그러면서도 상식적인 녀석으로 통했다. 이른바 노는 것을 좋아해서 조금의 불량스런 면도 있었지만, 녀석은 결코 세상이 정한 룰 안에서 즐기는 건전한 한량 중 하나다. 한마디로 그는 잘 놀면서도 강직한 바보. 그 자체였다. 한번 정한 답을 절대 바꿀 생각이 없는 너무나 건강한 정신세계의 사내. 바로 그것이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그런 녀석이라는 사실이다. 가윤은 녀석의 상식적이고 유쾌하고 호탕한 면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녀석인지도 다 알고 있었다. 운동으로 체육과에 입학하겠다고 결심하던 때부터 2년간 줄기차게 입에 달던 담배도 끊은 녀석이다. 윤나영이 예쁘다..라고 벙실 거린 그 멍청한 순간부터 2년 내도록 그 여자만 생각하고 결에 있으며 즐거워하는 그런 밝은 녀석이다. 그러니 방금 쳐다본 그 싸늘하고 혐오 가득한 눈길은, 정말 가윤에게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향해 애정 어린 한마디를 쏟아주길 기대한 것도 결코 아니지만, 마음 언저리를 씁쓸하게 짓누르는 비참한 느낌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또한 녀석은 자신에게 더 공격을 퍼붓기 위해 돌아보는 순간에도 이전과 결코 달랐다. 자신처럼 이제 생활이 피곤해 죽겠다는 듯, 거슬리는 미소를 지은 채, '휴우-'라고 짧게 한숨을 내쉰다. 지협은 넥타이 매듭을 가볍게 풀며 천천히, 그리고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가윤을 향해 덧붙인 것이다. "니 남자 냄새 달고 여기까지 오지 마, 계가윤." ".............-!!!!!........." "이만큼 시달리는 것도 좇같이 역겨우니깐, 남자 향수 냄새 달고 집에 돌아오지 말라구, 친구." "......................" "아, 미안~ 우린 친구 아니었지.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냐. 그런 건 친한 사이에나 하는 거지. 난 피곤한 게 싫은 것 뿐이야. "..피곤하다라.. ............하아.. 남들이 뭐라 그러든, 니가 상관없다고 말하면 그만 아냐?" "물론 그렇게 말하고 있지. 니가 뭘 잘 모르는가 본데.." 지협은 입술을 더 일그러뜨리며 오히려 비웃듯 가윤을 향해 지독하게 말한다. 끊임없이 상처, 상처, 상처만을 내는 일만 남은 듯, 어떻게든 이 상황을 도피하고 싶은 가윤이다. 그는 재빨리 식탁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녀석은 모르지만, 움켜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날이 설 정도다. "어이, 계가윤씨.." "...................." "부탁이니깐, 한 집에 살아도 이제 내 앞에서 꺼져 줘. 니 입으로 두 번이나 ‘친구가 아니다‘라고 했으니, 너처럼 똑똑한 녀석이 후회할 리도 없겠지. 나도 이 집에 사는 동안, 니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깐, 너도 이제 이 집에서 내가 없다고 그냥 생각해. 그러는 게 서로 편하잖아?" 더 이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녀석을 향해 고개 끄덕이며 웃는 게 불안해졌다. 가윤은 아주 짧은 순간 시선을 돌린다. 친구놀이의 끝이란, 어린 시절의 단순한 동네 놀이처럼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그런 가윤이었건만, 지협으로써는 당연히 더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강지협은 그래도 의리있는 녀석이다. 그만큼 살 부딪치고 같이 살아왔으니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안다. ..잘 안다. ..언제나 장난처럼 가윤의 머리카락위로 손을 꽂아 마구 헝클어 놓던 겁 없는 탄탄한 손바닥. 그 열띈 체온을 기억해 내며 가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시선을 피한채, 뭔가를 떠올리듯 웃는 자신에게 그는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정말 비수처럼 꽂아대는 한 마디에 가윤은 일순 기억에서 회귀하고 만 것이다.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지난 십팔년 동안, 그나마 너를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 "넌 괜찮은 놈이 되기엔 이미 너무 썩거나 더러워진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런 식으로 사는지 이해도 안되고.. 같은 사내 녀석을 안고 안는다니..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없거든?" "..............그래." "부탁이 있다면, 친구로써의 마지막 부탁인데,...." "............." "제발, 나영이 앞에라도 얼씬거리지 마라. 원래 너라는 녀석이 냉정한 놈이다 보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니가 그 녀석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는 게 나로서는 편하겠어." "..............-!!!!!!!!!!!!!!!" “처음에 니가 나영이 마음 알면서도 그냥 웃으면서 샐샐 받아줬을 때는, 그게 더 잔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보다 요즘의 상황이 더 거슬려. 그냥 서로 없는 셈 치고 살자. 그리고 기왕이면 나영이도 모르는 척 하고 살고.. 나도 내 여자도 병 걸리는 거 싫어.“ 아주 차가운 얼음에 화상을 입는다. 가윤은 한참을 그저 앞만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웃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술에서 세어 나오자, 뭔가 메마르고 퍼석해진 자신의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턱을 다시 치켜들고 묘하게 웃으며 오래된 친구의 눈을 쏘아본다. 정면으로.. 아무에게도 보상받지 못하는 이 거친 감정에 도저히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니가 내 감정을 모른다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냥 웃으며 상대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이 잔인한 일이다’라고 말한 그 장본인이 바로 강지협이다. 그게 바로 지난 2년 동안 가윤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여자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으로 버젓이 꺼내 놓는다. 남은 얼마나 위가 뒤틀리고 신물이 넘어오는데, 잘생기고 유쾌한 바보 따위가 그런 걸 알아!.......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서 가윤은 앞을 쏘아보았다. 녀석의 멋뜨러진 미간이 잠시 그 시선에 불만을 가진 듯 잔뜩 흐려지고 있었다. ***************************** 강지협에게 이것은, 예를 들자면 전혀 예상치 못한 당혹감이었다. 비교적 건강하고 강직하게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한 열 열덟의 어떤 사람이, 문득 새로운 상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바로 딱 그 짝이었다. 거의 만 이틀 만에 외박식을 치루고 돌아온 가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지협은 맥이 탁- 풀리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 화도 나지 않는다. 그 흔한 짜증조차도 나지 않는다. 이제 녀석에게 ‘왜?’ 라고 묻는 것도 지쳤다. 어차피 녀석은 언제나 놀리는 태도일테고, 절대 그 잘난 척하는 입을 열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셈이니깐. 그나마 자신에게는 소중한 우정의 울타리를 근근이 잡아야 하나..라고 고민도 해 보았지만, 가윤 쪽에서 이미 완전히 틀어버린 것이라면 어쩔 수 없다. 지협은 모질게 마음 먹고 한마디 건넨 것이었다. 나영의 이야기까지 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별 거 아니지만, 부모님이 이번 달 말에 집에 오시기로 했기 때문에 그 걱정마저 짐이 되어 던진 일종의 비난이었다. 학교 선생님에게 걸리지 않은 것만도 천만 다행이다. 하지만 거짓말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 가윤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중으로 무언의 고문을 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한마디 건넬 심보였는데 예상치 못하게 공격의 잔인함이 좀 더 강해진 것이다. 그것은 지협 자신이 좀 더 수월하게 표현하기 위해 가윤을 향해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자초한 일이다. 처음, 지협은 잠시 입을 달싹였다. 문득, 막 씻고 나온 가윤의 삐뚤어진 그 미소, 여전히 얄미울만큼 수려한 얼굴을 보며 정말 한마디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협은 대신 아주 짧게 한숨처럼만 입을 열었다. “......계가윤..... ...너는..............” ...이라고. 어쩌면 그 뒤에 더 꺼내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너는 그런 식으로 소문내고 그런 행동을 하고 다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던 나조차도 저절로 의식하게 되잖아’ 식의 말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대신 지협은 녀석이 들어오지 않은 48시간 가까이 자신이 무슨 상상을 했었는지에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 상상. 한국의 막강한 18세, 그 피 끓는 청춘이 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상상. 지협은 자신이 친구가 벌이고 있는 어른의 놀이를 상상했다는 게 스스로 놀랬다. ‘맙소사..내가 왜 그 녀석을 상상하지?’와 ‘정말, 얘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윤이 그렇게 한단말야?’..바로 그 둘 사이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왜 자신이 막상 가윤을 보는 순간, 때리거나 욕을 퍼붓는 게 아니라 마음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일종의 분노다. 언제나 웬갖 잘난척으로 방실 방실 자신을 비웃으며, 어느 날 갑자기 ‘난 너와 달라’라고 말한 후에 어른의 세계로 먼저 얄밉게 미끄러진 친구에 대한 분노. 녀석은 지금 막 샤워를 마친 듯, 다소 피곤해 보이는 눈가로 자신을 가만히 쳐다봤는데, 그 얄미운 미소는 변함없지만 물기가 찰랑거리게 떨어지는 머리카락부터가 일단 마음에 걸렸다. ..그것이 웃기는 거다. 십팔년동안 계가윤이 목욕을 한다든지 샤워하는 꼴은 죽도록 보아왔다. 눈여겨 본 일은 없지만..아니, 같은 사내 녀석끼리 샤워하는 걸 눈여겨 볼 리도 없지만, 갑자기 의식하게 된 자신이 놀라운 거다. 말도 안 되고 기묘한 기분에 오싹해진다. 아이들이 녀석의 길고 잘 빠진 목선에 사로잡힌 키스마크를 이야기했을 때도 아무 생각 없었다. 남들 눈에나 이뻐보이지, 아주 아기 때부터 서로 볼 꼬집으며 살아온 사이끼리 그런게 눈에 보일 턱이 없다. 그러니 미치겠다. 지금 딱 환장하겠는게 바로 그거다. 지금은 눈에 보인다. 그것도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선명하게.. 똑똑히 가윤의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이는 거다. ‘할 말이 뭐야?’ 식으로 자신을 나른하게 비웃듯 쳐다보는 저 얄미운...........얼굴. 갑자기 대뜸, 녀석의 젖고 피로한 어깨를 잡고, 정말 얄미워 미칠 지경인 시선을 향해 다그치고 싶었다. ‘너, 도대체 어디에 있었어!!!!!!!!!!!!’ 라고. ..혹은, ‘지금까지 누군가와 이렇게 저렇게 혹은 그 딴식으로 어떻게 ...-!!!!!!!!!!!..’라고 머리 속에 마구 마구 영상이 돌아가는 거다. 사람 돌아버리겠다. 지협은 비록 혐오한 적은 없지만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던 그런 종류의 상상, 즉 누군가 다른 사내 녀석 그것도 어른이 지금 젖은 저 녀석을 안고 마음대로 농락했다..라는 것을 머리 속으로 부지런히 망상한다는 것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예전같으면 말을 듣는 순간, 혀를 차고 웃어 넘겼겠지만 막상 눈 앞에서 저렇게 거만한 턱을 치켜들며 자신을 비웃는 가윤은 엄연히 현실이다. 미끈한 몸은 젖어 있었고, 반바지 만을 걸치고 있었을 뿐, 언제나처럼 18년의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향해 놀리고 있다. 그래서 결국 그 이상하게 눈 앞에서 정처없이 돌아가는 좇같은 환상 때문에 지협은 잔인하게 친구를 공격했다. 그냥 내 앞에서 ‘나는 남자가 좋아’라는 정도라도 끝내..부탁이야. 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그럼 그 정도로 이상한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같이 살지만 않고, 얼굴 부딪칠 일이 지금보다 줄어든다면 더욱 그 망할 상상을 안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지난 십팔년 동안, 그나마 너를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 "넌 괜찮은 놈이 되기엔 이미 너무 썩거나 더러워진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런 식으로 사는지 이해도 안되고.. 같은 사내 녀석을 안고 안는다니..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없거든?" ..라고. 꺼내 놓고 보니 심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협은 왠지 며칠 전에 ‘저 녀석은 정말 내 친구 아냐.’라고 말했을 때의 아주 작은 변화. 즉, 오래된 자신이 아니라면 절대 눈치 챌 수 없는 그 미묘하고 섬세한 변화가 녀석에게서 이는 것을 제대로 파악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오만해 보이던 얄미운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지협의 거친 공격에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며 웃고 있는 입으로 어떻게든 허세 부린다. 깨끗한 얼굴, 하나 하나 깔끔한 얼굴 선. 어떻게 해도 망가질 것 같지 않던 그 고고한 녀석이 무척 짧은 찰나 위태로워보였다. 그 순간, 지협은 자신의 내부를 빠르게 스쳐가는 왠지 뜨거운 공기를 의식했다. 저 아무런 오점 없을 것 같이 정갈한 외모로 잘도 타락하고 싶어하는 오래된 친구는.. ...정말 낯선 사내 녀석들이랑 즐기고 그걸 어떻게 표정으로 나타낼까..혹은 진짜 무너질 때가 있긴 한 걸까...누군가에게 애원하거나 부탁하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치욕적인 상황을 얼굴 붉히며 무너질 수 있을까..하는 실로 엄청난 상상! 왜 사람들이 파멸에의 욕구를 가지는지 순간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더욱 차갑고 잔인하게 입술을 비틀며 그에게 말했다. “그냥 서로 없는 셈 치고 살자. 그리고 기왕이면 나영이도 모르는 척 하고 살고.. 나도 내 여자도 병 걸리는 거 싫어.“ ‘내 근처에도, 내 여자 근처에도 오지마..‘ 라고 은연중에 원나영이 이제 자신의 여자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듯 조금 삐뚤어진 이상한 보복 심리로 몰아친 것이다. 왜 이렇게 엉뚱한 욕구가 들었는지는 설명하기 힘들었다. 사실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머리가 휙- 도는 것처럼 뇌 상태가 심히 이상해진 강지협이 그 순간에 껴안는 욕구는 그게 전부였다. 이 빌어먹을 정도로 거슬리고 얄밉고 그러면서도 오래되어 앙숙처럼 신경 쓰이는 친구. 그 녀석이 보여주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순식간의 무너짐이 지금 필요하다. 오랜 달리기를 마친 것처럼, 이상한 기대감으로 머리 속이 쿵쿵- 울리고 식도 끝이 바싹 타고 입 안이 메마른다. 엄청난 인신 공격에 가윤은 역시 지협의 예상대로 반응하고 만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도도해보이던 그 깨끗한 얼굴이 목덜미까지 붉어지며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린다. 뭔가 잠시 생각하듯 시선을 피한 채, 크게 숨을 들이 마쉰다. 그걸 관찰하는 것, 혹은 생전 처음으로 그 모습을 눈여겨 볼 때의 이 감정이 이렇게 교묘한 통쾌함인지 몰랐다. 오랜 시간, 하도 오랜 시간 이 녀석에게 놀림감이 되고 착하고 좋은 친구로만 살아왔더니, 정말 상처입히고 입을 때는 녀석이 이러리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쏟은 말은 심한 말이었지만, 가윤의 정갈한 얼굴도 조금 고통스러운 듯 찡그리고 숨을 몰아쉰 것이다. 하필이면 그 모습이 오히려 이제 막 지협의 뇌를 침투한 그 망할 놈의 상상- 다른 녀석과 자신의 오래된 친구가 정말 얽혀 있다는 그 쓰고도 짜릿한 상상- 을 더욱 부채질 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문득 가윤의 그 약간의 찡그림과 은밀하게 몰아쉬는 한숨...그것들로 인해 허벅지가 단단해진다. 공격을 받은 가윤이 잠시 피하던 시선을 돌려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며 다시 입술을 비틀며 웃었을 때는 아예 복부까지 단단해졌다. 정말 싫다. 친구를 상대로 이따위 상상이나 하게 되고.. 아니, 이렇게까지 만드는 이 녀석의 정말 싫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협이 엄격한 시선을 더욱 찌푸렸을때, 서로 시선이 마주친 사이로 가윤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깨끗한 그 얼굴위로 그린 듯 올라간 삐딱한 미소는 몹시 대조적이다. 뜨거운 공기를 받은 붉은 입술이 잔뜩 비틀어진 채, 지협을 향해 웃기다는 듯 중얼거리는 것이다. “니 여자라구, 강지협?” “...............” “재미있네. 그거. 니가 나영이를 니 여자로 만들었어?“ “........-!!!!!!!!!!!!!!” 그리고는 조금 다가왔다. 몹시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낮게 키득거리며 가윤이 젖은 머리카락을 성가신 손짓으로 쓸어 넘긴다. 빗질도 하지 않은 조금 헝클어진 그 머리가 깨끗한 이미지에 얽힌 비밀같은 선정성을 더욱 부각 시켰다. .............지협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너무나 한심해져서 천정을 올려다 본 채, 큰 소리가 날 정도로 한숨을 쉰다. 그 때를 노리듯, 얄미울 정도로 단정한 얼굴이 크게 웃음을 토해냈다. 반격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강지협이 그랬다니..말도 안 돼지. 너 여자랑 자 본 적 있어?“ 진짜 나쁜 새끼..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술술 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더욱 악랄하게 웃으며 덧붙인다. 천사처럼 달콤하게 웃는 것 같지만, 입술만은 독설을 내뿜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세상에서 나보다 널 잘 아는 인간이 있어?” “..........-!!!!!!!!!!!!” 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일을...이라고 퍼뜩 정신이 들기도 전에, 가윤이 자신의 넥타이를 휙- 잡아 당겼다. 지랄같은 교복 넥타이. 짙은 남청색 넥타이가 녀석의 목욕한 향에 파묻혀 손가락 사이로 걸린다. 자신만만하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목이 꺾이듯 녀석과 얼굴을 바싹 붙이고 말았다. 빼 내려고 하면 빼 낼 수도 있지만, 지협은 대신 인상만 더욱 험악하게 굳힌다. 방금 이 녀석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부모님보다 자신을 잘 아는 게 바로 계가윤이다. 그러니깐, 화가 난 자신보다 더 이글 이글 불타는 눈동자로 넥타이를 잡아 당겨 얼굴을 밀어 붙일 정도로 이 녀석은 강다구가 있다. 갑자기 두근 두근.. 일그러지는 얼굴이 이상한 상상을 품게 만들었다면, 이 쪽에서 가까이 들여다보는 - 이 역시 생전 처음으로 이렇게 자세히- 화 난 듯한 시선도 굉장히 어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침묵이 끝났다. 비웃는 거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녀석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키스는 할 줄 아냐, 유쾌한 바보?” 마찬가지로 속이 해일을 만난 듯 뒤엉키며 요란한 심장운동을 일으켰지만, 지협은 끝까지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가 무슨 상관인데?” “물론 상관없지. 나도 강지협이라는 인간이랑 의리 끊은 지 오래니깐...“ “.....................” “하지만, 직업병이 있어서 그래. 그런 말 들으면 꼭 확인하고 싶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코 밑에서 알짱거리는 긴 속눈썹이나 뜨거운 호흡.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기란 힘들었다. 비록 말로는 퉁명스럽게 ‘니가 뭔 상관이야?’ 라고 쏘아붙였지만, 계가윤이 달리 계가윤인가. 콧 웃음 한번 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은 냉정하게 넥타이를 가까이 잡아당긴다. 일순 녀석의 얼굴이 각도를 비틀었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훅- 하고 단단한 복부가 더욱 긴장했다. 그 순간에야 정신이 번쩍 들은 지협이 다급하게 외친다. “야!...........” .........라는 아주 원초적이고 선명한 거절. 그러나 ‘이게 뭐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가윤의 달콤한 시선이 먼저 자신의 턱 끝을 쏘아본다. 턱 끝이라기보다는 좀 더 위 쪽...그러니깐, 지협이 찡그린 채 닫은 그 입매의 선을 나른하게 흩어갔다. 아마 더욱 일그러지는 쪽은 자신이었던 것 같다. ‘설마..’하는 생각이 빛처럼 빨리 스쳐갔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다. 잘난 척 하던 가윤의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시야가 캄캄해진다. 그리고 쿵- ..아마, 자신이 기억하는 어떤 시간보다 빠르게 혈관들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 계가윤이.. 그러니깐, 자신의 십팔년 지우 계가윤이.. 요즘에는 배로 거슬릴 정도로 엄청나게 얄미운 잘난척 덩어리 계가윤이.. “...............흐응....................” 짧고 미묘한 콧소리를 내며 만족스러운 듯 입 맞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계가윤이.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니라 이런 종류의 일에 기겁을 할만한 강지협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을 그저 단순한 놀림이나 위협을 생각했던 지협에게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조금 전의 이상한 상상들..그 말도 안 되는 검은 유혹이 제대로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물론 그는 한순간 숨이 멈췄다. 자연스럽게 놀란 손이 가윤을 밀어내기 위해 뻗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살짝 입술 선을 따라 부드럽게 부딪치는 질감은.. ....이런, 제기랄!!!!!!!!!!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부드럽고 몽클한 느낌이었다.. 마치 스폰지에 물이 배이듯 촉촉하게 스미어 온다. 스미어온다니....미쳤지. 그런 생각을 하다니..완전히 미쳤지.. 믿을 수 없다! 이 녀석의 그 뾰쪽하고 눈꼴 시릴 정도의 잘난척 하는 도도함에 비하면, 정말 믿을 수 없을만큼 아찔한 촉감이었다. 질끈.. 지협은 눈을 꽉 감은 채, 입 안으로 파고드는 악녀같은 혀에 경악했다. 몰랑 몰랑한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입안을 유린하고 장악한다. 순간적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마구 헤집어 대는 타액에 다시 훅-하고 허벅지 사이가 단단해졌다. 뭔가 더 위급해진 기분을 느끼며 지협이 순간적으로 가윤의 어깨를 잡는다. ‘이 녀석은 미우나 고우나 내 친구다. 지가 아무리 발광을 하고 잘난 척을 해도,...’라고 간신히 정신을 다잡을 때였다. 간절하게 제정신을 회복하려는 지협의 마음을 여전히 비웃듯, 녀석의 매끈한 혀가 자신의 당황한 혀를 감싸며 마구 몰랑거린다. 그 찰나만큼은 정말 지협도 빡 돌 지경이었다. 그건 조금 전의 야릇한 아찔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도가 좀 커진 거다. 아아..라고 지협은 짧게 속으로 탄식했다. 무의식적인 탄식이다. 그 감질 맛 나는 태도..뜨겁고 물기 가득하게 자신의 혀와 얽혀 있는 그 몰캉거리는 느낌. 그것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잡히기만 해 봐라. 니가 나에게 이런 장난까지 친단 말이지..아예 그 얄밉게 몰캉거리는 놈을 씹어주지..’ 라는.. 아니, 그보다는 허리를 향해 무의식 중에 들어가는 힘. 그 미묘한 본능 때문에 저절로 녀석의 숨어버린 혀를 찾아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반응했다. 조금 전의 녀석이 하듯, 요리조리 피하는 녀석을 찾아 애타게 갈증이 났다.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언제나 얄미운 눈, 얄미운 목, 얄미운 팔, 얄미운 다리, 얄미운 코, 얄미운 미소, 얄미운 이 키스!!! 녀석은 정말 계가윤이 맞았다. 그는 후끈할 정도로 잽싸고 감미롭게 자신을 희롱하더니 이내 뒤로 빠졌다. 아쉬울 정도로 뜨거운 공기를 토해내면서 자기 할 건 다 하는 셈 치고 갑자기 입술을 떼고 만 것이다. 지협은 뭔가 쑤욱-하고 뜨거운 공기가 폐를 통해서 밖으로 나가는 기분이었다. 섬세한 안타까움이 갑자기 갈비뼈 부근을 물씬하게 통과한 것이다. 결국 희미하게 지협은 불만을 토해냈다. “..................야....”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다. 마음은 그보다 심하게 갈라져 있다. 조금의 긴장과 조금의 불만, 그리고 약간의 안타까움이 범벅된 전체 요리와 같다. 희미하게 눈을 뜨자, 녀석이 보인다. 여전히 코 끝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떼일 듯 말 듯 여전한 입술 사이로 거친 공기가 달아올랐다. 지협은 그 순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감미로운 시선. 한번도 본 적 없는, 야한 느낌의 친구. 머리 속으로 여러가지 경고음이 함께 울렸다. 마치 코치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강직한 열 여덟, 그래도 딴에는 의리의 사나이 강지협은 거칠게 손을 뻗어 가윤을 밀어냈다. 밀어내는 순간의 녀석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그리고 격렬하게 밀어냈기 때문에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도 못참겠다는 듯, 지협은 거의 불쑥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가윤은 희미하게 웃는다. 어딘가 지독하게 상처 입은 듯한 그 미소는, 어른 거리는 정신 속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입술을 뻑뻑- 닦아내는 자신에 비해, 녀석은 여전히 달콤한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였다. 가윤은 자신처럼 입술을 닦는 대신에, 마치 지협 것으로 보이는 타액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졌을 뿐이다. 바로 조금 전에 미친듯이 얽혔던 그 붉은 입술 위에서 말이다. 둘 다의 공통점은 단 한가지였다. 둘 다 날카로운 눈동자로 서로를 노려본다는 것뿐이다. 지협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이글되는 시선으로, 그리고 가윤은 차가울 정도로 깊은 비웃음으로.. “............미친 놈.” 마침내, 지협이 말했다. 가윤은 그 말에 그저 피식 거렸다. 그리고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천사처럼 달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만원만 내. 그럼 더 뻑- 가게 해줄게.” 그 말에 정말 뻑 돌아버린 건 지협이었다. 정말 얄미운.. ...오래된 친구가 자신을 놀린다는 걸 알아차린 거다. 믿을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일들이 놀리는 거라니.. 거의 실성할 것같이 내부에서 열이 마구 치밀었다. 철썩- 하고 들고 있던 가방을 소리나게 내던지며, 그는 차갑게 가윤에게서 등 돌렸다. 그와 동시에 가윤의 그 어처구니없는 한마디에 질릴 정도로 험악하게 대답한다. “니가 나한테 십억을 줘도 너같은 건 안 안어." “.......................” “..재수없는 새끼......” 쿵- 하고 둘 사이에 경계를 긋듯 문을 닫고 들어설 때까지, 지협은 관자놀이가 튕길 정도로 아플 지경이었다. <5> 지협은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북북 긁었다. 엉겁결에 키스를 당한 그 웃기지도 않는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린다. 그 와중에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지협을 향해 누군가가 신이 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야, 강지협! 우리 내일 너네 집에 놀러가도 되냐?” 같은 반 친구 녀석인 동일이었다. 남동일. 녀석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는 지협은 방금 그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조금 더 난감한 생각, 그러니깐 시도 때도 없이 파고드는 그 날의 영상을 떠올리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것이다. 그 와중을 노리기라도 한 듯, 동일과 다른 두 어 녀석이 우당탕탕- 교실을 가로질러 지협을 향해 뛰어왔다. “우리 너네 집에 가도 되냐구, 내일~..죽이는 비디오 빌려 놨거든.” “..우리 집?” “내일 토요일이잖아?” 아무래도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는 지협의 집은 그 동안 아지트였다. 그러나 녀석들이 노리고 있는 건, 어쩌면 최근에 뒷소문 흉흉한 가윤에 대한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칫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지협은 망설였다. “씨방새야. 야한 비디오라면, 요새는 동영상으로 다운 받아 보면 되잖아?” 한국의 18세. 그들만의 커뮤니케이션. 지협의 시큰둥한 대답에도 그러나 녀석들은 지치지 않고 눈알을 굴려댄다. “야, 같이 보면서 같이 딸딸이치는 재미가 얼만데~~!!..” 씨바, 퍽도 좋겠다..라고 중얼거리며 지협은 더욱 인상을 굳혔다. “몇이나 올건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일 저녁 쯤이면 녀석은 집에 없을 것이다. 최근 몇 달동안 토요일이라고 녀석이 집에 있었던 적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자신이야 사실을 알기 전까지 녀석이 공부하러 간다고 착각했지만..아무튼.. 질문을 던지는 지협의 의도가 마치 승낙처럼 여겨졌는지, 동일이 더욱 신이나서 대답했다. “우리? 셋 다 갈거야. 나랑, 상욱이랑 범기랑......” 무려 셋이나 와서 우리 집에서 야한 비디오 보면서 딸딸이 친다고?...니들이 지금 제 정신이냐?..씨바, 사내 새끼들만 우글거리는 반이다 보니 못하는 말이 없군. “가도 돼?” 그만 여러가지 일로 머리 속이 복잡해진 지협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문제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가윤은 집에 있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그리고 같이 온다는 범기와 상욱은 가윤과 자신처럼 일학년 때 모두 한 반이었다. 서로 인사 정도는 나눌 정도의 사이다. 아차..라고 생각해보니, 이번 주 일요일이 바로 월 말이다. 즉, 이 녀석들과 토요일만 좀 견디면 바로 나영과 주말에 영화보기로 약속한 그 날인 것이다. 지협은 그 생각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괜히 오래된 친구 가윤에 대해 생각하다가는 조만간 미처버릴 자신이 두려웠던 것이다. ***************************************** 설마하니, 토요일 오후에도 가윤이 집에 있는지 몰랐다. 지협은 현관에 남아 있는 녀석의 신발을 알아보는 순간, 흠칫 놀란다. 등 뒤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다른 녀석들과 거실을 번갈아 쳐다보며 일순 긴장했다. “뭐야? 왜 안 들어가?” 토요일 오후에 가윤은 대부분 집에 있지 않는다. 이전에는 녀석이 독서실을 간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어디에 가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다. 그러나 하필이면 재수없게......오늘 녀석은 집에 있다. 더군다나 집에서 야한 걸 보겠다고 떠들어대는 다른 녀석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지협의 안색이 변하든 말든 물론 그 녀석들에게는 관심 밖이었다.친구 녀석들은 잡다하게 떠들며 거실에 제각각 주저앉았다. 휙-하고 교복 상의를 벗자마자 지협은 조금 인상을 굳힌 채, 쇼파에 드러눕는다. 지 방에 있는 건 분명한데, 코빼기 하나 비취지 않는 계가윤이다. 녀석이 나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갑자기 민망해진다. 친구들이 이러는 거 한두번도 아니지만, 이전과는 결코 다르다. 가윤이 사내 녀석들과도 즐기는지 몰랐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혈기왕성한 18세들이다. 이 나이 또래에 한번쯤은 겪는 통과의례와 같다. 그런데도 가윤이 있는 집에서 이런다는 게 새삼 찝찝해지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 중에서 가장 성격 급한 상욱이 닫힌 방문을 턱으로 가리키며 소근거렸다. “야...걔 있냐?” 가윤이를 의식하는 건 비단 오래된 친구 지협만이 아닌 것 같다. 다만 세 녀석 중에서 범기라는 녀석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소매를 둥둥 걷으며 벙실거렸다. “그런 게 무슨 상관있어~ 그냥 돌려.” 동일이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묵직한 테이프를 꺼냈다. 화면이 돌아가고, 녀석들은 사발면이며 콜라며 꺼내놓고는 퍽이나 시끄럽게 모션을 지켜본다. 지협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하게 앞만 쳐다보았다. 신경은 끊임없이 닫힌 가윤의 방을 향해 뻗어간다. 오늘 같은 날, 가윤이 클럽에 가지 않았다는 걸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다른 녀석들이 조금씩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흐으응...이라고 화면에서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났다. 분명히 닫힌 저 방에도 들릴 것이고, 가윤은 지금 누가 와 있는지 뻔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치겠다. 지협은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신경 쓰는 녀석의 존재자체가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저 여자 가슴 죽인다...........” 누군가 말했다. 서양 여자들이 흔히 그렇지..뭐..라고 중얼거리며 지협은 팔배게를 하고 누웠다. 이 쪽 저 쪽으로 편하게 누운 녀석들이 점점 말이 없어지는 걸 보니, 아마 점점 달아오르는 모양이다. 화면으로는 참 굉장해 보인다. 그 쥐어짜는 듯한 교성하며, 질퍽한 교접의 향연. 대단하군...이라고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화장지를 찾았다. 지협은 일부러 아래 쪽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상욱이의 뒷목덜미가 붉게 변하는 게 벌써 싸도 한참 쌀 상태이다. 작작들 좀 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화면 속의 여자가 길게 비명을 지른다. ‘저건 다 조작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여간해선 이성적이 될 수 없다. 드디어 앞자리에서 범기가 끄응-하고 작은 신음을 토해냈다. 지협의 입장에서보면 믿기지 않을만큼 집중이 안되는데, 이 녀석들은 정말 대단하다. 아니, 어쩌면 이게 현실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래도 가윤의 오랜 친구가 아닌가. “..야...휴지..............” 하얀 교복 셔츠를 반 쯤 꺼내 놓은 범기가 중얼거렸다. 동일이 자신의 옆에 나뒹구는 휴지를 힘차게 던지는 순간, 여자의 신음소리가 더욱 강도를 높였다. 한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표정 때문에 지협은 저절로 마른 침을 꿀꺽-삼킨다. 그것은, 단지 야하고 선정적인 영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묘하게 일그러지는 여자의 작위적인 표정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까 놓고 인정하자. 문득, 그 위로 교차하는 얼마 전 친구 녀석의 기묘한 표정 때문이었다. 연출된 저 장면보다 훨씬 뭔가 확-하고 정신이 들게 만들던 그 야한 느낌.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야..넌 안 하냐?” 동일이 의아하게 돌아볼 때까지 지협은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멍할 정도의 머리 위로 거침없이 투과되는 영상.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다. 방금 전에 또렷하게 가윤이 스쳐갔다고 말하기도 민망하고, 그렇게 말을 꺼냈다간 이 녀석들이 뭐라고 말할지도 뻔했다. 지협이 대답없이 눈쌀을 찌푸리자, 동일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벌컥- 닫혀졌던 문이 열렸다. “............?..............” 어딘가 벗은 듯, 엉거주춤하는 시커먼 사내 녀석들의 모습과는 이질적인 표정이다. 가윤이 문을 열다 만 듯한 자세로 무심히 자신들을 응시한다. 무리들은 일순 당황했고, 가윤은 더욱 싸늘해졌다. 마치 그 상황을 즐기는 듯, 차갑고 수려한 얼굴. 쵸핏한 눈꼬리가 가늘어지며 여전히 시원하고도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 계가윤은 그들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지협은 방금 전까지 한심할 정도로 자신을 짓눌렀던 친구의 야한 얼굴을 떠올리며 순간 굳어버렸다. 남은 녀석들은 어버버 거리는 이상한 단어들로 가윤에게 제각각 인사를 건넨다. 말이 인사지, 사실은 외계어처럼 버벅거리는 낱말의 조합이다. “........가..가윤아..어디 가냐?” 차마 같이 하자는 말은 못하고, 범기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가윤은 외출을 할 생각이었는지, 초록색 물 빛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분할 정도로 상큼하게 웃으며 녀석이 대답한다. “잘생긴 회사원이랑 원조교제 하러 간다..왜?” “..........-!!!!!!!!!!!!!!!” 쿵-하고 말없던 지협의 심장이 덜렁거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윤은 한심해하는 눈길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런 말을 대 놓고 하는 친구 녀석 때문에 지협은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열심히 포르노에 매진해야 할 녀석들도 심각하게 황당해 했다. ‘잘생긴 회사원’이라는 또렷한 어감자체도 문제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관계를 의미하는 뜻이다. 지협이 홧김에 벌떡 일어서며 이를 갈듯 자신을 노려보는데도, 가윤은 으쓱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 진한 씩씩거림에 상관없이 여유만만하게 문을 닫고 나가 버린다. “.............방금 그거 무슨 말이냐.................” 최근에 돌고 있는 소문을 익히 알면서도 녀석들은 얼음처럼 싸하게 얼어버린다. 이럴 줄 알았다. 가윤이 집에 있고 녀석들이 들이 닥치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저 언제나 얄미운 배꼽 친구가 결국 이렇게 사고칠 걸 뻔히 알았다. 지협은 잘생긴 미간을 잔뜩 구기며 말없이 남은 녀석들마저 노려본다. 마치 애꿎은 곳에 화풀이 하는 자신의 태도가 영 못마땅할 정도였다. 맨발로 현관을 뛰쳐 나간 건 거의 십여초 흘렀을 때였다. 엘레베이터 앞에 서 있던 녀석이 자신을 힐끔 돌아본다. 깔끔한 녀석의 뒷목을 조르듯 한 손으로 확 낚아채며, 지협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자신이 몹시 불쾌하다는 증거다. “내가 말했지.. 니가 밖에서 어떻게 놀든 상관없어. ..그래도 다른 녀석들 앞에서 그 딴 소리를 지껄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니가 무슨 상관이야?” “ 붉은 입술이 혀를 날름거린다. 마치 별것도 아니라는 그 태도에, 지협의 머리 속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일은 나영이도 올거야. 니가 그런 말 떠드는 거..도저히 내가 못 봐주겠다.“ “뭘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꿀꺽- 갑자기 손바닥에 와 닿는 녀석의 목덜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호흡이 섞일 정도의 거리다. 문득, 이 녀석이 키스할 때가 생각나서 초조해져 버렸다. 지협은 다시 변덕스러운 사람처럼 녀석을 밀어내며 차갑게 잘라 말한다. “상식적으로 놀아, 계가윤.” “....난 충분히 상식적이야, 강지협.” 좋아..그럼..이라고 말하며 지협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긴다. 나야 말로 어쩌면 좋겠니...라고 속으로 몇번 욕을 내뿜는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니 악랄하고 얄미운 구석이 없어질까. 너는 왜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으면서 항상 내가 싫어할 행동만 골라서 해야 해. “내일 나영이가 올 때, 니가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까지 말하게 만들어! 왜 내가 너를 포기하게 만들어...나도 충분히 힘든데, 왜 너만 힘든 것처럼 말하고, 너만 기꺼이 추락해 버리는 건데..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니..가윤아.. “알아들었어? 니가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구!..” 이를 악물고 말하자, 가윤이 긴 속눈썹을 몇번 깜박이다가 미려한 얼굴로 살짝 웃었다. 아주 삐뚤어진 그 미소가 덜컹 마음에 걸린다. 나 너한테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잖아...그러니깐, 제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자, 새꺄.... “왜?” 가윤이 웃으며 반문한다. 아니, 기가 막힐 정도로 얄밉게 미소지으며 반짝이는 눈동자로 속삭였다. “그 기집애랑 아까 비디오처럼 놀려구?” “..............-!!!!!!!!!!!” 그게 나쁘다곤 생각하진 않지만, 그 적나라한 한마디에 기가 막힌 것이다. 지협이 있는대로 인상을 쓰자, 녀석은 그러나 더욱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진짜? 진짜야, 강지협? 정말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이야~..재미있네. 그럼 내가 백번 양보해야지. 당연히 내일 나가줄게. 진작 이야기하지..“ 이번에야 말로 지협은 정말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는 말없이 뒷걸음치며 가윤의 살짝 갈라진 미묘한 음색에 긴장했다. 딩동- 엘레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대로 자동문이 닫히고 가윤이 사라질 때까지 지협은 말없이 문만 노려보았다. 훅-하고 숨을 들이쉬자, 뻑뻑한 갈비뼈가 아프게 죄어온다. *************************** 규철이 안전밸트를 풀어줄 때까지, 가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저녁 내도록 조용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문제의 ‘잘생긴 회사원’이 쓰게 웃는다. 정확히 따지자면 위로겸 심심풀이 저녁 식사다. 사실 그 정도로 심한 말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만 거실에 앉아 있는 녀석들을 보니 너무나 속이 뒤틀렸다. 강지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 것 같다. 마치 보란듯이 그런 녀석들을 집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을 자극하고 갱생의 길로 유도하려는 것이다. ‘봐라, 이게 정상적인 18세다’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어이~..애인!” 규철이 자동차 핸들 위로 얼굴을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마 다운된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부드럽게 놀리는 말투다. “내가 왜 형 애인이야...” 콧방귀를 끼듯 피식 웃는 가윤의 모습에 규철은 재미있다는 듯 뻣뻣한 뒷 목을 젖히며 밝게 대답한다. 역시 그는 어른인 것이다. 홧김에 술을 잔뜩 마셨는데도, 그는 이럴 때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그 점이 정말 편하게 느껴졌다. “왜, 오늘부터 우리 원조교제 하기로 했잖아?” “.........형은 원조만 해줘도 돼요.”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걸 안 뒤로, 규철 때문에 클럽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졌다. 가윤은 클럽에서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단단한 약속 끝에야 겨우 한번씩 놀러가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규철이 제안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원조교제하자..라고. 그 말의 어감이 이 상황에서는 너무 아이러니해서 가윤이 배실거리자, 웃길정도로 진지하게 규철은 약속까지 정한 것이다. 밝고 건전하게 섹스나 한판 땡길까..라고 말하며 탄탄한 몸으로 기지개를 키는 규철은 그러나 괜찮은 형이다. 정말 멋진 남자다. “.......난 교제 쪽이 더 끌려.” 지협 때문에 우울해진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는 큰 손바닥으로 가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들어가라.. 너 너무 마셨다, 오늘.“ “..뭘,..한두번도 아닌데...” “건방지게 굴지 말고 들어가. 그 녀석이랑 해 보고 안 되면.............” “........?.........” 모처럼 토요일 오후 답게 영화도 한판 보고 머리가 띵할 정도로 맥주를 마셨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규철 역시 간만에 가벼운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는 정말 젊어 보인다. 실제로도 단단한 청년이었지만, 그렇게 차려 입으니 말쑥하기 이를 때 없다. 세련되고 건강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아파트 쪽으로 몸을 돌린 가윤을 향해 놀리듯 덧붙인다. “그 녀석이랑 해 보고 안되면, 날 사랑해줘야 해. 알지?” “..........?................” “우리 원조교제 하기로 했잖아?” 물끄러미 자신을 보며 치-하는 표정을 짓는 가윤이다. 규철은 털털 거릴 정도로 크게 웃으며 자동차의 시동을 건다. 규철 때문에 클럽에서 일하진 못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더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그는 왜 하필 오래되고 오래된 친구를 좋아하냐고 한심해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따뜻하다. 마음 든든한 미소다. *************************** 가윤은 꽤 오랫동안 밤 늦은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 건물은 그들이 10살 때부터 살고 있는 곳이다. 가윤은 당시에는 지협의 이 아파트에서 몇 킬로 떨어진 주택에 살고 있었다. 그래도 그 때도 지금처럼 시원한 봄 바람이 불었고, 그 때도 지금처럼 이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았다. 그리고 7년. 내일이 되면 여전이 어린 꼬마들이 이곳에서 활개치며 뛰놀텐데도 시간이 그만큼이나 흘렀다. 자신은 이곳을 너무나 잘 기억한다.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어린 잘생긴 바보 강지협과, 얄미운 모범생 계가윤도 여기서 놀았던 것이다. 언제나 봄 날이었다. ‘야, 계가~ 숙제 좀 빌려줘.’ 언제나 이 놀이터에서 코피 터질도록 놀던 지협은, 7년전에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부탁했다. 그때도 가윤은 늘 녀석에게 못된 태도로 의기양양했었다. ‘너 하는 거 봐서..’ ‘야, 좀 빌려줘. 엄마한테 혼난단 말야.’ 그래, 평생 그렇게 살아라, 강지협. 그리고 작년에도 이 놀이터에서 둘이 그네를 나눠타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교복도 벗지 않고 저녁 바람에 시원하게 날리는 넥타이를 보며 삐그덕-삐그덕 그네를 탔었다. ‘나 좋아하는 여자 생겼다.’ ‘..........!..........’ 바보 강지협은 하나 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 그래서 가윤은 녀석이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한참 후의 일이 될 거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녀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좇나 이쁘다. 몸매도 죽이고~..’ 그래, 평생 그렇게 살아라..친구..라고 가윤은 그때도 중얼거렸었다. 아마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 지협이 자신에게 숙제를 빌려달라고 말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은 녀석을 골탕먹이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고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녀석의 탄탄한 등을 감싸는 눈부신 흰 셔츠가 좋아서 그는 가끔 혼자 자위를 하며 잠이 들어야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절대 말해줄 수없었다. 18세에게 있어, ‘친구’란 자신의 모든 것 이상이다. 녀석은 그 때 이 그네를 타고 갑자기 앞으로 불쑥- 뛰어 내렸다. 부드러운 모래 위로 기분 좋게 착지하며 녀석은 흰 교복 소매를 둥둥 걷어 올리며 건강하게 웃었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계가윤. 니 불알친구가 17년 만에 사랑에 빠졌다니깐...‘ ‘..........어지간히 좋겠다, 그래.’ 갑자기 가윤은 그 날을 회상하는 순간 취기가 잔뜩 올라왔다. 녀석은 마지못해 꺼내는 가윤의 그 대답을 듣고도 기분 좋은 듯, 그 때 한참 웃었었다. 그리고 분명히 그 날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녀석이 그네에 여전히 앉아 있는 자신을 향해 손을 문득 내밀었기 때문이다. ‘가자. 집으로........’ ..라고 말하며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정말 환한 미소와 친절하고 착한 그 태도에 속이 비틀리는 가윤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다 큰 사내 녀석들은 어지간해선 손을 잡지 않는다. 뭔가 위험에 빠진 상황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녀석은 너무나 오래되고 오래되어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그렇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역시 이제 너무나 닮고 익숙해져서 서로의 의미 같은 건 전혀 생각지 않는 평범한 친절함으로 그렇게 덧붙였다. ‘가자, 집으로...’ 일년 뒤에 이제 혼자 앉아 있는 그네 위에서 가윤은 정말 취해버렸다. 친구로써의 따뜻한 그 우정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정말 화가 날 정도였다. 두번 다시 그 탄탄하고 따뜻한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이었다. 두번 다시 자신에게 ‘집으로 가자’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일은 나가 있으라고 말할 정도의 녀석이다. *************************** 곤하게 잠들어 있던 지협은 갑자기 무거워지는 허리의 느낌 때문에 끙끙거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나는 술냄새도 자신을 자극했다. 번쩍- 그때서야 그는 눈을 떴다. 새벽이 올 정도의 희미한 여명이었다. “...................-!!!!!!!!!!” 그리고 자신을 누르듯, 타고 앉은 누군가를 깨달았다. 이 묵직한 허리의 느낌은 바로 가윤의 무게다. 순간적으로 굉장히 놀랬고, 그리고 ‘너 뭐야..’라고 불쑥 외칠 뻔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 “......지혀바.................” 녀석은 취해있다. 그 ‘잘생긴 회사원’과 ‘원조교제’하러 나간 녀석이 아니었나..라고.... 잔뜩 위가 뒤엉키는 기분에 가만히 상반신을 일으키지만, 녀석은 꼼짝도 없이 버티고 있다. 불끈... 순식간에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지협은 더욱 당황했다. 녀석이 자신의 허리를 타고 앉은 채, 그대로 손으로 침대를 집고 엎드리듯 상반신을 굽힌 것이다. 마치 뒤로 피하려는 듯한 자신을 더욱 놀리듯 녀석은 얼굴을 바싹 들이댄다. 뜨거운 취기. 너무나 놀래서 말도 못하는 지협을 향해 녀석의 그 얄미운 미소는 여전히 새파란 새벽 속에서 입을 연다. “나중에..........” “............계가윤..비켜.” “.........훨씬 나중에 니가 이 일을 떠올리고 내가 너무 혐오스럽더라도...” “..가윤아 비켜!.........” 뭘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다. 순간적으로 목덜미로 확-하고 끼얹어지는 뜨거운 숨결. 그 가슴 당기는 묘한 호흡에 지협은 다급해졌다. 이 녀석은 남자다..라고 다시 되내이듯 자신을 세뇌시킨다. 그러나 그 때 가윤이 말했다. “............내가 너무 혐오스럽더라도... ......난 열 열덟 살이잖아..“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계가윤!!! “.......그냥 어려서 그랬다고 이해해.. ..그렇게 해. 내가 너무 어려서... .............어려서 그런 거라고....“ “..........??................” “...응?...” 왜 갑자기 재촉하듯 묻는 그 단순한 일 음절..‘응?’이라는 작은 물음이 그렇게 애타게 들렸을까.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허리에 앉은 녀석이 잔뜩 몸을 구부렸다. 바싹 좁혀진 거리가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손바닥에 땀이 배이며, 머리 속이 쿵쿵- 다시 울려댔다. 문득 이런 상황에서는 늘 처음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가늘게 전율한다. 지협은 숨도 쉴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마치 술기운을 빌려 꿈도 꾸지 못할 애원을 하듯, 가윤이 너무나 아슬 아슬해 보인다. 새벽이라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이 녀석의 이 표정이 너무나 절묘하게 무너지는 기분이어서 그것이 적나라했다면 도저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드럽게 얼굴을 살짝 비틀며 녀석의 호흡이 다가왔다. 질끈- 경악으로 눈을 감은 지협에게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녀석이 들릴 듯 말듯 말했다. 아주 희미하게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그 애랑 자지마....” “..................-!!!!!!!!!!!!!” 그리고 부드러운 녀석의 아랫입술이 닿았다. “..............!!................” 저번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저히 저 얄미운 녀석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토록 부드러운 느낌. 부풀어 오른 입술의 감각이 절실할 정도로 실감났다. 훅-하고 무의식중에 숨을 들이킨다. 더불어 아랫도리도 갑자기 흥분한다. 가윤이 허리 위를 달싹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숨덩이가 겹치고, 가윤이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살짝 흘러내렸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 순간에 지협은 그것마저 아깝다..고 생각할 정도로 뭔가 머리 속이 심하게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달콤한 설탕물을 자꾸 마실 때처럼 갈증이 계속 들었다. 식도가 타고 속이 점점 비워지는 기분이다. 배가 심하게 고플 정도의 허기가 복부를 타고 느슨하게 허벅지 사이로 흘러간다. 매끄럽게 파고 들어와 자신의 혀를 감싸고 농락하다가, 다시 애가 탈 때쯤엔 뒤로 후퇴한다. 환장할 정도의 갈증과 허기가 번갈아 밀려왔다. “...........으응................” 녀석의 목 너머에서 미묘하게 갈라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지협의 입장에서 보면 심장이 딱 멈출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이었지만,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가윤은 입맞춤의 최대한을 의미하듯, 조금 벌어진 입술로 지협의 턱을 쓸어내렸다.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점점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꼭 음미하는 표정처럼 묘하게 색기 어려서, 지협은 갑자기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여전히 목이 마르다. “..........-!!...............” 초저녁부터 그대로 잠드느라 미처 벗지 못한 자신의 교복셔츠. 그것을 하나 하나 푸는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보였다. 그때서야 지협은 가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중에 니가 훨씬 나이 들어 돌이켜 봤을 때, 내가 너무 혐오스럽더라도...’라고 한 말. 이 녀석은 정말 자신과 일을 벌이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다. 게다가 ‘그 애랑 자지마’라니..누구랑 자지 말라는 말인가..아니, 잠깐만..그건 그렇고, 저 녀석 지금 뭘 핥고 있냔 말야!!!........ 지협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쇄골과 단단한 가슴, 그리고 잔뜩 긴장한 티를 내듯 뭉쳐진 복부, 그 옆구리까지 섬세하게 핥아 가는 녀석의 혀를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눈으로 확인까지 하고 있으면서도 정말 믿기지 않았다. 숨이 꽉 막힐 만큼 허리 아래가 빳빳해지는 이 감각을 믿을 수 없다. 녀석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정수리가 보인다. 언제나 보아오던 그 친구의 표정. 아름답고 단정해 보이는 그 표정 못지않게, 내리깐 속눈썹이 음란하게 다가온다. 그 질퍽한 발정의 느낌에 숨이 막혔다. 한마디로, 발정기를 맞은 처녀처럼 유혹적이었다. “........계..가윤...........” 딱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녀석을 부르지만, 가윤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지협의 옷을 벗겨낸다. 그리고는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얄미울 정도로 재빠르다. 의식할 사이도 없이, 드러난 페니스를 입안에 넣어 버렸다. 지협은 순간, ‘훅-’하고 다시 공기를 갈구하며 목을 뒤로 젖힌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충격과 흥분으로 신경이 점점 마비된 것이다. “.................그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거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헐떡거리며, 그는 가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잔뜩 달아오른 자신의 분신이 녀석의 점막에 둘러싸인 게 똑똑히 전달되어 왔다. 확실히 같은 사내라는 것이 민감하게 작용했다. 그 엄청난 금기 같은 기분은 또 한편으로 교묘한 우월의식을 부채질 하는 것이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그 잘난척하던 가윤이 할짝거리다니!!... 더군다나 그 모습에 설득 당한 자신이라니!!!! 지협은 팔꿈치로 몸을 겨우 지탱하고 상반신을 살짝 일으켜 본다. 아래에 있는 녀석이 똑똑히 보였다. 그토록 정갈하고 깨끗한 얼굴이 붉은 홍조를 띄고 있다. 맙소사..라고 지협은 작게 탄식하며 신음했다. 정말 말릴 수가 없었다. 혀로 구석 구석 핥아가는 그 모습이 자신을 이렇게 흥분시킬지 전혀 몰랐다. “.........가윤..........아.......” 녀석을 부르는 음성이 너무나 혼탁해서, 지협은 몇 번이나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꽉 눌러야 했다. 허벅지 사이에 점점 열이 오를 만큼 교묘하게 예민한 부분을 쓸어간다. 귀두를 할짝이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거의 갈 것 같은 기분에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친구의 음란한 모습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자신처럼 강직한 녀석이 지조없이 이렇게 되어버린다는 것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반응해버린 몸 때문에, 지협은 녀석의 머리카락을 꽉 쥔 채 작게 전율했다. 그 순간이었다. “..........-!!!!!!!!!!!.............” 부드럽게 턱을 치켜들며, 녀석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하는 지협의 정액을 천천히 손가락 사이로 핥아갔다. 음미하는 표정이 너무나 탐욕적으로 보여서, 지협은 난데없이 속이 욱씬거릴 정도였다. 손가락 사이에 얽힌 타액을 혀로 낼름거리며 살짝 훔쳐보는 그의 눈길이 느껴졌다. 새침하게 올라간 깊은 눈매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 살짝 웃음끼마저 머금은 입꼬리도 나른해 보인다. 그 표정에 또다시 압도당했다. 저토록 야한 표정을 지으며 얄밉게 웃다니... 저게 정말 계가윤인가..라는 먹먹한 생각이 머리 속에 떠다니지만, 지협은 조금 탁해지는 자신의 호흡을 숨길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지협의 분출물들로 조금 적셔진 손가락을, 자신의 몸 뒤로 가져가며 가윤이 작게 허리를 떤다. 녀석에 의해 완전히 벗겨진 자신과는 달리, 녀석은 아마 하반신만 벗은 상태였던 것 같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아까 외출할 때 속에 받쳐 입었던 하얀 셔츠를 벗지 않았다. 그 상태 였기 때문에, 지협은 녀석이 정말 뭘 할 생각이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 그러나 곧 깨달았다. 자신을 삽입하고 있는 뜨거운 입구와 체온의 느낌을 말이다. 스스로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펴서 지협을 삽입하던 가윤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굉장히 힘겨워 보인다. 설명할 수 없을만큼 묘하게 찡그린 모습에, 또다시 관자놀이가 질끈거렸다. 평상시에 보여주는 온통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얄미운 얼굴만이 아니었다. 그 표정에 덧붙여, 조금 떠도는 곤혹스러운 시선이었다. 그러나 가윤은 입술을 조금 깨물고, 여전히 지협의 허리 아래로 몸을 낮춘다. ‘아...’하고 지협이 작게 신음을 입밖으로 토한 것은, 자신의 페니스를 감싸는 엄청난 압박감과 뜨거움 때문이었다. 조금 전 녀석의 입안에서 혀로 튕겨질 때의 느낌보다, 배로 근육들이 춤을 춘다. “...................이런...............” 계속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자신이 지금 녀석의 몸 안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그런 곳에 몸이 열리리라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으로...그것도 생전 처음 겪는 굉장한 뜨거움이 자신의 분신을 잔뜩 죄여온다. “..........읏..................” 그 뜨거운 죄여옴에 미칠 정도로 요동치는 하반신과는 달리, 머리 속은 충격으로 점점 하얗게 찢어졌다. 이것이 그 잘난척하는 얄미운 덩어리 계가윤이라니...녀석의 내부가 이런 열기로 자신의 것을 감싸다니...!!! 젠장..진짜 뜨겁잖아...라고 악 문 입술 사이로 욕설이 절로 튀어나온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겨우 헐떡이며 지협이 눈을 떴을 때, 드디어 가윤이 제대로 보였다. 길고 아름다운 두 다리를 벌리고, 마치 자신이 지금 들어간 몸이 같은 사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지 않으려는 듯, 벌어진 셔츠의 깃을 간신히 한 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녀석의 단단한 근육이 가볍게 경련하는 것까지 똑똑히 느껴진다. 뿌리 끝까지 힘겹게 삽입하자, 맞물린 곳에서 물기 부딪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괜찮아...” 너무나 놀란 듯한 자신의 눈동자를 보았는지, 가윤이 가볍게 숨을 할딱이며 턱을 치켜든다. 그리고 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강지협... ................두번 다시 안 할거야... ...그냥.. ...어려서............그런 ...거야. ..그냥 그렇게 생각해 ........“ 언제나처럼 재수없이 가르치는 듯한 말투였지만, 자신의 것을 꽉 죄여오는 그 엄청난 압력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협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대답할 의도가 아니라,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욕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허리를 흔들 때마다, 수축하고 확장하는 마찰소리가 접합된 부분에서 들려왔다. 마침내 지협은 참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 위에 내려앉은 그의 몸 뒤로 손을 가져간다. 마침내 욱씬할 정도로 자신을 지배하는 본능에 타협하고 만 것이다. 가윤의 엉덩이를 앞 쪽으로 바싹 끌어당기며, 삽입된 부분의 이 생생한 감촉을 탐닉하기 바빴다. 앞으로 쓰러질 듯한 자세로 작게 몸을 떠는 가윤 역시 촉촉한 신음이 연신 쏟아진다. 정말 발정기라도 맞이한 걸까..이 녀석... 어떻게 해야 이렇게 교태로워 보일 수 있지?? “...............으응............” 자신의 몸 안을 휘저어 놓는 뜨거운 지협의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고 작게 인상을 찌푸린다. 점점 녹초가 되는 것처럼 녀석의 상반신이 자신을 향해 기운다. 그 때문에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울 것처럼 묘하게 갈라지는 음성과 절묘하게 잘 어울리는 그 표정 때문에, 지협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평상시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런 얼굴. 조금씩 지협 역시 무심결에 몸을 움직이자 그의 신음이 더욱 짙어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느끼는 얼굴이었다. “.......아앗!........아,앗!앗!.........” 꿈틀거리는 자신의 분신 탓에 잔뜩 내부를 유린당하는 듯, 가윤이 가여울 정도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숨기지 못한 신음이 조금 벌어진 도톰한 입술에서 세어 나오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파르르 전율하는 얼굴은 거의 뻑 갈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보통 때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는 살짝 찡그린 표정. 매달리는 느낌처럼 애원하는 듯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댄다. 단정한 얼굴이 쾌감에 엉망이 되어, 절실하게 매달리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얼굴과 몸마저도 미끈하게 젖어 착 달라붙어 있다. 꼭 엄청나게 음란한 기운이 자신을 에워싸며 잡아먹는 듯한 쾌락에 시달린다. “.............히-ㅅ-!!!!!!!!!!...............” 그 표정이 갑자기 너무 굉장해서 지협은 일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성이 백지장처럼 날아가고, 본능만이 살아남아 짐승처럼 몸을 움직이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힘으로 관통당한 모양이었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여유를 찾을 사이도 없이 가윤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흥분에 젖어 있다 해도, 그렇게 섹시한 음성은 생전 처음이었다. 지협도 마침내 복부에 힘이 들어간다. 뇌를 잠식하는 듯한 쾌감이 쿵-쿵-쿵- ..굉장한 발자국을 찍으며 심장으로 세어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살짝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짙은 쾌감에 사로잡힌 아름다운 눈동자가 또렷하게 눈 앞에서 흔들렸다. 내가 정말 돌아버린 것 같군..계가윤이 이럴 때 예뻐보이다니..라고 생각하며 지협은 몰려오는 수마에 굴복하고 말았다. 털썩..하고 자신의 몸을 향해 쓰러지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왠지 모르지만, 조금 손가락으로 걸어 끌어 당겼던 것도 같다. 아아...지금 우리가 뭘 한거지.... 아니, 니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거지.... 이 뜨겁고 온통 축축한 물기는 도대체 뭐지.... **************************** 글쎄.. 하지만 결국 녀석에게는 그 일 역시 그냥 아주 악랄한 하나의 게임이었던 걸까? 일어났을 때는 이미 가윤이 없었다. 젖어 있는 침대 시트와 헝클어진 이불들만이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을 뿐이다. 어제 밤에는 완전히 미쳤다 치더라도, 지협은 이게 또 무슨 일인지 생각하기 위해 침대에 앉아 잠시 끙끙거려야 했다. 뭐냐구.??? ..아아....뻔하다. 어제 자신의 18년 지우와 섹스를 했다. 미치겠다. 돌아버리겠다. 정말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자기 경멸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막 다시 잠들기 직전에 자신의 몸을 향해 쏟아지던 녀석의 갸름하고 젖은 얼굴이 너무나 예뻤다. 분명 그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쾌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늘게 전율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이...좇같다. 지협은 자신이 그렇게 느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좇같아서 기분 더러워졌다. 가끔 사내 녀석들에게 섹스는 배출의 욕구와 같아서 어제는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감정이 개입되면 이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 대형 사고를 친 당사자는 아침이 되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녀석이 바로 계가윤인데도 말이다. 물론 여기까지 생각할 틈도 없이, 나영이 드디어 찾아왔다. 생각해보니 주말이었던 것이다. <6> 오전까지는 날씨가 지랄같이 맑았는데, 곧 있을 여름을 나타내듯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다. 나영과 집에 있었던 시간은 채 2시간도 되지 않았다. 빈 집에 둘만 있기도 머쓱하고 해서, 지협은 영화나 보러 가자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렇게 서너 시간 떼우고 나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찻집에 앉아 이것 저것 이야기도 좀 나누고 하루 해가 언제 지는지 고민해 버린다. 녀석이 아침부터 왜 사라진 건지 새삼 궁금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어제 자신의 입으로 나영이 찾아오니 집에 있지 말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 정신이 들고 나니 그 일이 떠올랐다. “가윤이가 학교 안 나온 날...” ..라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나영이 말했다. “가윤이가 학교 안 나온 날 클럽에 있었다는 거 진짜야?” 망할 놈의 뒷소문. 담임이 부르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아니, 부모님들이 아실까봐 속이 바짝 타 버린다. 그렇다고 문제의 당사자인 가윤이 그걸 해결할 의지가 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욱 큰 사고만 치고 콧배기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모르지..어제 만난다던 잘생긴 회사원을 만나러 갔는지도... “너는 그 클럽이라는데 한번 가 봤어?” 타박 타박- 곧 흐려지는 골목을 걸으며 나영이 중얼거렸다.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지협이 말없이 고개를 젓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은 안쓰러운 표정이 서로 닮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너는 가윤이 친구잖아. 너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 “........너는 걔 친구잖아.” 이 쯤에서 아마, 평상시의 자신이라면 나영이 아직도 가윤에게 미련이 있는가..라고 고민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오히려 그녀의 얼버무리는 말 끝이 갑자기 싸늘하게 숨통을 쥐고 흔들어댄다. "나영아.......“ “너는 걔 친구잖아...그렇지 않아?” 고집스럽게도 묻는다. 18세에게 친구란 굉장한 단어인데도 말이다. 아니..친구 아냐. 친구랑 섹스하진 않아. 어느 누구도 친구랑 그런 식의 관계가 되진 않아. 지협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뭔가 기묘한 기억들이 잔뜩 뇌리를 치고 들어온다. 그것은 하다못해 이 골목길 끝에 있는 자신들의 아파트. 그 앞의 놀이터에서도 항상 묻어난다. “..........생각해보면....” 지협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그의 가방에는 오늘 2년만에 처음으로 담배가 등장했다. 가윤이 어제 자신을 덮쳤다는 그 엄청난 충격을 상쇄하기 위한 흡연의 유혹이다. 나영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표정이었다. 날은 흐렸지만, 서늘한 바람이 무척 시원하게 얼굴에 와 닿는다. “생각해보면,... 그 녀석은 항상 나에겐 최악의 친구였어. 언제나 잘난 척이고, 늘 숙제같은 걸 빌려야 하는 나를 골탕먹이고....“ “.............그래도 친구잖아.” “....그래..” 이전까지는 그랬지.......라고 지협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친구’라는 무게가 이렇게 큰지 몰랐다. 생각도 안 해봤다. 친구를 안을 날이 올 거라고는..아니, 그랬기 때문에 지금처럼 마음이 초조해 지리라고는.. 눈을 돌려 가까워진 놀이터를 쏘아보았다.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가윤은, 그 이쁘장한 꼬마가 참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항상 외로워보였다. 그래, 생각해보니 가윤은 어릴 때부터 엄마가 없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혼자였다. “가윤이는 어릴 때도 재수없는 녀석이었어. 언제나 또래 다른 녀석들보다 책도 많이 읽어서 잘난 척하고...“ 그게 아니잖아, 이봐 강지협. 말은 바로 해야지..너도 스스로 잘 알고 있잖아. 가윤이가 책을 읽었던 건, 혼자 남겨지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러면서도 내가 같이 놀자고 꼬득이면 항상 비웃듯이 쳐다보곤 했어. 그 꼬마가 말야. 맨날 잘난척 하며, ‘너랑은 안 놀아.’라고 말했지.. 나에게 말야. 얼마나 내가 속이 울컹 거렸는지 알아? 항상 가윤이는 한대 패 주고 싶었다구.. 씨바.. 부모님들이 친해서 그렇지, 그렇지만 않았으면...............“ ........그렇지 않았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자신과 지냈더라도 여전히 가윤이는 그 든든한 위장용 잘난척으로 재수없이 버티고 있지 않았을까. 지협이 투덜거리는 듯한 입을 닫으며 쓰게 웃자 나영이 궁금한 듯 눈을 굴렸다. 그리고 그 때에 나영의 등 뒤에서 검은 승용차가 한대 바퀴를 굴리며 다가섰다. 처음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그러나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검은 차는, 그 진한 선탠만으로 미스테리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문제의 차는 천천히 미끄러지듯 다가서며 속도를 늦춰 버렸다. 한마디로 이 쪽에 볼 일이 있다는 증거다. 어리둥절한 나영과 자신을 놀리듯, 값비싼 승용차 창문이 서서히 내려간다. 운전석에는, 굉장히 이목구비 단정하고 잘생긴 청년이 놀리듯 몸을 내밀고 있었다. “....니가 강지협이냐?” 어찌나 대놓고 싸가지 없게 묻는지, 지협은 하마터면 욕을 내던질 뻔 했다. 대신 나영을 생각해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싸가지 없는 잘생긴 청년은, 신경도 안 쓴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 계가윤이랑 원조교제 하는 사람이거든?” “.............-!!!!!!!!!!!!!!!!!!” “이제 서로 자주 볼 사이인데 인사라도 할까 해서 말야. 거 참 잘생겼네... 너도 호스트 할 생각은 없냐?“ 그 때서야 맞은 편 차문으로 내리는 가윤이 보였다. 어제처럼 취해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굉장히 침착하고 싸늘한 표정일 뿐이다. 언제나처럼.. 수십년간 익숙해진 계가윤다운 얼굴. 건방질 정도로 턱을 치켜들며 그럼에도 위선적으로 미소짓듯 살짝 웃었다. 자신만만하면서도 억지스러운 친절을 나타내는 미소다. 그 달콤한 눈빛이다. 언제나 얄미운 새끼..... “나영이 왔네?” 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나영은 청년이 말한 ‘원조교제’때문에 거의 카오스에 빠진 표정이었다. 지협은 머리끝까지 부글거리는 심정으로 청년과 가윤 그리고 나영을 번갈아 쳐다본다. 최악이다, 최악! *************************** 쾅-하고 현관이 닫히자마자, 가윤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긴다. 그 바람에 건방진 이 녀석이 휘청거리듯, 거실 위로 나뒹굴어야 했다. “너 완전히 미쳤냐, 계가윤?” 그러나 피식- 마치 신경을 끊을 듯 노려보는 자신의 시선에도 아랑곳없다. 녀석은 그저 피식거릴 뿐이다. 언제나처럼 얄미운 입술이 오늘따라 붉게 달아올라 숨이 막힐 정도로 혀를 낼름거린다. “난 미친 거 맞아.” “미치려면 너 혼자 미쳐. 나까지 전염시키지 말고.“ 어제의 일까지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계속 어긋나려 필사적인 가윤에게 정말 화가 났다. 설명을 원한다, 설명을.. 지금껏 아무리 가윤이 얄밉게 굴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자신을 도와줬었다. 나영의 문제도 그렇고, 숙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심지어 부모님께 혼날 때에도 가윤은 얄밉게 놀려댔지만, 정작 그 부모님 앞에서는 위선적인 친절한 미소로 자신을 감싸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친구로 남을 수 있었다. 아무리 나쁘게 굴어도 속까지 엉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남자를 사귄단다. 그것도 진짜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라면 십팔년 친구인 자신이 등 돌리지도 않을 거다. 그럴 필요도 없다. 친구가 어려운 선택을 한다는데, 머리 속으로 이해가지 않더라도 백분 도와줄 정도의 의리가 있다. “아까 그 새끼가 그 잘생긴 회사원이냐? 그 새끼한테 정말 돈 받고 그 짓 해주냐?“ 어제 너랑 나랑 한 그 짓 말야. 그렇게 생각하니 더 속에서 천불이 났다. 어제 그건 뭐야, 그럼...얼마나 더 고약한 장난을 걸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냐.. “아~ 그 형? 그 사람 맞아. 그래...돈 받고 그 짓 해 줘. 조금 전에도 얼마나 흔들다 왔는지 허리가....“ 머리 속이 점점 차가워진다. 지협은 말없이 바닥에 누운 채, 악녀처럼 얄밉게 웃어대는 녀석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는 멱살을 쥐듯 머리를 들어올렸다. 이성의 밑바닥으로 잔뜩 가라앉은 분노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의례히 그렇지 않은가. 화가 날 때 무슨 생각이 차분하게 돌아간단 말인가..그리고 이 녀석은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 틈도 전혀 주지 않을까. 어쩌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코너에 몰아대는 걸까. 내가 너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냐, 이 십새꺄.... “새삼 그런 거 가지고 왜 화를 내냐, 유쾌한 바보? 이미 알고 있으면서?” 정말은 어느 쪽이 진짜 화나는지 자신도 가늠할 수 없었다. 가윤을 안은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애당초 자신을 상대로 이런 험상궂은 장난을 치는 가윤에게 화가 난 건지, 것도 아니라면 아직도 ‘친구’라는 이름에 시달리는 자신들의 18세에 화가 난 건지... 어쩌면 이 녀석이 정말 돈 대주고 몸 팔고 즐긴다는 그 잘생긴 청년에게 미칠 듯이 화가 난 건지.. “...죽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녀석의 그 선이 아름다운 목을 양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침착한 작은 얼굴이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어서 죽여. 넌...“ “....................” “.......넌 내 친구잖아. ...그러니깐,..이쯤 보여줬으면 죽여도 돼.“ 아아...라고 지협은 낮게 신음했다. 손아귀 아래로 늘 그렇듯, 작게 두근거리는 녀석의 심장이 느껴진다. 어제밤에 그렇게 와 닿던 뜨거운 체온. 온통 뭉텅이져서 알싸하게 재촉하던 그 환장할 것 같은 쾌감. 그것과 자신이 지금 품은 살기는 미묘하게 마주 이어져있다. 그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쳤다. “넌 좋은 녀석이야, 강지협.” “.................가윤아...” “...그러니깐 할 수 있을거야.” 얼마나 침착하게 말하는지 지협은 그 순간 정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 뻔 했다. 살짝 부푼 아랫입술을 열어, 조금 숨이 차 보이는 음색이었지만 굉장히 서늘하게 웃는 가윤이다. 눈을 가늘게 해서, 달콤하게 웃어준다. 말도 안 된다. 그 순간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혈관들이 팽창했다. “넌 좋은 녀석이야..사실. ..나도 알아. 세상에 나만큼 널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야.. 잘생긴 바보.“ “.......계가윤!!!!!!” “........그게 문제야. ..넌 너무 좋은 녀석이야. 어떻게 해도 나빠지지 않을 거야. ...........넌 머리는 좇나 나쁘지만.....“ “.........가윤아...” “..절대 부모님을 배신하지도, 친구를 버리지도, 사회에서 어긋나는 짓을 하지도, 사랑하는 여자를 잊지도 않을 거야. 그럴 거야. 그게 문제지. 그리고 나는..............왜... 왜 하필,.....난 거기까지도 알고 있어야 할까. 왜 니 말처럼 재수없게 너의 그런 점까지 이해하고 있어야하는 걸까?... 넌 나와는 달라.. 넌....어떻게 해도 나처럼은 안 될 거야..“ 부들 부들.. 지협은 갑자기 속이 울컥했다.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뻔하게 알아들었다. 항상 가윤은 그 모양이다. 왜 자신보다 훨씬 영리하고 예민한 걸까. 왜 그렇게 침착하고 조용한 눈빛으로...따뜻한 미소로 나를 욕하는 걸까. 당연히 자신은 이 녀석을 따라잡을 수도, 혹은 이 녀석처럼 타락하거나 망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가윤은 지금 자신에게 게임이라도 벌이고 있단 말인가. 이런 저질스러운 게임이 왜 필요한 걸까. 식도까지 속이 뒤엉키는 느낌에 지협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보다 가라앉은 음성으로 엄격하게 잘라 말했다. “아까 그 사람이랑 정말 사귀는 거냐?” 마지막 확인이다. 제발 계가윤.....차라리 그렇다고 말해라. 너를 위해 뭐든지 해 줄게. 동성애자 커뮤니티를 원해? 그럼 그거 만들어줄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내가 너를 변호해줄게. 넌 나를 알잖아. 난 그만큼 해 줄 수 있는 친구야..그렇지 않아? 제발 그렇다고 말해. 차라리 사귄다든지... 아니 이해할수는 없지만, 사랑한다라고 말해. 그렇게만 말하면 니 말대로 다 해결해 줄게. 니말처럼 그냥 어려서, 마음이 막 열기에 젖은 황당한 18세라서 그렇다고 내가 설득시켜 줄게.. 제발 좀-!!!! “사귄다고? ...하하.. 그런 걸 고상한 용어로 사귄다고 말해야 하는거야? 누굴 위해서? 너를 위해서? 돈 받고 그 짓 해준다고 솔직히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섹스도 하냐? ...............진짜?....” “당연한 거 아냐? 처음부터 한다고 했잖아, 이 돌대가리야! 난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냐. 그 사람의 몸이 좋은 거지.“ “그럼 어제 난 뭐냐...” “.........몰라서 물어? 심심풀이였어, 심심풀이.. 니들이 어제 거실에 앉아서 딸딸이 쳤듯이.. 나도 간만에 해 본 새로운 심심풀이였다. 왜? 정말 무슨 의미라도 둔 거야? 왜? 내가 임신이라도 할까봐 걱정 돼?“ “......이 개새끼......................”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단아하고 깨끗한 얼굴은 정말 순결해 보인다. 하얀 셔츠가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난잡했던 어제의 이 녀석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사실, 사내의 허벅지를 달구는데는 둘 다 좋았다. 깨끗한 얼굴이 흐트러지는 것도 좋았고, 몸살 날 정도로 젖은 채 신음을 참는 자존심도 좋았다. 그러나, 이 얄미운 몸, 얄미운 미소, 얄미운 눈동자, 얄미운 내부가 다른 녀석에게 같은 방식으로 열린다니...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어진다. 무의식적인 증오로 지협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모습을 아무에게나 보이다니....자신도 어제야 겨우 본 모습이었는데,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런 녀석의 얼굴이나 표정을 보고 있다니, ... 정말 환장할 것처럼 명치 끝이 아려왔다. 질끈-..숨이 막힌다. “이제 정말 나 미워하는 거지, 강지협?” ...이라고 목이 졸리는 순간에 가윤이 말했다. 여전히 웃으며, 차가운 미소가 너무나 어울리게 아름다운 얼굴로.. “...............!...........” 그 말에 정신이 번쩍 차려진 지협이 놀라서 손을 뗀다. 방금,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한 가윤의 한마디. 그 절실한 뭔가가 심장 모서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정말 나쁜 새끼.. 일부로 도발하다니...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나, 저게....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목덜미에 붉은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신의 살기가 눌러 붙여준 흔적이다. 한동안 관찰하듯 그 부은 자국을 따라가며, 말없이 지협은 고개를 숙인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한 행동이었다. 비록 재수없어 죽을 정도의 녀석이지만, 부드러운 목덜미에 벌겋게 남은 자국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 어제도 느꼈던 그 매끄러운 피부가 여전한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 목덜미의 흔적에 입술을 댔다. 마치 둥글게 원을 그리듯, 부끄럽게 달아오른 그 상처위에 혀를 굴리자 갑자기 바짝 긴장한 듯 녀석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뭔진 몰라도 그 반응이 신선하고, 한편으로 기대감으로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끄응- 하고 힘겹게 가윤의 목으로부터 얼굴을 떼며, 지협은 침을 삼켰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린 채 자신을 올려다본다. 이런 경우가 요 몇 주 동안 몇 번 있었다. 서로 말없이 응시하던 때가... 그리고 이렇게 위태로운 눈동자가 정말 가윤이 맞는지 안달이 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그 시선이 몹시 탐나는 바람에 계속 쏘아보게 된다.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가윤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실망감이 갑자기 싸하게 지협을 파고들었다. 대신 녀석이 돌려버린 채 자신에게 드러낸 옆모습과 더 긴장감 있게 도드라진 목선이 눈에 띈다. 그것에 화풀이 하듯, 강하게 이를 세워 물어 버린다. “.............아앗-!!.................” 가윤이 험상궂게 욕설을 던졌다. 십새끼..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욕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인데. 정말 놀랬던 모양으로 거칠게 숨을 씩씩거린다. “계가윤....” “.................” “정말로 죽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사람 자꾸 이상한 쪽으로 시험하지 마.“ 천천히 목을 털며 지협이 일어섰다. 이번에는 손자국 대신에 발갛게 부어오른 이빨 자국을 단 가윤의 목이다. 그 벌건 상처를 보는 순간, 왜 낙인처럼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처음보다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적어도 그렇게 물리는 순간의 가윤은, 여느 때처럼 악랄하고 고약하지 못했다. <7> 가장 오래된 친구와 잤다. 그건 쉽게 잊혀질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벌떡- 아침마다 축축해진 이불 위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의례히 지협은 식은땀에 젖곤 했다. 최근에 일어난 몇 가지 현상이다. 더군다나 요새는 가윤도 자주 집에 붙어 있는다. 늘 있는 일이었는데, 이젠 무시할 지경을 넘어섰다. 가끔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샤워를 하고 나올 때마다, 지협은 TV 야구 중계보다 다른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것은 바로 자주 자신에게 보여지는 녀석의 등. 우습게도 그 등에 정신을 빼앗기곤 했다. 등 줄기로 흐르는 몇개의 물방울에 넋을 잃은 듯 집착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눈동자가 그 범위 밖으로 돌려지지 않았다. 그 얄미운 등. 그리고 물방울. 한번 핥아보면 갈증이 사라질까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단지.... 그것은 갈증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보아온 친구. 젖내나는 아기 때부터 부비 거리며 깔깔거리던 친구. 저녁마다 수백번은 서로 스쳐갔을 친구. 그런 녀석에 대해 전에 없이 의식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문득 두렵다. 그러면서도 계속 타들어갈 것같이 목이 말라온다. 아주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녀석의 방문을 두들길지 몰라 겁이 났다. 어떤 이유를 대건, 요 며칠 아침마다 흥건하게 젖은 몽정으로 깨어야 한다는 것도 두렵다. 어지러운 감각, 몇 시간이 지나도 계속 해서 더 또렷해지는 그 감각들이 낯설다. 그런 자극들을 누구보다 오래된 친구에게서 갈구한다는 것이 가장 소름 끼친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욕구불만에 시달렸다. 자신의 처지가 우스웠지만, 웃을 수 없었다. 정말 안고 싶어졌다. 한번만 더 확인해 보고 싶을 뿐이다. 저렇게 시치미 뚝- 떼는 녀석이 가증스러울 정도로 그 날은 애원하는 시선이었는데... 아쉽다. 그리고 점점 더 신경은 난폭해진다. ********************************** 마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가윤이랑 잘 지내고 있냐?’ 건성으로 대답하며 지협은 닫힌 녀석의 방문 쪽을 바라본다. 녀석은 요새 밖에 나가지 않는다. 클럽도 안 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지협 자신과 자주 마주치지도 않는다. 아까 학교에서 잠시 스쳤을 뿐이다. 그것이 꼭 폭풍 전야 같아서 사실 신경이 더 곤두선다. 지협이 집중하지 않는 걸 아는지, 어머니는 연신 혀를 차고 계신다. ‘가윤이랑 잘 지내. 그래도 그 녀석 정도 되니깐, 너 같이 별 볼일 없는 놈하고 친구 해주는거야.‘ “아으!! 엄마! 그런 거 말 안해도 알아! 고만 좀 해요.“ ‘이 녀석이 성질만 살아가지고...’ 이젠 전화를 끊을까 하는데, 어머니는 그래도 염려가 된다는 식으로 덧붙이신다. ‘잘 하라구, 이 눔아! 괜히 미움 받지 말고!‘ “아, 알았어요! 회는 열심히 팔고 계시죠?“ 언제나 유쾌한 바보. 강지협은 그 씁쓸한 비아냥을 떠올리며 전화를 서둘러 끊는다. 예사와 같은 어머니의 잔소리가 너무 뜨끔했던 까닭이다. 엄마, 나 가윤이랑 잤어요....라고 말하면 우리 엄마 아주 기절하실지도 모른다. 쓰러지시는 정도도 아닐 거다. 차라리 남자를 안았다고 말하려면 생판 모르는 녀석을 말하는 게 나을지도.... 아니지...엄마, 엄마 아들이 살짝 미쳐서 아직도 녀석에게............. “..........-!!!!!!!!!!” 그리고 갑자기 떠올랐다. 어머니의 아무렇지도 않은 마지막 당부와 겹쳐서 기억이 났다. ‘미움받지 말고....’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녀석도 아주 비슷한 어감의 말을 했었다. 자신에게. *************************************** ‘이젠 나 정말 미워할 자신이 있어? 해 봐... 내가 너에게 그 정도 했으니, 넌 나 미워해도 돼. 죽여도 돼. 그래야 진짜 친구지...‘ ...라고 가윤이 말했다. 어머니의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지협은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일순 행동을 멈췄다. 분명히 혼자 방안에 앉아있는데, 머리 속이 온통 윙윙- 울리는 기분이다. 익숙한 자신의 방이 갑자기 거꾸로 회전하고 사방의 벽들이 일시에 다가오는 기분이 든다. 정신이 확 깬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처음부터 녀석은 그렇게 말했었다. ‘너 나 안을 자신있어? 너 나한테 안길 자신 있어?’ .........라고. 물론 그 뒤에 단서처럼, ‘물론 나는 너 아니래도 사내 녀석이라면 다 좋지만...’이라고 덧붙였지만.. 갑자기 그 말들이 떠오르면서 베일이 싹- 걷히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그 말이 이상하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드디어 알았다. 녀석은 정말 자신에게 미움받고 경멸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말들을 마구 끄집어내고, 항상 자신이 진심을 알고 싶어하면 더 없이 악랄하게 굴어 이성을 잃게 만든다. “.................-!!!!!!!!!!!!” 하느님...................... ........이라고 지협이 짧게 탄식했다. 계가윤이 아무리 자신을 비웃어도, 18년 친구라는 타이틀은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녀석은 어릴 때처럼, 지금도 지협을 거뜬하게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한결 날카로워진 지협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쓸쓸한 표정, 비틀어진 자괴감, 상실 가득한 눈동자,...아주 짧게 가윤을 솔직하게 만들었던 그 시선. 그것은 흡사 침묵으로 말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잡아줘’라고 필사적인 몸짓으로 말하면서 행동만은 지협을 떨어내려는 듯 온갖 난잡함으로 위장한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미, 지협은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왜 가윤이 클럽에 나갔는지를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알게 되었다. 만약 입장을 바꿔 자신이 가윤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로 굴었을지 모른다. 판단이 거기에 다다르자 그는 참지 못하고 벌떡- 침대에서 일어섰다. ********************************* 쾅쾅- 가윤은 잠들기 직전에 문 소리를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험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다. 이 집에 저렇게 문을 두드리는 녀석은 강지협 밖에 없다. 그렇다고 수십년 동안 녀석이 노크하는 걸 보건 이번이 처음이다. “뭐야?”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을 여는 녀석도 강지협 밖엔 없다. 무식한 새끼...라고 중얼거리며 가윤은 침대 저쪽의 이불을 확 걷어 자신에게 덮는다. 볼일 끝내고 빨리 나가라는 표시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 갑자기 들어와서 시비다. 목덜미에 남은 손자국을 어루만지며, 가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싸움은 어제 했던 그것으로 오늘 접으면 안될까? 가뜩이나 피곤한데 말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등교해서 담임에게 한참 시달렸다. 그러니 결코 평탄치 않은 하루였다. 그러나 녀석은 격한 손길로 자신이 덮은 이불을 확- 걷어낸다. 마침내 가윤이 포기하고 침대에 제대로 앉을 때까지 녀석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급기야 피로한 얼굴로 가윤은 냉랭하게 비꼬아댔다. “갑자기 왜 시비야?“ 다소 노곤한 시선으로 묻는 말이었다. 심장도 느슨하게 뛰고 있었고, 별다른 경계심없이 피곤했기에 꺼낸 물음이었다. 그러나 이 철벽같은 녀석은 탄탄한 상체에 팔짱을 끼며 문득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에게 안기고 싶다면....” “..............??........” “.........너는 지금 니가 하는 짓들 말고, 다른 선택은 없는거냐?...........” “..............-!!!!!!!!!!!!!!!!!!” 아무리 친구가 아니라고 말했어도 그들은 뼈속까지 파트너였다. 비록 겉으로는 친하지 않았지만, 싫으나 좋으나 서로를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둘다 서로를 놀리고 갉는 걸 좋아했지만, 결정적일 때는 항상 친구였다. 때론 지협이 머쓱하게 말하고, 때론 장난치듯 말하고, 또 때론 진지하게 말하고...심지어는 주어와 목적어를 다 생략한다 해도 알아들을 수 있다. 어떤 식으로 말하더라도 가윤은 그가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문제다. 방금, 이 녀석이 자신의 ‘딜레마’를 이야기 했다. 믿을 수 없지만, 이 강직하고 벽돌같은 녀석이 검은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자신을 쏘아본다. 가면으로 쓰고 있을 미소까지 꿰뚫어 마치 영혼의 깊은 곳을 유린하듯 꿰뚫어보고 있다. 흡사 거짓말을 꺼내면 죽여버리겠다..라는 식으로 쳐다본다. 가윤은 척추 마디를 전율하는 오싹함으로 잠시 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마치 쥐어짜듯 웃으며 한 단어씩 내뱉으려 애썼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굳이 너에게 안기고 싶었던 게 아냐.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였지..“ 아아... 역시 아무리 이성을 잃고 마음이 절박했어도 그 날 이 녀석과 그러는 게 아니었다. 너무나 잘 속이고 위장해왔기 때문에 절대 이 녀석이 알아차릴 리 없다고 여겼던 게 화근이다. 모를 줄 알았다. "그래.................“ ...녀석이 갑자기 입술 끝을 올리며 씨익- 웃는다.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저렇게 칼끝을 세우듯 웃는 걸 보지 못했다. 갑자기 손마디가 다시 벌벌 떨려온다. “..아..그래... ..예를 들고 싶어서 굳이 친구에게 안긴단 말이지.. ...좋은 비유야. 너 처럼 머리 좋은 녀석들이라면 몸으로 가르쳐 줄 정도는 되야지.“ “..............................” “.......하지만, 친구의 그 희생 가득한 가르침을 받고 생각해 봤는데 말야...” “............................” “.....나도 예전같으면 친구놈을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미친 게 아닐까...하고 걱정했을거야. ..하지만 겪고 나니, 정말 친구 놈을 안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니, 안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지. 안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한거지. 그렇지 않아?“ 무슨 말이 하고 싶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얼음같은 미소를 싹 지운 채, 상대방을 지독하게 관찰하는 시선이 된다. “내가 너 안고 싶어서 그 날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구. ........비록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 “솔직히 말해줄까? 그 날 이후로도 계속 생각나서 거의 미칠 것 같아. 그러니 이제 니 상태를 좀 더 이해하게 됐지. 천하의 계가윤이 내 주변을 난장으로 만드는 이 사건들을 저지르는 이유가 뭘까...라고.“ “.........지협아..........” “나쁜 새끼..” 그리고 이를 갈듯 쏟아부었다. 갑자기 달려들어, 멱살을 쥐고 불길이 확 번지는 지독한 눈동자로 으르렁 거린다. 숨이 막혔다. 어제 목을 조를 때보다 더 이유 있는 살기였다. 어제는 비록, 자신이 도발한 탓에 화가 난 것이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의 살기는 진짜다. 마치 자신을 죽이거나, 혹은 벌거벗겨 농락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정도로 필사적이다. 그만큼 흔들린 것이다. 가윤 자신이 녀석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건데...........마지막까지 참지 못하고 녀석에게 안긴 게 미치도록 후회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 좋은 녀석은, 끝까지 모르고 자신을 단념했을 것이다. 바로 친구라는 존재로써의 계가윤을 언젠가는 체념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강철같은 녀석은 또렷한 눈동자로 노려보며 낮게 속삭였다. “안기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안돼?” “.............-!!!!!!!” “하긴...... ...대한민국의 어떤 녀석이 자기의 오랜 친구한테 안기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겠어. 나라도 그렇게 못하지.. 그래..고민했겠지, 너도. 인정해. 그게 고통스러워서 클럽에나 나갔어야 한다면.. 좋아.. 그것도 인정해. 그런데... 왜 갑자기 밤 중에 안기고 지랄이야!!!!!“ “........너에게 안기고 싶은 게 아냐..” 그래도 침착하게 댓구하자, 녀석이 싸늘하게 씹는다. 웃기지 말라는 듯 음산하게 웃었다. “알아, 알아. 이해한다니깐... 나도 하고 싶지 않아, 계가윤. 정말 하고 싶지 않아. 너도 그랬겠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 진짜야. 이해해. 그러니 더 미치지.. 그런데도 하고 싶은 걸 어떻게 해!!!.........“ “..안 들려.....” “나쁜 새끼... 그렇다 하더라도...좀 더 참았어야지, 이 새꺄.. 아니면 끝까지 너만 망치던지... 이게 뭐야..“ “.......안 들려...” “웃기지 말고 들어. 내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얄밉게 안 굴래? 솔직히 말해줄까? 너 때문에 갈증이 나. 아침부터 밤 끝까지 니 지랄같은 행동들과 걱정들 밖에 안 들어. 혹시 원한 게 이거 아냐? 하루 종일, 온 종일.. ...망할 놈의 니 생각밖에 안 든다구............“ “안 들려.........-...........” 몸 전체가 갑자기 힘이 쭉- 빠진 채, 가윤은 안간힘을 다해 노래 불렀다. 그리고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저어댄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녀석이 힘찬 손길로 팔을 뻗는다. 찰싹- 하고 예리한 소리가 얼굴을 후려쳤다. 노래를 부를 힘도 사라진다. “들어, 이 나쁜 새꺄...............” “안 들려.” “들어!!!!!!!!!!!!! 니가 만족할만한 이야기야. 그래, 니가 이겼어. 원래 니가 이기는 게임이었어. 너 때문에 아침마다 사정을 한다구. 니 생각하면서 자위를 하게 돼! 너도 발정났지? 나도 그래! 하기 싫은데도 그렇게 돼. 나도 미치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니가 원하던 게 혹시 이런 거야? 이래서 좋아?!!!!!!!“ 녀석이 악을 쓴다. 가윤은 말없이 지협을 쏘아보았다. 정말 들리지 않는다. 니 말 같은 거 하나도 안 들려............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협의 눈동자가 조금 빨갛다. 정말 고민했을 거다..이 새끼는... ......한심할 정도로 강직하고 사람 좋아서...아마 죽도록 생각했을 거다. 그러니 니가 내 친구지..........라고 가윤은 쓸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지협은 더 기가 찬다는 듯 천정을 바라본다. 사실대로 말하자고 그가 말했다. 그래, 가윤은 그래서 웃었다. 녀석이 맞는 말을 했다. 녀석은 그러고도 남을 줄 알았다. 정말 안기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아닌 것처럼 말하고 아닌 것처럼 얄밉게 굴어도, 그 행동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며칠 전처럼 그렇게 안기진 않는다. 곧 죽어도 자신을 안을 강지협이 아니다. 포기하고 있었지만,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살고 싶었다. 그건 생존 본능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죽을 것처럼 너무나 아프기 때문이다. “가윤아............제발.............” “...............” “......뭐라고 말해 봐...” 인형처럼 눈만 깜박이자, 녀석이 갈라진 목소리로 재촉한다. 그래서 녀석이 좋다. 이 녀석은 자기에게 소중한 것 밖에 모른다. 버릴 줄 모르고, 떠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좋았다. “.........강지협...” “.....................” “.........니가 친구 아니라고 말해줘서 정말 기뻤어.” “...............-!!!!!!!!!!!!!” “난 니 친구이고 싶지 않았어..“ “........................” “그렇다고 연인이 되고 싶은 것도 전혀 아냐..“ 녀석이 힘차게 잡던 목덜미를 스르륵 놓는다. 조용한 자신의 목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삐걱거린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길이다. 고개를 저으며 삐딱한 미소를 억지로 지은 채, 녀석이 중얼거렸다. “지독한 새끼....“ “.................” 뜨거운 기운이 목 너머로 올라온다. 가윤은 겨우 겨우 그것을 꿀꺽- 삼키며 애써 냉정한 웃음을 지었다. 어쩌란 말인가. 이대로 조연같은 친구로 평생 지내는 것도 고통스럽고, 그렇다고 녀석과 희희덕 거리며 둘만 즐거울 수도 없다. 자신은 녀석을 잘 안다. 자신이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절대 친구를 안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했을 저 상식적이고 강직한 녀석은... 지금 당장만 혼란스러울 뿐, 언젠가는 열정만큼 치밀하게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사회와 가족들이 등돌리는 관계로 밀어넣은 자신을 누구보다 미워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경멸에 비할 바 아니다. 그래서 친구로 남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연인이 될 수도 없다. 가윤의 딜레마는 그것이었다. 클럽에 왜 나갔냐니.. 그건 너무 뻔한 이유다. 이제는 저 녀석도 알고 있는 바로 그 이유다. 그저 도망가고 싶을 뿐이다. 한국의 열 열덟 <8> 지협은 그 날 고개 돌렸다. 자신과.. 녀석과, 그리고 이 모든 현실에서 잠시. 물론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바로, 하지 못한 말 사이에 무수한 침묵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지협의 어지러운 판단력도 잠시였다. 감히 그것을 식힐만한 일이 곧 터진 것이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같은 반 녀석들 중 누군가가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구체적으로 가윤이라는 걸 언급한 건 아니지만, 어느 누가 보아도 그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가 된 글은, 학교 학생 중 누군가가 불건전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는 것과 그가 그래도 모범생의 탈을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음해성 내용이라는 이유로 선생에 의해 곧 삭제가 되었지만, 파장은 의외로 심각했다. 지협은 가윤이 곧 교무실에 불려갈 거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더군다나 다른 녀석들의 노골적인 따돌림도 가뜩이나 심각해지는 편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가윤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분명치 않다. 언제나처럼 조금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 편이었다. 늘 그렇듯 똑같은 표정, 늘 그렇듯 깨끗한 얼굴, 추호의 거리낌도 없고, 아무런 감정없는 미소. 도무지 그 뜨거운 몸이 진짜 녀석이었는지 의심이 늘 들만큼 냉정한 웃음. “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문제야...” 범기가 중얼거렸다. 녀석은 조금 전에 교실 창밖으로 스쳐가는 가윤의 반듯한 옆모습을 훔쳐보며 지협에게 넌지시 말한다. 그래도 점심을 먹은 직후였고, 일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녀석과 농구를 하기 위해 나오던 길이었다. “그래.” 지협은 짧고 건조하게 대답하며 가윤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휙 돌린다. 뭔가 불분명한 답답함이 명치 끝에 매달렸지만, 결국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요새는 잘생긴 그 회사원이라는 남자가 자주 데리러 오더라..” 농구공을 튕기며 범기가 작게 속삭인다. 아마, 게시판 사건으로 수근거리는 녀석들을 생각한 것 같다. 뭐, 반응은 여러가지였다. 범기가 구체적으로 가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비꼬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만, 뇌리에 선명하게 박히는 ‘잘생긴 그 회사원’이라는 말에 간이 서늘해진다. 학교, 게시판, 친구들..그 모든 곳에 파장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녀석들의 3대 3 농구를 하는 통에 몇 개의 농구골대가 모자랄 판이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지협은 말없이 학교 건물을 노려본다. “강지협.” 손가락 위에서 공을 돌리며, 범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연다. 이 녀석은 본성이 좀 그런 녀석이다. 가볍고 가벼운 녀석. 그런 녀석이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면 이제 가윤의 문제는 정말 심해진 것이다. “누군가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가족이나, 선생님이나..그 누구든.. 도와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남자를 좋아하다니.. 세상에 호모라니... ..........계가윤.. 아무리 그래도 니 친구잖아.“ “......................” 지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농구공을 빼앗아 마침 비어있는 골대에 격하게 집어 던졌다. 슛- 골인. 1득점. ************************** 과연, 교문 앞에는 한번 보았던 고급 승용차가 서 있다. 아이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여학생들 중에는 적나라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녀석도 있었다. 트레이닝을 가지 않고 이 시간에 남아 있는 게 오랜만이었다. 그 동안 지협은 하교 후에 바로 연습을 가느라 학교 정문 앞에 서 있는 이 승용차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나오던 가윤이 교문 앞에 딱 멈춰선다. 지협이 작정이라도 하고 기다리는 것에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포카 페이스를 유지했다. 드러내놓고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호기심에 가득한 사람들을 적당히 무시한 채 지협이 딱딱하게 내뱉는다. “잠시만 이야기 좀 하자.” 가윤의 보기 좋은 눈썹이 활처럼 쓰윽- 올라간다. 여전히 감정없이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언제나 흔들림없는 이 녀석의 태도에 화가 날 지경이다. 누구는 머리 속이 열기로 지끈 지끈 거리는데, 정작 당사자는 냉정하다. “여기까지 남자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 딱 잘라 경고하듯 말했지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가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이들이 듣지 못하게 좀 더 목소리를 낮추며 지협은 가방을 고쳐 멨다. “저 남자.. 학교까지 오게 하지는 말라구.“ “.....그럼 집에 데리고 오는 건 돼? 나더러는 나영이 올 때 집에도 있지 말라며? 뭔가 불공평 하잖아?“ 여유 가득한 미소. 언제나처럼 얄미울 정도로 건방진 태도. 그 밤에 살짝 말끝을 떨며 간신히 말을 하던 계가윤이 아니었다. 사실 그 날 모습도, 지협으로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녀석의 흔들림었지만 말이다. 아아.. 자신도 모르는 가윤의 어떤 마음이나 모습은 너무나 빨리 스쳐갔다. 남은 것은, 항상 지랄같은 이 얄미움. 언제나 한결같은 그 태도에 질렸다. 그래 니 마음대로 해! 니 마음대로 해! 니가 언제나 원하는 걸 얻어왔듯이 니 좇나 뛰어난 머리대로 살아! 요 며칠동안 내가 홀린 거지. 니가 어떤 녀석인지 뻔히 알면서, 또 한번 니 연극에 놀아나는거지.. 씨바.. 그러면서 왜 그 날의 니 부탁이 아직도 나는 쟁쟁한데? 왜 그게 귓가에서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울려대는 건데? “계가윤.” “........말 해. 귓구멍 뚫려 있어.” “너 연기자 해라. 아주 잠깐 널 동정할 뻔 했는데..친구로써..“ “동정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가윤을 기다리던 그 잘생긴 회사원이 드디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뭔가 위협적인 냄새를 풍기는 지협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순간,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가윤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덕분에 지협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고개를 숙여 녀석의 말을 주워 담아야했다. “착각하지마, 강지협.” 그것은 분명한 선언이었다. “복잡한 표정 짓지마, 잘생긴 바보. 계속 너랑 자고 싶었다고만 이야기했을 뿐이야. 널 사랑한다고 유치하게 말한 것도 아니고, 니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게 좋다는 뜻도 아니었어.“ “..........-!!!!!!!!!” “말했지. 난 너라는 녀석을 너무나 잘 알아. 세상에서 나보다 잘 아는 녀석도 없을 거야. 머리 나쁘고 방탕하면서도 의리파인 강지협이지. 너도 그 날 말했잖아. 한번 겪고 나니깐, 내가 안고 싶어졌다고.. 한마디 해 줄까? 쓸데없는 일에 책임감 느끼지마. 나는 니가 섹스 한번 했다고 책임져야하는 여자가 아냐. 너로써는 한번 한 그 경험이 흥분할만한 일이었겠지만, 난 아냐. 넌 처음이라서 중요했겠지만, 난 아냐.“ “.........계가윤..” “그게 끝이야. 차갑게 대하는 건 친구로써 그런 거라고 이해하겠다는 말이었어. 얼마든지 니가 나를 나쁘게 대해도 이해한단 말이었어. 나머지는 이제 참견하지마. 한번 같이 잤다고 세상 무너지는 거 아냐.“ 그 때, 문제의 원조교제 상대방이 성큼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언뜻 보아도 값비싼 양복 셔츠를 둘둘 말아 팔뚝같이 걷으며, 부유해 보이는 그는 가윤의 어깨를 한번 툭 친다. 지협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런 그를 노려보는 대신, 가윤은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웃었다. 눈동자의 무표정이 너무 깊어서 유리알처럼 다가올 정도였다. “그러니깐, 강지협...” “.............” “......날 욕하든, 때리든, 차갑게 대하고 벌레처럼 다루는 건 상관없어. 그건 니가 친구로써 할 수 있는 아주 멋진 권리야. 그렇다고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놀이까지 참견하진 마.“ “놀이?” 이번에는 다른 녀석들에게 들릴 정도로 조금 일상적인 목소리로 가윤이 딱 잘라 대답했다. “섹스 말야, 섹스. 난 친구녀석과도 자고 싶어서 환장할 정도라구. 너도 알잖아? 넌 그런 미친 놈한테 딱 한번 물린 거고.. 불행하게도...“ “.......닥쳐...이 개새끼.......” 나에게 그렇게 지독한 표정으로 내뱉는 너인데.. ..왜 꼭 지금도 꽉 쥐고 있는 니 주먹에 나는 신경이 쓰이는거지.... “불행하게도, 넌 더 이상 게임을 즐길 수 없어. 넌 너무 진지해. 말했잖아? 넌 나랑 섹스를 하면 할수록..“ “그만해, 계가윤.” “.......하면 할수록 날 경멸할거니깐. 그러면서도 그 망할 놈의 의리를 버리지 못하니깐. 너도 달릴 거 제대로 화끈하게 달린 사내새끼니깐 물론 동하겠지. 그러면서도 즐길 만큼 타락하지 않은 게, 니 잘못이야. 그러니깐 넌 안돼. 니가 해주지 못하는 부분까지 어설프게 참견하지마. 난 너랑도 그 짓을 하고 싶어 안달 난거 맞지만, 굳이 너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그야말로, 아이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물론 부글 부글 거리는 건 지협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입술을 비틀며 따박 따박 잘도 내뱉는다. 저 지나친 조소를 한대 갈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 쯤에서 잘생긴 회사원이 더 이상 관심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가윤의 팔을 잡아당긴다. 목덜미까지 빨게진 지협에게, 그는 더군다나 금박의 명함 케이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명함까지 한장 내밀었다. 지협은 한참 뒤에야 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발끝까지 얼어붙을 정도의 심한 분노에 허를 찔린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 날보다 한결 더 독해진 표정으로,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는지 속이 뒤틀린다. ‘내가 포기할 수 있게 도와줘야지.’라고 말했을 때도 그 애절함에서 끝내 시선을 돌려야했지만, 이렇게 하는 것도 결코 마음 편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지독한 얼굴로 ‘잡아줘..’라고 애원하는 위태로움이 언뜻 언뜻 보이는데, 손을 뻗을 때마다 더 멀어진다. 나더러 이제 어떻게 하라구!!!..........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왜 그렇게 지독하게 내던지면서 눈동자는 떠는 건데! 나에게 안기고 싶었다며!..쭉 안기고 싶었다며! 실제로 안길 정도로 무모해졌었으면, 있는대로 사람 휘저어 놓고는 이제 발 뺌이야? 그냥 장난이었다-...라고 치부하고 싶을 때조차, 가늘게 귀가에 붙잡혀 버린 니 한숨은 뭔데... 아아... 정말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건데... “휴우.............” 지협은 원래 흥분하면 한참 뒤에야 이성을 찾는 편이었다. 그는 험한 손길로 짧은 스포츠 형 머리카락을 벅벅 쓸어올리며, 손안에 잠긴 명함을 한참 뒤에야 들여다본다. ‘Ananomi' 라고 적혀있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고급 양질의 반듯한 명함 위에는 빨간 글씨로 Ananomi라고 적혀 있었다. 뭐하는 회사인지 그런 것은 일체 없이 다만 그 이름과 ‘김규철’이라는 남자의 풀네임만이 전부다. ******************************* “너는 아는 가장 예쁜 거짓말쟁이 중 한명이야.” 규철이 웃으며 말했다. Ananomi의 락커와 주방까지는 들락거릴 수 있었다. 예전처럼 손님을 받는다든지 하는 건 안 되지만, 지금처럼 얼마든지 가윤은 Ananomi 락커에 놀러올 수는 있었다. 무심하게 스포츠 신문을 들추자, 규철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셔츠에서 손을 빼낸다. 굉장히 잘짜여진 몸매다. 비록 테니스를 치는 그 누구 누구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 “형이 아무리 내게 거짓말쟁이라고 말해도...” “말해도?” “두번 다시 그 녀석과는 안 자요.” “.......누가 뭐래?” 그래, .. 김규철이 그런 일로 뭐라고 할 인간도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이 원조교제니 뭐니 하며 도발하고 있지만, 진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정말 잘 해주기 때문에 위로차 만나는 거 뿐이다. 말 그대로 원조는 있지만, 교제는 없다. “내가 견딜 수 없어서 그래요.” “...............”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가윤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솔직히 누군가 묻지 않아도,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상대가 친하고, 누구에게도 정직할 수 없다면 말할 나위 없다. “한번만 더 그 사고를 쳤다간,..” “...........?” “...내가 매달릴 것 같아 겁이 나서 그래요.” “좋아할 때는 언제고...” 아아...지금도 좋아요..라고 말하며, 가윤은 쓰게 웃었다. 다른 호스트 형 중에 하나가 락커를 빼꼼히 열다가, 반갑게 인사하며 문 닫는다. 규철은 바쁜 사람이니깐, 이 쯤에서 대화를 접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윤은 속이 미어질 것 같아 겨우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달칵-... 소매의 단추를 멋있게 잠그며, 규철이 가까운 의자에 앉는다. 마치 ‘마음 놓고 말해. 들어줄게.’라는 식이어서 한결 더 안심이 된다. “많이 생각했거든요. 정말..그 바보같은 녀석이 짐작도 할 수 없을만큼 골백번도 생각했거든요...“ “오죽했겠냐.” “그렇게 많이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예요.” “기대되는 결론이군. 뭐지? 개봉박두~ 두근 두근~”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윤이 밝게 웃었다. 나중에 크면 규철과 같은 어른이 되고 싶을 정도다. 그의 직업이 뭐든지 그건 상관없었다. “아무리 많이 생각해도.. 내가 덥썩 녀석을 덮친게 가장 큰 실수였어요.“ “...사랑이란 위대하군.” “놀리지말고요, 형.. 진짜.. ..덕분에 녀석이 진지해질거라는 거.. 사실..기대 안 한 건 아니지만..“ “..기대했으면 그 결과만큼 누려.” “.......그게 안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이 그 행위로 흔들리는 건 사실이지만.. 녀석은 기본적으로 노말이예요. 그 녀석이 나와 섹스를 하면 할수록 나를 미워할텐데.. 반대로 나는 하면 할수록 마음을 기대하게 될 거예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낫잖아? 처음에는 무인도 운운했지만, 조금은 수월해졌잖아?” 씽긋... 가윤이 간신히 웃자, 그 뻑뻑한 가슴을 들여다보듯 규철이 안쓰럽게 한숨쉰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무 생각없이 녀석을 도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어느 쪽도 원하는 결론이 아니라...이거지?“ ...라고 간결하게 결론 내려준다. 가윤이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그의 말이 맞다. 진퇴양난이다. 어차피 강지협은 죽었다 깨어나도 먼저 자신을 안을 위인도 아니었다. 그저 가윤이 먼저 덮쳤기 때문에 지금은 고민하는 것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이다. 그보다 더 심하게 녀석의 발을 묶을 수도 있겠지만, 결코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 이쯤에서 정말 그만두는 게 맞다. 녀석이 짐작할 수도 없을만큼 정말 많이 고민했다. 결론은 하나다. 어떻게 해도, 둘 사이는 파괴될 것이다. 자신이 문제다. 누군가 한 쪽이 가슴 시릴정도로 깊은 마음인 이상, 서로 타협을 보는 관계란 세상엔 없는 것이다. “가윤아...” 규철이 담배를 몰아피며, 조금 웃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웃음과 진심도, 항상 녀석 앞에서는 가면을 겹으로 두른 것처럼 가시 돋힌다. 그래서 날마다 더 미움받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진심같은 건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잔뜩 비꼬게 된다. “악순환이야. 사랑받고 싶어 도발하고, 막상 관계가 깊어질까봐 겁이 나고.. 이성을 차리면 냉정해지고 있지만, 어느 순간 흔들리면 걷잡을 수 없이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그런 악순환. 제발, 니가 아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까지 사람을 몰아세우는 감정의 악순환.” 규철이 말했다. 바로 그 부분에서 두 사람이 통했다. 같은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조금 휘둥그래진 채 쳐다보자, 그가 말끔하게 웃는다. “너 같은 거짓말쟁이를 한 명 알지. 꼭 너같은 녀석이다.“ “..........누구?............”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다. 규철과 같은 사람은 정말 누구를 좋아했던 적이 있을까..라고. “Ananomi가 왜 아무 탈 없이 잘 버티는 줄 알아?”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규철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했지만, 이상하게 표정만은 조금 쓰게 보인다. “조직이 버티고 있거든. 짐작했겠지만.... 서울 시내에 몇 개나 있고, 하룻밤 새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그런 조직들 말야. 당연히 고급 요정에는 조직이 있고, 조직이 있는 곳엔 몇 개나 되는 돈벌이용 가게들이 있지.“ “............-!!!!!!!!!” “국회의원들도 얽혀 있는 대형 돈벌이지. 최고의 환상을 심어주는 곳이 Ananomi야. Ananomi를 접수한 곳도 역시 그런 최고의 조직이지. 강남 일대를 주름잡는 그 조직은 벌써 몇 년 째 다른 녀석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이곳 물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지키는 조직의 리더에게 장차 그 조직을 이어받을 젊은 아들이 하나 있다는 거야...“ “.....................” “..그 녀석이 꼭 너같이 굉장한 거짓말쟁이지. 곧 죽어 쓰러질 것처럼 안쓰러운 눈동자를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버려’라고 말하지. 굉장히 아름다운 얼굴로, 재수가 없을 정도로 차갑게 말해. 너는 항상 그 녀석을 떠올리게 만들어.“ “.........규철이 형?” 괜한 말을 했다는 듯, 규철이 일어섰다. 그가 룸에 들어갈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줄기 의심처럼 가윤의 마음으로 바람이 흘러들어온다. 그것은 마치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꼭 자신과 닮은 그의 한순간 미소 때문이다. “형이 좋아했던 사람이 그 보스의 젊은 아들?” 갑자기 그 말이 튀어나왔다. 일순, 하얀 셔츠의 등이 갑자기 굳는다.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 규철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정확한 설명을 포기할 때쯤에야 규철은 라커룸을 나가며 여느 때처럼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래. 그 녀석도 너와 그 잘생긴 녀석처럼 나의 오래된 친구야.“ “........-!!!!!!!!!!” “더 심각한 건, 그 녀석이 Ananomi를 접수한 조직의 아들인 반면에,...” “....................” “....나는 녀석을 없애야 할 정도로 라이벌인 다른 조직의 일원이지.” “.............!!!!!!!!!!!!!!!!!!!!” “재수 오지게도 없지. 녀석과 나는 수십년간 친구였는데,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지 못해서 안달이야. 어쩌면 안고 안기는 관계조차 그렇게 파괴적이 되어 버렸고..“ 규철이 조직폭력배 출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여간해서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가윤도 놀라는 바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니가 지협이라는 그 친구에게 다른 마음을 가진 게 2년이 됐다고 했지? 나는 이 망할 놈의 감정의 악순환을 십년 가까이 하고 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지랄같이 ‘날 잡아’라고 말하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어찌나 그렇게 피투성이같은 말 뿐인지... 언제나 다른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결국 우리는 서로가 뭘 찾고 있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어.“ “....................” “그 녀석도 나와는 절대 안 자. 오죽했으면 내가 Ananomi에 들어 왔겠냐. 물론, 나는 .Ananomi에 숨어 있는 정보원이지만 말야.“ 그런 정도의 위험한 발언을 하면서도 그가 웃는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정말 뭔가를 아주 심하게 포기 당한 것같이 상실감 가득한 표정으로 웃는다. “그러니깐...” “................” “......강지협이 그 새끼가 끝까지 안 되면 나한테 와. 내가 원조도 해주고 교제도 해줄테니............. 너와 나는 동지 의식이라도 있잖아? ...아.. 그리고 슬슬 너에게 끌리고 있는 정신나간 어른이니 말야.“ “...........그 형은요?” “.......너도 그 상태에서.....조금만 더 나이들어봐. 내 나이 스물 다섯인데,.. 이제............. ......... ..... 편안한 사랑이 좋다..“ ...라고 말하며 그가 나갔다. 그러나 가윤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 그 부단하고 지리한 감정에 고개를 흔든다. 아무리 편안한 사랑이 좋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규철도 거짓말을 하는 거다. 힘들고 괴롭고 지치고 가슴팍을 짓누르는 이 거대한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기 때문에 좋을 뿐이다. 세상엔 수많은 것들이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할 수 있지만, 사람들에겐 아무리 아파도 버리지 못하는 감정이라는 게 낡은 기억 속에 언제나 존재한다. 그 사랑이 내 것이라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9> 결국 선생에게 불려갔다. 선생은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안색이 나빠진 모습으로 연신 당황한 기색이었다. 가윤은 겉치례 식으로 짧게 웃었을 뿐이다. 적당히 둘러대면 증거도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뭐라고 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힘겨운 모범생의 가면을 쓰고 교무실을 나왔을 때,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 자신처럼 자주 불려가서 이런 대화를 해야 하는 문제 학생들은 여러번 겪을 현상이다. 그러나, 조용한 복도 끝 믿기진 않았지만 지협이 있었다. 녀석은 계단 끝에 앉아서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심하게 바라다본다. 수업이 시작됐을 텐데도 아직 들어가지 않은 걸보면, 아마 누군가 연락한 모양이다. 보나마나 ‘계가윤’이 드디어 그 문제로 학교에 불려갔다..라고 어떤 얼빠진 녀석이 고자질했을 거다. 뭐..어찌되었건.. 가윤은 녀석의 모습에 사실 적잖이 당황했다. 충분히 시간이 있을 때는 강하고 차갑게 위장할 수 있지만, 이럴 때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당황했다는 걸 쉽게 숨기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며 앉아 있는 지협을 스쳐간다. 한 걸음, 두 걸음이 마치 몇 미터나 되는 듯 길게 느껴진다. 두근..심장이 그 걸음에 맞게 흔들렸다. 비록 모른 척 하고 지나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피하지 말고 제대로 보고 가, 계가윤” 아무도 없는 정막 끝에서 지협이 단호하게 입을 연다. 가윤의 몸이 이미 녀석의 어깨 근처를 반걸음 스쳐갔을 때였다. 희미하게 멘솔 냄새가 갑자기 느껴진다. 녀석이 2년전 쯤에 끊었을 담배. 혹시 최근에 다시 피기 시작했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녀석의 저지에 잠시 몸이 빳빳해졌지만, 가윤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집스레 앞으로 발을 내민다. 그러자, 휙-하고 빠른 바람소리와 함께 앉아 있던 녀석이 자신의 손목을 낚아챘다. 갸우뚱..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다. 그대로 멈춰서야했다. 지금의 지협이 너무나 진지하고 새로워서, 더 이상 오기를 부릴 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녀석은 계단에 앉은 채 자신과 시선이 반대방향이라는 사실 뿐이다. 비록 손목만은 화끈거릴 정도로 강하게 잡혀버렸지만 말이다. “손 놓고 이야기 해.” 냉정하게 잘라 말했지만, 지협은 끄떡없어 보인다. 다만 가윤이 뭐라고 지껄이든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반응이다. “우리 엄마는 니가 어리고 니 아버지가 외국에 나가실 때부터 친자식처럼 너랑 나랑 키우셨어.” “..........................” “오늘 선생에게 불려갔지?” “..................하고 싶은 말만 해.” 목덜미로 따끔거리게 와 닿는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그 시선의 눌린 자국에 화상이라도 남을 것처럼 놀랍게 격렬한 눈동자다. 애써 모른 척 앞 쪽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뭔가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넌 나보다 머리 좋잖아, 계가윤. 무슨 말인지 니가 더 잘 알 거 아냐? 선생에게 불려갈 정도였으면 이제 부모님께 들키는 건 시간 문제라는 말이야.“ “...................” 휴우-...하고 짧은 한숨. 그리고 지협이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녀석이 맨 교복 넥타이가 잠시 흔들린다. 여전히 놓지 않는 녀석의 손을 의식하며 가윤이 살짝 뒷걸음쳤다. 느낄 수 있다. 녀석의 안에서 뭔가 단단해진 것이다. “어제도 그 회사원 녀석하고 잤냐?” 짧게 입안에서 씹듯이 내던지는 질문. 눈을 가늘게 뜨며 탐색하는 듯한 눈빛. 절대 강지협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 갑자기 쿵-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심장은 사각형이다. 그 모서리가 이렇게 날카롭게 흉부를 찔러대는 걸 보니... 그만큼이나 욱씬거릴 정도로 뭔가 진득한 시선이다. 관찰하는 눈빛을 넘어서서 보다 깊은 곳을 구석 구석 질책하는 눈동자다. 그리고 그 때였다. “...........뭐야;.....-!!..........” 가윤이 낮게 탄식을 지르기도 전에, 갑자기 지협이 손을 뻗어 교복 셔츠 깃을 양쪽으로 잡아당긴 것이다. 투두둑- 셔츠에서 성급하게 떨어져 나간 단추가 계단을 마구 뒹굴었다. “..........-!!!!!!!!!!” 언제나처럼 사람좋게 웃고, 말도 안될 만큼 잘생기고 사교성 좋은 친구 녀석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이 날 정도로 차갑게 내려앉은 표정으로 삐딱하게 웃었다. “소리질러봐. 니가 유혹했다고 소문낼 거니깐...“ “.....-!!!!!!!!!” 소름이 돋을만큼 전율이 이는 표정이다. 열려진 셔츠 자락 때문에 벗겨진 가슴으로 차가운 복도 공기가 부딪쳤다. 이 녀석과의 게임에서 거의 매번 주도권을 쥐던 자신이 이번에는 잔뜩 굳어 버린다. 그 서늘한 시선, 아무런 감정을 담지도 않은 눈길로 지협이 가슴을 샅샅이 흩어간다. 정말 규철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확인하고 말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침내, 녀석이 그 강한 손끝으로 단추가 떨어져나간 셔츠의 양 쪽 깃을 확 잡아 내렸을 때는 숨이 막혔다. 어깨까지 드러났다. 심장이 파열할 것처럼 뛰어 대는 바람에 더욱 가슴이 질끈거린다. 더군다나 녀석은 정말 가윤에게서 난잡한 증거라도 잡을 듯, 너무나 집요한 눈길이었다. “그만 둬.” 익숙한 학교 복도, 환한 햇살 아래 매끈하게 드러난 상반신을 의식하며 가윤이 절망적으로 잘라 말했다. 왜 그런 걸 굳이 확인하고 싶은지 모르지만, 이쯤에서 멈춰줘야 한다. 그러나 이 녀석은 지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가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강한 손가락을 매몰차게 턱으로 뻗어왔다. “강지협!” 이를 악무는 듯한 그 표정. 한번씩 눈꺼풀을 닫았다 여는 것도 조금 시간을 들이는 것처럼 숨죽인 행동. 가윤은 훅-하고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명백히 말하자면, 녀석은 도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뭔가를 확인하기 위해 홧김에 그랬던 것인데, 생각에 잠겨버리느라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내민 것이다. 하필이면 그 손가락이 자신의 턱에서 목선을 쓸어내리며, 아슬 아슬하게 쇄골을 더듬기에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 쯤에서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녀석이 기가 막히다는 듯 쓰게 웃으며 중얼거린다. “그 잘생긴 회사원이랑 요란하게 뒹굴다 오는 것치고는 ... 늘 깨끗한 몸이군.. 아쉬워라... 그렇지?...“ “..............!!!!!!!!!!!......”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근에 몇 번이나 조금 약해진 자신을 들킨 가윤으로써는 한계라는 걸 알아야했다. 어제도 교문 앞에서 그렇게 공격했지만, 역시 이 녀석도 알고 있는 거다. “잘 좀 속여봐, 친구. 그래야 내가 안심하지.“ “..........섹스를 한다고 꼭 흔적이 남는 건 아냐. 니가 뭘 알아?” “....아하~...” 너무나 진지하고 한편으로는 찔리도록 아픈 시선이어서, 가윤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더 덧붙이기 위해 입을 열어야 했는데, 그보다 지협의 행동이 더 빨랐다. 녀석이 고개를 흔들듯 자신에게서 손을 떼어낸 채, 쾅-하고 벽을 손바닥으로 내리친 것이다. 더불어 온 구석 구석에 세포를 떨리게 하는 미묘한 열병들이 남겨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 흘렀을 때, 역시나 하지 못한 말들이 두 사람 각각에게 침묵으로 남겨졌다. 그쯤에야 지협이 벽에 이마를 댄 채, 이를 악물듯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 “..................” “..그 잘난척하고 아니꼬운 계가윤이 .. 그래도 내게 어느 날.. ‘넌 내 친구다.’라고 말해줘서 좋았어. 꼭 칭찬받는 기분이었어.“ “.....................” “..알아? 나에게 친구라는 건 내 자존심이야. 아직 얼마 못 살아봤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것 중엔 최고의 칭찬이었어. 넌 내 친구야..라고 말해주는 게 얼마나 인생에서 힘이 되는지 넌 모를 거야. 너에겐.. ..필요한 사람도 필요한 관계도 없이 너 혼자 모든 걸 결정하고 행동해버리니깐..“ 친구가 자기 자신의 자존심이라... ...그건 나에게도 그래..라고 가윤은 들리지 않게 속으로 헤아리며, 말없이 허리를 굽혔다. 단추 몇 개를 줍는다. “나영이와 사귀기로 했다.” “........-!!!!!!!!!!!!”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녀석의 말은 굽힌 허리와, 말없는 목덜미에 와 닿을 뿐이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말처럼 아득하다. “니 말들을 정말 곰곰이 생각해봤어. 안 되는 내 머리로.. 정말 여러번 생각했어. 계가윤.” “.................” “...니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겠어.” “...................” “....그러니깐, 이제 그 따위 거짓말 집어치워. 아니면 정말 치밀하게 잘 속여보든지 너는 나도 속이지 못할 정도로 이제 빈틈이 너무 보여. .......뭔가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위해 계속해서 삐딱해지려고 노력하고.. 계속 타락하려고 노력하고....“ “........아냐.” “니가 아니라고 우기든 말든...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여. 그걸 말하고 싶은 거다, 개새꺄.. 너는 너 자신도 제대로 속이지 못하고, 나도 속이지 못하면서 누굴 속이겠다는 거냐? 선생님? 부모님?“ 그래서 나영이와 사귄다는거냐..잘생긴 바보.. ...그래... ..하긴 그게 가장 빠른 답이지.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하기 까지 했는데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렇게라도 매듭지어야지. 잘했어, 바보! .................참, 잘했어. “잘 됐네. 축하한다.“ 그저 몇 개 남은 단추를 잠그며 가윤은 냉정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그 표정을 유심히 돌아보며, 지협이 쓰게 웃는다. 하지 않아도 아는 말들, 하고 싶어도 꺼내지 못한 말들....친구와 연인의 어중간한 경계선이 너무나 힘들어 작게 한숨 쉬어본다. “축하해?” 가윤의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 지협이 웃었다. 성마른 웃음에 가윤은 뭔가 울컥-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삼킨다. 그럼, 더 이상 뭐가 필요해? 니 여자를 축하하는데 얼마나 많은 수식어가 필요해? 거절할 수 없을만큼 냉랭하게 녀석을 노려보자, 지협이 고개를 흔들며 한참 격해진 어조로 낮게 욕설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듯 가라앉은 시선으로 가윤의 숙인 등에서 확 손목을 다시 낚아챘다. “축하한다구? ...축한하다라...그래..좋아... 다음부터 위세를 부리려면...계가윤..” “...........!!............” “떨지 않고 말하는 법을 먼저 배워.” “.............-!!!!!!!!!!!!!!” “아니면 떨고 있는 걸 내 눈에 들키지 말든지.. 이전 같으면 몰랐겠지만... 친구를 벗어난 내 눈에는 이게 너무나 거슬리거든. 계속 해서 지랄같이 마음에 걸린단 말야, 이 새꺄...!!!!!“ 지협이 재빨리 등 돌려버린다. 뭔가 혓바닥까지 지끈하게 올라왔던 목소리가 묻혀 버린다. 대신 가윤도 고개 돌렸다.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벌벌 떨리기 시작한 손끝으로 간신히 벌어지는 셔츠를 부여잡는다. 다음번에... ...라고 가윤은 시멘트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 친구. 아.... 이 다음에 좀 더 편하게 만나지면, 그 때 목욕탕도 같이 가고 이전처럼 깔깔거리며 같은 침대에서 뒹굴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자.. 니가 나에게 ‘친구는 내 자존심’이라고 했냐.. 계가윤이 강지협의 자존심만한 인간이었냐.. 좋네,.. 나 역시 살면서 그만한 칭찬이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축하하는 거야, 친구. 계가윤이 몹쓸 장난까지 걸며 잠시 널 혼란시켰지만, 꿋꿋이 버텨낸 그 강한 의지를.. 잠시 힘겨워하지만, 결코 나에게 넘어오지 않는 너의 높은 판단력을! .......사랑한다, 친구. 너는 내 18세의 유일한 자존심이다. 18세는 자존심만으로도 턱을 쳐들고 살아가고... ..그래서, 지금의 너는 내가 버티는 유일한 이유라는 말이다. <10> “어이구.., 정말 니가 우리 지협이 여자친구냐?”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달말에 올라오시겠다는 약속을 깨고 무려 이주일이나 넘기신 끝에 올라오셨다. 물론 편치 않는 길이었겠지만, 지협은 어머니가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심하게 들썩인다. 주말이라 놀러온 나영이 쇼파에서 벌떡 일어서서 90도로 인사한다. 원나영은 지협의 댓쉬를 5초만에 승락했다. 그렇게 빨리 승락해버리자, 지협 쪽에서 오히려 허탈할 지경이었다. 내가 뭐하러 얘 때문에 2년 씩이나 마음 고생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빨리 허락하는 나영에게는 애틋한 마음이나 애정같은 것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협으로써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과 가윤의 관계에서 가장 확고한 방어막이 되었다는 것을 확실했다. 계단에서 고백한 그 날을 이후로, 가윤과 자신은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 한마디 인사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 “이름이 뭐라구? 아아...원나영? 어이구..우리 아들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이리 이쁜 애를 데리고 왔노.....“ 어머니는 땀에 조금 젖으신 이마를 닦으시며 나영을 향해 환히 웃으신다. 언제나 딸이 갖고 싶었다는 어머니는, 그래서 이쁘장한 가윤을 어릴 때부터 친아들인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다. 계가윤.. ...빌어먹을, 오늘도 집에 없는 녀석이다. “그래, 너도 테니스 한다고? ..어이구, 잘 됐다. 우리 지협이 머리가 나빠서 공부는 못하지만..“ “엄마!”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심성은 착하거든. 이 녀석이 연애한다고 해도 나나 애 아빠나 안 말린다. 알아서 잘 들 하겠지. 꼭 우리 지협이 손 잡고 둘이 같이 대학가라, 아가.. 아이구, 이쁘다..“ “엄마, 쫌-!” 엄마, 나영이는 며느리가 아니라구요...라고 민망하게 이마를 찡그리며, 지협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어머니는 나영의 등을 한번 토닥거리시더니 제일 먼저 주방 쪽으로 건너가신다. 언제나 있는 주방 검사. 보통 때는 어머니의 습격에 이 주방 검사를 가장 쫄아있었는데, 오늘은 다르다. 주방이건 뭐건 가윤이 문제가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역시, 가윤이가 다 청소해놨지, 이 놈아.” “...내가 한 거야.” “웃기고 있네, 니가 뭔 청소를 해!” 의례히 가윤이는 공부하러 갔다고 여기시는 것 같았다. 부산에서 하는 회 장사는 아무래도 주말이 가장 바쁘기 때문에 여간해선 올라오시지 않는 어머니다. 지협은 말없이 나영의 손목을 잡으며 어머니의 이리 저리 옮기시는 발걸음을 지켜본다. 언제나 이럴 때 가윤도 같이 있곤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쾌하게 미소 지으며, ‘어머니 오셨어요?’라고 친절하게 굴곤 했다. “언제 내려가세요?” 어머니가 과일을 깎는 손을 내려다보며 지협이 낮게 물었다.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입안이 바싹 바싹 말랐다. “왜? 빨리 내려가라구?” “...........엄마...무슨 말을...” “우리 딸내미 얼굴 보고 갈련다.” 어머니가 딸내미라고 부르는 것은, 그 단정하고 아름다운 계가윤이다. 최근의 가윤에 대해 마찬가지로 걱정하고 있는 듯한 나영이 자신을 조심스레 돌아본다. 바닥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곁눈질하는 것이, 할 수 있으면 전화 하라는 신호 같았다. 지협은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게 긴 한숨을 쉬며 말없이 전화기를 집어 든다. ************************ 차라리 부르지 말걸... ...이라고 지협은 혀를 잠시 깨물었다. 정말 차라리 공부하러 갔다고 거짓말하고 부르지 말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윤이 어디 아프냐?” 나영과 나란히 앉은 자신. 그리고 어머니와 나란히 앉은 가윤. 넷이서 이렇게 밥을 먹는 게 속이 답답할지 전혀 몰랐다. “아뇨..어머니 많이 드세요.” 상큼하게 웃으며 가윤이 대답했지만, 그 또한 지협은 괜스리 신경쓰여 조금 인상을 찌푸린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엄청난 공기가 답답했다. 나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가윤과 자신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어머니는 가윤이 연신 걱정된다는 듯 자꾸 대화에 끌어드리려 애쓴다. “아가, 아무래도 이 녀석이 지 친구가 연애질 한다니깐 기가 죽은 모양이네..” 여기서 어머니의 ‘아가’란 나영을 칭하는 말이다. 엄마..제발..나영이는 며느리가 아니라니깐요. 그러나 지협의 점점 굳어지는 표정에도 아무런 상관없이 어머니는 계속 벅차게 웃으시며 나영의 숟가락에 불고기를 올려놓으신다. “하긴, 아기 니가 봐도 우리 가윤이 만한 얼굴이 없지? 어디 괜찮은 친구 없냐? 이 녀석 아버지와 우리 애 아빠가 맨날 같은 날 둘이 결혼시키자고 얼마나 젊을 때부터 말했는지...“ 나영은 좋은 녀석이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이 상황을 자연스러운 미소로 넘긴다. “그럼요, 어머니. 사실 가윤이 만한 친구도 없어요. 지협이도 멋있고, 가윤이도 좋은 친구예요.“ “그러게.. 우리 가윤이는 왜 여자친구가 없을까? 저 강씨 집안의 지협이 같은 녀석도 변변치 않은 게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만드는데 말야.“ 문득.. 어머니와 나영이가 정말 그 나이에 며느리, 시어머니라도 되는 듯 환한 웃음을 터뜨렸을 때.. 왜 하필 문득.. “가윤이는 더 이쁜 여자친구 만들려고 그러죠, 뭐... 쟤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요.” “그래, 우리 양반하고 가윤이네 아빠도 어릴 때 그런 걸로 이상하게 경쟁의식 느낀 모양이데.. 서로 누구 마누라가 더 이쁜가..뭐 이런 걸로.. 사내 새끼들은 왜 그렇게 철딱서니가 없는지.. 근데, 아기네 집은 어른들이 뭘 하셔?“ “어머니는 집에 계시고, 아버지는 대학 강사세요. 아직 정식 교수는 못하고 계세요.“ “어이구..집안도 좋네.. 그러니 이렇게 반듯하게 컸지. 어쩐지.. 지협아, 아까 얘가 밥 푸는 거 봤냐? 어쩌면 그렇게 야무지게 잘 푸는지.. 행주질은 어찌나 그렇게 깔끔한지.. 역시 집에는 여자가 있어야 해. 내 염치는 없지만, 자주 자주 와서 이 사내 놈들 좀 돌봐줘라, 나영아.“ 왜 하필, 밥이 목에 걸릴까. 갑자기 배부른 위장이 쓰게 신물 넘어오는 기분에 지협은 문득 가윤을 돌아보았다. 아니, 차마 가윤의 얼굴을 보지는 않고, 녀석이 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마디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확인하듯 그 때서야 얼굴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올린다. 표정은 정말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 “엄마, 그만 해요. 집에 가윤이 있잖아.“ “에구, 이 녀석아. 그러니깐 니가 허우대만 멀쩡하지 철이 없다는 기야.. 가윤이가 아무리 이뻐도 얘도 대학가고 그러면 나영이만한 애인 달고 다닐 놈이야. 그리고 집안 살림이 여자가 하는 거랑 남자가 하는 거랑 같냐?“ 그래도,.... 엄마가 쥐고 있는 젓가락도 가윤이가 설겆이 한거고, 내가 입고 있는 이 옷도 가윤이가 세탁한거고, 이 집이 이렇게 깨끗한 것도 가윤이가 그래도 자주 청소를... “..맞아요, 어머니.” 웃지마. 이 나쁜 새끼... 그렇게 젓가락을 무슨 무기처럼 꽉 쥔 주제에.. 손마디에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질린 주제에!............. “제가 그래서 지협이 데리고 살면 피해 많이 봐요, 어머니.” “거 봐라, 가윤이도 그렇다잖아, 이 눔아. 가윤아, 너도 얼른 얼른 대학가서 어서 이쁘장한 여자친구 데리고 인사시켜라, 알겠지? 그래야 니 아버지도 나도 안심을 하지. 일년만 더 지금처럼 버텨라. 넌 좋은 대학 들어갈 거야.” 너 부르지 말 걸.. 어머니의 그런 말에 그냥 따뜻하게 웃는 널 바라보느니, 그냥 부르지 말걸.. 이런 일로 내가 갑자기 뭔가 울컥- 넘어올지 알았다면 절대 너 부르지 말걸.... 그런 말들에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지으며, 우적 우적 목구멍에 밥만 미어터지게 넣는 너를 보면.. 배도 고프지 않은 주제에, 반찬도 하나 없이 볼이 터질 때까지 쌀밥만 집어 넣는...너.. 너.......부르지 말걸... 니가 나 사랑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나도 너 그렇게 생각할 마음은 전혀 없는데도.. 이런 상황이 이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절대 부르지 말걸... ..... “사람 처음 봐? 니 밥이나 먹어, 강지협. 남의 밥그릇 탐내지 말고..” 아무렇지도 않게 ...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의 밥상을 챙기는 너는 여전히 웃는다. 그 미소가 얄미운 게 아니라, 이렇게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면.. ..절대 두번 다시 너랑은 밥도 안 먹는다...이 개새꺄... 너는 밥을 먹냐? .........근데, 왜 내 눈엔 니가 억울함을 먹는 것처럼 보이냐. ... ********************************* 새벽 내도록 가윤의 토하는 소리에 지협은 자지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같은 새벽에 부산으로 돌아가셨다. 아침 첫 기차를 타고 나가신다고 서둘러 나가셨다. 어머니의 신조는 횟집에도 여자가 있어야한다 였기에, 지협은 잔뜩 헝크러진 머리, 운동복 차림으로 어머니를 배웅했다. “아침 꼭 챙겨 먹고 다녀라.” “..........네.” “그리고, 가윤이 표정이 많이 안 좋던데 연애질도 좋지만 친구도 좀 다독거리고.” “.....알겠어요.” 아직 해가 뉘엿 뜨고 있는 새벽 공기가 차다. 보라색에서 점점 파랗게 변하는 아침 풍경을 눈에 담으며 지협은 배웅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 때였다. 가윤이 샤워를 막 끝낸 듯 욕실에서 걸어 나온 것은.. “.........?..............” 여느 때라면 ‘어디 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일요일인데 이 새벽부터 어딜 가는지 분명히 물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와 자신의 소란 때문에 깼냐고 물었을 것이다. ..사실은 가장 안쓰러웠다. 누군가가 이렇게 안쓰러워 보인다는 것. 그것도 정말 예상치 못하게 저 얄미운 건방 덩어리 계가윤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 그 사실이 가장 안타까웠다. 녀석이 무엇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어하고, 무엇을 정말 간절하게 버리고 싶은지 잘 알게 되었다. 어제 어머니 앞에서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여느 때처럼 달콤한 미소를 짓는.. ...그 일상을 지키는 것. 그러면서도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 ........그 사실이 너무나 쓰라리게 와 닿아서 사실 지협도 한숨 자지 못했다. 가윤의 구역질 소리와 더불어서 말이다. “욕실 슬리퍼 젖었다.” 그러나 정작 가윤이 자신에게 꺼낸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래......라고 지협은 허탈하게 웃고 만다. 정말 녀석이 이럴 때마다 속이 잔뜩 뒤틀린 채, 기막힌 웃음밖엔 세어나오지 않는다. 공기가 빠져나간 듯한 갈라진 웃음덩어리이다. “넌 괜찮아?” 갑자기 묻고 싶어졌다. 어제 그토록 너 부르지말걸..이라고 새삼스럽게 후회한 시간을 떠올리며, 먹먹한 가슴 팍의 이상한 통증. 그것 때문에 겨우 숨을 내쉰다. 기어이 녀석에게 등 돌린 채 물었다. 이제는 녀석을 제대로 쳐다보며 물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둘이 같이 그 망할 놈의 섹스라는 걸 하고 난 뒤 그렇게 됐다. 새삼 화가 더 날 지경이었다. 니가 죄 지었냐. 그래 잤다, 잤어. 그럴 수도 있지.. ........살다보면 씨바, 이 일 저 일 다 벌어질 수도 있지. 그래서 니가 무슨 큰 죄 지었냐. 왜 사람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 봐. 왜 어머니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비겁하게 미소 따위나 짓고 있어. ..............어제는 내가 소리치고 싶었다. 니가 여자로 안 태어난 게 무슨 큰 죄야!!...떨지 말고 고개 좀 들어!...라고.... 자신이 그런 말을 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그 강한 얼굴, 그리고 아주 섬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지협은 아직도 머리 속이 쿵쿵 울려댄다. “욕실 슬리퍼? 난 괜찮아. 욕실 슬리퍼 젖은 게 무슨 큰 일이라고..“ 씽긋 웃으며, 가윤이 머리를 턴다. 또 한번 가증스럽게 피하는 거다. 지협이 ‘괜찮냐’라고 물은 건 절대 그 뜻이 아닌데.. “클럽 나가는 거냐.” 이젠 노골적으로 묻는다. 그런 말을 묻고 있는 자신도 표정 없는 건 매한가지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탓할 수가 없다. 자신을 유혹해 놓듯 도발하고는 있는대로 도망가 버리는 가윤을 욕할 수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과 사귀어 주겠다고 말한 나영을 욕할 수 없다. 새삼 18년의 윤리의식에 심각한 도전을 받기에 가윤을 따돌린다는 그 반 녀석들을 욕할 수도 없다. 자신의 일 아니라고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범기나 상욱을 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어머니를 욕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남은 것은 끓어오르는 분노, 격렬하게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 욱씬하게 죄여오는 두통. 그런 것 밖엔 없다. ......그래서 묻는다. 마치, ‘너 운동가냐?’라고 말하듯..‘너 클럽가냐?’라고. 이런 날이 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제법이네, 강지협. 니가 그런 말을 대놓고 묻고.“ 가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젖은 머리를 말린다. 그리고는 툴툴거리며 모자를 들고 나왔다. 청바지 샐샐 끌리는 소리가 너무 예뻐서, 지협은 하필이면 그 소리가 너무 예뻐서, 그 새벽의 가윤을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가시자마자 클럽에 간다 이거냐? 그것도 이 새벽에? 그 망할 놈의 클럽은 이 시간에도 그 짓을 한단 말야?“ “귀여운 말 하고 있네. 그 짓하는데 시간이 뭐가 필요해?” 타락한 것처럼 웃는다. .......그것도 목이 잔뜩 갈라진 채 마치 쉰 목소리 크득거리듯 깔깔댄다. 그렇게 토해댔으니 성대까지 잠긴 게 당연하다. 지협은 가만히 열이 오르는 눈두덩이를 닫았다. 얼마나 더 파괴되면 계가윤이 자연스럽게 밥을 먹을지 생각하는 거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저 녀석이 저 따위 놀음에서 지칠지 생각하는 거다. 얼마나 더 아파지면, 녀석이 정말 그 입으로 ‘날 좀 잡아줘..’라고 부탁할지 되내어본다. 눈을 뜨자, 하얀 셔츠...물기가 조금 배인 아름다운 얼굴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리없는 그 얼굴, 무표정한 시선.. 예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던 깔끔한 목선.. 마치, 진흙탕에 주저 앉아 망연히 자신을 쳐다보며, ‘나 좀 도와줘.’라고 ...평소의 가윤이라면 전혀 생각지 못했을 그 애처로움과 떨리는 아쉬움으로.. 하얀 셔츠 깃을 날리며 깃털처럼 따듯하게 품안에 죄여올 그 체온으로... ...정말 그런 가윤을 듣고 싶었다. 가윤의 온 몸이 비명처럼 무언으로 호소하는 질퍽한 도움에 손 내밀고 싶었다. 가슴이 절절할 정도로 녀석이 자신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걸 느끼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자신은 지금 녀석의 피곤에 지친 듯한 몸을 꽉 끌어안고 ‘한숨자자.’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절할 정도로 깨끗한 눈동자로 망연히 바라보는 이 녀석이 한마디만.....단 한번만 ‘날 도와줘.’라고 말한다면.. ......그 상상만으로도 오싹할 정도로 마음이 미어진다. “..............-!!!!!!!!!!!!” 지협은 마침내 자신이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라도 뭔가 행동하고, 잡지 않으면..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손을 뻗는 자신을 눈치 챘는지, 녀석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서로 그럴 듯하게 위장하며 상처 내기 급급했던 말보다 침묵 쪽이 더 나았다. 말하지 않았지만, 둘 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도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녀석이 도망을 갔고, 지협은 더 재빠르게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엉겁결에 잡힌 머리카락에서 손바닥으로 촉촉한 김이 서린다. 그대로 다급하게 비누 향 나는 귓전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이미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잡아달라고 말해. 계가윤..” 머리카락을 잡힌 채, 질질 끌려오듯이 억지로 몸이 돌려세워졌다. 녀석은 당황한 듯 입을 약간 벌리고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한다. 얄미워서 숨이 막힐만큼 .. .........그 모습이 아프다. “말 해!.. 차라리, .... ...........나에게 잡아 달라고 말해.“ “..............” “니가 더 나빠지지 않게,.. 니가 더 아파지지 않게.. 니가 더 힘들어지고 추락하지 않게... ..........나에게 잡아 달라고 말 해.“ “.....................” 울고 싶었다. 서로가 너무 무서워서 좋아하느니 안고 싶으니 어쩌니 그런 말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여느 책이나 영화에서는 그런 말을 수십번도 하던데.. ..이 관계가 너무 무서워서 실상 둘은 아무 말도 못 꺼내도 상관없었다. 그저 녀석이 그렇게 강한 모습으로 위장한 채, 혼자 끄억 끄억 토해내는 신물이 아파서.. ........이젠 못 참겠다. 어린 나이가 자격이 없어서,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저 지금의 내가 너무 아플 뿐이다. “한번만..가윤아..” “.................” “..한번만 내게 부탁해 봐.. 응?.. 제발.............“ 너 잡아 달라고 말 해. 그럼, 죽을 힘을 다해서 널 다시 일으켜 줄게. 어떤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모든 힘을 다해서 그렇게 해 볼게. 한동안 서로 이마까지 닿을 거리에서 녀석은 침묵을 지켰다. 조금씩 엉키는 호흡이 느껴지고, 둘 다에게서 험하게 몰아오는 숨소리까지 녀석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가윤아..“ “..................” 속이 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건조하게 말라붙었는지 모르겠다. 반면에 녀석은 고개를 돌리며 잠시 깊게 한숨을 쉬었다. 또렷하고 유난히 이쁜 옆 모습이 잠시 시선을 떨군다. 그리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내가 넘어져도 밟으라고 했지, 강지협. 쓸데없이 동정하지 마.........“ “......................” “....나영이나 잘 챙겨. .........친구보다는 애인이 우선이야.“ ..라고 말한다. 지협은 그만 견디지 못할 기분이 들고 말았다. 순간 억한 기분에 목이 메어서, 그는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가윤의 얼굴을 가린다. 긴 밤 내도록 참을 수 없이 아프게 선명하던 이 얼굴을 이젠 닫고 싶었다. 자신의 큰 손바닥, 그 단단한 안에 가려진 얼굴이다. 갸름하고 물소리 뚝뚝 날 듯이 아름다운 얼굴. 밤새의 토악질로 조금 피로해 보이는 눈가. 그 얼굴을 손으로 가리자, 지협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정말 이상하게도 목이 메어서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계가윤...” “...............” “..그렇게 시건방지게 굴 정도로 의기양양하면...” “..................”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해도 밥이라도 잘 처먹어.....새꺄.....” “.....................” “..니가 원하는대로 해 줄게. 니가 원하는대로 언제나 해 줄게! 나영이랑 사귀든 말든.. 우리 엄마가 뭐라고 하든 말든.. .......넌 밥이라도 잘 처먹어...이 개새꺄.......“ 사람, 이렇게 아프게 하지 말고...라고 중얼거리며 지협은 조금 눈물이 글썽거렸다. 눈에 잔뜩 힘을 줬지만, 이 강한 녀석이 떠는 게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주 잠깐만..비웃음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눈동자로 촉촉하게 눈물이 베였다. 아주 잠시. 딱 가윤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진 그 시간 만큼만. .....그 시간만큼만 이 아픈 18세를 게워낸다. <11> 오래만에 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즐긴다. 가윤이 무심코 교실의 시계를 올려다보았을 때, 점심 시간이 중반쯤에 이르고 있었다. 다시 창가 쪽으로 눈을 돌리자, 여기 저기 운동장에 흩어 진 아이들이 보인다. 언젠가 싸움이 붙었던 남지일도 농구를 하고 있었다. 탄탄하게 벌어진 상체를 가지고 짐승처럼 뛰어 올라 정확하게 슛을 던졌다. 만약 그렇게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좋은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지일은 지금도 이따금씩 혐오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지만, 사실 그 이상의 행동은 잘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 이상 오바하는 것도 사내 답지 못한 거다. 아마, 지일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 그리고 하필이면, 그 순간에 나영과 지협이 보였다. 얼추 보아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쌍의 그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책상에 턱을 괸 채, 가윤은 말없이 그 모습을 응시한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가윤은 그저 들리지 않게 ‘아아..’라고 짧게 신음하고 살짝 희미하게 웃었다. .....창 밖의 그 녀석들도 웃었다. 서로 마주보고 뭐라고 떠들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지협의 눈길이 최근에 자신을 보던 것과는 상반될 정도로 따뜻하게 웃었다. 왠지 최근에 우리 두 사람은 항상 아플 정도로 서로를 쏘아보거나, 미친듯이 시선을 피하는 게 전부인데, 저들은 꺼리낌없이 서로를 쳐다본다. ..그것이 바로 자신과 나영의 다른 점이다. 그것이 나영은 되고, 자신은 안 되는 세상의 이유다. 얼마 후에, 자신의 오래된 친구 강지협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내밀던 그 손과 똑같은 손이다. 테니스 채를 하도 움켜잡아서 손바닥에 굳은살이 잔뜩 박힌 탄탄한 손바닥. 마주 잡으면 굉장히 열이 올라서 함께 후끈거리는 그 손길이다. 가윤은 웃느라 가늘어진 자신의 눈꼬리가 경련이 이는 것을 깨달았다. 나영과 손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위로 올렸다 내렸다를 하면서 지협이 열심히 그녀의 말을 듣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등 뒤에서 그런 녀석을 불렀는데, 일학년 때 모두가 같은 반이었던 범기였다. 이범기. 유상욱. 그들은 자주 자신들의 집에 놀러왔었고, 가윤과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지만 또래 녀석들답게 무식하고 장난끼 넘쳤다. 좋은 녀석들이다. 지협의 친구라는 이유로 항상 좋은 녀석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마치 그들은 파워와 에너지로 가득찬 겁 없는 십대들 같은 느낌이다. 하긴 그것은 지협도 마찬가지다. 저 세명은 2학년이 된 지금도 같은 반이고, 가윤과는 달리 언제나 점심 시간이 되면 운동장에서 3대 3 농구를 한다. ..그것 또한 범기나 상욱 무리들과 자신의 다른 점이다. 그것이 범기나 상욱은 친구가 될 수 있고, 자신은 될 수 없는 세상의 이유다. ‘아무래도 비겁하지만... 오늘도 규철이 형을 불러야겠군..’ 이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가윤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쯤에서 웃기는 이 관찰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때 하필이면 아주 빠른 장면 하나가 번개처럼 시선을 붙잡아 버렸다. 모래 먼지가 일만큼 번잡한 운동장 틈에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재빠르게 지협이 나영에게 키스했다. 순식간의 동작이었다. 이번에는 가윤도 웃지 않았다. 그 익숙하고 거만한 웃음도 짓지 못했다. 다만 눈꺼풀만 몇 번 깜박일 뿐이다. 반면에 지협은 아주 환하게 웃으며 나영을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마치 잘가라는 듯, 손도 한번 흔들고 지 무리들이 부르는 농구 골대로 야생마처럼 달려간다. ..........가윤은 아무 말도 없이 그 모습에서 고개 돌렸다. 언제까지 감정없는 인형처럼 자신을 위장할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그러나 녀석에게는 죽을 때까지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조금씩 감정의 동요를 느끼는 녀석을 감당하는 것조차 벅차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그 큰 손. ..그리고 목이 메인 듯, 간헐적으로 크게 몰아쉬던 그 억눌린 목소리. 알고 있었다. 왠지 몰라도 지협은 그 때 울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정도로 좋은 녀석이라서.... .............같이 망쳐질 자신도, 혹은 끌어들일 용기도, 잡아달라는 부탁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내 자신을 파괴하고 나면, 더 이상 밑바닥도 없으니 나도 정신차리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험하지만,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도 했다. ***************************** “계가윤이 방금 교문 밖으로 나갔어. 봤어??!!” 농구공을 패스하며, 범기가 크게 물었다. 엉겁결에 공을 받은 지협이 놀란 듯, 눈을 깜박인다. 다시 한번 땀에 젖은 자신의 셔츠를 벗어 던지며, 지협은 그에게 되물었다. “뭐라구?.“ “방금 가윤이가 학교를 나갔다구!!!” 지협 다시 상욱에게 공을 던진다. 드리블 하던 상욱이 다시 뚝-그 움직임을 멈췄다. 땀으로 흥건한 지협의 상체를 노려본다. 아몬드 같은 눈동자를 가진 범기가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런 상욱을 쳐다보며 고개 저었다. 성격이 급하고 단순 무식한 편인 상욱이. 그리고 잔소리는 곧잘 하지만 친절한 편인 이범기. 그러나 주황색 농구공의 회전이 끝났다. 공을 쥐고 있는 상욱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고, 범기도 디펜스 하지 않았다. 그들과 농구를 즐기고 있던 다른 상대편 녀석들도 뚝- 멈췄다. 놀이는 끝났다. 계가윤은 강지협의 친구다. 그리고 이범기와 유사욱 또한 강지협과 친구다. 3대 3 농구를 하건 축구를 하건, 그들은 친구다. 따라서 이제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그때서야 범기가 흥건한 땀으로 젖은 이마를 한번 훔치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엄연히 들으면 마치 혼잣말 같았다. “같은 사내 새끼랑 자다니... ..........호모 친구라니..........“ 조금 낮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말도 이내 다른 목소리에 파묻혔다. 상욱과 자신을 뺀 나머지 녀석들이 뭐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농구팀에 붙어 버린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협이 아무렇지도 않게 범기의 말을 씹었다. 이전에도 범기는 저렇게 말했었다. 그 말이 처음 들을 때와는 달리 유난히 마음에 짐으로 남는다. “그럼, 이범기... 너는 내가 같은 사내놈이랑 자도 날 버리겠냐?..“ “...........???!!!!!!!!!!!!.......” “..넌 의리있는 놈 아니었냐?.......“ “...............!!!!!!!!!!” 공이 뚝- 바닥으로 튕긴다. 더 이상 묻진 않았지만, 뭔가 수만가지 질문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범기가 인상을 찡그렸다. 영문을 모르는 것은, 뇌가 없는 유상욱 밖엔 없었다. 녀석은 곰같이 큰 덩치로 두 사람을 덮치듯 어깨동무하며 ‘뭐냐~’만 연발한다. “하지만... 하..하지만...“ 녀석이랑 잤구나...와 같은 표정으로 범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는 띄엄 띄엄 뭔가 혼돈을 정리하듯 대책없이 말을 꺼낸다. “하..하지만.... 남자는..... 가슴도 없고..... .....여자처럼 부드럽지도 않고.... 딱 안기 좋게 작지도 않고........“ 휴우...라고 지협이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그때야 분위기 파악을 한 상욱이 일순 조용해진다. 멋지게 그을린 얼굴로 범기에게 눈을 돌리며 지협은 대답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신도 고민했던 것이고, 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래..........그 녀석은 가슴도 없고, 여자처럼 보드랍지도 않고, 자그맣지도 않고, 거리에서 마음 놓고 안거나 뽀뽀 할 수도 없다. 그러나...그 녀석의 밋밋하지만 열을 띈 붉은 유두를 기억하고 있고, 매끄럽게 부딪치던 탄력성도 기억하고 있고...무엇보다 아직도 닿고 싶은 그 뜨겁고 물기 젖은 내부를 기억한다. 처음 계기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다. 녀석이 장난으로 안긴 것이었는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그 몸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환장할 정도로 떠올리고 있고, 여전히 갈증나 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이범기....” “..........??” “그렇다고 가슴이 여자는 아니잖아. 여자들에게 가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가슴이 여자는 아니잖아?“ “...........-!!!!!!!!” “...넌 가슴하고 사랑하냐? 키가 작든 크든.. 그럼, 너는 그 키하고 사랑하냐? 그 키가 니가 사랑하는 사람의 전부냐?“ “.........아니..그러니깐, 내 말은............” “..넌 부드러움만 사랑하냐..........? 그 부드러움이 니가 사랑하는 사람의 전부냐?“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햇빛 때문인지 다소의 격앙된 마음 때문인지 녀석이 붉어졌다. 검고 예쁜 눈동자, 희대의 바람둥이 이범기. 씩씩거리며 지협을 향해 강하게 소리쳤다. “그게 아니잖아, 새꺄 ...-!!! 찝찝하단 말야! 누가 봐도 여자랑 남자랑 이어지는 게...자연스럽다구!.. 그건 너도 알 거 아냐, 새꺄..-!!! 너도 그러니깐 나영이랑 사귀는 거잖아? 나도 걱정하니깐 이렇게 말하는 거란 말야!!!“ “......................” “누구는 가윤이가 미운 줄 알아? 계가윤이 어디 미움 받을만한 녀석이야? 그 녀석 좋은 놈이건 나도 알아. 아니깐 답답한 거란 말야, 강지협!! 이해가 안되는 거란 말야. 왜 하필 그런 녀석이 남자를 좋아해? 왜 하필 그런 소문을 만들고 다니냐구!! 나도 좋은 녀석이라는 걸 알고 갑갑하니깐 그렇게 말하는 거야!!!!“ 지협이 농구공을 집어 들었다. 머리 나쁜 상욱만 중간에서 어쩔 줄 모르며 얼굴을 문지른다. 그래..라고 지협은 허탈하게 웃었다. 다들 이 녀석처럼 생각한다. 나쁘지 않다. 얼마 전 까지 자신도 그렇게 여겼으니깐... 하지만, 욱씬- 이제는 참기 힘든 몸의 욕구에 합세해서 감정의 통증까지 자신을 짓눌러댄다. 머리 끝까지 올라온 이 상황에 대한 분노와, 마치 코너에 몰린 듯한 한계감이 치솟았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 이범기가 아니라 누가 그렇게 말을 했다 한들, 아마 지협은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그래..알겠으니깐, 이제 다들 작작 좀 해!.. 가만히 좀 내버려 두라구! 정말 찝찝한 건 늬들이야! .....뒤에서 씹으면 기분 좋아? 진짜 친구였던 녀석도 있을 거 아냐. 그러면서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 건 잘한 짓이냐?“ “.................” 아이들이 하나 둘 농구를 그만두고 의아한 듯 돌아본다. 범기도 이내 자신이 꺼낸 말을 후회하는 듯, 손을 저었다. 정말은 아무도 탓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혹은 자신에게 걸리는 사람은 누구라도 혹독히 탓하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정반대의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거친 숨결처럼 터져 나온다. “그래, 잘 났다, 이범기. 넌 좋겠다. 태어날 때부터 여자가 좋아서..“ “..지협아, 그만 해.” 아이들이 쳐다보자, 상욱이 재빨리 지협의 어깨를 집는다. 그러나 덩치가 큰 상욱도 녀석이 내동댕이치는 손길엔 속수무책이다. 조금 빨간 눈동자, 성마른 목소리가 거칠게 튀어 나왔다. “한번 봐주면 안돼? 한번만 용서해주면 안돼? 그게 무슨 그렇게 죽일 죄냐?..........“ “...야!” “우리라도 그렇게 생각해야지, 그럼 누가 그 녀석을 돌아봐주는데? 찝찝해? 너는 일부러 친구에게 미움 받을 수 있냐?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친구를 남기려고 하는 이 마당에...“ “.............................” “...그 녀석은 계속 혼자인데.. ......가장 친한 친구를 버리는 건 용기가 아니냐? 너 같으면 아무리 타락한다 해도 굳이 자기가 아픈 방식을 선택할 용기가 있어? 넌 외로워질 자신 있어? 그만한 용기를 가질만큼 너에게 절실한 거 없어? 그 새끼의 그런 감정은 ...쓰레기냐?................“ 그 자리에는 언젠가 가윤을 때렸던 남지일도 있었다. 몇 개의 농구공이 또르륵 모래밭을 구른다. 지협의 갈색 상체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어도, 물기 배인 이 녀석의 답답한 듯한 격노함이 모든 걸 대변했다. 그는 정말 진지했던 것이다. 범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천천히 농구공을 집었다. 점심 시간을 끝내는 종이 울린다. 교무실에서 선생들 몇이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늘 천방지축 같던 야생말들이 멈춘 게 궁금해서 였다. 지협의 목울대로 뜨거운 공기가 울컥-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많이 누그러든 목소리로 범기를 향해 입을 연다. “니가 이해 못한다 해도.....” “................” “...자연스러운 건 누가 누구를 만나냐가 아니잖아.” “..............” “........사랑보다 더한 본능이 있냐... ..그거보다 더 자연스러운 게 있냐. 가슴이 여자는 아니잖아? 너는 그 가슴과 사랑에 빠진 게 아니잖아. 나보다 연약한 몸매가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의 전부가 아니잖아. 그 녀석이 누구와 안고 뒹굴건 말건.. 녀석이 사랑받고 사랑한다면.. ...그 녀석도 같은 거 달린 몸에 환장한 게 아니란 말이다. 니들이 구역질 해대는 변태가 아니란 말야. 그 녀석이 남자의 몸과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닌데, 한번쯤은 멋있는 친구들로 남을 수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해 주면 안 되냐..“ “.........지협아.” “..친구로써의 부탁이다. 그래, 그 녀석 호스트 해. 하지만, 니들이 그 녀석을 병자 취급하는 건 호스트를 하기 때문이 아니잖아. ...남자랑 관계하기 때문이잖아. 그래서 부탁하는 거다. 한번만 이해해 줘.“ “..........강지협!....” “..그게 그 녀석의 본능이라잖아!!!!!!!!!! 사랑하는 그 자체 만으로도 힘들텐데.. 왜 살아가는 것까지 이렇게 힘들어!!!!!!!!!!!!!!!“ “.........그래...그만해. 종쳤다. 들어가자....” “이러지마.... .........우린 친구잖아, 이 범기.” 5월의 문턱을 넘어선 어느 날. 학교 운동장에서 지협이 친구에게 말했다. 너는 사랑보다 강렬한 본능을 만나 본 일 있냐..라고. 그 보다 더 자연스런 감정을 만나 본 일 있냐........라고. 그리고 어떤 사랑이건 우린 친구다...라고. 그래서 이범기도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대답했다. “미안하다.”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졸업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이 운동장에서 농구를 할 것이다. ************************ 물론, 한동안 범기와도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사건은 정작 며칠 뒤에 터졌다. 역시나 농구를 한 게임 뛰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김이 모락 모락 날만큼 땀에 젖은 머리를 씻고 교실로 들어섰을 때, 누군가 문을 박차듯 뛰어나온 것이다. “뭐야?” 상욱이 물을 벌컥이다 놀란 표정으로 묻자, 이제 몇 분 안 남은 수업 시간을 남기고 뛰어 나온 녀석이 질린 표정으로 지협을 바라본다. “징계위원회가 열린대.” “.........!!!!!!!” “니 친구 계가윤이... .....어제도 그 남자가 데리러 왔었지? 어제 저녁에 학부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대.“ 상욱 역시 가윤과 친하지 않다. 그러나 녀석은 단순한 만큼 감동도 잘 받는다. 며칠 전 필사적으로 외치던 지협을 생각해서인지 녀석은 그 소식에 금세 흥분한다. 아니나 다를까. 유상욱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어떤 새끼가 쪼잔하게 꼬질렀어!” 그러나 지협을 싸늘하게 만든 건 단지 그 소식만이 아니었다. 막상 징계 위원회가 열린다는 말은 눈앞이 캄캄했지만, 내내 걱정하던 것이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말은 조금 뒤에 튀어 나왔다. “근데..문제는.............” “.................” “...가윤이가 아까 또 학교를 나갔어. 선생님들은 점심시간에 비상회의 한다고 모였는데.. 당사자인 계가 놈이 학교에 없다구!.............. 무단 결석이 몇 번에, 말도 없이 계속 사라지고... 거기다가, 녀석이 호스트 클럽에 나간다는 것부터 해서 .. 선생들이 다 알고 있어. 학부모들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야!!.“ “.............-!!!!!!!!!!” 만약, 계가 놈이 그대로 클럽으로 갔다면.. 이 일을 이제 조사하기 시작한 학교의 눈에 걸린다면... 이거야 말로 큰일이다. 지협은 눈동자가 불에 탈만큼 강하게 말을 하는 녀석을 쏘아본다. 마치 가윤이 거기에 숨어 있기라도 한듯 말이다. ************************ 가윤은 물론 규철을 만날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제가 심각해지면, 지협의 부모님도 이제 사실을 알게 될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윤은 운동장의 지협을 보는 순간, 또다시 그곳을 뛰쳐나왔다. 규철은 그 시간에 자고 있을테니 딱히 깨울 수도 없었다. 잠시 거리를 돌아다녔고, 호스트 바 Ananomi 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6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잠시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규철은 예약이 걸린 룸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대로라면 그를 만나기 위해 새벽까지 기다려야한다. 대신, 가윤은 Ananomi 의 캐셔와 시간을 노닥거리며 보냈다. 캐셔 형도 잘생긴 편이었고, 친절했지만 호스트를 할 생각은 없다고 가윤에게 말하곤 했다. 어쨌든, 기다리다 보니 점점 더 무료해졌다. 학교에서는 자신을 찾기 위해 또 다시 지협을 호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핸드폰은 꺼져 있고, 녀석이 이 곳의 위치를 알 리도 만무하다. 캐셔와 놀던 시간이 조금 지루해지고, 캐셔 역시 바빠질 무렵이 되자 가윤은 비어있는 룸에서 TV를 보기로 결심했다. 이전처럼 손님의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주로 다른 형들의 휴식장소로 쓰이는 이 룸은, Ananomi 사람들이 심지어 ‘가윤이 방’으로 부를 정도였다. 이따금 규철을 기다리며 이 방에서 노는 일도 많았다. 룸서비스 맨들이 가끔 문을 열어 커피도 타주고 남은 과일도 건네주곤 했다. 대부분의 Ananomi 사람들은 그에게 친절했다. “많이 기다렸지? 조금만 더 기다려. 부탁해, 애인~“ 밤 10시 쯤이 되자, 규철이 문을 조금 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윤 역시 부은 눈을 가만히 닫으며 가볍게 고개 끄덕였다. 다만, 뭔가 서두르는 느낌이 드는 규철이 수상해서 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본다. 어떤 손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등 돌린 규철과 로비에서 대화 중이었다. 보통의 손님이라면 룸에 들어가서 접대하는 게 당연할 것인데,...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남자의 모습은 약간의 궁금증으로 문틈을 내다보는 가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규철보다 조금 작은 키였고, 호리 호리한 몸매를 가진 남자였다. 빛깔 좋은 슈트 차림이었는데, 적갈색의 넥타이가 너무나 어울릴 정도로 눈동자가 생생하다. 무엇보다 갸름한 턱선이나 말끔한 얼굴 선이 가윤 자신과 퍽 닮아 있는 기분이었다. “..............!..............” 갑자기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왜 룸에 들어가지 않는지도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규철과 그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사내들이 주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호스트로는 보이지 않았고, 실제로 가윤이 아는 형들도 아니었다. 그래서 알아차렸다. 규철이 며칠 전에 이야기하던 그 남자다..라는 사실을. 그 때 상대방 남자가 규철의 어깨 너머로 한참 떨어진 곳의 자신을 문득 쳐다본다. 얼음같은 눈동자와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확연하게 와 닿았다. 정말 아무런 인간의 표정을 담지 않은 얼굴이다. 순간 오싹해졌다. 마치 지금의 자신도 이런 식으로 몇 년 씩 감정을 버린 채 살다보면, 저렇게 소름끼칠 정도로 무감각한 얼굴이 될지 두려워질 정도였다. 그가 자신을 한번 응시한 뒤, 다시 규철을 쳐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또렷한 붉은 입술이 마치 비아냥거리듯 한 쪽으로 기운 표정이다. 이상할 정도로 엄청난 살기를 담은 표정이었는데, 순간 그가 잠시 고개를 돌린다. 규철도 등 뒤에 몰래 보는 자신을 의식했는지 상대방의 팔꿈치를 잡아 다른 곳으로 잠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해가 되었군..이라고 생각하며 가윤은 다시 자신이 TV를 보고 있던 룸에 들어섰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안 좋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되는 일이 없다. 시간이 몇 분 더 흐르고, 기지개를 펴며 가윤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규철은 오늘 포기해야겠다. 웬만하면 오늘 재워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그 때 갑자기 룸의 문이 벌컥- 거칠게 열린다. 정말 일진이 안 좋은 날이었던 것이다. “여어~..언제 바뀐거지? 화장실 다녀오니, 이런 미인이 숨어 있었네....” ..라고 갑자기 술에 절은 손님이 들어섰다. 이제 20살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은 한눈에 보기에도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에 굉장히 취한 듯 보인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Ananomi에 들락거릴 정도면 굉장한 부자임에 틀림없다. Ananomi는 예사 호스트 룸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로 이 청년은 거물급의 자식이거나 졸부의 아들임이 분명하다. 혀가 잔뜩 고부라진 그의 말에 가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당황해 한다. 손님이기 때문에 자신이 함부로 설치면, 친절한 규철에게 방해가 될 뿐이다. 애당초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곳에 놀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할 줄을 몰라, 작위적인 미소만을 지으며 살그머니 그 방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어깨를 붙잡힌다.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튼튼한 몸이 자신의 어깨를 부러뜨릴 듯 잡아서 내동댕이쳤다. “이봐!.. 손님 안 받고 어디로 내뺄려고? Ananomi에서 그렇게 가르쳤나? 어디보자...“ “..........저기...” “..처음보는 얼굴인 거 같은데, 신입이냐? 하하.. 넌 다행인줄 알아, 새꺄..나 같은 손님 만나서..“ 다행이 아닌 것 같다. 오해인 듯한데, 가윤은 순간 다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의 빈 틈을 살핀다. 어디선가 다른 룸에서 질퍽하게 마쉬다가 착각해서 이 방에 들어온 것 같다. 로비에 아무도 없는지 걱정스러웠다. 까딱하다간 원치 않는 일을 당할 것 같았다. “너 국회의원 장현철 알지? ..그 분이 우리 아버지야, 새꺄.... 고분 고분 말 안 들으면, Ananomi 전체를 꼬질를 수도 있어.“ “............-!!!!!!!!!!” 정말 거물급 정치가의 아들이었다. 전에 없이 당황한 가윤은,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녀석의 옆구리 너머를 살핀다.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이었다. “야, 벗어. 아까 있던 놈은 어디가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더 미인이 들어왔으니 용서해 주지.“ 이전의 자신이라면 위세를 떨 듯 건방지게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충분히 남았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조금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 스스로의 일만으로도 속이 따끔거리는데,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탈칵 탈칵- 취한 녀석이 휘청거리며 일어나 버클을 푸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방을 착각한 것 같다. 어지간한 손님이면 룸안에서 이러지는 않는다. 이 녀석은 정말 최악이다. 그가 바지를 벗으려 용을 쓰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잘 관찰하며, 가윤은 조금씩 뒷걸음을 친다. 몇 발자국만 딛으면 룸 밖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어쩌면 화근이겠지만 말이다. “.............아악-!!!...............” “이 십새끼.. 어디로 도망갈려구....“ 손목이 꺽일 듯 잡혀 버린 것이다. 막을 새도 없이 날카로운 비명이 튀어나온 것과 동시에, 가윤은 눈 앞에서 번쩍- 섬광이 일었다. 다짜고짜 그가 뺨을 거세게 후려쳤기 때문이다. 조금 멍해진 정신으로 고개를 젓자, 입가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입 안 쪽이 부어오르고 입술이 터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퍽-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다시 주먹이 날아온다. “.....................앗-!!!!!!!!!!!” 술에 취한 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갑자기 자신이 풀던 벨트를 휘둘렀다. 통증 때문에 쇼파로 던져진 자신의 몸 위로 가죽끈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른다. 철썩-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릴 때마다, 무방비의 목덜미에서 찢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아...라고 짧게 비명을 지르는 순간, 허리위에 내려 앉는 엄청난 무게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너무나 빠르게 다가오는 폭력의 속도에 놀랬다. 공포에 젖을 사이도 없었다. 이제는 끝이구나..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어렴풋이, 자신의 몸을 타고 누르는 엄청난 무게 뒤로 구원처럼 로비의 불빛이 세어들어온 것이다. 규철이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사내의 등 뒤에서 잘라 말했다. “......그 녀석은 제 애인입니다, 손님.” “............?............” “그리고 저희 영업 끝나면, 손님의 안전도 보장 못합니다.” 스르륵... 험상궂게 가해지던 거친 손끝이 그 냉철한 한 마디에 갑자기 목 에서 사라진다.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 가윤이 콜록거리며 일어서자, 규철이 싸늘하다 못해 섬칫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 “씨바, 원조교제 한번 하기 힘들다.” ..라고 규철은 차를 세운 채, 무지막지한 목소리로 화를 냈다. 입술이 찢어진 자리에서 뚝뚝- 핏물이 흘러나와 가윤의 상의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 뿐이 아니라, 녀석이 야만적으로 내리친 가죽 벨트 때문에 하얀 목덜미에는 붉은 자국이 서너 개 남았다. 누가 봐도 험한 꼴을 당했다는 걸 알만큼, 머리카락도 헝클어지고 얼굴도 창백해 보인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니 그 잘난 룸메이트가 볼 만한 얼굴을 하고 있겠군.” “.......자고 있을 걸...” “.....자고 있으면 깨워서 보여줘. 이전에도 나를 보는 눈빛이 장난이 아니던데.. 그 새끼, 아주 너를 갈아 마실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흐응..이라고 가윤은 낮게 웃었다. 아까의 규철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절도 있고, 딱 부러지는 목소리, 그 차가운 냉정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친절하며 어른스러운 형이 아니었다. 정말 그는 괜찮은 사람일까?.... “그래, 오늘은 왜 찾아온 거냐? 그 험한 꼴을 당하려고 지 발로 온 건 아닐테고.....“ 담배를 빼 물며 규철이 쓰게 웃는다. Ananomi를 나오자마자, 가윤의 집으로 차를 몰았으니 그 화난 듯한 얼굴을 보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제야 조금 기분이 풀린다는 듯, 욕설을 몇 마디 내던지며 그가 물었다. 아아..오늘의 용건. 뭐였더라? “며칠 전에 그 녀석이 여자한테 키스했어.” “........누구? 강지협이? 네 베스트 프렌드? 그걸 왜 이제 이야기 해.“ “그냥.. 원래 충격은 천천히 찾아오는 거잖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자꾸 떠올라서 그래. ........형도 봤을 거야. 그 때 같이 있던 여자애. 그 애랑 사귄대요.” “......씨바, 생긴 것만큼 밝히는 놈이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너는 자존심도 없냐? 그런 말 하며 웃고 있게?.“ 규철이 뭐라고 욕하며 넥타이를 휙-하고 풀었다. “자존심.. 있어. 자존심 있으니깐, 녀석이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지.." "..........그래, 그 녀석 입장에서 보면, 니가 얼마나 골 때리겠냐. 갑자기 18년 된 같이 사는 친구가 그렇게 삐딱해지기 시작했는데.. 어지간한 녀석들도 견디기 힘들거다, 아마.“ “아... ..그래..맞아요. 근데.... 더 기가 막힌 건 뭔지 알아? ..........나에게 잡아달라고 말하래. ...그러면 무슨 수를 써서도 더 타락하지 않게 잡아주겠대... ....그걸 내가 거절했어.... ...거절해야 하니깐, 한 건데.. ....그 녀석이 그 여자애랑 있는 건...더 지켜볼 자신이 없어..” “........................” “............이럴 땐, 나 같은 거 없어졌으면 좋겠어..................”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렸던 것 같다. 규철이 의아한 듯, 셔츠 소매를 걷으며 돌아봤다. 가윤은 여기 말고 갈 곳이 달리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자신은 갈 곳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머리 나쁘고 건달같은 녀석이지만, 지협이 ‘가자 집으로..’라고 말해줬을 때야 돌아갈 곳을 겨우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그 녀석이 좋았고, 또한 좋았기 때문에 미움 받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녀석은 절대 친구로써의 자신을 포기할 줄 모르는...착한 녀석이다. 더듬 더듬...생각해보니 규철을 걱정시키는 것도 못할 짓이다. 그리고 자신과 신파조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가윤은 그저 머리를 감싼 채, 허탈하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어릴 적에 시골에 놀러갔다가... 깊은 개울에 빠진 적이 있는데......” “..................‘ “.....이제 대여섯살 밖에 안 된 저나 그 망할 새끼에겐 깊은 곳이었거든. ...나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그 와중에서도 당연히 녀석이 사람들을 부르러 갈 거라고 믿었어.“ “근데, 안 부르러 갔냐? 씨바, 그런 새끼를 왜 믿어?“ “..................형.” 가윤은 유리처럼 투명한 눈동자로 규철을 돌아보았다. 세상에서 강지협을 그렇게 잘 아는 인간도 나 밖에 없어. 나는 녀석이 왜 달려가지 않았는지 다 알아. 녀석이 왜 안 그랬냐 하면... “..형.. ...그 녀석도 같이 물에 뛰어 들었어. ...그 녀석은 아직도 수영 못하는데 말야. ...정말 골 때리는 녀석이야...“ “..............-!!!!!!!!” 무슨 말인지 알고 있잖아, 규철이 형. “..그럼.. 잡아 달라고 말해, 새꺄... 그리고 좀 웃어, 임마... 하.하.하...이렇게.“ 담배를 입 가에 걸며 규철이 음울한 표정으로 과장스럽게 웃는다. 그 놀리는 표정에 조금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 망할 녀석이..’라고 그 미소를 보며, 규철이 웃음을 거둔다. 그저 말없이 한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팔꿈치 까지 소매를 걷은 그 손은 건강해 보인다. 김규철도 믿을만한 인간이다. 새삼 그 사실을 자주 깨닫는다. “.............형..” “.........말 하라, 오바.” “...나 집 나오면 재워줄 수 있어?” “............-!!!!!!!!!!!” “...이젠 정말 얼굴도 안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래....“ “............계가윤!...” “...나도 내가 항상... 잡아달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는 거 알아.. 나도 내가 항상... 제대로 밥도 못 넘기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도 어쩔 수가 없잖아!!! ...내가 벌린 일이니깐... 어떤 일을 겪어도 나 하나면 족해. 안 그러면 그 녀석은....“ “.......계가윤, 임마....” “...같이 물 속에 뛰어들 녀석이야. 골 때리지. 왜 조금 더 이기적이지 못할까..그 새끼..............“ 곤란한 표정을 짓는 규철을 향해, 가윤이 미소지으며 재빨리 덧붙인다. 숨이 찰 정도로 간절한 음성이다. “부탁이야, 형....“ “............잡아주길 원한다며... 니가 그렇게 한마디만 말해도 녀석이 너를 잡아줄 거라 믿는다며..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냐...“ 매우 빠르게 건네는 말에 규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 물음에 잠시 숨을 딱 멈추며 가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옅은 미소를 비웃음처럼 지으며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수초가 지난 후였다. “..........그게 문제야..형.....“ “..............-!!!!!!!!” “........단 한마디만 하면 되기 때문이야. 내가 녀석에게 나 좀 도와줘..라고 말하면.. ..그 녀석은 필사적으로 나를 잡을 거고..“ “................” “..그럼..나는 다시 친구로 남든지.. 혹은 더 이상 관계가 발전한다 해도 죽도로 원망만 당하든지... ..둘 중 하나야.“ “...............”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 알잖아, 김규철!! 죽도록 노력했는데, 기껏해야 둘 중 하나란 말야!! 죽은 척 하고 살든지, 정말 죽든지!!! 그게 뭐야... 단 한마디로 그렇게 되어버린단 말야!!............“ “.....................” “..그게 문제라니깐..형. 나는 그 ‘날 잡아’라고 정말 미칠 정도로 내뱉고 싶고.. 그 녀석도 그 한마디를 환장할 정도로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 둘은 그 곳에서 같이 못 견뎌.. ..둘 중 하나는 물러나야 해.“ 갑자기 와락- 그 순간, 은은한 남자 향수 냄새가 얼굴을 덮었다. 규철의 셔츠에서 나는 향이었다. 뭐지..라고 깨닫기도 전에 그가 큰 한숨을 쉬며 두 팔을 벌려 옆자리의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은 것이다. “......................-!!!!!!!!!!” 그리고 천천히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울컥할 정도로 매달리듯 애원하고 있었는데, 마치 아기를 달래는 것처럼 조용하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곧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묘하게 찡그린 가윤의 얼굴을 들어, 놀랍게도 규철은 그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꽉-도장을 누르듯, 뜨거운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다. 스르륵-..안도감이 밀려왔다. 이 사람은 진짜 어른이다..라는 것을 정말 깨달았다. 천천히 안전밸트를 풀어주는 몸짓이 느껴졌다. 규철이 가라앉은 친절한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 정말 교제할까, 애인?” “.................?” “..원조말고, 교제만 말야.” 농담처럼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언제나 자신을 환영한다는 인사와도 같아서 가윤은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가 키스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놀랍게도 지협 역시 그 시간에 깨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규철이 차에서 내리는 가윤을 이미 보고 있었다. 실상은, 한 두시간 전부터 그는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제기랄!!!! 2년동안 끊은 담배를 마침내 다시 손가락에 걸게 된 것이다. 이만하면 얼마나 초조했는지 여실히 증명된다. 마침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녀석이 들어섰을 때, 지협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조금 전에 그 ‘잘생긴 회사원 원조교제 철면피’가 자신의 친구 아닌 계가윤에게 키스했다. 그것도 차에서 내리는 가윤의 팔을 잡아 갑자기 끌어당기며 키스했다. 멀리서도 똑똑히 보였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봤을까..하는 것보다 지협은 다른 이유로 심하게 얼굴을 굳혔다. 말라비틀어질 우정. 닮을 대로 닮아버린 우정. 친구 이하의 친구가 되어버린 뒤틀린 감정. 목끝까지 욱씬거리는 위액이 넘어온다. 그 ‘잘생긴 회사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가윤의 턱을 잡아당기며 깊게 키스했다. 가볍게 꺽여지는 가윤의 허리를 어른의 팔이 든든히 두르고, 마치 자신의 것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키스했다. 그에 어떤 느낌인지 똑똑히 기억나는 바람에, 지협은 무의식중에 베란다 철제를 손으로 꽉 쥐었다. 갑자기 하얗게 질려버린 자신의 손마디가 느껴진다. 핏기가 송두리째 발끝으로 빠져나간다. 머리 속에 얼어나는 해일은 커다란 파도처럼 갈가리 찢어졌다. 한참을 거친 숨만 들이키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녀석이 들어섰다. 조심스럽게 들어섰지만, 이내 베란다에 버티고 있는 자신을 본 듯 잠시 걸음소리가 멈춘다. 오늘은 지협에게 정말 최악의 날이었다. 요새는 하루 하루 이 ‘최악’이라는 단어가 갱신되는 기분이었다. 학교에 징계 위원회가 열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가윤은 하루 종일 보이지 않다가 이제서야 저 녀석 차에서 내린 거다. 분명히 자신이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을 녀석이.. ..아니, 모르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똑똑히 가르쳐 줄 수 있다. 두번 다시 그 사실을 잊지 못하게 각인시켜 줄 의향이 있다. 지협은 정말 머리 뚜껑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느 날 ‘난 남자를 좋아해’라고 말하고, 또한 무심하게 웃으며 ‘나 호스트야’라고 선언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장난같이 키스하고, 분풀이처럼 안겼으면서!!... 사실은 그 것이 얼마나 잦은 꿈으로 요새도 자신을 괴롭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심지어는 밤새 잠들었을까..하는 기분으로 요새도 계속 제 방문 앞을 서성거린 기분을 전혀 모르면서... 손을 내밀 수 없는 먼 곳으로 자꾸만 자꾸만 도망간다. 얄싸한 미소와 야한 상상들, 그리고 정말 얄미울만큼 예쁘장하게 웃으면서 청결한 얼굴로 ‘내가 언제 너랑 잤어?’라는 듯 시치미를 뚝-떼면서.. .........인간이란 숨어 있지 않을 냉정한 표정으로 ‘날 내버려둬’라고 말하고, 상큼하게 웃으며 짐승처럼 꾸역 꾸역 밥만 삼키면서... “.........나 내일부터 다른 곳에서 살게.” ..........이제는 등 뒤에 대고 여유만만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 도망간다. 그 잘난 위선과 가면들을 빤히 들키는 이 마당에도 항상 한결같다. 하루 하루가 피를 말리듯 이렇게 망연하게 얼어붙는 기분이다. 그래..라고 지협은 돌아보지 않고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문제가 뭔지 똑똑히 알고 있다. 조금 전에 다른 녀석이 맛보고 떠난 그 신랄한 입술을 물어뜯고 싶은 거다. 나에게는 그 날 이후 손도 못대게 하고 갖가지 위장들로 항상 도망만 치면서, 그 위세 좋은 녀석에게는 당당히 맛보게 하는, 그 금단같은 열병이 너무나 화가 난다. “...............-!!!!!!!!!” 그러나 휙-하고 돌아보았을 때, 지협은 녀석의 얼굴 때문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핏기 없는 얼굴은 질린 것처럼 유난히 하얗고 입술에는 터진 자국이 그대로 달려있다. 목덜미에조차 선명한 채찍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감히 누군가 믿기지 않을만큼 녀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너!!!!!!..................” 한번에 성큼 성큼 다가서서 거칠게 손목을 잡아당기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얄미운 눈꼬리가 뾰족하게 자신을 노려보았다. 지금 니 꼴이나 보고 말해, 계가윤..니가 지금 나에게 당당하게 이 집을 나간다고 말할 때인지....거울이나 보고 말해. “그 잘생긴 회사원이 좀 난폭하게 노는가보지?” “..................-!!!!!!!!!!!!!” 그때서야 왜 지협이 인상을 싸늘하게 얼리며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지협에게 잡히지 않은 남은 한 손으로 무심결에 입술 쪽을 매만지더니 잠깐 당황한 표정이 된다. 그 흔들리는 시선에 얼음같은 분노를 고정한 채, 지협은 차갑게 몰아붙였다. 이게 니가 원하는 거냐? 이만큼 파괴되었으면 이제 만족해? 그래 잘 했어. 학교도 널 포기하고, 그 회사원도 널 포기하고.. 이젠 나도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정말 잘 했어. 완벽해! 대단해!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칠 수 있어? 친구들에게 그렇게 너를 부탁한 난 뭐가 돼? 니 마음만 철판이냐? 넌 부서질 줄도 몰라? 이렇게 해서 마지막의 나조차 완전히 경멸하길 원하는 게 영악한 니 계획이야? 그럼 떨면 안 되지.. 왜 떨어, 이 십새꺄... 눈을 뾰족하게 세워서 ‘그게 뭐?’라는 식으로 날 쳐다보면, 제발 흠칫 흠칫 놀래지 말라구. 진심을 들키면 안 되잖아? 무슨 말인지 몰라? 그래야 내가 널 포기하지!! 그래야 내가 널 안 믿지!!!!!!!! ............그럼에도 그런 너를 지금 안고 싶어 안달이 난 내 아랫도리도 정말 웃기지. 정말 다른 녀석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내 알량한 18년의 우정이 우습지. 니가 안쓰럽고 불안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 내 안의 아픔이 우습지...너는 그것마저도 부술 정도로 니 멋대로인데... 목이 꽉 막힌 목소리로 거칠게 지협은 그를 몰아세웠다. 이성은 이미 뇌를 튕겨나간지 오래였다. 너를 포기해? 너를 단념해? 그냥 그렇게 세상이 널 부서뜨리게 내버려둬? 누가 니 등을 밀고 무릎을 꺾어도 그걸 보고만 있어? .....................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지협은 녀석을 잡은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며, 낮고 거칠게 속삭였다. 절대...........이제는 안돼, 계가윤. 벌써 여기까지가 한계야. “너야 말로 그 영악한 머리 포기해, 계가윤.” “............-!!!!!!!!!!!” “이 정도 하면 내가 널 포기할 줄 아냐?.“ “............강지협..” “여길 나가? 니가? ...귀여운 계획이야. 그 잘난 회사원 집에 간다구? 이런 꼴을 당했으면서?“ “강지협!!!!!!!!!!!” “웃.기.지.마.. 잘 들어. 넌 하나도 포기 못 시킬 줄 알아. 넌 다시 학교에 다닐 거야. 이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에서 모범생이 될 거고..“ “..................-!!!!!!!!!” “우리 엄마건 아빠건 미안해 할 일 하나도 없을 거다. 니가 뭘 어째? 도망가? 어디로? 내가 말했지.. 넌 아무도 못 속여. 백날 도망가 봐. 니가 원하는 거 내가 하나라도 해 주나!!! 넌 아무도 못 속이고 아무데도 못 가.“ 녀석의 얼굴에서 그 얄밉던 미소가 싹- 걷혔다. 순식간에 놀라울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이 점점 붉게 변해가더니 잡혀 있던 손을 빼 내려는 듯 거칠게 고개를 흔든다. 그러나 지협 역시 싸늘하게 내뱉었다. 이 쯤에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 터진 것이다. “알겠지? 이제 다 집어치워. 이전 같으면 니 말에 고분 고분 설득당해주는 게 의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지협아, 놔. 아파!!” “닥치라 그랬지? 이젠 니 말같은 거 안 들어. 니가 여기를 나가? 학교에서 도망쳐? 너 나 잘 안다며? .........니 눈엔 내가 그걸 봐 줄 인간으로 보여?“ “.............제발................” 뭐라고 거절하려는 듯한 날카로운 신음이 가윤에게서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지협의 행동보다 늦게 터져 나왔다. 이미 머리가 마비된 그에겐 남은 것이 없었다. 이 지지리도 지랄같이 혼란스러운 녀석. 그 얄미운 얼굴을 조금 전의 사내처럼, 아니 그보다 더 난폭하게 잡아당기며 억지로 입을 맞춘다. “..................-!!!!!!!!!!!!!” 이렇게 놀라는 가윤을 본 적이 없다. 충격으로 둥그렇게 떠지는 맑은 동공을 쏘아보며, 눈을 뜬 채로 지협은 다급하게 꽉 닫혀진 입술을 고집스레 씹어댄다. 이빨을 바싹 세우고 잘근 거리는 통에, 도저히 참지 못하는 듯, 가늘게 신음하며 녀석이 마침내 입을 벌렸다. "일이 이 정도 됐으니, 니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최선의 길인 것 같다. 학교?.. 하아~! 내가 질질 끌고서라도 등교시켜 주지. 넌 니 식대로 백날 해 봐. 이제 내가 그걸 용납하나." "..................!" “거절해도 안을 거다.” “.............-!!!!!!!!!” “니가 허락해도 안을 거고....” “...........!!!!!!!!!!!!!!” “..니 말 같은 건 하나도 안 들어줄 생각이다.” "..............." 정말 이번에는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지협은 그 인간성 좋은 자신이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 본능만 광폭해 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다. ‘도와줘’라는 말을 끝내 듣고 싶었다. 잡아달라는 말을 한마디만 해줬어도 어떤 짓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언제나 자신과 어긋나는 길만 철저하게 선택했다.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면서, 제대로 마음을 숨기지 못할만큼 안타까움도 같이 동반한다. 제기랄!!!!!!!!!!!!!!! 이번에는 도저히 못 봐주겠다. 어지간한 녀석의 얄미움에 이력이 난 자신이었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참아지지가 않는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허벅지 사이로 단단하게 솟아오르는 열기, 그 숨 막히는 소유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도 없어지지 않는 목마른 기분이다. 단물을 들이마시듯, 자꾸 자꾸 녀석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가득 빨아들인다. 으으응...이라고 거절할 것같은 기색이 보일 수록 더 집요하게 혀를 놀렸다. 마침내 완전하게 지협안에 사로잡힌 녀석의 혀가 뿌리채 뽑힐 듯 얽힐 때까지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멈춰지지가 않았다. 녀석이 잡아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녀석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게,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제는 그가 언제나 자신의 바램과는 반대로 행동해 왔듯이 고대로 녀석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도망치겠다구? ..........끝까지 가 보자, 그래.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해 주지. ******************************** “...안..........돼................” “한 발자국도 내 말 없이는 못 나가. 니가 어딜가?“ 마치 작정한 것처럼 몇 번이나 갈 때까지 놔 주지 않는다. 가윤은 정말 울고 싶어졌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정신이 파괴될 정도로 계속 얽혀오는 뜨거운 열기는 처음이었다. 싫어....라고 작게 애원하듯 꺼냈지만 냉큼 묵살당한다. 뒤에서부터 꽉 잡힌 허리는 도망갈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 때처럼 자신의 몸을 확인시키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그를 농락할 수도 없었다. 마치 그 때 그랬던 것을 벌하듯, 지협은 더 잔인하게 굴었다. 기절할 것처럼 쾌감으로 온 몸이 벌벌 떨렸다. “...........아아....................” “좀 더 솔직해야지, 계가윤. 진작에 이렇게 하고 싶었잖아? 확실히 말해. 내가 잡아줄게..“ “............아...냐.....................” 고집스럽게 고개를 젖는 가윤이다. 그와 동시에 신음이 튀어나오는 입으로 그 단단한 손가락이 침입했다. 몇 번째 뒤에서 관통당하는 삽입은 적나라하게 애널을 자극해댔다. 일부로 수치심을 자극하듯 불을 켜 놓고 엎드린 자세로 범해진다. 참을 수 없는 굴욕감과 쾌감이 극처럼 오고가며 척추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니가 뭐라고 말해도 이젠 니 말 안 들어..” “지협아.........................” “..알아? 개패듯이 패서라도 내일 학교에 끌고 나갈 거다. 그 클럽인지 뭔지 내가 때려 부셔 버릴 거야. .......그 남자 새끼 한번만 더 만나면 죽여 버릴 줄 알아..“ “........강지협!!!!!!!!!.............” 단단하게 엎드려진 몸. 그 사이를 열어 눈으로 확인하며 지협은 반대로 더욱 달아올랐다. 결국 만족스러울 정도로 애원하는 신음이 가윤에게서 튀어나온 것이다. 안타까울 만큼 색스러운 애원이었다. 이미 눈꼬리에는 젖은 신음이 매달려있다. 엎드린 녀석의 허리를 꽉 잡고 다시 한번 녀석의 내부를 관통한다. 거칠게 삽입되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자지러질만큼 흐느낌이 짙어졌다. “......아악..........-!!!.................” 연결된 부분에서 자신의 굵은 페니스를 빼었다 넣어본다. 숨 막히는 것처럼 엉망으로 흐트러진 비명이 간헐적으로 가윤에게서 쏟아졌다. 그 열기 가득하고 뜨거운 내부는 촉촉한 점막으로 자신의 것을 감싸 안는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반사적으로 꽉 죄여온다. 본능적인 반응인 것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지협의 허벅지 사이도 점점 단단해졌다. 경련이 일어날만큼 가늘게 흐느끼는 가윤의 신음도 크게 한 몫했다. 이번에는 절대 도망갈 수가 없었다. 표정하나 숨길 수 없이 엉망이 된 모습으로 몇 번이나 지협에 의해 억지로 사정 당했다. 하얗게 세어 나오는 자신의 것에 낭패감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 붉힌다. 그것이 바로 질리지 않을만큼 놀라운 욕구를 도발해냈다. 언제나처럼 얄미운 모습이 아니라 애처로움이 감돌아 사랑스럽다. “.........아흑................” 마침내 녀석을 몇번 울리고 말았다. 제발..그만해....라고 말할 때까지 구석 구석 범해진 채 적나라하게 관찰당해진 것이다. 지협은 녀석을 똑바로 누이고 잘빠진 발목을 잡아 높게 위로 들어 올렸다. “...아앗!......................” 마지막엔 그렇게 다리가 들려진 채로, 더욱 심하게 사정당했다. 얼마나 심하게 굴었는지, 가윤의 몸이 벌벌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풀어 오른 유두의 붉은 빛은 온통 타액으로 반짝거리고, 침대보는 몇 번의 사정으로 혼탁하게 젖어 들었다. 그의 애널에서는 자신의 사정액이 넘치다 못해 조금씩 세어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기절한 것처럼 진이 빠져 누워 있는 가윤의 목덜미에 인사처럼 지협은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부풀어 오른 입술, 그 상처 자국을 단단한 자신의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무의식적으로 길게 상처난 목덜미를 혀로 핥는다. 그때까지 녀석은 보는 사람이 넋 나갈만큼 할딱거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 떨리는 어깨를 조금 힘주어 끌어당긴다.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에 엎드린 채, 잘빠진 나신에 온통 지협의 흔적으로 가득차 있었다. 불긋 불긋한 몸으로 배게에 얼굴을 박고 조금씩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욱 애처로워 지협은 쓴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곧 이어 숨소리가 잠잠해 질 때가 되어서야 피곤함으로 눈 아래가 살짝 부풀어오른 녀석의 미묘한 색기가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서야 이불장에서 새로 꺼낸 깨끗한 이불을 덮어 자신과 녀석을 한묶음처럼 끌어안았다. 내일 아침에도 만약 도망간다면, 이번에는 정말 자신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나는 안돼.....” 얼마나 짐승처럼 해 댔는지, 엄청나게 쏟아지는 수마 속에서 지협은 겨우 물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꽉 맞물린 가윤의 몸이 잠시 움찔거렸다.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걸 잘 안다. “그런 녀석이 아니라...” “...............” “...........니가 마지막으로 손 내밀 수 있는 자리에 .. 왜 내가 아냐.. ........왜... ..너는 내가 원하는 거에 반대로만 행동해...“ “......................” 대답은 없었다. 다만 물기에 흠뻑 젖은 몸이 길게 한숨을 쉰다.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가윤은 침대에 이미 없었다. 집에도 없었고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다. 지협은 마침내 테니스 채를 던져 버렸다. 분명히 마지막으로 경고 했는데도 녀석은 지 마음대로 굴고 있다. 머리털 하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만 것이다. <12> 가윤의 담임 선생이 아주 심각한 얼굴로 지협을 불렀다. “학교에도 나오지 않고, 연락도 안되고,.. 아버님은 외국에 계신다고 들었고... 사실은...“ 가윤이 같은 녀석이 문제를 일으킬 일이 없을거라고 믿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정년퇴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선생의 얼굴이 너무 안쓰러워서, 지협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동안 무단 결석에, 호스트 바를 들락거린다는 믿을만한 정보도 논의됐고... 이건 내 선에서 어떻게 처리가 안 돼. 학부모들 사이에서 의견이 자자해서... 징계 위원회에서 심하면 퇴학까지도 거론되고 있다.“ 역시 그냥 정학이나 이런 걸로 멈출 일은 아닌 거다. 대한민국의 어느 고등학교도 그대로 넘어가지 않으리라. “내일 오후에 마지막 징계 위원회 모임이 있는데.. 그 전까지 가윤이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다. 어떻게 녀석을 만나야 이유라도 묻지.“ 늙수리한 얼굴의 진땀을 훔치며, 선생은 깊은 한숨을 쉰다. 침착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던 지협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교무실을 걸어나왔다. 자신과 이 선생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교무실의 다른 선생들도 서로 자신을 관찰하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 오전 내내 수업을 빠진 채 교무실에 불려나간 지협이 돌아왔다. 잠깐의 쉬는 시간을 틈으로 아이들이 일제히 뒷문으로 고개를 돌린다. 녀석은 그 강하게 잘생긴 얼굴로 잠시 발 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일학년 때부터 친하던 범기나 상욱들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누군가 어떻게 되어가냐..라고 물었어야 하는데, 아무도 섣불리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것처럼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녀석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다. 조금의 시간 후에야, 그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교복 넥타이를 셔츠 주머니 안에 밀어 넣었다. “너 나 따라갈 수 있냐?” 그렇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책가방을 들며 지협이 범기에게 말했다. 마음 속에 잠깐의 저울질이 계속된다. 어디로 어떻게 가자는 설명이 없는 것이다. 이 친구 녀석이 무조건, ‘따라갈 수 있냐.’라고 물었다. 그 때 상욱이 갑자기 교복 상의를 집어 들며 책상 몇개를 뛰어 넘었다. “가자.” 역시 성질 급한 유상욱이다. 덩치 큰 몸을 굴리며 상욱이 다가오자, 지협이 그제야 안심한 듯 살짝 미소지었다. 쭈삣 쭈삣 서 있는 멋있는 스포츠 형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긴 채, 그가 상욱의 등을 한번 쳤다. 범기의 망설이는 틈을 휘어잡듯, 다시 상욱은 더 크게 외쳤다. “야, 가자, 이범기!” ‘어쩔 수 없잖아...’라고 범기가 어깨를 들썩인다. 그것도 모자라서, 상욱은 조금 아연하게 쳐다보는 다른 녀석들한테도 열심히 한 오바하며 지껄여댄다. “싸나이는 의리! 곧 죽어도 의리 아니냐!“ “....................” “친구의 친구도 내 친구! 당연히 악의 소굴에서 구해와야지!!!“ 그런 게 뭐가 의리야....씨바........................라고 중얼거리며 범기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두번 다시 사고치지 않겠다고 엄마한테 말했는데, 인생 심하게 꼬인 것이다. **************************************** 지협이 열 댓명의 무리들과 함께 바로 향한 것은 다름 아닌 가윤의 반이었다. 그는 그곳의 뒷문에 삐딱하게 기대며 남지일을 불렀다. 애당초 가윤과 같은 반으로써 문제를 일으킨 첫 장본인, 남지일. 눈매 날카롭고 주먹도 마찬가지로 날카롭다고 전교에 소문난 녀석. 녀석은 제일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다가 느릿 느릿 걸어나왔다. 여전히 험상궂은 눈빛을 빛내며 ‘무슨 일이냐’ 식으로 턱을 들어 올린다. 이만하면 시비이거늘,... 지협은 그 순간 씩- 웃으며 그런 남지일의 어깨를 툭-쳤다. “너도 가자.” 그 순간, 범기는 저런 좇같은..이라고 중얼거리며 상욱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영문을 모른 채, 곰처럼 쳐다보는 상욱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성질만 급한 곰탱이, 유 상욱! “어딜?” 남지일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지협은 가방을 고쳐매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니가 가윤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 이해해.” “...........” “나도 사실 못 마땅해.” “그런데?” 씨익- 다시 깊게 미소지으며, 아이들의 궁금한 표정을 뒤로하고 지협이 팔짱을 끼었다. “그래도 패든지 가두든지 뭘 하든지.. 그 녀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녀석을 끌고 나와야지.“ “...............음...................” “....꼬지른 녀석을 나무라는 게 아냐.” “난 안 꼬질렀다, 강지협.” “알아. 그 정도는 되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니깐, 같이 가자고 말하는 거다.“ “.......난 일학년 때도 이미 징계 먹었어.” 그러자 지협이 무지 큰 목소리로 웃었다. 정말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지일이 불쌍했던 것이다. “그럼 한번 더 먹는다고 큰 일도 아니네. 가자, 남지일.“ “..............” “다른 걸 다 떠나서....... 난 이 일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끼어드는 게 싫다. 그리고 분명히 너같은 녀석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아직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닌데, 간섭받고 싶지 않다.” “.............” “..그 녀석은, 우리들 중 누구도 안 믿어.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그래.” “..그러니깐, 우리가 가서 그 새끼 그런 생각에 엿 먹이자구. 너 그 새끼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냐? 그 녀석이 남자를 좋아하든, 호스트를 하든 그런 건 나중에 따지자구, 우리.“ 아아.. 계가윤이 울어? ......거 참.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강지협. 범기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눈이 동그래진 상욱의 발을 꾹-눌러버렸다. “..가자. 남씨. 니 반 녀석들 데리고...“ “..................” “...우리 문제니깐.. ...우리가 해결해야지. 계가 놈 엿도 좀 먹이고....“ 지일이 험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워낙 사교성 좋은 지협이다 보니 거절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18세의 우리. 우리 식으로 해결하자..라는. 어느 세계든지, 그들만의 방식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일이 욕을 하면서도 짐을 싸고 나왔을 때.. 또 녀석이 몇 명의 지 무리들을 데리고 가윤의 반을 나왔을 때.. 범기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 가윤의 친구일지도 모른다...것을 말이다. 비록 공식적으로 지협이 ‘나는 그 녀석 친구 아니다’라고 말한 적 있었지만..어쩔 수 없다. 이 녀석은 정말 가윤을 아끼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행동하진 못한다. 그러나... 그에 반해 이 녀석은.... 이라고 범기는 계속해서 상욱의 뒷통수를 때리며 들리지 않게 소곤거렸다. “씨바, 새꺄... 넌 무슨 생각으로 따라나왔냐?“ 그러자, 이 생각이라고는 눈 뜨고 찾아볼 수 없는 성질만 급한 유상욱. 굵고 잘생긴 눈썹을 쓱- 밀어 올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멋있잖아?” “....................” “왜 요 전날 지협이 새끼도 그렇게 말했잖아. 이해하든 아니든, 그냥 멋있는 친구로 남아줄 수도 있다고.. 싸나이는 의리! ..곧 죽어도 멋있게 살아야지!“ 아아... 언제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친구를 잘 만나야 해.라고. 윗 어른의 말씀 중 틀린 거 하나도 없다. 그러나, 자신들은 실제로 겪지 않으면 모른다고 늘 고집을 부린다. 어른들 말씀이 다 맞는 거 알고 있는데도 늘 이렇다. 불안한 앞 날을 생각하며 범기는 상욱의 탄탄한 등을 정말 시원하도록 한대 갈겼다. 이게 다 니 탓이야, 이 씨부랄 놈아!!!!! 책임져, 이 새대가리야!!! <13> 지협은 명함을 꺼내들어 그 ‘문제의 남자’에게 전화했다. 누군가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김규철이라는 사람은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떤 회사냐고 묻자, 친절하고 깊이 있는 남자 목소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클럽입니다, 고객님.’ 이라고.. 그래서 알아차렸다. ‘잘생긴 회사원 김규철’은 이 명함에 적힌대로 Ananomi라는 호스트 클럽의 호스트였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한 낮에 학교를 이탈한 그들이 도착한 곳도 바로 명품의 거리 압구정동의 Ananomi 바 앞이었다. 한낮에.. 그것도 교복을 제대로 입은 십대들이 바 앞에 죽치고 앉아 있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각각 쳐다본다. 또한 범기도 마찬가지로 불안해졌다. “강지협.” “..........?.............” “..여기서 기다려도 , 우린 저 안에 들어갈 수 없어. 교복을 입고 있잖아.“ 또한 남지일도 여전히 마음에 안든다는 듯, 저쪽 구석에서 계속 바닥에 침을 뱉고 있다. 그러나 지협은 아무 대답없이 물끄러미 자신만 바라볼 뿐이다. “듣고 있냐, 십새야? 우린 못 들어간다구!“ 그리고... 저 악의 무리들 가운데서 가윤을 찾아오려고 해도 무기도 없고 말야...분명히 조폭들이 관계되어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 범기가 빠르게 덧붙이자, 지협은 여전히 눈만 몇 번 깜박였다. “이 범기...” “..........그래.” “...괜찮아. 우린 들어갈 거다.” “............-!!!!!!!!!” 미친새끼의 미친 친구들이다. ******************************** 오후 4시쯤 되자, 멋진 양복을 입은 청년들이 나타났다. 제각각 들어오는 편이었는데, 바 앞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검은 교복의 녀석들을 의아한 듯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머리 꼭지 열린 십대인 법. 그들 중 아무도 지협 무리들에게 ‘뭐야?’라고 묻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어디선가 본 듯한 잘생긴 사내가 값비싼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 범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청년의 정체를 기억해내려 애쓰자, 청년은 일단 차 문을 내려 무리들을 한번 쳐다보았다. 달칵- 지하에 차를 주차하는 듯 보였다. 처음부터 이 청년은 낯이 익었지만, ‘너희들 하고는 볼 일 없다’라는 식의 싸늘함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죽치고 앉아 있던 지협은 달랐다. 청년이 자동차 키를 돌리며 Ananomi 입구로 걸어오자, 그가 벌떡 일어섰다. “아까 전화 한 게 너냐?” 라고 청년이 웃으며 지협에게 말했다. 지협이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더 여유만만하게 웃는다. ..저 광경을 보니 떠올랐다. 그는 바로 범기 자신이 지협에게 일러주었던 그 청년이다. 늘 학교 교문 앞에 가윤을 데리러왔던 그 사내!! .........저 녀석도 호스트였단 말야? “가윤이 데리러 왔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인가 보군..이라고 생각하며 주섬 주섬 다른 녀석들이 일어났다. 솔직히 이 중의 반은 호스트 바에 쌈질 하러 간다니깐 멋있어 보여서 나선 것이다. 그 철없는 영웅주의...그래도 뭐 가끔은 도움된다. 새대가리 유상욱처럼 말이다. “못 들어갈텐데? 저 안에 가윤이가 있는 건 확실하지만...............“ 범기가 했던 걱정을 그대로 꺼내 놓으며, 청년이 놀리듯 웃었다. 갑자기 부아가 받친다. 그러니깐, 이 무리들이 조폭이라도 싸울 태세로 달려온 거 아닌가. 반면, 지협은 처음부터 좀 침착해 보였다. 든든할 정도로 침착하게 녀석은 청년의 미소를 맞받아친다. 가윤이 저 안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녀석은 더 강한 눈빛으로 웃었다. “오늘 데리고 갈 겁니다.” “니가 무슨 수로? 신분증 검사 할텐데?“ 그럼, 처음부터 계가윤은 어떻게 들어갔어!!........라고 범기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이제 각목을 찾아 Ananomi를 부수는 일만 남았다..라고 생각하며 검은 교복의 무리들은 서로 날카롭게 눈빛을 교환했다. 얼굴만 반반한 호스트들이 어디 맥이나 출 수 있나보자. 그 때.... “규철이 형.” “...........?..........” “...여기 제 신분증 있습니다.” ..라고 지협이 뭔가를 그 청년 눈 앞에 내밀었다. “............???................” 각목이나, 소주병이라도 찾고자 했던 교복파들이 일순 굳는다. 지협이 그 잘생긴 얼굴로 반듯하게 웃으며 내민 것은 다름아닌 명찰. **고등학교 2학년 *반 강지협. ..........이라고 적힌.. “...........하...............” “제가 저기 들어갈 수 있는 허가증 입니다.” “......................” “..친구라는 이름의 허가증입니다.” 규철이라는 이름의 청년도 뭔가 재미있다는 듯 한참 웃었다. 지협이 녀석이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명찰 따위를 내밀 수 있단 말인가. ************************************ 한국의 십팔세 중에 거의 몇 퍼센트 만이 장난으로라도 호스트 바에 들어와 봤을 것이다. 범기는 어리둥절해 져서 여기 저기 적나라하게 살펴보는 상욱의 정강이를 다시 걷어찼다. 정신차려, 이 새대가리야. 우린 지금 견학온 게 아냐. “저 방에 있다.” ...라고 규철이라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구석 룸 중에 하나를 가리켰다. 한눈에 보아도 Ananomi 전체는 번쩍거리는 명품들의 일색이다. 도저히 자신들이 상상하던 그 음침하고 음란한 호스트 바 분위기가 아니어서 일단 교복파들은 기가 죽었다. “정말 사귑니까?” 지협이 그 방으로 향하기 직전에 규철을 향해 물었다. 그 표정 역시 강지협 답지 않게 너무 진지해서 범기마저 쫄아붙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규철은 부드럽게 웃었다. 로비에 몰려나오는 다른 청년들을 손으로 저으며 안심시킨다. 그는 계속 웃으며, 그러나 강하게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지만... ..그렇다면 너는 양보할 수 있냐? 나는 그 녀석의 최고의 애인이자, 최고의 친구가 되어 줄건데? 너같은 녀석은 들어설 자리도 없을 거다.” “그래서 며칠 전에 그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 “.........아... ..그건 내가 그런 게 아냐. 어떤 미친 놈이 그런거지. ...니가 걱정할 만한 그런 일은 없었다. 당연히 그런 일을 안 만들기 위해 내가 존재하는 거고.“ 그러자, 지협이 주먹을 꽉 쥐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솔직히 그럴 생각이었다. 니 말처럼.. 점점 진지해지고 있었어. 그리고 아직도 그건 유효해. 하지만.... 그 녀석은 나에겐 절대 말하지 않아.“ “...................” “..붙잡아 달라고 말야. 아쉬운 건 그거다. 그리고 나에겐...“ “...................” “..너처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명찰이 없다.” 갑자기 가슴이 싸하다. 친구. 그것은 어떤 세상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행증이다. 그 때 마침, 성질 급한 상욱이 지협을 향해 빽 소리 질렀다. 딱 녀석이 손잡이를 돌리기 직전이었다. “야! 우리는 뭐해!” 다시 범기가 상욱의 발을 꾹- 눌러야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지협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대답한 것이다. “뭘하긴? 놀아야지, 이 새끼들아!“ ...............그렇다. 노는 곳에 들어왔으니, 놀아야 한다. 그건 너무 당연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 밖에서 이는 소란에 잠시 당황한 것 같았다. 가윤은 경찰이 온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지협이 선명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녀석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었다. 먼저 아무 말 없이 노려보듯 가윤을 쏘아본다. 그래도 학교에 나올 생각이라도 한 건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에 눈을 멈춘다. 갸름하고 아름다운 얼굴. 살이 조금 빠지고,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목덜미며 쇄골에 그 날에 자신이 몇번이나 남겨 놓은 흔적도 여전했다. 잠시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이 녀석이 ‘나 호스트 한다’라고 말한 그 날부터 시시때때로 올라오던 식도의 울컥한 기분은 내내 목소리를 잠기게 만든다. 여전히 잠을 잘 못잔 듯 깨끗한 얼굴의 눈가만이 조금 부어 있었다. 무척 놀란 모양으로 정말, 가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검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비록 그 순간이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고개를 휙- 돌렸지만, 지협은 낮게 탄식하며 손바닥으로 입 주변을 잠시 가린다. 너는 무엇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걸까. 정말 내 당부처럼, 밥은 제 때 먹고 있는걸까. 왜 나를 믿지 못하지.. ..........결국 난 니가 원하는대로 그렇게 뭐든게 망가지게 놔 둘 수가 없는데.. “이런 데 숨어 있는다고 문제가 해결 되냐?...” 겨우 한마디 꺼내며 지협은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내, 휙-하고 빠르게 자신을 스쳐가려는 녀석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당긴다. 그 바람에 털썩- 가윤의 몸이 내던져지듯 앉혀졌다. 쇼파가 잠시 출렁거렸다. 언제나 깔끔한 옆선이 오기를 드러내듯, 절대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 그 얄미운 얼굴 말이다. 얄밉도록 거슬리는 그 아름답고 단정한 얼굴. 그 같은 얼굴이 며칠 전에 밤새도록 자신에게 시달렸다. 이젠, 절대 니 바램같은 거 들어주지 않겠다..라고 말했는데 겁도 없이 다시 도망간 계가윤이다. .......무엇으로부터..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는지.. 이 강한 고집스러움과 당당함이 얄미워 죽겠는데도, 이제 못 보면 안될 정도로 중독되어 버렸는데 말이다. .........그래..라고 지협은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못 놔주겠다. “지금 나가면, 다시 그 규철이라는 놈한테 갈 거냐?” "....니가 상관할 바 아냐." 잠깐 갈비뼈를 들썩이며, 지협은 숨을 몰아쉬었다. 불빛도 단아하고, 차갑기 그지 없는 공간이다. 그렇게 폐쇄적인 기분을 주지 않는데도 답답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사람에게는 충고가 필요할 때와 위로가 필요할 때가 따로 있는데,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들은 그 두 가지를 항상 잘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학교에 모인 그 어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각박한 감성에 필요한 것은 충고가 아니라 그저 위로일지 모르는데 말이다. 지금 이 녀석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 비록 본인은 자꾸 아니라고 우기겠지만... 문득, 아무 생각없이 그 떨리는 손끝을 꽉 쥐었다. 손아귀에 가득 담기는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설명할 수 없이 설레이고, 이상한 긴장감으로 신경이 파닥거린다. 십년도 훨씬 넘는 친구,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지닌 의미, 녀석이 지닌 표정, 그 단순한 것들이 사뭇 달라진 것이다. 한참 그 손끝을 잡은 채로 지협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이 얄미운 녀석을 휘어잡고 싶어 안달이 난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생소한 경험인 만큼 혼란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 격렬한 두근거림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들자, 까만 시선이 서로 얽힌다. 여전히 일그러진 그 얼굴은, 지협이 이 곳에 나타났다는 놀라움과 더불어 흔들리는 녀석의 마음을 결코 숨기지 못했다. 조금은 위장할 수 있겠지만, 절대 숨겨주질 못했다. 살짝 찡그린 채, 필사적으로 대범해지려 우기는 모습이 안됐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언젠가 어머니와 식사할 때 느꼈던 그 단순한 경험. 그 때도 역시 이랬다. 아...젠장. 난 정말 미친모양이다........니가 계속 이뻐보이니.....................라고 지협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울듯 말듯 간신히 입가와 근육에 힘을 주고 있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향해 천천히 중얼거린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약해지면 안될까." "....................." "니가 이렇게까지 강한 녀석이 아니라면 좋겠다." "........................" 가끔은 내게 마음 놓고 기대게.. 가끔은 내게 그렇게 모질 정도로 등 돌리거나, 너 자신에게서 등 돌리지 못하게.. .. 그러나 기어이 가윤이 자신의 시선을 휙- 피해버린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스르륵--.. 부드러운 천이 손마디를 빠져 나가듯, 녀석이 꽉 잡힌 손을 천천히 자신에게서 빼낸다. 멀어지는 것이다. 포기시키려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체념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필사의 힘으로 사양한다. 자신을........그리고 이 상황을. ".................아....." 지협은 마침내 짧게 신음을 토했다. 뭔가 견딜 수 없을만큼 욱씬한 감정이 상반신을 급습했다. 질끈-하고 갈비뼈 안으로 심장이 파편을 튀며 갈라지는 기분이다. 녀석은 자신을 거부한다. 거절한다. 아마 거리를 둘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방식으로 자신을 밀어낼 것이다. 녀석의 그 동안 기억에서, 삶에서, 앞으로의 모든 관계에서 거절한다. 아무리 여기까지 달려온 자신이라 하더라도 환영하지 않는다. 흔들리지만, 결코 아직도 자신이 내민 손을 잡지도 혹은 매달리지도 않는다. 반대로 자신은 더욱 선명해지는 고통에 당황한다. 단지 거절당했을 뿐인데도.. 위로와 도움을 거절당했을 뿐인데도 이렇게 통증이 짙다. 갈증과 고통이 뒤범벅되어 마음 속이 지잉- 울리는 숨가쁜 맥박소리로 가득하다. 두근 두근 두근.........그 심장은 너무 많이 뛰어 아프다. 녀석이 어디론가 가고 싶고, 어떤 인생의 선택을 한다면 그것을 충고하거나 위로하는 것이 바로 친구의 역할이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될 수 없다. 이 거침없고, 걷잡을 수 없이 뛰어 오르는 심장의 세차 운동은, 오직 녀석의 거절만을 떠올리게 만든다. 계속해서 위장을 쥐어짜게 만든다. 그래서 깨달았다. ...십년이 넘는 친구. .....이 녀석을 어느 순간, 돌아본 것이 바로 문제의 시작이었다. 아주 단순한 일상이 무너지고, 아주 단순한 편견들이 갑자기 뒤섞이고, 선택을 강요받고, 결국 자신은 뭔가 선택했다는 것을... "나한테 이러지 마, 계가윤..." 간신히.. 말 그대로 간신히... 지협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미소짓지만 내장이 뒤엉킨 듯, 내부의 질끈한 고통은 여전히 강도를 높여간다. 마치 타이르듯, 그리고 녀석의 거절을 마지막으로 설득하듯 그는 다시 부드럽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한테 이러는 거 아냐...너." ".............가라."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너 때문에 나 아프잖아, 새꺄...................." "...가... 강지협. 학교로 돌아가." ".....너 때문에 아프다고 말하고 있어, 지금. 재수없이 잘난척 해오고.. 뭐 하나 남의 말 들을 필요없이 니 뜻대로 살아와서 얄미운 니가..." ".........가라니깐!!!!!!!!!!!" ".........이상하지. ...그렇게 얄미워 죽겠는데.. ...넌 내 말같은 건 언제나 비웃으며 무시하잖아... 이십년 가까이 넌 내 친구였는데... ....니가 널 안을 수 있냐고 물었던 말.. 그 말 이제는 취소 안돼. 장난으로 되돌릴 수도 없다.." ".........돌아가라니깐!!!!!!!!!!!!!!!!!!............." "..너는 아니냐...?.. 너만 아닌 거냐?... ...너는... ..내가 친구로서 좋기라도 했었니, 그동안? ..그것도 아니면 그냥 놀린 거였냐..." ".............니 자리로 돌아가, 이 새꺄!!!!!!!!!!!!!!!!!!!!" 녀석이 비명을 지르듯 크게 외쳤다. 언제나 포기와 체념을 남에게 강요하는 이 일방적인 녀석. 마음에 안들고 재수없고 얄미운.. .......그러나 끝내 아프고 안타까운 이 녀석. 지협은 계속 욱씬거리는 상체를 어루만진다. 그리고는 가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스치듯 몇 발자국 걸어 나갔다. 녀석은 저렇게까지 소리지르지 않는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돌아갈까, 그럼?." "......................" "..진짜 돌아갈까?.." 시간이라는 게 무게가 있는지 몰랐다. 살면서 어떤 시간은 그렇게 무거울지 전혀 몰랐다.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벌벌 떨려오는 초조함으로 지협이 가윤을 스쳐갔다. 이번만큼은 자신도 서 있지 않았다. 분명히 잡으러 달려왔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가윤은 미동도 없어 보인다. 정말 패서라도 데리고 가야하나..라는 판단의 한계까지 밀려왔을 때, 가윤이 몸을 돌렸다. "........내가 아무리 불쌍할 정도로 매달려도 밟아버리라고 말했지..............강지협." ".................!......." 선이 청결한 목에 핏줄이 설 만큼 턱이 덜덜 떨리는 녀석이다. 믿을 수 없을만큼 동요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믿기지 않는 쪽은 지협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의 눈가에 말갛게 고인 물기가 엿보였다. 계가윤이 정말 울다니... .......자기 입으로 녀석들을 선동했지만 정말 믿기지 않았다. 녀석은 마치 최선의 힘을 다해,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주먹을 꽉 쥐고, 물기 매달린 속눈썹을 깜박이며 미소짓는다. 언제나와 같은 자신만만한 미소. 그러나 내면이 산산이 부서진 사람이 짓는 쓰린 웃음. 그 거만하고 얄미운 웃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눈가의 물기. “널 잘 알아...“ ..라고 녀석이 말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목이 메인 듯, 마치 싸울 사람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며 녀석이 꺼낸 말은 그게 전부다. “..............!............” 울음과 웃음이 반쯤 섞인 그 찡그린 얼굴을 보며 지협은 조금 고개 끄덕인다. 지금에야 알 것 같다. 그것이 정말은 무슨 말이었는지.. 이전에도 녀석은 자주 ‘널 잘 알아. 세상에 나만큼 널 잘 아는 인간이 있어?’라고 물었는데,..틀리지 않았다. 몹시나 익숙한 이 말은, 그러나 십팔 세의 자신들에게는 일종의 고백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만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녀석은 부들부들 떨리는 턱을 들어 이를 악물 듯 노려본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에게 퍼붓듯, 목소리를 높여 계속 소리쳤다. “난 널 잘 안다구, 이 새꺄!!!! 강지협.. ...난 널 누구보다 잘 알아!!!!!!!!!!!! 나는 널 믿는다구!!.. 세상에서 널 가장 믿어!!.“ 그 갈라진 음성, 참혹한 마음 안 쪽에서 비로소 지협은 녀석의 말이 더욱 생생히 와 닿는다. 일종의 그들만의 암호처럼, 푸른 나무같은 그런 고백. 녀석이 말하는 ‘믿는다’와 ‘널 잘 안다’는 결국 그런 말이었다. 넌 우정이상이야, 강지협. 난 널 누구보다 그렇게 여겨왔어. 널 사랑한다구!!!!! 세상에서 가장 널 아껴. “이 세상에 나보다 널 잘 알고.. 나보다 널 믿는 인간이 또 있어?!!!!” 이 세상에 나보다 널 사랑하는 인간이 있어? “그렇다고 그걸 어떻게 말해!!!!!! 나는 안 답답한 줄 알아? 나도 환장할 것 같아.” 그렇다고 좋아하니, 사랑하니..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고작, 널 믿는다..혹은 널 잘 안다..라는 말이 전부인데.....그렇게 표현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법도 없는데!!!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말이 어렵고 무거워서.. ..기껏해야 이 나이에, 이 현실에 할 수 있는 말이란... 너를 잘 알고, 너를 가장 믿는다는 게 유일한데!!!!!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까지가 최선인데.............. 너야 말로 그냥 날 안으려는 게 다 잖아! 그냥 섹스하는 거랑 상대방을 잘 안다는 거랑 착각하지 마.” 너는 그냥 나 안고 싶니?.. ..너에겐 그게 다 이지만..젊은 시절의 짧은 치기이지만,... 나는 그게 아닌데 어떻게 해. 나더러 어떻게 하라구!!!!!!! 나는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죽을 힘을 다해서 이 상황을 버티고 있는데, 넌 내 마음의 반도 몰라. ...넌 날 잘 알아? “너는 몰라. ...나에게 있어 ‘도와달라’는 말이,.. 혹은 ‘잡아달라’는 부탁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그런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 ...내가 너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면...그건...“ 그건, 사랑한다는 의미보다 더한 거야. 너에게 잡아달라고 말하면, 그건. ...날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야. 나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주길 원하는 치열한 외침이 되는 거야. ..그런 말을 어떻게 부탁해... ...그런 말을 내가 어떻게 입 밖으로 내!!.. “.....그러니깐... 함부로 날 도와주겠다고 생각하지마. 입 닥치고 여기서 나가 버려, 강지협 나도 사실은 힘들...어. 나에게도 지금은 ....어려워.. ..나도........ .......쉽지 않아.........“ .....라고 가윤은 고개를 돌렸다. 지협은 그만 참을 수 없어졌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 단단한 어깨, 심플한 등, 수만가지 침묵으로얄밉게 위장하며 버텨왔던 녀석의 세상... 그 뼈 아픈 현실에 견딜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던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결코 가윤은 처음부터 자신을 놀리려는 것도, 혹은 정말 환장해서 호스트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역시 오래된 친구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친구의 믿음을 배신할 정도로 최악의 녀석이 아니었다. 단지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도 답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그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너 그동안 날 우정이상으로 생각해 왔니.. 사랑해 왔어?........라고..지협의 등으로 서늘한 반문이 몇 번이나 스쳐간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는지 너무나 분명해서...그것을 확인하는 이 과정이 너무 지독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참을 수 없어졌다. 손을 뻗어 와락- 그만, 자신과 키도 비슷한 녀석을 마치 품안에 에이듯 안아버린다. .. 더 견딜 재간이 없었다. “.....날 잘 알아?” 휙-.. 녀석의 돌린 몸을 잡아 자신의 안으로 가득 끌어안으며, 지협이 중얼거린다.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고 흡사 미친 놈처럼 거듭 속삭인다. 녀석의 높은 체온이 와 닿는다. 이를 악문 그 흐느낌에 셔츠가 금방 축축해졌다. 한참 어깨위에 녀석의 얼굴을 묻힌 채, 가만히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견딜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뭔가 멋있는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녀석도 자신도 좋아질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정말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그냥 친구가 아니라고만 이야기 해 주면 돼............“ “...................” “다른 헛소리를 하면, 지금 날 죽이는 것과 똑같아. ....그냥 내버려 둬, 강지협. ...이게 옳아. 그냥 버려둬. ...니가 이 이상 날 잡으려 하면.. ..난 얼마든지 미친 듯 날뛸 거다. ..잘 알잖아? 난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눈물이 얼룩진 채,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마녀처럼 녀석이 샐샐거렸다. 그 억지같은 미소를 보면서도 지협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 안쓰러운 감정의 마지막을 살피듯 바라만 볼 뿐이다.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계가윤은 정말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이대로 끌고 나간다면 녀석은 미친 듯이 날 뛸 것이고.. 또한 이 녀석이 겪어 온 감정의 굴레, 그 진지한 고통에 아무런 해결도 되지 못한다. 잡으러 왔지만, 결코 잡히지 않는다. 손가락을 빠져 나가는 희미한 연기처럼 옅은 미소를 띈 채, 여전히 자신의 말을 비웃는다. 그 웃음이 이전에는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고, 이제는 애닮은 기분마저 든다는 게 오로지 차이일 뿐이다. 그래,..차라리 내가 그렇게 말해서 니가 속 시원해진다면.... “가윤아............” “..................” “.........친구로써의 넌, 오늘이 마지막이다.......” 니가 원하는대로 해 줄게. 니가 듣고 싶은 게 그 말이 전부라면..이젠 정말 진심을 담아 해 줄게. .........그 말 하면 편해지니. 니가 원하는 게 그런 가혹한 자유라면 얼마든지 선물해 줄게. ..그러면 그 암흑같은 웃음을 짓지 않고, 세상을 용케 견디지 않을래...?... ..뭔가를 악착같이 지키기 위해 이런 거짓말도 하고, 자신의 고통을 자진해서 희생하기도 하고,.. 웃기게도 상대방의 행복한 얼굴을 기대하고.. ...이런 것이 진심일 때의 마음이구나. ..처음 알았다.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나....간다...계가윤...” “...........!!!!!!!!” 가만히 가윤의 몸을 떼어 내며, 지협이 뒤로 걸었다. 등 뒤에 탄탄한 문이 부딪칠 때까지, 그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는다. 조금 진정되는 듯한 표정. 내가 멀어져야 상대방이 안심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그 혹독함에 숨통이 아린다. 룸 밖으로 나가기 전에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지협은 여전히 자신에게 철저한 동갑내기 친구를 보며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미친 놈처럼 악을 쓸 필요까지는 없어. 니가 가길 원하면 지금 나가줄게. ..하지만..이 말은 해 주고 싶다.“ “..................” “...내 친구가 남자를 좋아해...” “.......-!!!!!!!!!!” “...근데 조금 전에 알았지만, 나도 어쩌면 남자를 좋아해....” “...........-!!!!!!!!!!!!!!!” “친구를 사랑하는 거.. 그것도 오래된 친구를 어느 날부터 다른 시선으로 느끼고 보게 되는 거... ......그건 생각만큼 나쁘니 않아. 가끔 기대할 만큼 멋지기도 해.” 조금 벌어지는 입술이 보인다. 쌕쌕- 거칠게 입밖으로 튀어나는 뜨거운 숨결이 보인다. 녀석의 동공은 지금껏 지협이 듣고보지 못했을 만큼 경악으로 물들어 있다. 당혹감에 빠진 녀석을 보니, 짜릿할 정도의 쾌감이 들었다. 여전히 부드럽게, 그리고 환하고 크게 미소지으며 지협은 룸의 문을 열었다. 걸어 나오기 전에, 아름다운 친구를 향해 한마디 던지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힘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견딜만 해...” 그래, 견딜만 해. 너도 이 말에 뜻을 알거야. 아무리 니가 듣기 원하는 말을 하고, 이 관계를 잘라버리고 싶어도.. 내가 방금 너를 잡은 손, 너에게 내밀었던 내 손은 여전히 니 옆에 있다는 걸. ..나는 아직 너를 잡고 있다는 걸. 그 편이 훨씬 더 즐겁게 견디는 방법이라는 걸. ********************************* 씨바, 이게 뭐야. 범기는 계속 머리 속에 차오르는 두통을 의식하며 상욱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개념없는 녀석이 어딜가나.... 유상욱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 “오늘 밤 만은 그댈 위해서~ 분홍의 립스틱을 바르겠어요~ 그대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분홍의 입술자국 새기겠어요~“ 마이크를 잡고 얼마나 열창을 하는지...범기는 상욱의 그런 모습에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 쳐다볼 뿐이다. 김규철이라는 인간은 정말 냉혈한인 것 같았다. 그는 지협이 없는 무리들을 룸 안 쪽에 다 몰아 놓고, 바의 다른 호스트들을 불렀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말쑥하고 깔끔하게 생긴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리고.. “동작 봐라! 더 크게! 일동 좌우 반동 실시!“ ........그리고 그 젋고 어린 무리들이 예상했던 혈전은 없었다. 그들은 각목이나 깨진 병 대신,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노는 일에 열중할 뿐이다. 강지협이 이 새끼, 정말 미친 거 아냐..라는 생각만 머리 속을 빙빙 돈다. 잘생긴 형들은 이 상황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끼거나 쇼파에 느긋하게 앉아 박장대소를 했다. 일사분란하게 교복을 입은 무리들은 한 명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 부를 때마다, 열심히 좌우로 흔들며 가락에 맞춰 흥을 돋궈야했다. 이건 아냐..이게 아냐!!... 범기는 이 비극적인 상황과 어쩔 수 없이 우정에 팔린 자신의 몸을 생각하며 혀를 깨물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호스트들은 즐기고 있었고...이상하게도 분명히 반쯤은 고객인 자신과 친구들이 이들을 즐겁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 곳을 때려부수지는 못할 망정, 뭔가 심각하게 입장이 바뀐 것이다! “오오~ 내일이 오면 떠나야 하는~ 그대의 스을픈 눈으을 들여다보며언~ 눈물 방울이~~~~~ 얼굴을 적시고~~~~~~~~~~ 자, 다같이..뚜뚜리뚜바~뚜비 뚜밤바~“ 그리고는 전직이 심하게 의심되는 새대가리 유상욱은 개념없이 쭈욱 한 곡조 뽑아댄다. 나른하고 유쾌한 표정으로 그 무대를 즐기고 있는 호스트 형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넉살좋게 상욱이 온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를 때마다, 뒤로 넘어갈 듯 웃으며 박수를 쳐댄다. 덕분에 한끗 고상하고 호텔같은 이 곳은 이상한 반란으로 얼룩졌다. 범기가 옆으로 살짝 돌아보았을 때, 그 무시무시한 뾰족한 눈의 남지일도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열심히 ‘뚜뚜리뚜바’를 하고 있었다. KBS 합창단 코러스도 아닌데, 모두가 코러스 보이가 돼 버린 것이다!! “..이야~ 그 녀석들 물건인데?“ “그러게.. 무슨 생각으로 여기 들어왔냐? 난 아까 니들이 저기 죽치고 앉아 있길래, 오늘 경찰이라도 들이닥치는 줄 알았지...“ “아..나는 그 유명한 압구정동 교복파인줄 알았지~!!” 그리고는 맥주를 마시며 잘생긴 형들은 연신 즐거워한다. ‘딱 호스트 감이네..졸업하고 올 생각없냐?’등등의 실소 섞인 농담을 들으며 범기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이거 해야 하나..뚜뚜리뚜바.. ...그러나 가끔 하루는 너무 길었다. <14> 몇몇의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이 굳은 표정이었다. 학교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어른들이 득실거렸다. 미끄러지듯, 가윤의 반에서 자신의 반으로 범기는 뛰어 들었다. ..씨바.. 어제는 영문도 모를 중노동에 시달렸는데,.. 덕분에 호스트 형들의 사랑아닌 사랑을 듬뿍-받으며!!! “가윤이 오늘도 안 왔대. ........지협이 너 , .... 그 녀석 어제 집에도 안 들어왔다며?...“ 어깨가 탈골이라도 된 듯, 근육들이 춤을 춘다. 누구에게 하소연할수도 없는 ‘뚜뚜리뚜바’ 사건 때문이다. 이게 무슨 18세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거냐, 강지협!!! 니 잘난 설득에 반쯤 넘어가고 있었는데!!!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십새야..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조금 있으면 오후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될 것이고 징계위원회도 열릴 것이다. 그러나 어제 그렇게 잔뜩 멋있게 주눅들지 않던 강지협도 눈썹에 잔뜩 힘을 준채 말이 없었다. 어찌보면 아주 낙심한 것 같지는 않고, 어딘가 어제 밤을 꼴딱 샌 듯 파릇한 수염자국도 보였다. ..수염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의리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야!!” 채근하는 목소리를 묻어버리듯, 수업 시작 종이 울린다. 지협의 자리에서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며 범기는 계속 작은 욕설을 투덜거렸다. 이게 뭐야..아무 것도 나아지는 게 없잖아..라는 생각 때문에 어제의 그 수치와 힘든 결심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드르륵.. 잔뜩 욕을 중얼거리며, 시끌 시끌한 녀석들의 분위기 속에 노트를 꺼낸다. 그 때 앞문이 열리고 국어 선생이 들어왔다. 그러나 선생은 간단한 인사 끝에, 곧 ‘자율학습이다’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다. 아마,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그도 지금 열리는 징계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것이다. “야, 조용히 좀 해, 이 좇같은 새끼들아!” 반장이 쑥덕거리는 녀석들 틈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자율학습..그 허울좋은 핑계에 넘어갈 위인들도 없다. 그들은 제각각 어제의 말도 안되는 무용담을 구라치기에 바빴다. 어제 수업을 빼 먹고 다 달려간 걸 아는 녀석들이 자꾸만 묻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거기 갔었냐?...호스트들도 잘 싸워? ....등등.. ...그리고 범기는 알고 있었다. 어제 밤 그토록 잘생긴 형들의 사랑을 받으며 ‘뚜뚜리뚜바’를 하던 녀석들이 오늘은 마치 전사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한다. 허풍과 위세, 그리고 의리를 빼면 할 말이 없는 시절인 것이다. ..쪽팔려 미치겠구만...아아...이제 어떻게 될려나... ..범기는 한숨만 쉬었다. 가윤이 쫓겨나는 건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도 좋든 싫든 어제 따라 나섰던 것이다. ********************************** 그 때, 어떤 녀석이 외쳤다. 아마 창가에 자리잡은 녀석이었을 것이다. 친구들의 위세좋은 구라에 대충 고개 끄덕여주고 있던 범기도, 고개가 꺽일만큼 대단한 외침이었다. “계가윤이다!!!!!!!!!!!!” 그러자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강지협이었다. *************************************** 뒷문이 열렸을 때, 지협은 한참 허공을 쏘아보듯 바라본다. 그 눈길이 여전히 너무나 아파서 가윤이 살짝 고개를 돌릴 때까지. 그리고 제각각의 이유로 흥분한 녀석들이 책상을 우당탕 뛰어 넘어 그들을 둘러 쌀 때까지 한참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학교에서 마주하는 녀석은, 언제나와 같이 깔끔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자신을 쳐다본다. 옥상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녀석이 자신을 버렸던 날. 그때와 변함없는 아름다운 눈동자는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정갈하다. 호기심 가득한 녀석들이 마치 패 싸움을 보듯 둘 사이에서 눈을 부지런히 굴렸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듯, 녀석의 목울대가 한번 움직인다. 그리고 마치 뭔가 생각하듯, 샐쭉한 눈꼬리를 반듯하게 올려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굉장히 아름답고 침착한 표정이었는데, 순간 숨이 훅-하고 들이쉴 정도로 애처롭게 미소지었다. 지구가 몇 번을 돌아갔을만큼 천천히 녀석이 말했다. “....도와줘......” 드디어 말했다. 그리고 실감이 나지 않아 지협이 눈을 똑바로 뜨자, 녀석이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날 좀 도와줘.” “..............!!!............” “......부탁이야.....” “........................!!!!!!!!!!!!!!!!!..........” 짜릿한 쾌감. 순간, 머리 위로 수천가지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한마디에 집중하기는 처음이다.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잡아달라는 부탁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대신 가윤은 긴 팔을 올려, 자신의 교복 소매 끝을 잡고 조금 흔들었다. 마치 아이들이 길을 잃을까봐 엄마의 소매나 옷 끝을 꽉 잡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사랑스럽고 슬퍼보였다. 머리 카락이 쭈삣 설 정도로 지금 당장 녀석을 끌어안고 싶었다. 온 몸에 소름돋힐만큼 자신도 녀석이 필요했다. 그만큼이나 이런 이 녀석을 원했다. “..........가자.” 지협은 단호하게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이 정도면 된 거다. 이 잘났고 고집불통이었던 녀석이 마침내 자신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차마 전체를 끌어안지는 않았지만, 애타게 매달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녀석이 자신에게 뭔가 부탁하거나 이렇게 사랑스럽게 군 적이 없다. 이렇게 파리하고 조금 부은 눈밑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애원한 적도 없었다. 이렇게 진심어린 부탁에 마음이 찡하게 울렸다. 더불어 심장이 부서질 듯 뛰어 오르고 혈압이 상승했다. 그 순간의 자신은 마치 세상의 전부를 바꾸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기분이었다. 진흙탕에 온통 젖은 채 앉아있던 녀석이 자신을 향해 ‘날 좀 일으켜 줘..’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믿기지 않았지만, 녀석이 부탁하고 애원한 것이다. 언제나 도도하고 절대 망가지지 않았을 것같던 그 녀석이....조금 슬픈 듯 웃으며 가늘게 떨리는 그 손끝으로.. 다름아닌 자신의 소매 끝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이 정도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암...당연히 그랬다. 그는 어제 자신과 같이 압구정동으로 갔던 녀석들을 불렀다. 그리고 주저없이 가윤의 손을 잡고 빠르게 교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 가윤은 자신의 반에서 지일과 몇 명을 불러내는 지협을 보았다. 교무실로 걸어가기 직전이었다. 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제 규철에게 바에 온 녀석들이 대략 열 댓명이었다고 들었다. 매우 놀랍다는 듯 지일을 돌아봤지만, 교무실에 들어갈 때까지 녀석은 빳빳이 앞만 바라본다. 교무실 안에는 굳은 얼굴의 어른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교장이나 다른 학부모들은 매우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반면, 생각지도 못했던 가윤의 등장으로, 담임의 얼굴은 반쯤 반가운 표정이다. “너는 반으로 돌아가라, 강지협” ..이라고 지협의 담임이 말했다. 자신만 놔두고 다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불쑥 들이닥치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했다. 그러나 지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들 앞에서 가윤을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그 따뜻하고 큰 손. 체온이 단단한 그 손. ............갑자기 울컥 속이 아팠다. 그리고 따가운 시선이 싫어서 고개를 돌렸는데, 녀석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조금 낮았지만, 충분히 모두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좀 버릇없겠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이 녀석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게 단지 무단 결석과 호스트 출입 때문입니까?“ 무단결석과 호스트 출입은 ‘단지’라는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가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지협에게 보이지 않게 한 행동이었지만, 마치 녀석은 그 순간을 말리듯 손아귀에 힘을 더 꽉 준다. “강지협. ...가윤이가 압구정동 호스트 바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학부모들이 여럿이야. 실제로 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물어보니.. 다들 더 잘 알고 있더군.“ 학생과주임이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눈길만은 똑바로 가윤을 노려보았고, 그 때 지협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오만한 안경을 쓴 학부모 대표가 신경질 적으로 입을 연다. 그녀가 누구의 어머니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가윤과 같은 반에서 자주 석차를 다투던 녀석의 어머니다. 안경을 쓰고, 지일이 가윤을 팰 때 뭔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그 비겁한 녀석!...누가 꼬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뒤에는 다른 학부모들 서너명이 앉아 있었다. 그 분들은 그녀와는 달리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건, 학생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예요. 그리고 문제된 저 학생도 할 말이 없을 거고.. 듣자하니, 편부모에 아버지도 한국에 안 계신 거 같은데... 공부만 잘 한다고 뒤로 딴 짓을 하면 쓰나. 다른 아이들이 영향을 받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니깐....“ “...........하지만...” “가윤 학생 대답해 봐요. 압구정동 호스트 바에 들락거렸다고 우리 애가 그러든데... 정말 아니라고 말할 자신 있어?“ “......................” “솔직히 말해 봐, 계가윤! 우리 선생님들 중에서도 그 소문을 듣고 있었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거짓말이라고 말할 자신 있어? 너 호스트 바에 정말 갔냐?“ 가윤은 조금 더 흠칫- 떨었다. 살짝 떨리는 손가락을 녀석이 하나 하나 엉키듯 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공격에 할 말이 없다. 가윤은 이내 입술을 야무지게 깨물며 대답했다. “갔습니다.” “,,거봐...내 그럴 줄 알았어.” 꼬지른 녀석의 어머니가 회심의 미소를 띈다. 그리고 다른 어른들도 적잖이 놀라고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소곤거렸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성적이 좋으면 정학 정도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학교 위신문제도 있고, 다른 학생들이나 학부모들 시각도 있는데, 가윤 학생이 양심이 있다면 알아서 학교를 그만두는 게 나는 맞다고 봐.“ “............!!!!!!!!!!!” 잠시 숨을 들이키는 순간, 지협이 그 말에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라는 식으로 선생 몇 명과 학부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가윤의 담임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깊게 한숨쉰다. 그러나 그 때였다. 지협은 떨지도 않는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 정말 호스트 바에 들락거린 일 때문에 녀석을 처벌하실 생각이라면...“ “.........?..............” “..이 녀석 하나로 안 끝납니다.” ..라고 말하고 자신의 등 뒤에 쭈삣거리며 서 있는 어제의 무리들을 돌아본다. 놀란 까달게 가윤이 고개를 휙 들자, 녀석이 윙크하듯 눈을 찡긋 거렸다. 뭔가 짓궂고 장난끼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믿을 수 없을만큼 당당해 보였다. “저도 같이 학교에서 나가겠습니다, 선생님.” “강지협!!...........” 지협의 담임이 벌떡 일어선다. 앞날이 유망한 테니스 선수. 언제나 강직하고 의리 있으면서 항상 넉살도 좋고 유쾌해서 선생들이 좋아하는 학생, 강지협. 그가 씩 웃으며 가윤을 잡은 손을 바싹 끌어당겼다. 것 봐, 힘들더라도 둘이 버티는 편이 훨씬 나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놀란 것은 가윤도 마차가지였다. 살면서 이렇게 놀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항상 자신을 못마땅해하지만, 마지못해 친구로 살아온 강지협이!!! 그러나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듯한 웃음을 띈다. “이 녀석만 호스트 바에 간 게 아닙니다. 저도 갔었습니다.“ “...............-!!!!!!!!!!!!!!!!!!” 그래서..어제....찾아온 거.... ..가윤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든 말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더욱 당황했고, 순간적으로 누군가가 학부모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범기야!!..........” 이범기의 어머니다. ‘딱 걸렸다.’라는 듯한 표정으로 상욱의 뒤에 숨어 있던 범기가 쭈삣거리며 나섰다. 설마,...라는 표정이 가윤과 녀석의 어머니 모두에게 스친다. 그러나 범기는 정말 울며 겨자먹기같은 표정으로 뭔가 억울한 듯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딱 한번 갔었어.. 진짜야.................“ 주여......이라고 말하며 범기의 어머니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독실한 크리스천 집사의 아들, 이범기. 신앙의 힘으로 아들을 개화시키려는 노력의 끝을 느끼신 걸까.... 가윤은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자...잠깐만..........” 누군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손을 저었다. 머리가 벗겨진 교장 선생님이다. 그러나 유상욱 쪽이 더 빨랐다.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범기를 노려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게 그렇게 큰 일이예요? 저도 갔었는데?...........“ 교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으로 무리들을 가리킨다. “저....저...-!!!!!!!!!!!!” 허나, 가장 믿지기 않게도.. ..남지일이 씩 웃었다. 그로써는 가윤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어쩌면 학교의 권위였을지도 모른다. 둘다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난 또 뭔가 했네. 왜 다들 호들갑이지? 거기라면 나도 갔었는데...?....“ 교장을 비롯한 몇몇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그러나 녀석들은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채로 뒤에서 웅성 웅성...수학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뭐야, 그거~ 우리 어제도 갔잖아.” “그래, 별 거 없었는데? 형들하고 놀고 노래 부르고..“ “아~ 거기..? 난 뭐 대단한 데라고 이러시는 줄 알았지. 술 담배 안 팔고 노래만 부르고 나오는 거기? 근데 왜 다들 저래?“ “에이~ 난 노래방인줄 알았지.. 아는 형이 있어서 잠시 놀러간 건데, 그것도 문제인가?” “그러게!.. 전화 해 봐요, 선생님! 거기 김규철이라고 있는데, 그 형이 제 아는 형이거든요~ 그냥 형네 회사에 놀러 간 거예요~“ “와~ 넌 규철이 형 아냐? 나는 승훈이 형 아는데~ 그거 참 묘한 인연이네~~ 어떻게 그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냐??“ 갑자기 시끌 시끌한 소란이 가득한 교무실에서, 가윤은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솔직히 그렇다. 이들을 진짜 친구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걔 중에는 정말 얼굴만 아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 때 그 문제의 학부모가 소리쳤다. “하지만, 학교에 안 나온 건!!! 그리고 아무리 모르고 갔었다 해도 학생이 호스트 바에 출입을 한 건...분명히 문제가...............“ 지협이 더욱 느긋하게 웃었다. 녀석이 짓는 따뜻한 웃음이 손끝으로 전달되어 온다. 손끝을 타고 흘러 팔꿈치로, 겨드랑이로, 쇄골로, 그리고 심장으로 천천히 퍼져간다. 역시 둘이 더 낫지? 뭐든 나누는 건 좋은 거야. “아..그건요, 어머니. 제가 가윤이 룸메이트 입니다. 가윤이가 아팠는데.. 저는 테니스 연습한다고 생활이 달라서, 녀석이 결석하는 걸 범기한테 전해달라고 했거든요...“ 그리고는 자신있다는 듯 범기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범기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상욱을 애처롭게 쳐다보며 마지못해 덧붙였다. “예...근데..요.. 그게 저도 바빠서 상욱이한테 전해 달라고 했던 걸....요..“ 그래서 지협이가 범기에게 범기가 상욱이에게 상욱이가 다른 누군가에게..이런 식으로 전하다 보니 전달 못했어요. 그러니깐 서로 게을러서 그렇게 된 거지 이 녀석이 잘못 한 건 아니예요...라고 말하며 다시 와글 와글.. “저도 얼핏 그런 말 들었습니다. 제가 교무일로 바쁘다 보니 정식으로 체크 안 한 게 잘못인가 봅니다.“ ...마침내, 자신의 담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가윤은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한번도 이들을 친구라고 생각해보진 않았다. 비록 잘 지내는 편이었지만, 진심으로 이들이 자신의 편인 친구라고는 여기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학부모가 소리쳤다. “그런 식으로 감싸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냐!! 어디 그런 값싼 게 우정이라고, 학생들이-!!!“ 그러자, 지협이 웃으며 가윤의 어깨를 툭툭 친다. 반대로 가윤은 자신의 발치에 마찬가지 리듬을 툭툭- 떨어지는 눈물자국을 보고 있었다. “........어머님. 저희는 이 학교에서 우정에는 값을 매길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어머님이 가윤이더러 나가라고 하는 이 학교에서요.“ “..........-!!!!!!!!!!!” “......그리고 설사 학교가 이 녀석을 포기해도 우리가 포기 못합니다.” “..........!!!!!!!!!!” “...이 녀석은.......” “강지협!!!!!” “이 녀석은... ......... 제 친구입니다. 우린..이 녀석의 친구입니다. ..이 녀석은 제 가족.......입니다..“ 너는 내 친구. 친구 이상으로 친구고, 친구보다 더한 친구.. 너는 내 가족. 어떻게 해도 널 버릴 수 없고, 언제나 잡아주고 싶은 내 가족... 내 친구, 내 가족, 내 버팀, 내 의지, 내 필요, 내가 가진 모든 감정, 내가 가진 모든 나눔... ..그리고 그 이상의 의미.. 언제나....내 것.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강지협. 그 녀석의 목이 잠시 움찔거리는 것으로 봐서는 녀석도 뭔가 울컥하는 기분을 참는 기색이다. “..............!!............” 그 순간, 가윤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고백을 들었다.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너의 친구다..라고. 니가 아무리 흔들리고 넘어져도, 절대 혼자 넘어지는 일은 없다...라고. 자신이 잡고 있는 손. 그리고 자신의 단 한마디 ‘잡아달라’라는 말이 자신의 고백이듯...녀석의 ‘친구다’라는 말도 천금같은 사랑고백이었다. 누군가 부정한다 해도, 그 말은 적어도 가윤에게 가장 환상적인 사랑고백이다. 그리고 녀석도 조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너는 늪에 빠졌니? ..아,.. ..나도 그래. 18세들은 늪을 보지 못하고 첨벙 첨벙 앞으로 뛰어나가지. 그러니 뭐 어때. 진흙탕에 빠져도 둘이 있는 게 훨씬 나아. 너도 우냐? ..아,..나도 그래. ........친구란.. ..가끔 그런 거 아냐?.... ************************* 교무실을 나오며 누군가가 말했다. “아, 왜 애를 울려!!” 가윤이 이를 물고 흐느끼듯 눈물범벅이 되자, 난처한 누군가가 괜히 지협을 향해 따진 것이다. 모두가 벼르고 있었지만, 막상 가윤이 울자 당황한 것이다. 원래 단순한 놈들이지만, 마음 약한 놈들이기도 하다. “에..?.. 내가 울린 게 아냐!....”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지협이 우는 가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만하면 잘 했어, 수고했어..라는 의미였다. 그 바람에 겨우 학교에 나온 망설임이 더욱 흩어졌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아 진짜, 쪽팔려 죽는 줄 알았네.” ..지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등을 휙-돌린다. 고맙다..라고 가윤이 울다가 웃는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자, 녀석이 민망한 듯한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손을 흔든다. “범기는?...” 지협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 질문에, 누군가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떨어댄다. “아까, 지 엄마한테 잡혀서 조퇴했어.” “..어쩌냐.. 죽도록 기도하겠군..오늘..“ “...아아.. 그래도 좋겠다, 이범기.. 우리는 이제 죽었다. 학교에서 전화 할 거 아냐.“ “좋은 생각이 있어. 엄마하고 아빠하고 조금 화가 누그러졌을 때 집에 기어가는 거야. 어때? 우리 쪽에서 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화가 풀리시지 않을까?..“ 또다시 시끌시끌시끌... 아이들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슬렁 어슬렁 반으로 돌아간다. 마치 조금 전의 일은 별일 아니라는 듯,..아니, 오히려 한번쯤 멋진 친구로 남을 수 있어서 크게 만족했다는 듯.. 마음도 몸도 다 성장해 가는 그 탄탄한 등들을 바라보려니 마음이 출렁거린다. 살짝 휑한 복도 위에서, 그때 지협이 가윤의 물기 어린 손을 잡았다. “이젠 됐지?” “...................”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고개를 들자, 녀석이 햇살처럼 웃는다. 그 건강한 웃음, 이 실감나는 체온. 언제나 강직하고 밝은 녀석이 마치 가윤을 약올리듯 입을 연다. “난 니 친구 아니다, 계가윤.” “.................” “아까 교무실에서 말할 때까지만 니 친구였어.” “............!!......” 가윤이 당황해하자, 녀석은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이젠 니가 친구하자고 매달려도 내가 못해.” “...........강지협.....” “..친구 안 할련다. 못 해 먹겠다, 그거.“ “....................” “...이젠 대충 고집부리고, 그냥 내 거 해라. 바둥거려서 뭐 할래. 이제 넌 그 바도 못가고 학교랑 우리집 아니면 갈데도 없으면서....” “......야!!.................” “...나도 너 잘 알아. 나도 널 믿어. ..........그냥 위태롭더라도 내 거 돼라.“ “......................” “...어때?.. 그래도 둘이면,.. 세상을....버틸만 하잖아?“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변함없이 그는 ‘집으로 가자...’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가윤은 그만 다시 눈두덩이가 뜨거워진다. 돌아갈 곳이 생겼다. 애초부터 떠날 수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니가 말하는 거 하나도 들어줄 생각이 없다..라고 녀석이 말했다. 그리고 너는 나를 잡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가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너졌다. 언제나 녀석을 잡고 매달리는 쪽이 자신이라고만 여겼는데, 녀석은 그 말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쪽에서 잡았으니, 너는 애써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돌아갈 곳을 찾았다. 바로 그 탄탄하고 따뜻한 큰 손. ****************************** 물론, 다음 날 대문만한 종이가 교문 앞에 붙여졌다. 『상기 아래 학생들은, 학교 교칙을 위반하고, 학생의 본분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한 바, 본교의 명예와 전통에 심각한 훼손을 가했다. 따라서, 본교는 징계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학교의 실추된 이름을 회복하고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정화 기회를 주자는 교육의 취지에 알맞게 아래와 같이 30일 정학과 근신에 처한다. 근신에 처한 기간 동안 본 학생들은 교칙에 따라 등하교 하고, 징계위원회의 결론에 따라 학생생활지도부의 지도를 받으며 .... ..... ......명단은 다음과 같다. 2학년 * 반 계가윤, 남지일...................................... 2학년 * 반 강지협, 이범기, 유상욱..........................................』 결론이 났다. 열 다섯명이 넘는 학생들을, 그것도 증거도 없이 퇴학시킬 수 없는 까닭에..그들은 모두 유기정학에 처해졌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그날의 화려한 무용담을 뻥치기에 바빴다. ...그렇다. 그들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친구를 구출하기 위해 호스트에서 전쟁을 벌이다가 자랑스럽게 유기정학을 당한 것이다....라고.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들이 무모할 만큼 치기어리고 열정 어려서 비록 퇴학을 당하더라도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진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비록 그들 모두가 그 일을 잊어도 적어도 한 사람만은 잊지 못할 거라는 점도 변함 없었다. <15-에필로그> 열심히 잡초를 뽑으며 상욱이 실실 웃었다. “야, 이 범기! 너 어제도 새벽기도 나갔냐? 왜 그렇게 병든 닭처럼 빌빌 거려?“ 유기정학들은 수업에 들어갈 수 없다. 대신 하루 종일 반성문 쓰고, 온갖 청소에 가끔은 학교 운동장 돌을 고르고, 잔디의 잡초를 뽑는다. 믿기지 않겠지만, 호스트 바에 가서 적들을 소탕한 이 학교의 영웅들은 야구르트 배달 모자를 쓰고 열심히 잡초 제거의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뭐니 뭐니 해도 따가운 햇볕을 가리고 자외선을 차단하는 데는 이 모자가 최고라고 유상욱이 적극 권했던 것이다. “말 시키지마, 삼각김밥. 내가 얼마나 많이 기도해야 이 과거가 회개되겠냐.“ 투덜거리며 녀석은 잡초 뽑기에 열을 올렸다. 언제부터인가 이범기가 자신을 똑바로 쏘아보지 않는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유상욱은 잡초를 뽑는 일에만 열중하기로 결심했다. 사나이는 의리! 친구는 의리! 잡초 뽑을 때도 의리는 중요하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어떤 녀석들은 짓궂게 인사하며 지나쳤다. 거들먹거리며 ‘여어~’라고 손을 치켜드는 상욱과는 달리 범기는 더욱 땅을 파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인사하지마, 인사하지마. 이 상황에서 제발!!........... “...아.. ....이 씨밸놈의 잡초들은 언제까지 뽑아야 되는 거야..“ 다른 누군가도 투덜거리며 웃는다. 남지일이 바닥에 침을 퉤-뱉으며 그 말을 씹었다. “자, 니들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회초리를 흔들며, 가윤의 담임이 등 뒤에서 소리쳤다. 그도 시말서 썼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이 일에 연관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억울해 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이 범기를 빼고...덕분에 지협은 자신의 플레이 스테이션 2를 양보해야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한 댓가가 아닌가! “자, 가자.” 녀석들은 허리를 일으키며 체육복 무릎에 묻은 흙을 턴다. 가윤도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뭐라고 떠들썩하게 웃으며 들어서는 녀석들 틈에서 지협이 무심결에 자신에게 손을 잡았다. “자, 가자..” “.............” “..집에 가야지.” 언제나처럼 든든하게 잡고 성큼 앞으로 발을 내민다. 밝은 저녁의 햇살이 낯살 뜨겁게 운동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동장을 뛰쳐나오는 아이들이 석양 속에 자전거를 탄다. 아주 많은 아이들의 무리가 색색깔의 저녁 노을 안으로 자전거를 몬다. 넥타이 끝이 펄럭이며 사라지는 그 모습은 단연 이 학교의 장관이었다. 졸업하기 전까지 내내 가장 멋진 풍경으로 기억될 모습이다. 그들은 언제나 노을을 향해 자전거를 몬다. 그러나 그 저녁을 두려워할 필요가 별로 없었다. 아무리 앞이 캄캄해서 자전거가 진흙에 빠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언제나 친구가 옆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갸우뚱- 몸을 가눌 수 없어 진흙탕에 자전거가 쓰러진다 해도, 여럿이 함께라면 훨씬 낫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 “씻어..” 머리를 털고 나오며, 지협이 가윤에게 수건을 던졌다. 자신의 차례가 끝났으니 씻으라는 말이다. “으응.” 더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의를 벗어던진 채로 가윤은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이 독서실에서, 그리고 녀석이 체육관에서 돌아온 것은 밤 늦은 시간이었다. “야, 씻어!” 여전히 게임에 열중하자, 지협이 소리치듯 수건을 가윤의 머리 위에 올린다. “안 치워?” 다시금 쏟아지는 뾰족한 목소리. 그러나 지협은 실실거리며 그 수건으로 가윤의 머리 위에 터번을 말았다. 인도갈까, 인도? “강지협....” “응?...” “좋은 말로 할 때, 하지 마.” 어깨에 묻은 땀방울이 예뻐서 등을 혀로 살짝 핥자, 금방 녀석이 날카롭게 나무란다. 타이판 갈까, 타이판? 야자수 그늘 아래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룰루 랄라~범기랑 상욱이한테 엽서도 띄우고... “그럼 씻어.” “흐응..웃기고 있네. 언제부터 니가 잘 씻었다고 잘난 척이냐, 강씨?“ 씻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비웃는다. 그 웃음이 너무 얄밉고, 또 한편으로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협은 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도 안 되고, 그제도 안 되고.. 아마 오늘도 안 될 거다. ......앞으로 쭉 안 될지도 모른다. 어제도 침대에서 차였고, 그제는 방문앞에서 일격을 당했으며, 그그제는 신문지 뭉탱이로 맞았다. 너무하잖아?..라고 말해도 가윤은 절대 그 오만하고 달콤한 미소로 약만 올릴 뿐이다. “자꾸 그러면 친구로 다시 돌아간다?” 강지협이 턱을 치켜세우며 거만하게 위협했지만, 예쁜 눈은 샐쭉하게 가늘어지며 ‘그러시든지?..’라고 대답했다. “내가 다시 나영이랑 사귄데도 좋아?” “..오홀~.. 그래, 그럼 그러시든지.. 나는 다시 규철이 형이랑 원.조.교.제. 하며 되니깐..“ “씨바.. 너 그 형 한번만 더 만나봐!!!! ...아주 그 형 보는 앞에서 니가 뻑가는 표정 짓게 만들어줄테니!!........“ “..웃기고 있네. 실력도 없는 게 말빨만 늘어가지고...“ 부글 부글... 계가윤은 나쁘다. 어디 한번 져 주면 안되나.... 내가 아무리 테니스 치기 때문에 정력을 소모하면 안된다고 해도 그렇지........... .................. .......나는 사내도 아니냐.. 어떻게 그렇게 나불 나불..사람을 약 올리고 휙휙- 사람 손에 걸리지 않게 도망이나 다니고!!......... .. “나영이 한테 전화 했어?” 지협이 다시 눈을 반짝이며 공격하자. 그 순간에야 비로소 가윤이 움찔- 어깨를 움츠린다. 귀 뒤 쪽을 빨 듯이 혀로 훔쳤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어디로 느끼는지 호시탐탐 연구 중이다. 녀석이 갈 때 짓는 그 표정이 너무 좋아서, 가끔 머리 속이 심각하게 균열하는 자신이다. 심각하다. 좀 많이 그렇다. 그러나 재수-!.. 역시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만큼, 드디어 반응이 살짝 있다. 못말린다는 듯, 조그맣게 뜨거운 한숨을 토하며 녀석이 고개를 치우려 필사적이다. 왜 이렇게 도망만 가냐..너는... ..그러니깐 더 사람 환장하게 만들잖아, 지금..!! “........우응... ...하지마!!............“ “..나영이한테 전화 했냐니깐?... 내일 피자 먹자며, 다같이~” 다시 한번 집요하게 물으며 녀석의 귓속으로 혀를 말아 넣었다. 훅-하고 빨아들이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늘게 떨며 녀석이 저 쪽으로 확 물러앉는다. 이런 젠장. ........조금만 맛보게 해주면 어디 덧나나... ..그 동안 나 좋아해줬다면서.. ..내가 모르는 동안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갈증나 했는지 나는 궁금하고 억울할 지경인데.. ..살짝만 맛보면 누가 쓰러진다냐...이 지독한!!... “니가 전화 해, 이 발정기 짐승아.” 가윤이 머리 위의 수건을 내리며 힐난하게 비꼬듯 깔깔거린다. 그리고는 잘 빠진 몸을 일으키며 혀를 낼름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그 날 내가 나온 건 너 때문이 아니라, 나영이 때문이니깐.” 인도건 타이티건 타이판이건 다 물 건너갔다. 언제나 그렇듯, 싸움의 승자는 늘 계가윤이다. 처량할 정도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과는 상관없이 욕실 쪽으로 걸어간다. 아아..나영이. 그렇다. 그 날..자신과 전설의 압구정동 교복파 무리들이 바 앞에 간 날, 그 날 밤에 나영이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강지협이 좋아. 그리고 너도 좋아. ...하지만 둘 다 친구로 남아있지 못할 정도는 아냐. 그리고 난.. 애인이 아니라 친구가 필요해. 다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결론이 꼭 필요해? 다음에 내면 안돼? 그냥 셋이 다 친구하면 안돼??‘ 쿵쿵- 발소리를 크게 내며 지협은 가윤이 들어간 욕실문을 마구 두드렸다. 그리고 여전히 불만에 가득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그럴 거면, 나영이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말하지, 왜 나한테 왔냐?” 하긴.. 저 얄미운 녀석이 그런다고 덥썩- 나에게 안길 것도 아니었겠지.. 요새는 깜직하게 욕실문도 잠그는데 뭐... 씨바..계가윤이 계가윤이지....그 .계가윤이 어딜 가나. 그러자 물소리와 섞인 채 왠지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대답했다. “너도 나영이 이야기 하면 좋을 거 없을텐데? 그 대낮에 나영이한테 키스한 게 누군데 그래?” 누가 뭐래도 우린 그 녀석에게 빚진 게 있지..라고 중얼거리며 지협은 털썩 욕실 문 앞에 주저앉았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보여주라...씨바..나도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래? ...너 너무 나쁜 거다, 계가윤. “야, 유쾌한 바보!” 한참 물소리 흐르더니 갑자기 빼꼼히 욕실문이 열린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근 두근 하는 지협을 향해 녀석이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아아..예뻤는데.. 그 때 학교로 돌아와서 망설이며 내 소매 끝을 잡았을 때, 정말 예뻤는데.....내가 다시 죽었다 깨어나도 그 때처럼 환장하게 매달리는 일은 없겠지. ..아깝다...씨바.. 침대위에서라면 그렇게 매달리게 만들 자신 있는데.. 사실, 너도 그 때 매달렸잖아. 이제와서 또 아닌 척 하기는.. ..진짜 얄밉다.. “뭘 그렇게 쳐다 봐, 이 정학생아!” 그리고.....진짜 아깝다. 그 때 조금 더 시간을 벌어볼걸.. 녀석은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과 얼굴로 문틈으로 살짝 목만 내민체 샐샐 웃었다. 그대로 손을 뻗고 싶지만, 사나이 체면에 꾹 참을 뿐이다. 그러나 녀석은 그 환상적인 미소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밥먹자!...” “.................................” “야, 밥 앉혀.” 기가 막히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지협이 팔짱을 낀다. 이 나쁜 녀석... .................이제는 아예 부려먹기까지!!............ 그러자 목 너머로 작게 큭큭거리며, 가윤이 갑자기 자신의 이마에 키스했다. 츕-하는 작은 소리에 지협은 잠시 얼어버린다. 정신을 조금 차렸을 때, 이미 욕실문은 쾅-하고 닫혀 있었다. “야!!..이거 너무하잖아!!..............” 그럼 우리 일본갈까, 일본? 노천하러...?.. ...돈이 어딨냐구?.. ....한번만 더 나한테 매달려 봐. 그럼 내가 죽어라 벌어줄게. 암, 그렇고 말고. “밥 해주면 생각해볼게.” .....라고 대답하는 저 즐거운 목소리에, 지협은 어깨를 조금 늘어뜨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누가 뭐래도... ..아무리 자신을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날이 갈수록 뻑 갈 정도로 좋아진다. 자꾸 호흡이 격렬해지는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가윤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알고 있다. 도망갈 여지를 주기 위해서 이다. 후회가 되면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도망갈 수 있도록...다른 기억을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아직도 십팔세는 늪이 빠져 있다. 하지만 두고보라지...라고 쌀을 씻으며 지협은 툴툴거렸다. 절대 안 될거다...라고 또 혼잣말하며 두부를 마구 썰어댄다. 지글 지글..두부가 후라이팬에서 섹시하게 선탠을 한다. “밥 먹자~!!!...............” 어느새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맑은 녀석이 달려왔다. 목욕을 마친 녀석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 계가윤의 냄새다. 왜 가윤이에겐 좋은 냄새가 날까. 날마다 세탁기에 넣어 통째로 피죤 부은 그런 냄새... “...밥 잘 먹어.” 가윤이 젓가락을 건네주자, 지협은 뜬금없이 말했다. 식탁 맞은 편에 팔짱을 낀 채 앉은 자신의 모습이 조금 전과 달랐기 때문인지 녀석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비웃는다. “잘 씹어 먹으라구.” 아냐, 밥 잘 먹어. 딱 그만큼만 서로 행복해지자. 매일같이 먹는 밥인데 네 생각 나지 않을리 없잖아.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나는 니 친구가 될 거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니가 원할 땐 친구, 니가 원할 땐 그 답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 내가 말했지? ...친구에게 찡-하게 마음이 빠지는 거.. 그것도 오래된 친구에게, 동성의 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수만가지 감정을 느끼는 거.. 그거.. “왜 웃어, 계가윤?” “..두부가 맛있어서, 행복하거든. 두부도 행복하대.” ..그거, 겪어보니깐 쑥스럽지만 그렇게까지 못견딜 정도는 아냐. 사실은 아주 괜찮아. 행복해. 딱 두부가 익은 만큼만, 딱 그만큼만......지금은 그 정도라도 좋아. 그러니까...밥 잘 씹어 먹어. 이 새꺄... 시간이 한참 흘러, 너와 내 머리가 희끗해지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이런 저런 일들이 잊혀지는 순간이 되더라도.. 그때도 우리는 가장 좋은 친구, 가장 좋은 남자로 남자. ..그거 괜찮지 않아? 어떤 답이냐가 결국 중요한 건 아니잖아. 사랑이니 뭐니 이런 게 너무 무겁고 어렵다면,.. 그냥 두 손만 잡고 견뎌보자. ..가끔은 이것보다 훨씬 좋아질지도 몰라. 난 너에게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너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어. 너에겐 그 말이 관계의 끝인지 몰라도.. 나에겐 안 그래. 중요한 건 그거지. 넌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어. 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인 내가, 그만큼의 자리를 비워났으니 말야. ..잘 들어. 넌 이제 내 친구 아냐.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넌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어. 언제든지 니가 원할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 사람들이 가끔 잊는데, 그곳에 학교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압구정동의 어느 곳에 멋진 호스트 바가 하나 있었다. 전혀 관계 없는 두 곳일 것 같지만 묘한 공통점이 있다. 언제나 최고의 쾌락과 유희가 넘치는 그 바에도 사람이 있고, 친구가 있었다. 더군다나 할 말 많고, 늘 자극을 찾는 새로운 나이의 그들에게도 물론 친구가 있다. 그 두 장소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에게도 우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 늘 같이 걷는 그 파트너 ..... 누군가가 말했다. 신은 고통과 동시에 친구를 준다고. 그것은 어쩌면 아주 공평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격정에 시달리는 연인도 아니고, 핏줄을 나눈 가족도 아닌데 내 등 뒤에 굳건히 버티어준 그들. 가끔은 생각과 기호도 틀리고, 마음을 정말 상하게도 만들지만 또 사람을 감동시키곤 하는 그들만의 이상한 재주. 언제나 걸쭉한 욕설을 입에 담고 있지만, 가끔 살 떨릴 만큼 영화 속 주인공처럼 멋진 선택을 해 주는 그들.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 혹은 그런 친구를 갖게 된다는 것은 그래서 공평하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너는 내 친구다’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인생이 달라질 때가 있다. 그것은 친구란 가끔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우 (非迂 - *한자로 아니다 ‘비’에 먼 길 혹은 마음이 삐뚤어지다 ‘우’. )- 마음이 가까운 벗이다. 바로 그 오랜 친구와 함께 사랑에 빠지는 것. 우정과 사랑이 뒤범벅된 치열한 그 시절을 즐기는 것. 가끔, 그것도 누군가에겐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나쁘지 않다. 매우 좋다. 그래서 우리들은 곧잘 그런 선택을 하곤 한다. 최고의 가족, 최고의 협력자, 최고의 이해자.. 가장 가까운 거리의 사랑. 바로, 비우(非迂). 어떤 초여름, 그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이 하나있다. 그들은 서로 갉고 싸우고 놀리지만, 가끔 제대로 서로를 응시하고 말없이 서로 미소 지으며 같은 문장을 떠올린 채 대책없이 따뜻해진다. 그 한 줄은 바로 이렇다. ‘친구’란 내 인생 최고의 칭찬이다. -클럽2-비우 終- 클럽-X (부제 : Neverending X) - written by. 조반유리 나는 살다가 단 한번 인생에 선을 그었다. 내가 그은 선 위에, 그가 붉은 색으로 자신의 선을 그었다. 그와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고, 단 한번 만났다. 나는 그 불멸의 시간 속에 그를 안았다. 그것도 그가 자신을 파괴하길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아야했다. 그것은 미치광이 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두번 다시 그를 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X. 서로 결코 닿을 수 없는 길에서 단 한번의 정점을 꿈꾼다. <프롤로그> 내 이름 이용협. 내 나이가 5살이 되던 어느 날. 내 아버지 같은 사람 ‘유혼우’가 나를 불렀다. 새로 이사한 집에 내 또래의 다른 녀석이 있었다. 혼우는 나를 불러 그 녀석을 인사 시켰다. ‘앞으로 잘 모셔라. 도련님이다.’ 나는 그냥 앞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나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너무나 그리웠다. 엄마랑 헤어진지 일년 정도 되었지만, 간신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도련님인지 뭔지는 관심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눈물이 글썽거리며 아버지 같은 사람 ‘혼우’를 쳐다보았다. ‘왜 울었니?’ 혼우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 본다. 그도 좋았고 또 혼우의 아줌마, 그의 부인도 좋았다. 그러나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엄마가..보고..싶..’ 내가 훌쩍이며 겨우 말을 꺼내자, 갑자기 내 앞에서 무표정하게 있던 그 문제의 ‘도련님’이 주먹을 휙 뻗었다. 순간적으로 눈에 별이 일만큼 강렬한 펀치였다. 얼떨떨해진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짜증으로 마주 주먹을 쥐었다. 그 때 그 어린 녀석이 나에게 얄밉게 말을 걸었다. ‘내 이름은 은류다. ...그런 일로 울지마. 사내 녀석이 쪽팔리게.‘ ‘................-!!!’ 우리는 그 이후로 십오년을 같이 살아야 했다. <1>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하는 몇 가지 날이 있다. 은류를 만나던 날도 그랬다. 또 한가지 날이 있다. 나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날은 내가 스무살을 몇 년 넘기고 시작되었다. 그 때 나는 이사가 말한 고급 호텔에 앉아 있었다. 로비로부터 해서 호텔 방 입구까지 조직원들이 드문 드문 앉아 경비를 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특별한 날이었다. 나는 호텔에 들어선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혼우’형님의 살해 소식을 들었다. 밤 11시를 약간 넘긴 시간이었는데, 여름 한낮이 지난 후로 밖에는 계속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혼우 형님의 죽음은 나를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나는 지금까지 이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에 그다지 실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둘러 형님이 안치된 병원으로 향했고, 하얀 천을 걷어 내며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눈시울에 열이 났다. 혼우 형님이 죽었다. 혼우 형님이 죽었다. ..그가 죽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직의 다른 녀석들이 내 옆에서 사색이 된 채 머물고 있었다. 혼우 형님은 조직 내에서 서열 2위였다. 그리고 우리 은도(銀刀)파 이른바 ‘실버 나이프’는 강남 일대의 사수를 위해서 힘을 쏟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반대파 수류(守旒)파에게 연일 공격을 받고 있었다. “용협이 형님. 지금 말씀만 하시면 큰 형님께서 다른 녀석들을 풀 계획이십니다.“ ".................." "형님, ..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유천형님 쪽이 더 먼저 움직일 겁니다.“ 혼우 형님의 시신을 확인한 후에 차에 올라타는 순간, 보좌를 하던 귀우 녀석이 말했다. 귀우는 이제 스물 여덟. 나보다 여섯이나 많은 나이다. 내가 한날의 스물 둘에 형님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바로 죽은 혼우 형님의 배려였다. 나는 사실 실버파에서 별로 하는 일 없는 한량에 지나지 않았다.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의 보좌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는 정보팀장이라는 역할을 분배 받았을 뿐이다. 그런 괜찮은 자리 역시 내 힘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키퍼파들에 대해 제대로 잘 알고 있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내가 그들의 정보를 잘 다루게 된 이유. 그것은 내가 키퍼파에서 어릴 때부터 정보원으로 키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우 형님이 키퍼 파의 아들과 나를 동시에 어릴 때부터 돌봤던 것이다. 어린 나와 혼우 형님을 동시에 상대파에 20년간 심어 놓은 내 아버지. 즉 내가 일하고 있는 실버파의 대부 ‘여호준’ 의 계략이었다. 그의 계략은 성공했다. 적어도 절반은. 혼우 형님은 어렸던 나 때문에 발이 묶였고, 그는 20년 동안 조직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의 아들과 나는 서로 맞바뀐 것이었다. 한마디로 혼우는 인질로 나를 키운 것이었고, 나는 또한 인질로 역할로 나를 노리는 반대파에서 거꾸로 키워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스무살이 되면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오늘 혼우 형님이 죽었다. .........내 인생을 꼭두각시처럼 만든 몇 명의 인간. 그 중에 가장 나의 증오와 애정을 한번에 받은 한 많은 인간이 칼에 난자당해 쓰려졌다. 투두두둑.. 빗방울이 여과없이 차창 밖을 떨어진다. 나는 귀우의 제안에도 말없이 고개 돌리며 침묵을 지켰다. 그 때 나의 머리 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혼우 형님이 죽었다... ..그리고, 과연 키퍼에 남아 있는 나의 형제이자 유일한 연인, 그리고 한 때 신부를 꿈꾸었던 은류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가 궁금했을 뿐이다. 강은류. ..그는......내 삶의 X 였다. <2> 혼우 형님의 정확한 본명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는 태어나서 의식이 있는 순간부터 혼우 형님과 형수님의 손에서 자랐다. 그것도 그 때 막 조직을 넓히기 시작했던 키퍼파의 아들 은류와 함께 자랐다. 우리는 동갑이었고, 서로 기저귀를 차고 다니던 순간부터 얼굴을 익혀왔다. 나는 내가 키퍼에서 자랐지만, 실은 실버의 정보원으로 키워지고 있다는 걸 18살에 알았다. 그 날, 혼우 형님은 술이 취해 들어왔다. 그리고 자고 있는 은류를 한번 힐끗 바라 본 채 아직 깨어 있는 내게 술 한잔을 더 하자고 권했다. 당시 나는 아무런 의심없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혼우 형님은 넓은 집에 잘 꾸며진 바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따른 양주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며, 혼우 형님은 그날 따라 유독 말이 적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우 형님은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었다. ‘용협아.’ 목이 따끔거릴만큼 양주를 한모금 축일 무렵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내가 키퍼파 사람들에 의해 키워지는 조직 한량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부를 못하는 은류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이따금 부모 없는 나를 이 곳 사람들이 키우는 이유를 잘 알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도 은류와 내가 동년배기여서 같이 키워지는 것이라고 의례히 혼자 단정 지었다. 나는 학교에 다니는 시간까지 은류의 보디가드, 그러니깐 조직 내에서 유일하게 동년배의 친구이자 보좌관의 역할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어렸던 우리들의 그 날들은 내내 치열했고, 즐거웠고 평온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에 모든 것이 박살났다. 열 여덟의 태양은 내게 잔혹했다. 은류는 그 잔혹한 비밀을 스무살 무렵에야 알고 있었으며, 결국 남은 이년 동안 고통의 짐은 고스라니 내 몫이었다. 물론, 은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아버지 같은 혼우 형님과 형제 같은 내 배신이 더 큰 고통이었지만 말이다. 그 여름의 밤. 혼우 형님은 양주 잔 속의 얼음을 굴리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용협아. 똑바로 잘 들어라. 너는 여기 사람이 아니다.‘ ‘.............??.......’ ‘너를 처음 거두신 분도, 또 너를 여기다가 풀어 놓으시고 양육비를 대주시고.. 또 네게 처음으로 용협이라는 이름을 주신 분도... ...키퍼의 큰 형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물론, 나에게 아버지 같은 분은 한 집에 같이 살고, 은류와 나를 언제나 엄격하면서도 자유롭게 키워준 혼우 형님이었다. 그렇지만 키퍼의 대 보스, 내가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 시절에 한번씩 보았던 ‘강은석’형님은 내게 정신적인 아버지였다. 더군다나 생판 남이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온 은류는 은석 형님의 호적에 올라가 있었다. 몇 번 만난 적도 없고, 또한 만날 때도 언제나 내게 싸늘한 눈길을 보낸 은석 형님.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오래된 습관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은류는..-!!’ 은류는 키퍼파 대보스 은석의 아들로 되어 있었다. 물론, 중년의 은석이 입양한 아들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엄연히 아들이었다. 대를 이어야 하는 것이다. 충격으로 이를 악물고 겨우 의문을 던지는 내게, 혼우 형님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내게 답해주었다. ‘은류는 물론 키퍼 사람이다. 용협아.. 하지만 너와 나는 아냐. 우리는 실버 사람들이다. 너의 아버지는 실버파의 대부 여호준 형님이다.‘ ‘...........-!!!!!!!!!!!!!’ 그 때 , 아마 내 마음은 수천가지 비명들로 가득 찼던 것 같다. 아주 짧게 눈을 깜박였고, 한동안 숨을 쉬지 않았다. 혼우 형님의 말자체가 이미 공포였다. 그러나 혼우 형님은 이런 내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건조하게 웃었다. 화려한 과거 경력을 지닌 사내가 꿈이 조각났을 때 지을 수 있는 씁쓸한 미소였다. ‘너는 스무살이 되면 나와 같이 실버로 간다. 너는 실버. 그리고 은류는 키퍼다.‘ 유혼우. 그 역시, 자신이 하는 말의 무게가 모두에게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다. 그는..우리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들의 음모, 그들의 피투성이 전쟁에서 단순한 희생양- 그 꼭두각시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조작할 수도, 그리고 어떤 사람의 마음도 파괴할 수 있었다. ‘혼우 형-!...’ ‘소리지르지마라, 용협아. ..은류 깬다.‘ 혼우 형님은 그 때 담배를 물었다. 물기에 젖어 눅눅한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잠시 애를 쓴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너와 나는 원래 실버였다. ...너는 여호준 형님의 아들이고.. 반대로 니가 알고 있는 여호준 형님의 지금 아들 유천은 내 아들이다.‘ ‘........그런............’ 한마디로 그것이었다. 강남과 서울근교, 그리고 멀게는 경기도 일대까지 꽉 잡고 있던 여호준. 그는 젊은 나이의 호랑이였고,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크게 염려했다. 따라서 실버파 내에서도 그의 숙적이 많았다. 숙적들은 대부분 뱀과 같은 그의 지혜에 떨어져 나갔지만, 그들 중 일부는 튀어나가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비극적이게도.. 내가 태어나던 해에 만들어진 수류파, 즉 키퍼(keeper)들이 가장 강력한 적수였다. 이름뿐인 나의 아버지, 여호준은 키퍼들을 가장 견제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몇 십년 뒤에는 그의 예상처럼 늙어버린 자신을 치고 나올 세력이 바로 키퍼들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혼우 형님의 아들과 내 아들이 비슷한 나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렇게 해서 바로 이 비극같은 광대 연극이 시작된 것이다. 여호준은 자신의 아들인 나와, 혼우 형님의 아들인 유천을 서로 바꿨다. 그것은 인질과도 같았다. 그리고 혼우 형님에게 나를 데리고 마치 혼우 자신이 실버파를 빠져나온 것처럼 모든 것을 조작했다. 어차피 키퍼들의 우두머리인 ‘강은석’ 역시 실버파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은석은 별 의심없이 혼우를 받아들였고, 오히려 매우 흔쾌히 자신의 양 아들 은류와 나를 같이 키우는 일을 맡겼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다른 건 다 상관없었다. 내가 스무살이 되어 혼우 형님의 말처럼 키퍼의 적수, 실버파로 돌아가는 ‘배신자’가 되더라도, 그 낙인이 남더라도 나는 상관없었다. 그러나 상관있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가족처럼 자라온 ‘은류’.. ..우리는 십팔세가 될 때까지 서로밖에는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 열 아홉의 어떤 날에, 나는 연습장을 펼쳐 놓고 여러번 X라고 적었다. 그것은 수학에서 말하는 미지수이기도 했고, 또 때론 ‘답이 아니다’라는 뜻의 ‘엑스’이기도 했다. 은류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내 머리는 터질 것 같았다. 은류는.. ...그때까지 은류는 철부지였다. 녀석은 바짝 치켜세운 눈꼬리를 가진 전형적인 미청년이었다. 그 해 십팔세의 여름을 넘기면서 녀석은 더욱 사내다워지고 단단해진 골격을 갖추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언제나 신랄한 농담을 즐기며 깔깔거리는 얄미운 성격. 그러나 조직의 아들답지 않게 그늘도 없었고, 오히려 티 없이 맑았다. 그런 점이 어쩌면 당시 동갑의 보호자였던 나에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어이, 가자!’ 은류는 교복마저도 단정하게 입지 않았다. 목섬까지 올라오는 상의는 절대 제대로 단추를 끼우는 법이 없었고, 안에 받쳐 입는 셔츠마저 늘 두 세개를 풀어 놓았다. ‘제대로 입으셔야죠.’ 나는 열 여섯부터 타인이 없는 자리에서는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 그 때는 당연히 조직의 큰 아들인 은류를 존대하는게 옳다고 여긴 것이다. 내가 반대파인 실버의 아들이라는 건 전혀 모를 때였다. 그러나 그렇게 잘 고쳐지지 않던 존댓말의 습관은, 혼우 형님이 내게 그 비밀을 털어놓던 여름 밤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저절로 은류에게 거리를 두었고, 은류는 나에게 의아해 했지만 대놓고 이유를 묻진 않았다. 언제나 냉정한 편인 나였기 때문에, 오히려 녀석은 쉽게 납득하는 눈치였다. ‘너 말야, 이용협. 요새 너무 건방진 것 같아.‘ ‘제가요?’ ‘그래. 나이는 동갑인데 걸핏하면 목에 힘주고 있지 말라구.. 목이 떨어져서 나갈지도 몰라, 댕강 댕강~ ...에.. 그렇게 다니면 보기 흉하잖아? 푸하하하-‘ ...맑은 은류. 서늘하게 생긴 얼굴로 곧잘 농담같은 이야기를 하며 배가 접히도록 웃었다. 그도 나도 합기도 유단자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은류는 그렇게까지 근육이 붙은 체질이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자주 납치라든지 협박같은 것을 당할 때도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 때부터 나는 녀석의 보호자여야 했다. 스물 네시간 경호원들이 붙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조직에서는 나를 믿고 있었다. 사고 잘 치는 난장판 은류보다는 얼음같고 싸늘한 내가 적격이었다. 은류 역시 이 그림자 같은 내 상황에 잘 적응했다. ‘집에 가시면 제발 숙제 좀 하세요.’ 그의 가방이 가볍게 어깨에서 흔들렸다. 은류는 대보스의 걱정을 살만큼 공부를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잡기들에 능했다. 여자 꼬시기, 여자 후리기, 여자 만들기, 여자 버리기..등등. 나는 그런 은류를 충분히 걱정하고 있었다. 바로 충분히. 그래, 어쩌면 그게 문제였다. 너무나 충분히 걱정했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이 위태로웠다.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은류만이 항상 밝게 웃으며 격의없이 장난을 쳤을 뿐. ‘야, 수건!’ 샤워를 하고 나올 때도 그는 항상 나를 찾았다. 벗은 몸을 서로 보이는 것도 거의 막론하고 살아왔다. 다만 내 쪽에서는 은류의 벗은 몸에 간혹 당황했지만 그 쪽에서 나를 볼 일은 없었다. 나는 굉장히 철저한 편이었다. ‘근데, 너처럼 냉정하고 빈틈없는 녀석도 ... 그... 자위.....를 하냐?’ 뜬금없이 둘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장난끼 있게 물어보는 그 습관도 그는 나와는 반대였다. 물론, 한 두해 그를 겪은 것도 아니고 이제는 그런 장난에 당황할 나도 아니었다. 나는 식탁 밑으로 은근히 다가오는 그의 발끝을 무시했다. 그는 대 놓고 나를 유혹하지도 그렇다고 거절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즐겁게 놀리는 입장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당황하는 걸 보며 즐거워했고, 나이 들어서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당연히 하죠.’ 눈길도 주지 않고 밥을 먹자, 그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발을 내린다. 아쉽게도 허벅지 근처까지 갔는데 말이다. ‘건방진 새끼. 점점 더 심해지는 거 같아. 너는..‘ ‘그렇게 만드시잖아요? 제 잘못이 아닙니다.’ ‘내가 뭘?’ ‘걱정시키지 말라구요. 항상 아버님이 하시는 호스트바에 들락거리지도 말고.. 그렇게 안 해도 충분히 그 쪽 녀석들 안달 나기도 하니깐, 제발 찝쩍거리지 마세요. 장난으로 그러셔도.. 상대방은 적당히 진심일 수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그러니깐 은류의 아버지 강은석은 강남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호스트바 Anonami 를 소유하고 있었다. 압구정동에 위치한 이 곳은, 명품의 호텔과 같은 분위기였다. 몇몇 정치가들이 연루되는 바람에 시세는 더욱 확장됐다. 바로 그 Anonami 에 최근에 은류가 자주 들락거린다. 열 아홉. 생기 가득한 사랑스런 얼굴. 180 가까운 키. 그리고 갸름하고 아름다운 얼굴 선과 남자답지만 정돈된 생김새.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은류가 자주 생글거린다는 사실이었다. 그 나이 답게 조금은 어린 모습. 청년도 아니도 아닌 중간 나이또래의 아름다운 밝음이 그의 무기였다. Anonami의 시커먼 남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다. 나는 은류가 웃는 모습을 보며 보이지 않게 한숨쉰다. 나이가 들어서는, 바로 그 시커먼 남자들에게서 그를 지키는 것도 나의 임무 중 하나였다. ‘아아.. 용협이 없으면 나는 무슨 재미로 사냐?‘ 그와 나는 피 한방울 안 섞였지만 형제처럼 자랐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의 이 아슬아슬한 긴장감. 바로 서로를 알게 모르게 저울질하고 심장을 이따금씩 울렁거리게 하는 이 긴장감이 머지않아 끝나리라는 걸. 어떤 때는 가끔 잠든 그를 보며 나는 잠을 잘 들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을까. 우리가 일년 내에 서로 등 돌리게 된다는 걸. 우리는 X. 서로 한번 밖에 인생에서 마주할 기회가 없다. 그리고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야 한다. //////////////////////////// 은류와 내가 스무 살이 되기 직전에 그는 자주 남자들을 만나러 나갔다. 물론, 같은 수의 여자들도 곧잘 만나러 나갔다. 그리고는 내게 조금 뻐기듯 말했다. ‘그렇다고 그 녀석들이랑 다 자는 건 아냐. 그렇지?’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상세히 알고 있는 나에게 말이다. 나는 그가 Anonami에 들릴 때마다 저절로 마음이 철렁했다. 부드러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이어폰을 끼고 교복에 손을 꽂은 이 아름다운 19세는 영락없이 순수해 보였다. ‘이용협.’ 나는 무엇보다 그가 나를 부르는 이 특별한 어감이 좋았다. 내가 교복 셔츠를 소매까지 걷고 그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고 있는 그 순간에도 말이다. 그는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여름이었고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아 더웠던 것이다. 땀이 살짝 배인 단정한 이마선도 아름답다. 나는 그가 나를 부르는 그 특별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말 진지할 날이라곤 별로 없는 은류. 그가 오랜만에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른 것이다. 왜 모든 사람은 다 나를 얻으려고 안달인데, 너는 아니지?’ ‘..안을 이유가 없으니깐요. 우리가 짐승입니까?‘ ‘..내가 사내라서가 아니고?.. ..내가 아는 한 너는 여자친구도 따로 없잖아?‘ ‘질문이 이상하시네요. 수학에나 집중하세요.‘ 그리고 나는 연습장에 매우 크게 X 라고 썼다. 그것이 은류와 나의 관계에 대한 답이다. 그는 나와 형제도 친구도, 그리고 어떤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다만 그 해 열아홉까지 그 정점에 머물도록 축복을 받았을 뿐이다. 아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모르는 쪽이 좋았다. ‘......나..사실은...’ ‘..네. 말씀하세요.’ ‘..나, 사실은 그 녀석들하고 한번도 잔 적이 없어.’ ‘............-!!!..............’ 언제나 건방지고 얄미운..그러나 그 모습 때문에 때론 사랑스러운 은류가 조금 주저하듯 시선을 피했다. 하얀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든다. 그 반응이 신선해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모를 거다. 강은류가 Anonami에 갈 때마다 내가 얼마나 두 손을 꽉 쥐고 그 입구에서 기다렸는지. ‘...넌 이상해. 난 나를 지킬 힘이 충분히 있어. 너도 알다시피..난 유단자야. 그리고 꼬맹이 때처럼 더 이상 납치를 당하거나..협박을 당할 일도 없고..‘ ‘압니다.’ ‘..그런데 왜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지? ..이렇진 않았잖아?..‘ 불쑥- 나는.. ..갑자기 그를 끌어당기고 싶은 생각에 가만히 연필을 쥔다. 꽉 쥔 손마디가 하얗게 될 때까지 쥔다. 나는 너와 가까워지고 싶다. 아니, 정말로 닿고 싶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꼭두각시 춤의 끈을 끊을 수 없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춤을 춰야 하는 분홍신발의 저주랑 비슷했다. 어느 꼬마가 주일에는 절대 신지 말라고 경고를 들은 붉은 슈즈. 그리고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신었기 때문에 결국 평생 저주의 춤을 추었다는 그 붉은 슈즈. ...우리가 이 악연을 벗을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였다. 발목을 자른다. 그리고 인연의 시간에서 차갑게 등 돌린다. 잘린 발목을 담은 슈즈만 빙글 빙글 춤을 추도록-. 그러나 은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속편하게 한숨을 쉬며 쓸쓸하게 웃었다. ‘....내가 사고를 많이 쳐서.. ..언젠가는 네가 나에게 지칠 거라고 생각했어. 이용협.‘ ‘............-!!!!!!!!!!!!!’ 그 때 연필이 뚝- 부러졌다. 선이 단정한 목. 그리고 살짝 벌어진 셔츠 틈으로 제대로 보이는 쇄골. ..그것은 어쩌면 노골적인 유혹이었다. 그는 말했다. 어느 누구와도 사실은 자지 않았다고.. ..그 말은 절대 친한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솔직함을 넘어섰다. 오히려 말간 눈동자는 뭐라고 할 수 없는 끌림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신 안간힘을 다해 미소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평생의 따뜻함을 담아서..나는 한번도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은 그런 웃음을 만들었다. 알고 계십니까. .......처음부터 당신 뿐이었는데. ‘공부하세요.’ ‘..아, 저 건방진 놈.’ ‘제가 건방지면 은류님도 정말 얄미운 겁니다’ 나의 작은 타박같은 말 한마디에 금방 숙이는 정수리가 보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희미하여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내 연습장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X 야.’ ..나는 우리의 관계를 그보다 더 잘 설명하는 말을 알지 못한다. /////////////////////////// 그 해 겨울이었다. 대학 입시 결과가 발표 났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나의 눈물겨운 동급 과외 때문인지 그는 합격하고 말았다.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농땡이를 쳐서 그렇지, 아주 최악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조직의 놈들이 열어주는 파티에 참가했고, 즐겁게 먹고 마시고를 했다. 어느 샌가 185가 넘은 내 키에 거의 가까울 정도로 은류도 자랐다. 다만 어깨너비나 이런 것들이 나보다 조금 적고, 허리도 살짝 나보다 가늘고..그것 외에는 그도 벌써 청년이었다. 다만 솜털이 채 가시지 않는 뽀송 뽀송한 맑음. 그의 사랑스러움은 단연 톱이었다. ‘나 연애할지도 몰라.’ 파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며 은류는 술에 취해 낄낄 거렸다. 기사도 백밀러로 돌아보며 살짝 웃는다. 김기사 아저씨와 우리는 바로 이 이십년의 시간을 같이 했다. 그에게도 우리는 아들뻘의 녀석들이었다. ‘도련님 많이 취하셨네. 오늘도 용협이가 고생하겠군.’ ..나는 그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취한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부비적거리는 모양도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이 비극의 연극은, 바로 스무살이 그 반전의 타이밍이었다. 나는 날마다 혼우 형님이 은류에게 이것을 어찌 알릴까...하는 고민에 휩싸여 있는 걸 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도련님 잘 모셔, 이용협!’ 아저씨는 우리를 불 꺼진 집에 데려다 놓고 떠났다. 아직까지 흥청거리고 있는 어른들에게로. 나는 조금 애를 쓰며 은류를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어차피 잠에서 깨지도 않을 주정뱅이.. ...........그리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혼우 형님의 형수님이 떠 준, 루돌프가 그려진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가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에 붙어 있었다. 그 상태로 잠시 내려다보다가, 나는 잠들었다. 아마 잠들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나를 이 곳에 이끌었던 것은 바로 그였다. 어리고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며 내 뺨을 철썩- 때렸던 강한 녀석이었다. 당신은 말했다. 나에게. ‘그만한 일로 울지마, 사내새끼가.’라고. ...그로부터 더 훌쩍 자란 그는...나와 헤어질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나는 궁금했다. 깜박 잠든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물론 얼마 잠들지 못했지만 말이다. 바로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베는 듯한 기분에 잠시 일어났다. 이번에 눈을 떴을 때는, 놀랍게도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일은 좀체 없었다. 항상, 내가 그를 내려다 볼 뿐, 그가 나를 보는 일은 없었다. 늦잠꾸러기 은류. 허나 열 아홉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그가 팔꿈치를 지탱한 채로 나를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난 너랑 섹스하고 싶어.’ ‘.........-!!!!!!!!!’ ‘.....니가 같은 생각이 아니라는 게 정말 화가 나. ..언제나 목석같이 단단한 녀석이라서.. ..난 이제 내가 경멸스러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목을 끌어당겼다. 목위까지 짧게 친 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은류였다. 반짝 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아름다웠고.. 창 밖의 눈소리는 사각 사각 말없이 쌓여갔다. ..나는 그를 원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찡할 정도였다. 태어나서 유일하게 내게 묶여 있는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대해. 내 목에 손을 감고, 살짝 눈을 내리깐 채 그가 희미한 웃음을 띄었다. 그러나 입가에 조금 떨리는 그 미소. 그것이 묘하게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이 당당하고 강한 사람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거다. 내가 자신을 거절할까봐. 혹은 거부할까봐. ‘내가 무너지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물론 보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더. 과연 관계 중의 그는 그 산뜻한 모습 외에 어떻게 엉망이 되는지..언제나 머리 속이 복잡했다. 교육이 철저했던 까닭에 차갑고 냉정한 표정밖에는 그에게 보여준 게 드물지만..나는 오히려 가끔 겁이 났다. 순수한 미소를 짓는 이 사람을 망쳐 놓을 정도로 격한 감정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던 것이다. 그 온도가 강했고, 그 수위가 높았기 때문에 나는 두려웠다. 내가 그를 안는다면 정말 파괴하고 찢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난.. ..니가 한번이라도 이성을 잃는 걸 보고 싶거든. ..사실은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 이성을 잃은 이용협이라는 녀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저도 이성을 잃습니다. 인간이니깐요.‘ 그러자 은류가 쓰게 웃었다. 가늘게 떨리는 턱. 그리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조금씩 세어나오는 뜨거운 한숨. 그는 내 허리 위에 앉아 살짝 몸을 움직였다. 마치 낸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의 자위같은 체위에 나는 오싹할 정도였다. 사실 애가 탄 것은 이 쪽이었다.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딱 잘라 대답했지만,.. 심장은 두근- 파열할 것처럼 격렬해졌다. 나는 그의 목선에 머리를 묻었다.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하얀 나신을 벗기고 제대로 관통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만큼 확신과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내가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을만큼 나약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쩌면.. 그 강렬한 유혹, 하반신이 마비되고 뇌가 터질것 같은 그 짐승의 발정에 나는 굴복하고 싶었다. 정말 그랬다. ..........그를 내 손에 넣고 싶어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사내였다. 그리고 그가 막상 얼굴을 묻고..키스했을 때, 나머지 반의 혼도 나를 빠져나갔다. 다만 광기만 지배했다. 우리는 그 이후로 항상 그랬다. 둘이 만나면 항상 서로의 광기를 자극해댄 것이다. ..부드러운 입술. 지난 이십년 동안 지독히 나를 희롱해온 입술이 거침없이 나에게 다가온다. ‘...........으응.....................’ 부드러운 비음. 그의 턱을 잡고 도망가는 혀를 얽혀 세우며, 나를 언제나 잔뜩 도발하는 이 얄미운 버릇을 길들이고.. 두번 다시 다른 녀석이 맛볼 수 없도록 뾰족한 관능을 세워 벌한다. 내 상체를 더듬는 손을 거칠게 잡아 꺾자, 작은 비명이 그의 입에서 세어나왔다. 나는 스스로도 당혹할만큼 검은 욕망을 담아 단호하게 선언했다. ‘장난치지 마십시오.’ ‘................-!!!!!!!!!!!!!!’ 그리고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오히려 타액이 흘러넘칠 정도로 마구 퍼부어댔다. 항상 나에게 견딜 수 없을 만큼 고문같은 입술이었다. 다른 녀석들이 미쳤다고 해도 나에게는 상관없었다. 절제가 너무 길었고, 타락은 그만큼 빠르게 번져갔다. 부드러운 목선을 잘근 잘근 씹었다. 귓 속으로 혀를 넣어 빨아들이자, 훅-하고 단단한 그의 상체가 경련한다. 아름다운 나신을 스웨터에서 해방시켰다. 분홍빛의 유두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나머지 한 쪽은 입안에 넣고 굴렸다. ‘...........흐읏..........-!...............’ 짧은 탄성이 쏟아졌다. 저항인지 재촉인지 알 수 없게 희미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그 소리를 삼키려고 그는 입술을 꽉 깨문다. 언제나 당당하던 모습 외에 그가 보여주는 그 당혹감이 신선했다. 침으로 반들 반들해진 그의 상체에서 혀를 굴려 그대로 단단한 복부, 은밀한 선이 이어진 허벅지 사이로 진행한다. ‘......안..돼..................’ 하반신을 벗겨내고, 음모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의 아래를 꽉 쥐었다. 목이 꺾이며 가늘게 비명을 지른다. 벗어나기 위해서 침대 시트를 꽉 쥐는 손목이 보였다. ‘.....이런...씨바-!!!!!..............’ 내가 마침내 불쑥 달아오른 자신의 페니스를 입안에 넣자, 미친 듯한 욕설이 튀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잡아 먹힐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 난처한 기색이 여전히 마음을 욱씬거리게 만든다. 강하고 강하고..순수하고 아름다운 .. ..조각같이 탄탄한 그 미끈한 육신처럼 걸맞는 그의 영혼. ‘...........안 놔?..안 놔?............아아..이 개새꺄.............’ 머리를 흔들었다. 뇌수를 타고 짜릿하게 쾌감이 흐를 것이다. 나는 주저없이 그의 다리를 들어올려 내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는 드러난 애널을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푼다. 자지러지는 듯한 욕설과 비명이 같이 흘러나왔다. 정신없이 헐떡거리는 모습이 가여울 정도로 짜릿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며 젖은 얼굴을 흔든다. 그의 흐느낌이 내 하반신을 부채질 했다. ‘장난치신 벌입니다. 끝까지 가세요.’ 나는 그의 애널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조심스레 내벽의 감촉을 즐겼다. 이런 식으로 사내를 안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만 Anonami의 형님들이 늘 알려주곤 했었다. 그리고 해 봤을 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맥박이 터질 것 같은 깊은 진동에 전율했다. ‘..아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자세여서 그의 허벅지 안쪽이 바들 바들 떨렸다. 가는 발목을 잡아 높이 세우고, 나는 닫히려는 다리를 찰싹 때렸다. 깜짝 놀란 듯, 하반신이 눈 앞에서 활짝 열린다. 유린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내부에서 손가락을 움직이자, 가늘게 비명을 지르며 내 목을 꽉 끌어 당겼다. 이런 식으로 매달려오는 그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만큼 마음이 욱씬거리고..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만큼 멍했다. 어쩔 수 없다는 낭패감에 젖어 욕설을 계속 하던 그도 결국 포기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듯 작게 오열할 뿐이다. 다시 그의 입술을 찾고, 내 타액을 받아 마시도록 가득 섞이고 , 내 몸에 가늘게 매달려 오는 전신을 즐겼다. 정신없이 갈구하는 입맞춤의 여운처럼 길고도 강렬했다. ‘흐...웃...........................’ 붉게 상기된 뺨. 젖은 얼굴. 살짝 맺힌 눈물.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게 매달려오는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 내 손바닥에 자신의 사정액을 잔뜩 남기며 그가 어깨를 떨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들어 스스로 핥도록 시켰다. 쾌감에 물든 눈동자가 흐릿하게 고개 저었다. 그러나 내 광기는 이미 그것을 앞서갔다. ‘앞으로 많은 사람과 좀 더 즐기세요.’ ‘..............-!!!!!!!!!!!!’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게 당신의 인생이니깐요.‘ 그는 충격을 받은 듯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묻어 내 손바닥을 핥는다. 도전적인 시선, 아직도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어쩔 수 없는 요염함, 또한 언제나 상대방을 진하게 자극하는 강렬하고 저항적인 시선으로 눈꼬리를 반짝 치켜세우며.. 그는 내 손바닥을 핥는 동안 한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에 넘실거리는 욕망이 소름끼칠 정도로 아찔했다. 하마터면 정말 그를 안을 뻔 했다. 나는 그와 거리를 두겠다는 혼우 형님의 약속. 그리고 나 자신의 약속에서 모두 패할 뻔 했다. 그러나 나는 묵직한 하반신, 아예 아플 정도로 나를 죄여오는 엄청난 욕구와 싸우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뭔가 억울하고 대단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 말이다. 등이 아플 정도로 수만가지 질문을 던지는 눈동자다. ‘내 인생에서 너는 없는 거냐???’ 벗은 그가 셔츠만을 겨우 걸친 채, 침대 위에서 물었다. 아직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후끈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내가 막 방문 손잡이를 잡을 때 일이었다. ‘........언제나 제가 옆에 있을 수는 없죠. 도.련.님.도 강한 사람이니깐요.‘ ‘....너와 난 형제야.’ 그가 벌떡 일어선다. 주루룩- 자신의 분출액이 조금 허벅지 사이로 흘렀다. 미끈한 다리 사이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며 나는 말했다. ‘앞으로 제가 어떤 사람을 안든지..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 ‘저는.......당신과는 안 잡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말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는 그것에 충격 받은 듯,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영리하고, 예민하며 섬세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지존. 그는 아마 수류파를 잘 이끌 것이다. 그의 독특한 카리스마. 그 지치지 않은 독기와 근성만큼 언제나. 쿵- 하고 문을 닫았다. 나는 그 때 열 아홉의 크리스마스를 탈출했다. /////////////////////////////// 스무 살. 나는 인생에서 막 한 점이 시작된다는 직감을 가졌다. 한번도 보지 못한 긴 장도를 들고 혼우 형님이 들어선 날이었다. 아직 초봄이었고, 나는 그 날이 은류와 나의 마지막 시절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어라 말을 할 것인가..하는 것은 이미 결론났다. 혼우 형님도, 그리고 나도 은류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딱 한번 나는 저항했다. 혼우 형님에게 반항 한 것은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은류와 나에게 모두 최고의 아버지였다. 은류와 나는 우리를 낳게 해 준 아버지는 달랐지만, 우리를 키워준 아버지는 같았다. 그런 그가..은류의 잠든 이마를 살짝 어루만지며 쓸쓸하게 말했다. ‘용협아. 가자..’ ‘.......하지만....’ 하지만 떠날 수가 없었다. 은류는 내 베개를 안고 자고 있었다. 어제까지 낄낄거리며 Anonami에 가는 걸 내가 몹시 나무랐기 때문에..그 오후에 내 나무램을 들은 나름의 복수였다. 베개가 없으면 내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반응하리라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은류는요!!!.........’ 나는.. 그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유일한 아버지. 혼우에게 마구 외쳤다. 이를 악물고..우리들이 모두 사랑했던 은류가 깰까봐 목이 쉴 정도로 간신히. ‘...용협아..’ 그러나 혼우 역시 한동안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기어이 잠든 은류에게서 뒤 돌아섰다. ‘...나에게는 아들이 셋 있다.’ ‘..............’ ‘너와..은류와.. ..그리고 태어나서 한번도 아비 역할을 해 주지 못한 유천이 말이다..‘ ‘........-!!!!!!!!!!!!’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우리들은 이 웃기는 조직 싸움에 우리들이 삶을 잃었지만, 혼우는 그 보다 더 한 것을 잃었다. 그는 우리처럼 진짜 자신의 모습이나 삶도 뺏겼고, 또한 아들의 유년시절도 뺐긴 것이다. 더 이상 나는 외칠 수 없었다. 내가 가지 않으면 혼우의 아들 유천이 살해당한다. 더군다나 나는 처음부터 이 키퍼파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잠시만 인사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장도를 손에 쥐고, 혼우는 말없이 내게 건넸다. 알고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 역할은 이 장성한 아들 은류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핏줄뿐인 아버지 여호준의 명령이자, 우리가 이십년 동안 인생을 바꾸면서 여기 남아 있는 이유였다. 그러나 혼우도 나도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여기 남아서 은류를 지켜줄 수도 없고, 은류도 여기를 떠나 나에게 올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혼우는 살해당한다. 그의 아들인 유천도 위험하다. 우리들 각자도 제거당한다. 그것이 바로 비열하고 악랄한 조직들의 생리다. 나는.. ..장도만을 쥐고 한참 은류를 내다보았다. 푹 잠들었는지 기분 좋은 한숨을 쉬며 작게 미소짓는다. 잠버릇이 고약한 편이지만, 내 옆에 붙어 잘 때는 꽉 엉기는 일 외에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다만 자다가 신음을 잘 내뱉고 한숨을 가끔 쉰다. 그만 견딜 수 없었다. 가만히 무릎을 꿇고, 그가 꽉 끌어안은 내 베개를 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 뒷머리는 여전히 상쾌한 스무살 박이 사내답게 짧게 쳤지만, 앞 머리가 그새 눈을 찌를 듯 자란 것이다. 말없이 엉겨 붙은 그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걸리는 그의 체온. 혹은 어쩌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이 생생한 감촉을 음미한다. 내가 떠나도 잘 있을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몫만큼 행복하길. 장도를 가만히 바닥에 놓았다. 실버파의 표장이 세겨진 장도였다. 누가 보아도 실버파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물며 숙적인 키퍼파의 아들 강은류는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우리가 떠난 것을. 그들을 배신한 것을. ...천천히 뒷걸음친다. 발소리가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문을 몇 미터 남겨둔 채 나는 숨을 계속 몰아쉬었다. 아주 서서히..몇 시간에 걸쳐 호흡하는 사람처럼 많이 공들여서.. ...내 이십년의 형제, 그리고 친구,.. .......내가 모든 걸 받쳐서 꼭 얻고 싶은 유일한 그를 바라보았다. 서늘하고 아름다운 그 모습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욱씬거린다. 찡-하는 울림이 내 심장을 꿰뚫었다. 언제나 강철사내라고 은류가 놀렸듯이, 나는 금속으로 만든 울림을 느꼈다. 급기야 주먹을 꽉 쥐고, 눈꺼풀에 뜨거운 기운이 밀려 나오기 전에 등 돌렸다. 밖에서 기다리는 혼우가 초조해지기 전에 나가야했다. 그 때였다. ‘잘 가.’ 나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마치 공포 영화처럼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고 있는 듯, 소름이 돋는다. 나는 차마 뒤 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소리 높여 비웃듯 나를 웃었다. ‘잘 가, 이 용협.’ 휙- 귀전이 찢어질 정도로 거칠게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침대에 엎드려 누운 자세 그래도 눈을 반짝 뜨고 있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놓여진 장도를 들며 몸을 일으켰다. 내 베개를 여전히 꽉 안은 채. 그는 울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다만, 나를 여전히 노려보는 듯한 도전적인 시선 그대로 작게 미소지었다. 손가락 사이에도 걸리지 않는 너무나 희뿌연 미소. 그는 한번도 그렇게 웃은 적이 없었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미소. 그렇다. 이후로도 그는 곧잘 그렇게 웃었다. 인생의 하나를 포기한 그런 종류의 웃음. 허망과 허탈. 아니, 상실의 미소. ‘.......잘가. 실버.’ 그는 내게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장도를 들어 쓰윽 칼집에서 꺼낸다. 그리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자신의 손등에 대고 그었다. ‘..............-!!!!!!!!!!!!!!!!’ 깊게 밴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한걸음에 그에게 달려가자, 그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칼을 바닥에 던진다. 그리고는 내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핏물 흐르는 손등을 침대 보로 둘둘 말았다. ‘가지고 가.’ ‘............................’ ‘...니가 버리는 건 여기 두고,.. 니가 가지고 갈 건 잘 챙겨가.‘ 나는.. 지독히..아팠다. 너무나 아파 흉부가 가득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전처럼 생기 가득하고 밝은 모습이 아니라 지독하게 파괴된 그 모습이 아팠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버리고 장도를 가지고 갈 것이라는 것. 바로 그가 버려지는 것이고, 내가 실버로 갈 것이라는 걸. ‘그 날 깨어 있었어.’ ‘.............-!!!!!!!!’ ‘.........혼우 아저씨가 말할 때..나도 깨어 있었다. ..나는.. ..니가 나에게 말해주길 믿었을 뿐이야.‘ ......나는 고개 돌렸다. 그 철저한 우리의 가면은 어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 새, 감정을 조절하고 말을 아끼며 그리고 냉정하게 등 돌리는 법을 배운 것이다. ‘잘 가라, 친구.’ ‘.........강은류..’ 급기야 나는 열 여섯 이후로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그러나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손등만 감싸 안은 채, 바닥만 내려다본다. 하하..라고 짧게 웃었다. 나를 보지 않는 그 지독함이 너무 아팠다. 아름답고 독기 어린 옆모습이 그린 듯 깨끗했고, 침묵의 통곡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용협. ....나는 팔릴 거야..‘ ‘.........-!!!!!!!!!’ ‘....강은석.. ..그 양아버지라는 탈을 쓴 인간은.. ..날 되물림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나도 그렇고..‘ ‘................안돼..’ ‘..왜, 스스로 인생 즐기며 살라고 니 입으로 그랬잖아? ..난 Anonami가 좋아. 거기 팔리길 원해. 아버지도 내게 Anonami에서 정치거물 들에게 봉사하는 걸 원하시지. 멋진 거래~! 어른들의 잔치. ..............난 이미 팔렸어. 장현철 씨 알지?................. 재벌 정치인....‘ 그리고 천둥이 쳤다. 봄 밤 하늘위로 엄청난 굉음이 진동했다. ‘말도 안되는 일... ........하지 마요....................‘ 제발!!!!......이라고 나는 절규했다. 속으로 수천번, 수만번. 그러나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쓰게 웃었다. 미칠 일이다. 그는 내 시선을 적당히 피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가 서로를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어긋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마지막이라는 의미였다. ‘너는 이제 나를 보호할 이유도, 빌미도, 그런 일도 없어. 이용협. 네 갈 길을 가.‘ 언젠가는 내 손으로 어른들의 이 줄을 끊는다. 그도 주먹을 꽉 쥔 채, 같은 말을 했다. 하얀 시트에는 핏자국이 가득 번졌다. ‘어른들의 무대에 줄이 달린 채로.. 시키면 시키는대로 미친듯이 춤 추지.‘ ‘......................’ ‘..그들이 시키는대로 다리가 부러져도 춤을 춰야하고.. 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이 아픈데도 춤 춰야 하고... 이 지랄 같은 저주처럼.. 언젠가는 선을 끊어버릴 거다. 니 손을 끊지 못한다면 내 손으로 끊는다. ..아.. ..우리의 손목 발목이 잘려나가도.. 그 때 돌아보아도 이것보단 나을 거다.‘ 나는 알지 못했다. 지난 2년간 내가 그렇게 고민했던 것처럼.. 우리는 같은 침대에 누워, 서로 잠든 척 하면서 몇번이나 서로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참지 못해 울었고, 잠든 상대방의 머리카락에 입맞춤 했다. ...........우리는 서로를 죽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는 이미 서로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우리는 서로 안의 각자를 죽여왔기 때문에, 더 이상 상대를 향해 칼을 겨눌 수 없었다. 그날 우리는 은류를 버렸다. 아버지이자, 형제, 친구, 그리고 감정들도 함께 그 바닥에 남기고 떠났다. ///////////////////////////////////// 혼우와 내가 새벽에 걸어나왔을 때, 처음 보는 검은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지하 주차장에는 혈흔이 낭자했다. 그 피의 주인공들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다행이도 그들은 심하게 다치긴 했지만, 생명이 위독한 건 아니었다. 그것은 떠나가는 우리들이 남긴 마지막 동정이었다. ‘잘 있어.’ 말없이 내가 이십년을 살아온 집을 돌아본다. 여명 때문에 집 전체가 파랗게 보였다. 나는 내 인생의 어떤 한 장면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더불어 엉켜 있던 우리의 가는 관계도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아직 정확히 X 라는 선이 아니라는 걸. <3> 2년 뒤, 혼우 형님이 살해당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가 살해당했다. 나는 믿을 수 없었지만, 혼우 형님은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의 장례식에서도 미친 춤을 춰야 한다는 걸.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슬펐다. 다만 비가 내린다는 이유로 표정을 감출 수 있을 뿐이다. 그를 죽인 것은, 예상했듯이 키퍼의 하수들이었다. 나는 검은 승용차에 타고 묶기로 예약된 호텔로 향했다. 그 때 막 혼우 형님의 시신을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건 , 그토록 품에 안아보고 싶어하던 다 커버린 아들 유천이었을까. 아니면 그를 따라 간첩처럼 살아온 동지 나였을까. 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듯, 아프게 남기고 온 아름다운 은류였을까.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뒤틀리고 엉망이었는지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이름도 성도 다른 자신의 세 아들이, 이렇게 마찬가지로 서로 증오하며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니, 호텔에 들어설 때 까지 나는 은류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도 분명히 지금 혼우 형님이 죽은 걸 들었겠지. ..그렇다면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형님,.. 장례준비를 하겠습니다.‘ 귀우가 내게 말했다. 호텔의 마스터 키를 꽂기 전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그를 쳐다보며 고개 끄덕였다. ‘경찰은?’ ‘그 쪽에서 개입하지 못하도록 의사에게 손을 쓸 생각입니다.’ 나는 너무나 피로했다. 혼우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동시에 들게 했는지 모른다. 가만히 차가운 금속성 문고리에 나를 기댔다. ‘잘 안되면 차라리....유천 형님에게 말해라.’ ‘하지만, 형님!!’ ‘..유천에게 말해. ........그도.. ..아들 중에 하나다.‘ 유천은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그리고 그는 나를 여러가지 이유로 증오했다. 하나는 바로 은류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또한 혼우 때문에. 그는 나에게 은류를 뺏겼고, 아버지도 뺏겼다. 유천은 나와 은류가 다니던 학교를 같이 나온 한 해 선배였다. 그가 은류를 좋아했다는 건 은류의 그림자였던 나도 알고 있었다. 다만 나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을 뿐이다. 허나 그 역시 나를 증오하는 만큼 조직에 대한 애증도 컸다. 사랑했고, 그만큼 증오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운명처럼 서로의 삶을 조금씩 죽여 온 것이다. 애정과 증오는 우리에게 같은 의미로 해석되었다. ‘예, 형님. 쉬십쇼.’ 불만 어린 표정으로 귀우가 물러나자, 나는 호텔문을 열었다. 다른 녀석들이 몇명 문 앞을 지키고 섰다. 늘 있는 일이므로 나는 개의치 않고 문을 닫는다. ‘............-!!!!!!!!!!!!!’ 그리고 놀랬다. 방 안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피투성이의 은류가. 우리는 2년만에 서로를 다시 마주했다. /////////////////////////////////////// 가끔은, 너무나 애가 탈만큼 그리워서 눈동자를 파 내고 싶은 기다림도 있다. 그 기다림과 그리움이 뇌를 파고들어 스스로를 잡아먹는 그런 사랑도 있다. .............우리는 죽어 있었다. 우리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천과 나, 그리고 은류는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서로의 삶을 바꿔치기 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인생을 넘겨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죽였다. 아주 메마르게 서로의 숨결을 평생에 걸쳐 조금씩 잡아먹었다. ......우리는 미쳤다. ‘...............-!!!!!!!!!!!’ 그날은 혼우 형님이 죽은 날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혼자만의 호텔방. 나는 내 발로 떠나온 은류를 그 방에서 다시 만났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이 전율이 흐른다. 처음에 눈에 띄인 것은 녀석의 피투성이 셔츠였다. 어떻게 이런 고급호텔에 달려올 때까지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는지 나는 의아할 정도였다. 그리고 눈에 띈 것은 녀석이 온 몸 구석 구석에 묻혀온 살기와 증오였다. 녀석은 반 쯤 실성한 것처럼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너무나 아랫바닥까지 지친 눈동자. 그러나 적의와 절망이 생생히 살아 있는 눈동자로 그가 나에게 말했다. - 나를 안아.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창밖으로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하얗게 질린 얼굴, 그와는 대조적인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는 마치 찢어질 듯 다시 외쳤다. -나를 안으라구, 이용엽!!! 범하란 말야. 두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밟아 없애버려.- 쿠궁-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 그리고 그와 내가 마주 선 호텔 방으로 적혈색의 비명이 아우성친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끔찍한 악연, 녀석과 내가 제대로 떨치지 못해온 지나한 인연에 대한 증오다. 나는 그가 들고 있는 핏빛 칼날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는 자기 혐오를 보았다. 칼날보다 자기 혐오 쪽이 더 위협적이었다. 내 오래된 친구,.. 한편으로 내 오래된 기억속의 연인,.. 또 한편으로 나를 버린 나 자신같은 존재 은류가 말했다. -위선자. ..이용협. 너는 이미 나를 죽였어. ..그러니.. 두번 죽여. 망쳐 버려. 제발.. 뒤 돌아볼 수 없을만큼 끔찍하게 죽여..- - 정신차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채운다. 은류는 두번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십 삼년을 서로 망설이게 만들었던 이 지랄같은 늪. 그 곳에서 허우적거리는 은류가 아니었다. 그 단호한 입술을 삐딱하게 웃으며, 녀석은 광기와 열기가 가득한 눈으로 내게 똑바로 소리친다. -정신? 언제나 똑바로 차리고 있지. 그게 문제일 뿐이야. 나는 왜 언제나 제 정신일까..하는 것 말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미치는 거야. 지금 이 순간 미쳐 버리는 거라구..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이 자리에서 날 안아. 갈기 갈기 찢어 버려. 알지?..- -................- - 잘 들어.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내가 미쳐 버릴 때까지 파괴 해. 만약 내가 이 호텔방을 걸어 나갈 때까지 제 정신이라면,.. 이번엔 니가 내 손에 못 살아 남아.- -.........................- - 여기.. 이 칼 보이지? ..이게 누구 피일 거 같아? ..이 피를 묻혀오게 누가 시켰을 것 같아??- -.................!!!!!!!!!.........- 번뜩이는 미치광이 광대의 춤.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지 못한 자들의 갈기 날리는 노래. 녀석이 시킨 것이다. 혼우를 죽이도록. 혹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말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너무나 뿌리 깊었다. 그래서 나는 기억한다. 그 폭우 솟아지던 피투성이 날. 우리를 키워주고 이끌어준 혼우 형님이 살해당했다. 또한 같은 날, 십 오년이 넘게 친구로, 그리고 나머지 시간만큼 서로를 제거하기 위해 애쓰던 숙적의 대상으로 나는 녀석을 안았다. 아니, 파괴했다. 그리고 두번 다시 나는 그를 안지 못했다. /////////////////////////////////////// 다만 그 날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매끄럽고 시원한 피부. 벌벌 떨리는 몸. 아무런 죄책감도 혹은, 이전의 망설임도 남기지 않고 거칠게 그의 피투성이 옷을 벗겨냈다. 그를 벌거벗겨 나가게 만드는 게 내 광기의 일부분이었고, 나는 찢듯이 그를 전라로 만들었다. 두번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마치 자신의 속죄를 나에게 부탁하듯,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아윽....................’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린다. 그는 내가 떠나던 날 팔렸다고 말했다. ...........자신이 스스로를 팔았다고 말했다. 그가 누구에게 자신을 팔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깨끗한 반응에 나는 놀랬다. ‘벌려.’ 누운 채로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손가락으로 벌리도록 시킨다. 할 수 있는 온갖 잔인함이 내 이성을 뛰쳐나왔다. 그는 벌 받길 원했고, 나는 벌하길 원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었다. 둘 중 하나가 미치지 않는 이상은, 이 질긴 ‘마리오네트’ 그 선은 끊어지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미친 채로도 계속 끈에 달린 채 춤 춰야 한다. ..........손목을 자르고, 발목을 자르면 이 핏빛 전쟁에서 구원이 보인다. ‘.......아윽...................’ 혀를 세워 부드럽게 애널을 풀자, 허리가 흔들렸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애널 사이로 빨려들어가는 내 손가락은 나와는 별개의 제 3의 물체 같았다. 잔인할 정도로 내벽을 긁고 안에서 움직이자, 불쌍할 정도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아..........................’ 유두를 남은 손가락으로 꼬집어 세운다. 끊어질 듯한 비명이 세어나왔다. 아픔과 쾌감이 동시에 뒤섞여 있었다. 매혹적인 입술이 벌어진 채, 거친 숨을 쌕쌕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쪽에서 미쳐 있다. 나는 싸늘한 손바닥으로 그의 낭심을 움켜쥐고 입술을 미끄러뜨린다.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기어이 ‘배신자’라는 무대에 올라야 했던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 낙흔을 세기길 바랬다. 흔들리는 몸, 움찔거리는 어깨를 끌어당기며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의 몸을 최대한 벌린다. 그에게 행위의 일방적임을 알려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발기한 페니스를 튕겼다. 목이 꺾일 듯 은류는 눈물을 글썽거린다. ‘............아윽...-!!!!!!................’ 거칠게 안을 후벼파듯 움직이자, 입술을 깨물던 그가 가늘게 오열했다. 그는 울고 싶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나 우리는 수컷들이다. 우는 방법도, 울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우리에겐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허리 움직여. 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니깐.’ 나는 지난 이십년 동안 그에게 명령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러나 가늘게 떨며 조금씩 자신의 거침없는 얼굴을 파괴하는 그. 붉은 기운으로 온 몸을 도색하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인다. 굴욕과 수치, 또한 자신이 일으킨 질퍽한 음란함에 스스로 치를 떨었다. 그 엉망이 된 모습이 너무나 음란하게 나를 자극한다. 불쑥- 나는 셔츠를 벗고 마침내 그 앞에서 몸을 벗었다. 태를 벗었다. 나를 벗기고 이 지독한 살기와 색기가 어우러진 우리들의 무대에 분노를 발산했다. 나는 그 날 녀석을 범했다. 아마, 내가 기억하는 날, 내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것이 소멸된 밤이었다. 녀석이 실제로 바라는 바였는지, 혹은 내가 바라는 바 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는 것은 나를 향해 열렸던 뜨거운 몸. 그 입구의 질끈한 유혹 뿐이다. 감정 없이 안기고 안는다. 이 거친 본능 외에, 녀석이 말하는 것처럼 피투성이 광대들의 파괴 본능 외에 남는 것은 없다. 나는 은류의 전율하는 얼굴을 바라보며, 대퇴부를 거칠게 양 쪽으로 벌렸다. ‘.........하윽....................‘ 손가락에 힘을 줘서 조금씩 달아오르는 녀석의 고환을 감싸쥔다. 거친 손놀림에 고통을 느낀 듯 녀석이 허리를 비틀었다. 머리 속까지 차가워지는 이성. 그렇게 내 안에서 천천히 지워지는 인간을 느끼며 나는 무표정하게 녀석의 벗겨진 하반신을 들어올린다. 파괴하고 미치게 만들지 않는 한은, 녀석도 그리고 나도 빠져 나갈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뼈 속까지 통감하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미쳐야 된다. 아니면 제거 당한다. ‘많은 여자를 안아봤잖아, 은류.‘ ‘..................우욱.......-!!!!!!!‘ ‘다리를 더 벌려. 니 소원대로 내가 찢어갈기기 전에..‘ 밝게 빛나던 호텔의 불빛. 그리고 계속 몰아치던 창밖의 뇌우. 혼동과 격정, 고통과 죄책감, 살기와 색기가 뒤범벅된다. 나는 내가 미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이 치명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것인가..하는 생존의 욕구로 미쳐 있었다. 녀석이 옳았다. 나는 위선자였다. 나는 녀석이 바라는 바 대로 치밀하고도 잔혹하게 녀석을 유린할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을 파괴하는 것은 나를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은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나에게 말했다. ..자, 같이 파멸하자.......라고. ‘........아악.......!!....‘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자, 물기 젖은 도톰한 입술이 그것을 빨아올린다. 긴 시간 짐승같은 욕구에 시달린 녀석과 나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쑤욱- 손가락이 녀석의 부드럽고 질퍽한 입안에서 부유한다. 가늘게 떨리는 녀석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나 역시 허벅지 사이로 몰리는 사정의 기운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것을 체벌하듯, 나는 손가락을 녀석의 입속에서 거칠게 빼낸다. 그 대신, 아랫배에 닿을 듯 잔뜩 긴장한 내 페니스를 가져다 댔다. 처음에 그는 망설였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미친 것은 내 쪽이었다. 찰싹-하고 녀석의 뺨을 때렸다. 물기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쥐어박듯이 입안에 밀어 넣는다. 목구멍까지 넘어갈 듯 깊이 삽입하자, 녀석의 어깨가 경련했다. 치욕. 적이자 친구이자 가장 오랜 시간동안 함께 살아온 동성의 사내. 그것을 밝은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핥고 있는 자신에 대한 치욕...반대로 나는 짜릿한 가학적 쾌감에 휩싸인다. 언제나 단정하고 깨끗한 얼굴이 붉게 물들어 싹싹이는 거친 숨 소리를 내는 녀석이다. 둥글게 입술을 말아 점막으로 페니스를 자극하며 스스로를 숨기지 못함에 당혹하고 있다. ‘움직여.‘ 짧고 간결하게 말하며 녀석의 머리를 양쪽으로 잡는다. 사내의 다리 사이에 놓여진 녀석은, 견딜 수 없을만큼 부도덕해 보였다. 차갑고 이지적인 얼굴을 잡고 피스톤질 하듯 움직이자 내 것을 입안에 넣은 채 은류는 숨을 헐떡였다. 불쑥- 녀석의 벗은 다리 사이로 음모를 헤치고 조금씩 부푼 그것이 보였다. 나는 잔인하게도 녀석의 그것을 발로 조금 밟는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어루만지면서 이따금 체벌에 가까운 강한 자극을 가한다. "..핫!!!......................." 녀석이 튕기듯 움찔거렸다. 그럴 때마다 더욱 죄여오는 입안의 느낌이 강렬했다. 녀석의 눈꼬리에도 작은 눈물이 맺혔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움직이고 있고 자신도 만져지고 있다. 나의 발바닥 아래에서 말이다. ‘............아..................’ 자극을 줄 때마다, 살짝 귀두를 스치는 혀의 움직임에 나는 저절로 뜨겁게 한숨쉬었다. 그는 철저한 노리개로 전락했다. 우리의 마리오네트는 그 때 딱 한번 끊어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처음으로 이미 만들어진 무대를 탈출했고, 처음으로 우리가 피에 굶주린 수컷들이라는 걸 절감했다. ‘...........아악-!!!!!!!!!!!..................’ 찢어질 듯한 교성이 나를 울렸다. 그의 내부가 끊어질 정도로 강하게 삽입한 것이다. 이미 자신의 입안으로 잔뜩 부풀려 놓은 내 것이 인정사정없이 그를 꿰뚫었다. 관통을 당한 채,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그의 몸도 같이 움직였다. 우리는 그 때 처음으로 같은 줄로 연결된 것이다. 항상 우리를 묶은 줄은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움직였는데,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줄을 끊고 손목과 발목과 허리와 입술을 우리만의 줄로 묶었다. 함께 움직였고, 함께 피투성이가 되었다. ‘잘 봐. 강은류.’ 지치고 기절 할 만큼 안은 뒤에도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미 녹초가 된 그를 뒤에서 삽입한 채, 나는 일으켜 세운다. 호텔의 큰 거울. 그 선명한 불빛 아래 놓으며, 스스로 이 광경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도발해 놓은 것을 스스로 품고, 같은 수컷에게 꿰뚫린 수치.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만으로 쾌감을 느끼게 길들였다. 쾌감과 자학적인 파괴감에 완전히 물든 멍한 시선으로, 은류는 거울 안을 보았다. 아무리 고개를 돌리려 해도 등 뒤에 안은 내가 거침없이 돌려세운다. 마침내 , 체념한 듯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아무도 널 안지 못해.’ ‘.........웃..기지..마.’ ‘..아무리 많은 사내가 널 안아도, 니가 기억해야 할 건 이거 밖에 없다.’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내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게 맞았다. 나는 그가 나를 벗어나려고 한다면 팔을 부러뜨리고, 그의 줄을 끊고 영원히 미친 춤을 추는 이 광대놀음에서 발목을 자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내에게 안긴다면, 그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내 광기에 전이된 녀석이 분노와 두려움에 떠는 눈동자로 이 질퍽한 삽입의 축제를 응시했다.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분신이 물기를 품은 채, 거울 안에서 드러나 있다. 반대로 자신이 도발한 내 분신은 그의 몸 깊숙이 박힌 채 안에서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조금 전에 자신의 몸에서 나온 사정액으로 뒤를 흠뻑 적신 상태였다. 나는 충분히 그것을 즐겼다. 그것을 손가락에 묻혀 자신의 애널에 적실 때, 그는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온 몸을 떨었다. 그러나 끝내 나는 그의 다리를 닫지 못하게 뺨을 몇 대 더 때렸다. 잔인하게 내가 피스톤 질을 하자, 연결된 입구에서 물기가 흐르며 소리를 낸다. 꽉 깨문 그의 입술에서도 견딜 수 없는 듯 울음과 뒤섞인 교성이 흘러나왔다. ‘악..아악......!!..아!.아앗!!..............’ 내 손가락에 걸린 실. 내 뜻대로 움직이는 내 무대의 인형. ...그는 그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무대를 탈출하여 내 것이 되었다. 움찔거리는 그의 내부는 내 것만을 온통 감싸 안은 채, 야한 신음과 흐느낌을 토해내야 했고, 지독히도 괴롭힘을 당하고서야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나를 도발한 벌이었다. 나는 도발당하면 광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미치고 갈증나게 만든 체벌이었다. 수컷들의 강한 교접. 그 질퍽한 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에 내가 맞물린 그의 엉덩이 사이를 벌렸을 때, 아직 채 닫히지 못한 그곳은 수십번의 움찔거리는 운동을 계속하며 내 정액을 쏟아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끊임없이 채워 넣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혼우가 죽었다. 우리는 아직도 관객들이 가득한 무대에서 원치 않는 춤을 춘다. 우리들의 몸은 교접했고, 우리들의 정신은 균열했다. //////////////////////////////////// ‘니 부하들 불러.’ 그리고 그가 말했다. 손가락 끝도 움직일 힘도 없이. 새벽이 오는 그 시간에 그가 말했다. 아직도 밖에는 비가 내리쳤다. 폭우가 쏟아졌다. 번개와 천둥이 하늘과 땅을 갈라놓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미치지 않았다. 나는...차가운 눈으로 정액에 범벅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넥타이를 매는 순간, 녀석이 조롱하는 듯한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서. 니 부하들 불러, 이용협.‘ ‘........-!!!!!!!!!!!!!!’ 우리는 미치고 싶었다. 그리고 충분히 미쳤다. 그러나 파괴하려면 멀었다. 우리는 서로 파괴하고 싶었지만, 나는 결국 그를 사랑했다.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자신이 다른 이에게 안기는 걸 구경시키는 것이었다. ‘..말했지. ..난 나도 파괴하고.. ..너도 파괴하는 게 목표다.‘ ‘....강은류.’ ‘이 싸움에서 등 돌리지 마. 처음부터 날 버린 건 너였다.‘ 우리는 같이 추락한다. 그리고 탈출할 수도 없었다. 고통을 잊는 가장 큰 방법은, 바로 서로의 영혼을 발기 발기 찢어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피눈물이 날 정도였다. 욱씬거리는 속이 너무나 아파서, 한동안 숨이 막혔다. 그는 혼우를 죽인 자신의 조직도, 그리고 그 조직에 속한 자기 자신도, 또한 그런 자신을 버린 나도, 그 모든 것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함께 모두가 절망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을 무대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끈을 끊어버리는 방식- 그것은 서로가 이 극한 적대감과 증오 속에서 파괴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부탁이야.. 이용협.. ..다시 한번만 나를 죽여...‘ ‘.......................’ ‘......혼우.. 혼우의 가슴에 박힌 칼을 봤어.. ..너도 아는 놈... 우리를 학교로 데리러 오던 원우중이 찌른 칼이었지.. 하하..... ....너는 좋지 않았냐..그 시절이...‘ ‘.........................’ ‘...왜 나만.. 다 기억하고 있어야..하지?.. 너도.. 혼우 형도.. 우중이도.... ..김기사도.. 모두가 잊고 있는데.. 내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은석도 이제 다 병들어 죽어가는데......................‘ ...우리들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운 은류를 보았다. 짐승들의 발정. 그 비린내가 가득하다. 은류가 떨어뜨린 칼을 보았다. 바로 자신의 말처럼 혼우의 가슴에서 오늘 뽑아온 칼이다. 아마 , 이 칼날이 꽂혔을 때, 뜨거운 혈관이 범람하고 잔혹한 축제의 주인공 중 한명은 사라졌으리라. ‘...나를 미치게 하지 않으면.. 넌 같은 칼에 오늘 죽어.‘ ‘................’ ‘..난 그렇게 하고도 남을 놈이야. 이미 난 .. ...죽은 영혼이니깐...‘ 알고 있다. 우리들은 서로의 심장을 노리는 좀비처럼 가슴을 파헤쳤다. 그 날. 우리가 이십년간 살던 집에서 서로 등 돌린 그 날. 나는 눈을 감고 한참 숨을 골랐다. 그리고 아무런 영혼도 담겨 있지 않은 그 상실의 눈동자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주먹을 쥐고,..여전히 그 날처럼 그에게서 등 돌렸다. 한명만 제거하자. 남은 한명.. 바로 내 친아버지.. ..아아..그럴 수 있다면..정말.. 이 비린내 나는 싸움은 멈출텐데. 언제나 자욱한 비 비린내, 피 비린내, 정액 비린내. ... ‘잘가, 이용협.’ 녀석이 씨익 웃었다. 영혼없이 말라붙은 미소였다. 녀석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방 문 밖으로 나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복도에 몰려 있던 서너명의 녀석이 나를 지켜보았다. 그들 중 몇은 은류를 알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성대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몇 번이나 마른 입술을 축여야했다. 문고리를 잡고 .. 세어나오지 않는 음성을 몇 번이나 쥐어짜듯이 반복했다. 급기야 온통 갈라진 목소리로 튀어 나올 때까지. ‘들어가서 그 녀석을 범해.’ ‘.............-!!!!!!!!!!!!!!!’ 나는 나 자신에게 확인시켰다. ..우리들의 줄을 끊자.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춤 춘 후에. 이 미친 춤을, 제발!!!... 우리들의 아버지, 그의 장례식에서조차 우리는 어릿광대의 미친 춤을 계속 춰야 한다. 언젠가는 끊자. ..........서로 파해친 이 심장만큼 꼭..반드시 보상받는다. ‘들어가라.’ 나는 쇠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문에서 비켜섰다. 부하들이 아직도 망설인다. ..시선을 피한 채, 꽉 다문 눈꺼풀로 나는 절규하듯이 소리쳐야 했다. ‘가서 범해!!!!!!!!!!’ ‘..형님!...’ ‘미친듯이 안으라구, 이 새끼들아!!!!!!!!!!!!! 그 새끼가 제 정신으로 여기서 걸어나가면................ 니들 모두 죽여버릴 거다. 알지?.... ...그 녀석이 오늘.. 부하들에게 혼우 형님을 죽이라고 시켰다..‘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의 심장은 내가, 내 심장은 그가 서로 나눠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었다. 녀석들이 조심 조심 나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문밖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침의 동이 훤하게 뜰 때까지..나는 헝클어진 차림으로 미친 놈처럼 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날 처음으로 나는 무너졌다. 그리고 또한 처음으로 나는 그를 안았고, 두번 다시 안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망가지는 쪽을 선택했다. 두번째에는 나에게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잔인함이었다. ..나는.. ..아주 조금 울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였는지, 아니면 혼우 형님의 죽음이었는지. 혹은.. 그에게도 해 주지 못한 말. 혼우 형님의 시신, 그 꽉 쥐어진 손아귀에서 빼온 은류의 사진이었는지. 어린 시절의 귀엽고 사랑스럽던 그 웃음이었는지. 어느 쪽이든, 나는 키가 크고 나서 처음으로 아주 조금 오열했다. <4> 장례식이었다. 검은 양복은 우리에게 익숙했지만, 오늘처럼 길들여진 적도 없었다. 나는 상주의 띠를 두르고 문상객을 맞이했다. 겉으로는 평온했고,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출상을 나가는 날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새 잔디를 깔지 않아서 아직은 붉은 흙. 손으로 쥐어 말없이 바닥에 뿌리자 금세 촉촉이 젖었다. 그리고 검은 승용차와 함께 유천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짐승처럼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어쩌면 혈육만 같을 뿐, 아무런 연관성도 없었던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섰다. 주위로 검은 우산을 든 녀석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유천은 소리없이 붉은 흙을 밟으며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한참 뚫어질 듯 노려보다 빙긋이 웃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무대에서 우리들을 조정하던 끈 하나가 사라진 것을. 아마 그 역시 혼우 형님에 대해 나 못지 않을 것이다.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해서 사랑하는. “아버지는 오늘 오시지 못한다.” 유천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여기서 유천이 아버지라 부르는 건, 사실은 내 친부 ‘여호준’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 묻히는 것은, 유천의 친 아버지 유혼우다. 그러나 우리 둘중 어느 쪽도 그것에서는 마음을 비웠다. 어차피 우리는 ‘필요’에 의해 살아가는 법만 익혀온 짐승들이었다. 나는 그가 두번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냉정할 수 있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몇 분이나 흐른 뒤였다. “그리고 너는 다음 주 부터 다시 키퍼 쪽으로 간다.” “............-!!!!!!!!!!!!!!” 순간적으로 완전히 그를 때려 눕힐 뻔 했다. 경악에 물든 채 내가 주먹을 꽉 쥐자, 그가 씽긋 웃었다. 표정없는 회색빛 웃음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은류는 거기 없을 거다.” “...........!!!!!!” “교환이다, 이용협. 너와 은류를 교환한다. 혼우 형님의 살인에 경찰이 끼어들지 못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너와 은류를 크로스(cross-X) ..한다.“ 나는.. 그렇게 세상이 흔들릴만한 폭우를 알지 못했다. 검은 양복이 온통 핏빛으로 보일만큼 비가 몰아치고 바람이 세찼다. 유천을 태우고 온 검은 차가 때를 기다리듯 다시 열렸다. 온통 검게 썬탠이 된 그 차 안에서 바로 그가 나왔다. ...은류. 증오하고 미워하고 버리고 파괴하고, 그렇게 잘라내고 싶어 너무나 아픈 내 생살 같은 사랑. 잘라 낼 때마다 내 발목이 아프고 손목이 아파서 피눈물을 토하는 사랑. 은류 역시 그러나 차가웠다. 그는 그 날 나에게 안기는 방식으로, 마지막 남은 자신의 인간을 버렸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껍데기처럼 웃으며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순간적인 살의에 번뜩이는 내 눈을 보며 유천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셋은 검은 양복을 입고 서로의 시선을 철저히 외면하며 비켜 서 있었다. 꼭지점을 이으면 하나의 관계가 될 정도로, 우리의 발자국은 붉은 흙에 새겨진다. “잘 들어라.“ 유천은 이를 악문 내 귀전에 낮게 속삭였다. “너는 Anonami의 호스트로 위장 취업한다. 말이 위장취업이지,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지, 사실은.. 그 쪽과 우리 쪽에서 더 이상의 혈전없이 타협하는 걸 찾아내기로 했다.“ “...........................“ “우리는 오늘부터 같은 시장을 공략하기로 했다. Anonami는 최고의 거물급도 오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적당히 정보를 빼와. 너와 은류는 서로 맞교환 된 인질이다. ..알지? ..너는 도망가지 못해. 은류가 다친다.“ 유천은 야욕에 물든 사내였다. 그는 은류를 가지고 싶어 했지만, 가지지 못한다면 파괴하려고 하는 근성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우리 셋의 공통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파괴한다. 흔적도 없이. 다른 누구에게도 가지 못하게. 춤을 추는 발목을 잘라낸다.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지만 몸 조심 해. ..이 위태로운 계약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니깐 말야.“ “..................” 나는 입술을 꽉 물고, 손바닥이 손톱에 짓눌러 피가 날 정도로 생살을 파 헤쳤다. 또 다시 지겨운 이 놀음. 광대 짓. 무대 안의 우리. 그리고 빗줄기 사이의 은류를 노려본다. 너는 그래서 그 고통의 원인인 너를 없앴냐고..그렇게 처절하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비가 너무나 세차게 내려 나는 소리칠 수 없었다. 언제나 이 치열한 아우성은 그 비명 소리가 너무 커서 절대 그에게 닿을 수 없다. 마치 지구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리지 않듯. ...너무나 아프고 소름끼치는 이 절규는 그에게 닿지 않는다. 나는 충분히 소리치고 있음에도,..그는 느끼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는 영혼이 없다. “..잘 버텨라, 이용협.” 마지막으로 유천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너나 은류가 그 거짓 놀음의 실을 끊게 된다면.. 나도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말 축복해 주지.“ “................” 나는.. 그저 가만히 살기와 색기가 뒤덮힌 시선으로 은류를 노려보았다. 알고 있다. 이런 제안은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쳐 들어온 그가 꺼낸 것이라는 걸.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버렸다. 내가 다치며 그도 다치고, 내가 죽으면 그도 죽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유천이라는 그림자가 이제 생긴 것이다. 투두두둑- 다시 땅바닥으로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꽂힌다. 비로 온통 젖은 우리 셋은 아무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른 조직원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박힌 듯 소리없이 고개 숙이고 있다. .......우리는 아직 너무 젊었다. 나는.. 열이 가득 치미는 내 목구멍에 모든 힘을 불어 넣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은류의 영혼을 꿰뚫어보며, 나의 시선을 똑바로 노려보는 그 상실 가득한 도전정신에 아파하며. 그리고 드디어 유천에게 대답했다. “너무 자신만만해 하지 마십시오. 형님.” “............!...........” “..언젠가는 제가 끊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서로 교환되었다. 우리는 또한 언제나 X. 인생에 단 한번 마주쳤다. 그 마주침을 잊지 못하도록 서로 격렬히 가슴을 파헤쳤다. 대신 비어버린 늑골 아래로 심장이란 것을 빼어버렸다. /////////////////////// 어떤 사람은 한번 스쳐가도 마음에 남고, 또 어떤 사랑은 한번 안은 것만으로 인생의 모든 추억이 된다. 우리는 언제나 X. 그는 나를 삶에서 언제나 밀어내기 위해 태어난 사람. 서로에게 항상 미지수. 서로를 아프게 거절하는 유일한 상대. 닿지 못하는 방향으로 늘 교환되는 춤추는 인형 X. 한번의 피 끓는 마주침 외에 항상 서로의 반대쪽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일주일이 멀지 않아 Anonami에 취직했다. ‘김규철’이라는 가명과 함께. 내 인생은 다시 한번 교환되었다. -클럽 X end- [장편] 클럽-비우(非友) - 1 클럽 에피소드 2 : 비우 written by. 조반유리 한국의 열 여덟. 특히, 한국의 열 여덟인 남학생들은 욕과 조사로 이뤄진 특이한 커뮤니케이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친구 아니다’라는 말을 무서워하기도 하며, 한편으로 ‘내 친구이다’라는 말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런 그들 중 하나에게 바로 이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즉 한국의 열 여덟, 그 중에서도 친구 관계 좋기로 유명한 ‘계가윤‘이 조금 전에 그 말을 들은 것이다. ‘너는 이제 내 친구 아니다.’ ..이렇게 정색을 하고 가윤에게 말한 인간은, 다름 아닌 그의 십 팔년 된 친구 강지협이다. 또한 그들은 한 집에 둘만 사는 룸메이트였던 것이다. 비록 십 팔년 전부터 딱히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두 사람은 외모에서 성격까지 모든 것이 거의 달랐다. 키는 둘다 비슷했지만, 어딘가 차갑고 깨끗한 이미지의 가윤은 수학과 과학을 잘했다. 모범적이고 우수하며 지적인 느낌..그것이 바로 계가윤의 그 동안 이미지다. 반면, 강지엽은 그와 십년이 넘는 친구였지만, 공부하고는 전혀 담을 쌓았다. 그는 몸으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체육 특기생을 목표로 훈련 중이었다. 외모도 가윤과는 달리 조금 더 단단한 느낌이었다. 가윤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지만, 지협에게는 골치덩어리였다. 다른 녀석들에게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곧잘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비웃곤 하는 고약한 친구. 어릴 때부터 항상 그 녀석에게만은 놀림을 당하며 살아왔다.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은 딱 두 개 밖에 없었다. 하나는 같은 집에 산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미우니 고우니 해도 18년 동안 서로를 골려먹었다는 사실이다. 허나 미운 정도 정이라고.. 이 고약하고 얄미운 친구 계가윤은 그래도 강지협에게는 친구였던 것이다.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다르던 아니던, 똑똑하고 지적이며 수려한 이 친구 녀석을 속으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런 자신이 오늘 계가윤을 진하게 노려보며 18년 만에 처음으로 이를 갈듯 선언했다. 너는 이제부터 내 친구 아니다...라고. <프롤로그> “너는 이제 내 친구 아니다.” 보통은 ‘너랑 친구 안해, 새꺄!’ 혹은, ‘십새꺄, 너랑은 쫑이다!’라고 표현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녀석이 조금 다른 표현을 썼다. 조금 더 진지하고, 뭐랄까..조금 더 나이들고, 그리고 건조하면서 뭔가를 참듯이 꽉 쥔 주먹으로 말이다. “너는 이제 내 친구 아니다, 계가윤” 학교 옥상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가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지협 쪽을 한번 힐끗 쳐다볼 뿐이다. 반듯한 이마, 조금 성가시게 폴락거리는 머리카락. 가윤의 그런 점들은 18년 동안 축복이기도 했고, 덫이기도 했다. 아무려면 뭐 어떤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8년 지기에게서 방금 ‘친구 아니다’라는 어마 어마한 말을 들었다. 가윤은 교복 주머니에 손을 꽂고, 즐겁다는 듯 지협을 향해 씽긋- 웃는다. 지협은 그 순간 늘 그렇듯, 소름이 돋았다. 깨끗한 얼굴로 시원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친구도 많고, 인기도 많은 계가윤이다. 물론 지협은 지난 십년이 넘도록 녀석이 얼마나 얄미운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적어도 남이 봤을 때는 뭐 하나 부족한 거 없는 녀석이다. 그런 가윤이 뭐가 아쉬워서 그 짓을 하는 걸까. 호스트 말이다. 호스트. 아니, 녀석은 말이 좋아서 그걸 ‘호스트’라고 표현했지, 따지고 보면 남창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금 지협이 가윤에게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계가윤. 지협의 18년 된 친구, 그 시원하고 서늘한 눈매로 웃는 맑은 얼굴의 가윤이 늘 그렇듯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찌보면 날라리 같아서 그렇지, 한결같았던 친구 지협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뭐, 마음 내키는대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이것이다. 지협은 가윤에게 ‘이제 너와의 십팔년 친구 사이는 끝이다’ 라고 말했고, 가윤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것이다. ‘그래~ 마음내키는대로’ 라고.. 그 흔한 주먹다짐도 없이, 늘 둘 사이에 난무하던 욕설도 없이, 18세에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공포가 일었다. 친구를 잃은 것이다. <1> 쿵-하고 소리가 나도록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지협은 침대 위로 과감히 낙하했다. 교복도 벗지 않고 짜증이 난다는 듯 머리카락을 북북- 쓸어 넘기며 그는 면 이불에 얼굴을 부비적거린다. 가윤이 주말에 빨아 놓은 깨끗한 세탁 냄새가 났다. 이런 식의 섬유세제 냄새가 나는 녀석이 바로 가윤이다. 오늘로써 친구사이를 완전히 정리한 그 녀석, ‘계가윤’말이다. 십팔년 친구, 이년간의 룸메이트. 지극히 짓궂은 성격, 싸늘하고 침착한 웃음, 짜증날 정도로 잘난 척 하는 그 얄미운 녀석! 녀석에겐 18년 동안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그런데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문제의 시작은 간단했다. 누군가가 가윤을 압구정 뒷골목에서 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소문이 마구 겹쌓인 채 흘러 다녔다.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가윤이 그렇다는 것은 굉장한 의외였다. 쾌활하고 잘 노는 자신과는 달리, 가윤은 모범적이고 청결한 이미지다. 십 팔년 동안 항상 그랬다. 가윤이 의외로 얄미운 구석이 있고, 성격이 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정도로 오랜 친구였던 자신만의 판단이다. ‘계가윤이 아르바이트 해? 넌 같은 집에 살잖아? 혹시 들은 이야기 없어?’ 친구 녀석들은 당연히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가윤의 이미지가 워낙 학교에서 좋다보니 대 놓고 묻기 힘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가윤의 룸메이트인 지협에게 묻는 것이 그들에게 쉬웠다. 그러나 지협도 그런 말은 녀석들에게 처음 들었다. 계가윤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그것도 보통의 알바가 아니라, 법에 걸리는 범법행위이자 이상야릇한 아르바이트? 같은 집에 살아도 워낙 공통점이 없는 둘 사이다 보니, 그리고 그 공통점 없이도 18년 간 무난하게 지내온 사이다 보니, 그런 깊은 대화까지는 못 나눈지 오래다. 그 아르바이트라는 게 결국 호스트 일이냐? 아직 미성년자가?..라고 지협이 따지고 물은 것은,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5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 5개월 동안 지협은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고 관찰하다보니 밑도 끝도 없었다. 매일 밤 늦는 가윤과, 가끔 새벽이면 어디론가 나가는 듯한 그의 모습. 그 느낌.. 왜 예전에는 잠만 잔다고 몰랐을까..하는 죄책감마저 들고 말았다. 그래서 마침내 대 놓고 확인해 볼 결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도 가윤은 어느 날처럼 시원한 미소로 얄밉게 웃었다. 그러나 지협은 서늘한 미소로 웃고 있는 그를 무시한 채, 다짜고짜 옥상으로 끌고 올라갔다. 계단으로 마구 밀어당기는 녀석에게서는 늘 청결한 세탁의 향이 우러났다. 그러니 더 믿을 수 없다. 깨끗한 얼굴, 깨끗한 미소, 그리고 한편으로는 잘생긴 외모와 잘 뻗은 팔과 다리. 마주보면 한 치의 어긋남도 거의 없을만큼 키도 같은 그들은, 아무리 그래도 십년이 넘도록 친구사이였다. 가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곧잘 미스테리 했지만, 그래도 좋은 사이를 유지해왔다고 여겼다. 이런 잘난 척 하는 고까운 녀석과 18년씩이나 같이 지내는 거 아무나 못할 일이다.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를 거쳐 같은 고등학교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그 계가윤이 십년 내도록 변함없는 상큼한 대외용 미소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나 아르바이트 해.’ 그 순간, 지협에게는 자신의 발끝이 천천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남창이야?’ ‘남창 아냐, 호스트야. 뭐..니가 느끼기에는 별반 다를 바 없겠지만...’ ‘............왜?.........아니, 도대체 왜?’ 한국의 십 팔세들은 욕을 굉장히 잘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 중요한 느낌, 그리고 시리도록 뭔가 애간장이 타는 진지한 상황에서는 그들도 욕을 할 겨를이 없다. 욕이란 본시 약간의 과시와 약간의 허세용이다. 지금은 그 허세와 과시를 할 틈이 없는 거다. 또한 지협은 가윤을 만난 이례, 이렇게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물론 가윤은 욕을 잘 안하는 성격이었지만 말이다. 어딘가 삐딱하게 웃으며 자신을 놀려대면 놀렸지, 함부로 욕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강지협...’ ‘넌 임마, 너네 집 가난하지도 않잖아? 니가 성적이 안 좋아? 니가 뭐가 모자라? 굳이 알바를 하고 싶다면, 새꺄, 조금 더 다른...‘ ‘강지협..’ 얼굴이 시뻘게진 자신이 뭐라고 따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가윤이 못 말린다는 듯 상큼하게 말하는 순간,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너, 나 안을 수 있어?’ ‘............!!!!!!!!!!!!’ ‘..아니면, 나한테 안길 수 있어?’ 호스트라고 해서 나이든 여자들에게 돈 받고 적당히 주흥을 맞춰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계가윤 입에서 나온 질문이 걸작이다. 그것도 뭔가 즐겁다는 듯, 정색을 하고 그렇게 되물은 것이다. ‘너 나 안거나 안길 수 있어?’..라고. ‘내...내가...너한테 왜 안...겨!!!!!!!!!’ ‘..거 봐.’ ‘그리고....내가 왜 너같은 사내 새끼를 안아!!!!, 이 십새꺄!! 정신 좀 차려!!’ 계가윤은 소리높여 웃었다. 얄미운 미소다. 언제나 상큼하게 웃는 얄미운 녀석. 지협이 충혈된 눈동자를 깜박였다. 흥분 때문이었다. 어느 새, 가윤도 웃으면서도 답답하다는 듯, 교복 앞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당황한 지협을 향해 느긋하게 입을 연다. 그 순간, 무척이나 비웃는 기분이 든 건 또 왜였을까. ‘난 너 안고 싶거든.’ ‘..........-!!!!!!!!!!!!!!!’ ‘난 너에게 안기고 싶거든....’ ‘............!!!!!...........닥쳐, 이 좇같은 .....................’ ‘사실 니가 아니라도 상관은 없거든. 그런 게 나니깐... 취향만 비슷하고 나랑 비슷한 종족이면 누구라도 상관없어.‘ 그 순간, 지협은 가윤을 포기했다. 아니, 포기 당했다. 녀석의 그 얄미운 웃음, 얄미운 목, 얄미운 상반신, 얄미운 손목, 얄미운 몸으로부터 강하게 시선을 피했다. 십 팔년 동안 헛것이었다. 성격이 좀 안 좋고 잘난 척 하는지는 알았지만, 저런 새끼인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남자라도?’ 조금 얼빠지게 묻는 자신을 향해, 가윤이 맑게 웃었다. 마치 놀란 자신을 매번 놀릴 때 그 표정처럼 통쾌하다는 듯한 웃음이다. 언제나 순식간에 부아가 치미게 만드는 그 .. 얄미운 웃음! ‘당연히 남자라도 돼, 강지협. 내가 지금 한 말이 그거잖아?’ ‘그..그런거라면.. ..에..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거라면 굳이 호스트가 아니라도...‘ ‘뭐, 어때? 돈도 벌고 몸도 즐기고? 맨날 공부만 하며 살기에도 지루하잖아?‘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그럼........너는 이제 내 친구 아니다. 계가윤.’ 정말 목울대로 넘어오는 뭔가 울컥한 기분을 꽉 다스리며, 지협은 간신히 던진 한 마디였다. 포기당했다. 스스로 포기한다든지 뭐 그런게 아니라 아주 일방적으로 포기당했다. 가윤이 자신에게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녀석이 남자도 좋아한다고 해서 한 말이 아니다. 그 방법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걸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폭탄선언하며 즐기는 녀석의 성격도 이젠 못 견디겠다. 그러나 계가윤은 언제나 계가윤이다. 자신의 십 팔년 지우. 가윤은 함껏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천천히 되새기듯 시선을 잠시 피한다. 비록 그 순간은 한 몇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녀석은 다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한 채, 여유가득한 웃음을 만든다. 그 포기에 수긍한 것이다. 친구가 아니라고 엄청난 선언을 했는데, 그 선언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인정한 것이다. ‘그래. 뭐, 마음 내키는대로~..‘ ********************* 그렇게... ‘넌 이제 내 친구 아니다’ 라고 말하고 일주일 쯤 흘렀다. 그리고 같은 학교, 같은 집에 사는 그들로써는 몹시 생소하게 냉전의 분위기를 맛보고 있었다. 아니,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는 얄미운 가윤이 어떤 기분인지는 전혀 모르겠다. 녀석은 변함없이 밤 늦게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왔고, 그리고 또한 아무 내색없이 다음 날 아침이면 등교길에 나섰다. 언제나 같이 학교로 향하던 발걸음은 둘 사이에 엄청난 거리를 남기며 떨어졌다. 아침이면 이어폰을 꽂은 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학교로 향하는 가윤의 등줄기만 진하게 노려볼 뿐이다. 물론, 아무리 노려보아도 그 계가윤이 뭔가 설명해 줄 리 없다. 십팔년 된 친구 관계도 깨끗하게 끝낸 천하의 가윤이니 말이다. 그렇게 시원하게 끝장 낼 거라면 뭐하려고 지금까지 친구했는지 모를 일이다. 거 참..애당초 그 긴 시간동안 그래도 친구라고 그 지랄같은 성격을 받아준 자신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협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아야 하잖아..라고 투덜거리며 그는 가방을 들어올렸다.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을 준비하는 자신과는 달리 이과 계통인 가윤과는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렸다. 두 사람이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두 사람 모두에게 친한 양 쪽 부모님들 때문이다. 가윤에게는 아버님 한 분 밖엔 안 계신다. 그것도 잦은 해외출장으로 별로 한국에는 계시지 않았다. 또한 지협의 부모님은 주소만 서울 쪽으로 해 놓고, 부산에서 회 장사를 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지협의 부모님은 가윤을 믿고 있는 것이고, 가윤의 아버지는 지협을 믿고 있는 것이다. 가윤은 공부를 잘했고 침착한 성격이었으며, 자신은 체육을 잘했고 쾌활한 바보였다. ‘쾌활한 바보’라는 말은 바로 가윤이 즐겨 쓰는 표현 중 하나다. 이제는 같은 집에 살아도 둘 사이에 그런 말 들을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얄미운 새끼...... 도대체 어쩌려고....” 쾌활한 바보는 가방을 어깨에 고쳐 메며 혼자 중얼거렸다. 체육특기생 지망자들이 방과 후에 자주 훈련용으로 들리는 ‘휘트니스’ 클럽에는 벌써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입구에서 음료수를 뽑는 찰나에, 그들 중 하나가 반갑게 어깨를 툭- 치며 인사한다. “야아~ 쾌활한 바보~” 이마를 살짝 찌푸리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나영이 보인다. 진나영. 바로 한동안 지협이 헤벌레 거리며 매달리던 그녀. 자신처럼 테니스를 전공하는 그녀는, 잘빠진 몸매에 괜찮은 성격을 가진 여학생이었다. 교복 치마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그 다리에 얼마나 침을 흘렸는지!..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윤이 옆에서 얼마나 비웃는 미소를 지으며, ‘바보. 하반신만 있는 열혈청년’이라고 놀렸는지!!!!! “자꾸 그렇게 부르지마.” 요새는 컨디션이 안 좋거든...이라고 둘러대며 지협이 웃었다. 사실은 나영이 그 별명을 알고 있는 것도 가윤 때문이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부터 나영을 점찍었었는데, 그만 그녀는 가윤을 더 좋아했다. 지금도 그 상황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는 지협이 가윤과 그나마 친구사이었기에 뭐든지 이해하려는 차원이었을뿐. 자신은 입학 이례 계속해서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저울질 당해왔다. “가윤이는 잘 지내? 수업 끝나면 요새 잘 안 남아 있던데?” 나영의 질문에 눈에 띄지 않게 양미간을 흐리며 지협은 대충 얼버무렸다. 지금이라도 백번 그녀를 가윤에게 양보해 줄 마음이 있다. 녀석이 그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 사이를 접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사실, 이런 생각 자체도 짜증난다. 내가 뭐하러 그런 녀석따위를 염려해야 한단 말인가. 그 -!!! 성질나도록 잘난척하는 여유만만한 녀석을! “.......가윤이..요새 정말 그 이상한 아르바이트 해? 아이들이 그렇게 수근거리던데..그게 진짜야?” 뭔가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 있던 지협에게로 나영이 그 말을 던진 것은 복도를 돌아 갈 무렵이었다. 코너를 돌아 트레이닝 장소로 향하기 직전, 그녀가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꺼낸 말이다. 그 순간, 두뇌의 다른 활동이 일시에 정지하기 이르렀다. ..상관없고 싶다. <2> 그러나 그 ‘상관없고 싶음’에 도무지 참여해주지 않는 게 바로 계가윤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새벽 3시를 아우르는 이 시간!.. 지협이 이 시간까지 깨어 있다는 것은 거의 신비에 가까웠다. 그는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배게에 머리를 대자마자 1분안에 잠드는 경의로운 생명이었다. 그러나 그가 올려다보았을 때, 시계는 거의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쯤에야, 비로소 문을 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달칵. 그리고 샐샐샐....청바지 끌리는 소리. 누구의 발소리인지 몸짓인지 모르는 바 아니다. 지난 2년간 뻔질나게 들어왔던 소리며, 지난 십년이 넘게 함께 얼굴 맞대고 살아온 심술궂은 친구의 발소리다. 이 곳은 본래부터 둘 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나마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낯선 감정이 어느 날부터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래도 긴 시간 유지한 ‘친구’라는 이름의 담이 이상한 방식으로 부서진 것이다. 비록 친구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심하게 마음에 걸린다. 지협은 심호흡을 깊게 내쉬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거실의 어두운 밤 안으로 녀석이 흠칫 놀란 채 물컵을 들고 있었다. “너무 늦잖아?” 주방의 불을 켜며, 지협은 잠이 쏟아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북북 긁었다. 자신은 뭔가 표현하고 말하는 것이 가윤처럼 잘 되지 않는다. 가윤은 머리 좋은 녀석이고, 똑똑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바보’라고 놀리며 얄밉게 웃어도 좋은 친구라고 여겼다. ‘친구가 아니다’ 라고 말한 건 어디까지나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가윤에 대한 악랄한 공격이었다. 그것은 최후통첩이었고, 그렇게 했을 때, 가윤 쪽에서 조금의 양보를 해주길 바랬던 거다. 호스트를 그만 두던지, 아니면 최소한의 납득이 갈만한 설명을 해주던지.. 그러나 가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어떤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친구가 아니다...라는 말에 ‘그래’라고 웃으며 대답했고, 등을 돌렸으며, 혼자 등교하고 혼자 하교했다. 어디까지 가나 두고보자..라고 결심했건만, 여태까지 두 사람은 그 날 이후 말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다. 원래 얄미운 녀석이었지만, 그건 긴 시간 친구로써의 동경 조금과 잘난 녀석에 대한 약간의 질투..그런 것들로 적당히 위장된 또래다운 감정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겉보기 얄미워도 본 바탕은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지협이다. 그러나 이 정도면 졌다. 다른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열 여덟살의 어린 호스트라니... 그러면서 생글 생글 웃으며 상대방을 아이보듯 야루는태도라니!!!!..더군다나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니!!!!!!!!! 도무지 그 자세가 괘씸해서라도 화가 치미는 것이다. 친구?..친구고 뭐고 없다. 오늘부터 사과처럼 강판에 갈아 마실 이름이 바로 ‘친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윤은 역시 계가윤이다. 그는 씩씩거리는 지협을 향해 무척 상냥하게 대답했다. “무슨 상관이야, 잘생긴 바보?” 그리고는 잠시 놀랬던 눈동자를 거둔 채, 물 컵에 다시 입을 대고 키득거린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흠칫 놀라는 표정에서 어딘가 모를 피곤함이 엿보였다. 녀석이 놀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너에 대해 떠들고 있다구, 계가윤. 정신차려.” “그러든지 말든지, 니가 무슨 상관이냐니깐? 친구 아니라며?“ 가윤의 검은 머리카락이 기분 좋은 듯 찰랑거린다.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정갈해 보이는 얼굴, 그 수려함에도 짜증이 났다. 필시 자신이 엄청난 눈동자로 노려보고 있을텐데도, 가윤만은 그 표정에 기 죽지 않는다. 원래 이런 녀석이다. 워낙 꼬맹이때부터 같이 자라온 게 그 이유다. 성난 자신이 재미있다는 듯 목을 갸웃거리며 가윤은 키득키득 웃었다. 저 얄밉도록 기생 오라비 같은 얼굴을 한번 칠까..라고 주먹을 꽉 쥐자, 녀석이 다가오며 어깨 위로 손을 걸었다. “이런 식으로 매번 지니깐 안 되는 거라구, 강지협.” “...........치워.” “니 입으로 친구 아니라며? 그러면서 뭘 그렇게 신경 써? 이건 니가 먼저 다시 말 건거다, 알지?” “입 닥쳐, 술 냄새 나.” 녀석이 다가오자, 훅-하고 술냄새도 함께 다가왔다. 계가윤이 술을 마시다니...친구 녀석들과 선생들이 알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교복도 벗지 않은 낭창한 몸이 술주정을 부리듯 찰싹- 달라붙으며 깔깔거렸다. 언제나 자신을 놀리는 재미로 사는 정말 얄미운 이 성격! ..그러나 놀리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십 팔년 된 친구가 호스트를 한다고 선언해서 놀리는 일은 정말 재미없다. 전혀 재미없다. “학교에서....” 술 때문에 몸에 열이 오르는 듯, 교복 넥타이를 풀며 가윤은 자신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언제나 이 딴 식인 건 녀석도 마찬가지다. 마이 페이스..오직 그 뿐인 정말 싫은 녀석. 누구에게나 깔끔한 미소를 보이며 친절하게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친구고 뭐고 지 배알 땅기는대로만 행동하는 지랄같은 이 성격!!! 더군다나, 자꾸만 엉키려 하는 이 습관은 단순한 주정 같은데도 몹시 거슬렸다. 오라, 이제는 술까지 예사로 마신다 이거지.... “학교에서 소문 다 났대. 오늘은 심지어 나영이까지 물었다구, 너에 대해서..” “.........나영이?.........걔가 누구야?.. 아~.. 강지협군을 밤마다 발딱 일어서게 하는 그 여자~ 확실히 섹스는 잘 하게 생겼어. 다리도 미끈하고 가슴도 팡팡하고~“ 마치 언제는 죽도록 친했다고, 자신의 어깨에 비스듬히 한 팔을 걸고 아무렇게나 깔깔거리는 그가 미치도록 얄미웠다. 왜 뭘 해도 이렇게 고약하게 구는걸까. 지협은 가뜩이나 잠이 오는 까닭에 성질을 내며 자신의 몸에 지탱하는 녀석의 팔꿈치를 확- 잡아 당겼다. “정신차리고 똑바로 말해, 계가윤. 그렇게 속물적으로 말하지 말고...“ “속물적인게 어때서? 니 말대로 내가 밤마다 하는 일이 그런 건데, 이제와서 깨끗한 척 굴 필요가..........“ 그 순간, 지협의 뚜껑이 확- 열렸다. 무심결에 그는 팔을 휘둘렀고, 아주 짧은 찰나에 손바닥 아래로 미끈한 피부가 아프게 와 닿는다. 한번도 가윤을 때린 적이 없다. 때릴 만한 일도 없었다. 둘이 서로를 패가며 싸운 적도 없다. 애당초 그럴 일이 생길만큼 서로 진짜 상처 낸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찰싹’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 직후였다. 자신이 방금 가윤의 뺨을 때렸다. 그로부터 한 5초 정도 흘렀다.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말없이 서로를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녀석은 놀란 것 같지도, 혹은 화 난 것 같지도 않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으니 말이다. “....................아프잖아?” 조금 전까지 너무할 정도로 깔깔거리던 그 녀석. 계가윤이 문득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만지며 씽긋- 웃었다. 녀석이 점점 손도 못 쓸 정도로 악질이 되어 간다는 것과, 또 자신이 녀석을 때렸다는 두 가지 사실에 어안이 벙벙한 지협이 오히려 당혹할 지경이었다. 맞은 쪽은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듯, 태연하게 자신을 움켜진 지협의 팔을 깨끗이 풀어 놓는다. 그 침착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맞은 쪽도, 잘못한 쪽도 분명 저 녀석인데, 왜 그 깔끔한 얼굴에 남은 손자국으로 자신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 십새야...” “.........?” “..머리 좋은 니가 아무리 우습게 생각하고 좇같이 날 비웃어도.. 나영이는 내가 좋아하는 녀석이야.“ 보다 진지하게 말하자, 녀석이 ‘아하~’라고 짧게 탄식하며 다시 샐샐거린다. 부어오른 뺨과는 대조적으로 삐딱한 미소다. 갑자기 그 미소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18세인 자신이 욕으로 허세를 부리는 대신에, 이 녀석은 미소로 허세를 부리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허세일까. 무엇을 위한 위장이며, 무엇 때문에 아니꼽다는 듯 히죽거리는걸까. ....도대체 이 녀석과 지낸 그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에, 녀석이 이 딴식으로 웃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 일까. “그럼, 강지협.......” “......?........” 여전히 그린 것같이 미소지으며, 가윤은 마침내 교복 넥타이를 휙- 하고 풀어버렸다. 남은 한손으로 답답한 듯 셔츠 앞자락을 풀자, 섬세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갑자기 지협은 순간적으로 뒷걸음쳤다. 무언가 침묵과 같이 공격받는 위협을 느낀 것이다. 머리 나쁜 자신으로써는 설명하기 힘든 종류의 위협이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나는 것을 힐끗 쳐다보며, 녀석이 묘하게 웃었다. 조금의 무방비같이 씁쓸한 미소..설명할 길 없이 정체모를 그 이상한 웃음. 그리고는 조금 전보다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럼, 강지협............” “...........” “......그 여자에게나 잘 하라구. 니 여친이 될 여자말야.“ “.................” “...친구도 아니라면서 나 같은 거한테 신경 쓸 필요 없어.” “..........친구 아냐.” “..그러니깐,..넌 단순한 놈이니깐 한 가지 일에나 신경 써. 내가 밖에서 뭘 하든 니 알 바 아니잖아, 그렇지?“ 꼭 그럴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흡사 더러운 걸 피하는 듯한 자신에게서 상처 받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밤. 처음으로 지협은 온 밤을 꼴딱 샌 채, 학교에 등교해야 했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다! ************************** 그리고 망할 놈의 키스마크. “야, 너 계가 놈 목에 있는 멍자국 봤어?” 담임의 지루한 종례를 끝내고 지협이 가방을 드는 순간, 다른 반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1학년 때 가윤과 자신과 같은 반이었던 이태라는 녀석이다. 말 많고 시끄러운 이태 새끼. “진짜?” 이태의 그 호들갑에 지협은 다소 사납게 가방을 어깨에 둘러맨다. ‘씨바, 좇같네...’라고 중얼거리자, 일순 분위기가 세-하게 굳었다. 이태가 쫑알거린 ‘계가 놈’이란 다름아닌 계가윤이고, 목덜미의 멍자국은 바보 아니면 다 알정도의 키스자국이다. 오늘 등교할 때 보았다. 교복으로 결코 가릴 수 없는 목덜미에 나 버린 그 보라색 흔적을. 보라색보다 조금 붉은 빛을 띈 그것은 절대 벌레에게 물린 자국도, 혹은 맞은 자국도 아니었다. 한국의 18세, 혈기 왕성하고 욕 잘하며 ‘친구’라는 커뮤니티를 가진 그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바로 그 자국! 망할 놈의 키스마크. 갑자기 울화가 솟구치는 자신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힐끔 힐끔 눈치를 보며 떠들기 시작했다. “우아..그거 좇나 세게 빨아들여야 남는다고 하던데...” “그래, 여러번 해줘야 남는다구~” “씨바, 그 잘난 척 하던 계가 놈이 누구랑 그랬다는 거야, 도대체? 인기도 졸라 많네, 그 새끼... 하긴, 인물은 꽤 되니깐..그래도 어떤 여자가 용감무쌍하게 계가 놈한테 그런......“ “야야~ 여자 아니래. 얘들이 그러는데, 남자가 한..” 그 때쯤에 지협은 정말 거칠게 교실문을 닫고 나섰다. 등 뒤에서는 지협까지도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쳐다보며 지들끼리 떠드는 무리들만 남았다. 그들에게서 들려오는 말들은 단편적이어서 가희 짐작하기 힘든 대화였다. 주로, ‘졸라’ ‘씨바’ ‘우웩’ ‘진짜?’ ‘남자랑 빠구리도 해?’ ‘구라치지마, 십새꺄..’ 등등의.. 흔히들 할 수 있는 18세, 한국의 남자새끼들에게의 전형적인 커뮤니케이션. ‘좇’에서 시작해서 ‘좇’으로 끝나는 한결같은 녀석들이거늘.. 이제 그들에게 조금 상식 밖의 대 사건이 터진 것이다. 동경이든, 충격이든, 구역질이든 뭐든...전혀 예상 밖의 그 무엇! ********************** 트레이닝을 대충 끝내고 라켓을 집어 들었을 때, 나영이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왔다. 새삼 그 표현이 생각났다. 친구를 잃으니 여자가 생겼다..라고. 가윤의 문제가 종종 화젯거리가 되는 요새 이전에, 나영이 이렇게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입을 연적은 별로 없었다. “넌 괜찮아?” 저녁 햇살이 나영의 어깨 위에 부딪쳤고, 코트에서는 공 튀기는 소리가 밝게 울렸다. 대학교 코트를 빌려 곧잘 연습하는 그들에게 이 공간은 미리 맛보는 에덴과도 같았다. 단 하나, 얄미운 친구에 대한 염려만 빼면 말이다. “뭐가 괜찮아?” 다소 시큰둥한 자신의 대답에 나영이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진다. 보나마나 ‘가윤’에 대해 묻고 싶은 그녀다. 아서라, 여자여. 그 녀석은 18년 친구인 나도 속일 정도로 속물인 인간이라니깐. 완전히 타락했어. 정말 엉망이라구! 그러나 나영은 지협의 공포스런 외침에도 상관없이 보다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가윤이 그럴 녀석 아닌 거 같은데, 니가 뭐라고 알아봐야 할 거 아닌가? 너랑 그래도 제일 친한 친구잖아?“ “안 친해. 그리고 그 녀석 생각보다 밥맛이야. 니들은 몰라, 그 새끼가 얼마나 .......” “..........?........” 말을 꺼내다 다시 입술을 꽉 깨문다. 뭐라고 말 못하겠다. 녀석이 밖에서 웬갖 짓을 하건, 자신과는 이제 결별한 인간이다. ‘친구도 아니다’라는 그 어마무시한 말도 샐샐거리며 피해간 인간이다. 지협은 내심 궁금해하는 나영을 보며 그냥 쓰게 씨익- 웃었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소문이 쌓여질수록 이런 종류의 일은 공격적이 될 게 뻔했다. 하다못해 십팔세가 되도록 보지도 듣지도 못한 ‘따’가 되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며 지협은 나영보다 더 무겁게 한숨을 쉰다. 테스트가 끝날 때까지 절대 입에 대지 않겠다는 담배..그 미련한 한 모금이 눈에 거슬릴 정도로 그리워진다. “나영아, 우리 달 말에 영화나 보러갈까?” 지협은 아무런 생각없이 대뜸 내뱉었다. 말 그대로 머리 속에 지끈거리는 뭔가를 잊기 위한 도피같은 제안이었다. 나영이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하더니 이내 씽긋- 웃는다. 일종의 찬성이다. 역시 연인을 얻기 위해서는 조금 쓰지만, 친구를 외면해야 할 때도 있다. ********************** 그렇게 두 주가 흘렀다. 예상했던 대로 가윤의 그런 행동과 더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뒷담화들은 이제 곧잘 입에 오고 내리는 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다. 가윤 자신이 그걸 느끼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행동이 앞서는 지협으로써는 이상한 위기의식 정도야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식으로 떠들어대던 녀석들 중 일부가, 곧 진지한 거슬림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이 된 키스마크부터 해서, 곧잘 이상한 흔적들을 달고오는 가윤이 오히려 문제였다. 하려면 표를 안 내던지...라고 속으로 욕설을 씹어 넘기며, 지협은 어지간하면 관여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니, 사실은 가윤 쪽에서 관여할 여지를 만들지 않았다. 언제나 지협의 말투를 놀리며 녀석은 되려 비웃는 얼굴이다. 다른 녀석들에게는 친절하고 성격 좋기로 한 계가윤이, 왜 자신에게는 그토록 엉망이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쯤에 사건이 터졌다. “계가윤이 지일이한테 터졌대!!!!!!!!!” 누군가 지협의 반 문을 힘차게 열고 소리쳤다. 남학생 반과 여학생 반이 나눠진 그들로써는 가끔 눈에 띄게 싸움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성적 좋고, 성격좋고 - 물론 지협에게만 빼고- 친절한 계가윤이 그런 일에 끼여들 리가 없다. 끼여들 꺼리가 있다면, 바로 요새 녀석이 하고 다니는 요상한 행동과 바로 그 문제의 알바에 있는 것이다! “야, 너 안 가봐, 강지협? 문을 열고 들어온 녀석이 앉아 있는 지협을 향해 소리친다. 가윤의 반에 있는 남지일이라는 녀석. 주먹이 매섭기로 전교에서 소문난 녀석이다. 또 그 녀석의 꺼림직한 눈동자는 어떤가. 사고 잘 치고, 문제 많기로 유명한 녀석이다. 지협은 어찌해야 할까..라고 생각하며 일단 끄응- 하고 허리를 일으켰다. 자신의 입으로 ‘친구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어지간히 걱정은 든다. 더군다나 한 두달에 한번 정도 올라오시는 부모님도 이제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은근히 눈쌀을 찌푸리는 사이, 지협은 자신과 가윤의 반을 쭉 이어가는 시멘트 복도 위를 조금 빠르게 걸어갔다. 이미 저 쪽 구석에 한 패로 둥그렇게 모여든 녀석들이 보인다. 여학생 반에서도 아이들이 일제히 뛰어 나왔다. 하느님 제기랄..나영이도 눈이 동그래진 채, 싸움터로 향하고 있었다. 퍽-하는 둔탁한 주먹질 소리. 한 눈에 보아도, 입이 찢어진 가윤과 턱 끝이 붉은 지일이 보인다. 오라, 지일은 가윤의 면전을 향해 어퍼컷을 매겼고, 가윤은 지일의 턱을 올려지는 화려한 필살기를 보인 것이다. ..........만은, 어쨌든 싸움은 말리고 본다. “야,!!!!!!!!!!!” 대뜸 인파를 헤치며 큰 소리 치는 지협에게로 아이들의 시선이 일순 몰려든다. 절반 대 절반이다. 그러니깐, ‘십새꺄, 방해하지 마’ 라는 시선 절반과, ‘그래, 강지협 너라도 좀 말려라’ 라는 시선 절반. 지협은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계윤의 멱살을 쥐고 있던 덩치 좋은 지일도 같이 눈매를 날카롭게 만들며 이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체육을 하는 자신이 그런 눈길이나 몇 번의 주먹질에 끄떡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지협은 단단한 상체에 팔짱을 끼고 웃기다는 듯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너, 남지일.. 그 새끼 놔.“ “씨바, 좇같은 게 어디서 놔라 마라 씹쌍질이야!” .........역시 우리나라의 무서운 18세 중 많은 수가 특이한 커뮤니케이션을 갖는가보다. 아무리봐도 가윤이 먼저 지일을 때렸을 리는 없고, 보나마나 저 녀석이 시비를 건 거라고 생각하며 지협은 조금 삐딱하게 웃었다. 아니, 그 녀석 왜 건드려? 니들이 싸울만큼 뭔가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나 지일이 지협의 매서운 시선에 멱살을 놓고 바닥에 침을 탁- 뱉는 순간 뭔가 명치에서 답답하게 걸린다. 지일은 자신의 패거리 쪽으로 걸어가며 지저분하다는 듯, 가윤의 상반신을 손으로 떠밀어 버린 것이다. 잠시 가윤이 휘청거렸다. 하얀 교복 셔츠가 심하게 구겨져 있었고, 넥타이는 둘 다 어디 팽개쳤는지 모르겠다. 그 때 바로 지일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니가 이 녀석 서방이라도 돼? 요새 이 녀석 때문에 반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아?“ “...........-!!!!!!!!!!!!” 서방이라니.. 장난으로가 아니면 아무도 그런 말 쓰지 않는다. 지협은 짙은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서늘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집어드는 가윤과 지일을 번갈아 쳐다본다. 뭔가가 있다. 이들이 싸운 것은 그냥 또래들의 치기어린 다툼이 아닌 것이다. 지일이 그 생각에 쐐기를 박듯, 모여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지협을 비웃었다. “너랑 이 녀석이랑 친하다며, 강지협. 그럼 니가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이 녀석 때문에 이 반 얘들이 모두 에이즈에 걸리면 어떻게 해? 그 땐 니가 책임질래?“ “.............-!!!!!!!!!!!!”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다. 질끈거리는 명치 부근의 통증이 흡사 갈비뼈가 나갔을 때의 아픔과 비슷하게 다가왔다. 그래..라는 생각이 먼저 든 것이다. 결국 그 소문들 때문이구나..라는 빠른 판단으로 지협은 가윤을 향해 노려보듯 시선을 돌린다. ‘제발, 이젠 정신 좀 차려, 이 새꺄....너 정말 그러다 따 당하면 어떻게 할래..’ 라는 엄격한 눈길이었다. 그러나 가윤은 헝크러진 머리카락, 그 사이로 손을 꽂아 아무렇지도 않게 쓸어 넘긴다. 그리고는 다시 집어든 교복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며 아무런 표정없는 시선으로 남지일을 쳐다보며 씽긋- 웃었다. .....웃어? 니가 지금 웃음이 나와, 이 천하의 재수없는 계가윤!!!!!!!!! “저 녀석은 내 친구 아냐, 남씨..” 가윤이 천천히 입을 열자, 갑자기 싸한- 물길을 공격 받은 듯, 세상이 얼어붙는다. 싸움에 의해 가빠진 숨결 때문인지, 조금 할딱거리는 호흡을 잠재우며 가윤이 피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쓰윽- 닦아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못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분명한 어조로 웃으며 덧붙였다. “........저 녀석은 내 친구도 아니라구, 남씨. 친구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냐.“ 저 새끼가!!!!!!!! 일순간, 지협은 가윤을 때릴 뻔 했다. 이 난동과 싸움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볼 여유도 없이 그는 주먹을 쥐고 상반신을 바람처럼 뻗은 것이다. 만약, 그 순간 나영이 뒤에서 말리듯 셔츠를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필시 가윤을 때렸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지윤은 핏기 배인 도톰한 아랫입술을 비스듬히 올리며 웃었다. 그 생생한 놀림같은 웃음에 치가 떨린다. 오냐, 그래..이제 진짜 친구 아니다. 내가 두번 다시 니 걱정같은 거 하나 봐라. 어디 두번 다시 니 이름을 내 입으로 담는가 봐라. 기껏 걱정되어 찾아왔더니, 뭐 어쩌고 어째? “....그래, 남지일.” 지협은 조금 뒤로 물러섰다. 나영이 뭔가 겁에 질린 것처럼 지협의 팔꿈치를 꽉 잡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 속이 뒤집혀서 머리 속이 온통 헤집어 진다. 마침내, 그는 조금 차가운 듯한 인상을 주는 가윤의 눈매를 똑바로 노려보며 마찬가지로 똑똑히 대답했다. “그래, 남씨.. 니가 뭘 잘못 알았나본데...“ 지일이 다시 못마땅하다는 듯, 가윤을 노려보았다. 아마 가윤이 ‘사내 녀석들과 잔다’라는 소문이 이제 단순한 장난같은 소문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꼭 필요하다고 우기는 ‘희생양’ 그러니깐 ‘왕따’와 같은 핑계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여기 모여 있는 모두가 그걸 걱정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 중에서도 지협은 가장 어중간한 경계선이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윤의 표면적인 오랜 친구이자, 룸메이트 인 것이다. 지협이 있는 한, 그들 중 누구도 가윤을 정말 ‘왕따’ 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협 역시 그런 것 때문에 가윤이 보다 조심이라도 했으면..하는 게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완전히 판가름났다. 이번에도 가윤 쪽에서 먼저 자신을 포기했다. 믿을 수 없다. 내가 그렇게 죄를 많이 지었나..도대체 내 어디가 어릴 때부터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나쁜 새끼.. 씨파, 지랄 난장 쳐 먹을 새끼... 언제나 얄미운 얼굴, 얄미운 미소, 얄미운 목, 얄미운 손목, 얄미운 몸!!!!!!!!!!!!!!!!!!!!!!!!! “.........난 저 녀석 친구 아냐.” ..라고 지협이 말했다. 역시 한 10초 정도 정적이 흘렀고, 다섯 번 눈을 깜박인 지일이 그 말에 조금 흡족하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공식적인 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윤이 자초한 것이다!! 반면 지일을 몹시 재미있다는 듯, 비아냥 거렸을 뿐이다. “..불쌍한 호모 새끼........ 봐라, 니 절친한 친구도 등 돌리잖아, 이 십새꺄....“ 거짓말. 이 자리에서 먼저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한 게 바로 가윤이다. 지협은 나영이 ‘말도 안돼...’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쿵쾅 쿵쾅 뇌를 짓이길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돌아서기 전에 잠시, 그 공식적인 단절에 이 쪽을 바라보던 녀석이 떠올랐다. 아주 약간...........남들은 전혀 모르지만, 십팔년 지우인 자신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너무나 미묘한 변화. 녀석의 얼굴이 조금 핏기 가신 듯 창백해졌다. 그리고도 너무나 대조적이여서 선명한 붉은 핏줄기도 덩달아 보였다. 녀석은 입술에서 피를 스윽- 닦아내며 말없이 자신을 향해 웃은 것이다.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얄미워 죽겠다. 왜 갑자기 이 모든 일을 엉키게 만든단 말인가! 왜 늘 계가윤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만 그토록 엉망인 인간이란 말인가!!!!!!!!! *******************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심지어, 지협이 여느때처럼 밤 늦게 집에 들어왔을 때조차도 가윤은 그곳에 없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여느 때처럼 별 탈 없다는 거짓말로 둘러대고 깜박 잠이 든 게 아마 새벽 서너시였을 것이다. 그 때까지도 지협은 약간의 피로감과 걱정, 그리고 분노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오늘 밤만은 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잠이 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아침에 부랴 부랴 부은 눈꺼풀을 떴을 때,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계윤이 어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녀석은 그 난리를 친 학교에도 오늘 등교하지 않았다! 오후 늦게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계윤의 담임이 자신을 호출할 때쯤에야 지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얼굴을 보지 않은 부모님께 거짓말하듯 적당히 말하고 나오는 순간, 교무실과 마주보는 창 밖으로 굵은 빗줄기들이 연신 쏟아져 내린다. 학교는 수업을 시작했는지 복도 끝까지 지나치게 조용했다. 지협은 정말 오랜만에 수업을 째듯, 건물 입구까지 걸어 나왔다. 설렁 설렁, 교복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걷는 자신은 어딘가 넋이 빠진 듯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대로 그는 수업이 마치는 종이 울릴 때까지 한참, 건물 입구에서 바깥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보고 있었다. .........자신은 가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둔하지도, 혹은 바보도 아니다. 다만 얄밉기 짝이 없게 문제를 회피해가고, 천재들이 곧잘 그렇듯, 샐샐 웃으며 남을 비웃지만 않는다면 더 적극적으로 이 난관을 해결할 용기도 있다. 갑갑한 마음에 차가운 손바닥을 이마에 올려 여러번 쓸어내린다. 살면서 이만큼 가윤의 목을 조르고 싶었던 일은 정말 없었다. 어디에 있던지 오늘 찾아내기만 하면 정말 끝장을 보고 싶을만큼, 지협은 코너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한창 수업을 받고 있을 나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위반인지는 알지만, 그녀에게 문자라도 보내면 마음이 편해질까..라는 생각이 속절없이 든다. 비가 내리는 날은 트레이닝 외에 연습이 더 없다. 갑자기 뭉그러진 하루의 일상, 무너져버린 일상의 편안함이 눈 시릴 정도로 그리운 오후였다. <3> 가윤은 압구정동 호스트 바 Ananomi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곳 사람들은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것을 모른다는데 있다. 사촌 형의 전공책과 학번으로 나이를 대충 속였다. 그것이 안 좋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행여 단속이라도 뜨는 날엔 미리 알게 되기 때문에 편했다. 고급사람들을 상대하는 고급 요정은, 그래서 계윤이 선택한 마지막 보루였다. 어제 처음으로 Ananomi 에서 손님과 2차를 뛰었다. 한마디로 난생처음 외박을 한 것이다. 아마 같이 사는 녀석은 자신이 안 들어왔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게 뻔하다. 그럼에도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그 손님으로부터 도망 나온 오늘 오후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바보같은 강지협은 자신이 없으면 우산도 챙겨가지 못할텐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쓰디 쓴 위장액이 거꾸로 솟는 것 같은 웃음이다. 가윤은 옷과 머리에 묻은 빗줄기를 털어내며 Ananomi의 입구에 들어섰다. 집으로 돌아가거나 늦게 학교라도 가 볼까 생각했지만, 이미 한번 잘못 이탈한 젊음의 궤도는 수정될 줄 몰랐다.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Ananomi 밖에 없었다. 달칵..둔탁한 문소리를 내며 아무도 없는 빈 룸에 앉는다. 구석 구석 젖은 곳에서 뜨거운 몸의 열기와 맞물린 채 하얀 김이 서렸다. 가윤은 아무 생각없이 손바닥을 쥐었다 풀었다를 서너번 반복했다. 그 때 쯤에 바로 규철이 들어섰다. 자신이 Ananomi에 오는 것을 규철이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혹은 룸서비스 중에 하나가 찔렀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Ananomi의 가장 고참 호스트 중 하나이며 가장 돈을 잘 버는 호스트 중 하나인 김규철의 안색이 별로 편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윤은 규철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눈에 띄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제발...’이라고. “계가윤.” 규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잘못한 일들, 혹은 Ananomi에 거짓말 한 것들을 그가 이제 알아낸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지금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정말 싫다. 그러나 상대방은 자신의 맞은 편 쇼파에 털썩 몸을 앉히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미 입을 열고 있었다. “너 어제 작업 갔었지?” 작업이란 2차를 의미한다. ‘전투복’으로 갈아입어..라고 손님이 말한다면, ‘2차 갈 준비를 하자’라는 말과도 같다. 즉, 그냥 술 따르고 적당히 유희를 맞춰주는 것을 떠나서 말그대로 섹스를 하러 간다라는 것과 같다. 그래, 규철의 말이 맞다. 어제 Ananomi에 온지 처음으로 가윤은 2차를 따라나섰다. 한마디로 작업을 갔었다. “오늘 니 손님에게 항의 전화가 왔었어. 매니저가 두손 빌어 사과드렸지.“ “.................” 가윤이 혼자 쉬는 룸에 규철이 들어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2차를 따라나섰을 뿐, 가윤은 Ananomi라는 일급 호스트 바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도망쳐 버린 것이다. “왜 도망쳤지?” “..................” “..경험이 없어서?.........상대가 남자라서?......” “.............” 규철이 셔츠 주머니에서 래죵을 꺼내 불에 붙였다. 아마 찰칵-하고 고급 라이터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그 희미한 불빛으로 그가 쓰게 웃는 입매가 언뜻 보였던 것 같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가윤이 즐겁다는 듯 웃고 있자, 규철도 마주 대답하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짧게 덧붙였다. “아니면, 니가 미성년자라서?” “............-!!!!!!!!!!!!!!” “것도 아니면, 니가 좋아하는 다른 녀석이라도 생각나디? .......니가 보기엔 여기가 놀이터냐?“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규철은 웃는 눈동자였지만, 동공 너머의 영혼은 유리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두근‘- 하고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 뛰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 계가윤.” “......형.........” “너 한번만 더 여기에 발 들이밀면 학교에 전화한다, 이 십새꺄....” “.........규철이 형!!.......” 어른들의 고급 양복. 그 옷깃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윤이 다소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갑자기 뭔가 참으려 할 때마다 식도 부근에서 어른거리는 이 절규같은 비명은 곧잘 내부를 할퀴고 지나간다. 속이 따끔거리고 아픈 상태다. 호텔에서 Ananomi 까지 오는 동안 맞은 비와, 방금 규철이 꺼낸 한 마디에 머리 속의 핏기가 잔뜩 빠져 나간 것 같았다. 뭔가 자신을 부르는 가윤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들렸는지, 규철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찌푸리는 것처럼 안색을 달리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눈길이 변한다. 가윤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위 쪽에서 일어나는 통증이 심리적인 것 이상으로 정말 아팠던 것이다. 망할 놈의 위통. 얼굴을 조금 묘하게 찡그리는 사이, 규철은 안색을 살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짧고 건조하게 웃었다. “..가윤아.” “................” “........왜 우냐?....” “.........-!!!!!!!!!!!!” 울고 있는지 몰랐다. 가끔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다는 의식이 너무나 짙어져서 이제 어느 시점까지 와 있는지조차 짐작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내일부터는 자신을 보자마자 주먹부터 휘두를 것 같은 규철이 낮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한대 콩-하고 쥐어박았다. ******************* 술은 마실 수 있겠지..라고 말하며 규철이 맥주를 두어 개 가지고 왔다. 미성년자인지 몰랐을 때야 양주를 곧잘 쓰리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가차 없었다. 예약 받은 손님도 있을텐데, 흠뻑 젖은 자신에게 타올을 내밀며 그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에 삐딱하게 웃으며 놀리듯 되묻는다. “그래서... ...결국 열 여덟 먹은 계가윤이 나이까지 속이면서 이 짓을 하려는 이유가 같이 사는 그 친구 때문이라 이거지?” “...친구 아니예요.” 가윤이 담배에 손을 가져가자, 규철이 손등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린다. 뭔가 ‘보호받고 있다’라는 기분이 조금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김규철은 확실히 Ananomi에서 가장 세련되고 오래된 호스트다. “친구든 뭐든, 안기고 싶은 건 사실이잖아,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 할 수 없잖아요...라고 말하며 가윤이 안 들리게 얼굴을 붉히고 투덜거린다. 규철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거라도 하면 테크닉이라도 좋아질까봐? 테크닉 좋고, 죽여주게 섹스 잘한다고 아무나 안을 수 있으면 왜 모두가 이 짓을 안 하는데?“ 점점 놀리는 듯한 말투에 가윤은 조금 싸늘하게 웃으며 댓구했다. “...테크닉이 좋아지든 아니든, 그 녀석은 나 안 안아요.” “...그렇기도 하겠지.” “세상에 여자들이 모두 사라져서 여자들의 제국과 남자들의 제국이 따로 생긴다고 해도..” “..그건 너무 삭막한 상상이군.” “..그래도 그 녀석은 나 못 안아요. 세상에 남아 있는 인간이 유일하게 하나 뿐이고,.. 그 하반신 바보새끼가 발정기를 맞는다해도..“ “..어린 놈이 못하는 말이 없군.” “..그래도 그 녀석은 절 안지 않을 거예요.” “........그 녀석 수도승이냐? ...세상에 너 밖에 안 남았으면 그래도 재고의 여지가 있는 거 아닌가? 너무하네, 그 친구..“ 조금 전에 규철이 자신에게 ‘왜 우냐’라고 물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이유, 그러니깐 막 짓눌린 것처럼 압력을 가하던 상반신의 억한 감정이 불쑥 튀어 나온 것이 지나지 않았다. 휴우-라고 짧게 한숨을 쉬고, 가윤은 조금 미소지었다. 언제나 지협이 녀석 앞에서만은 잘 지을 수 있는 그 위장같은 미소처럼 이번에도 입 끝이 단단하게 말려 올라간다. “.........난 그 녀석 친구니깐요. ..그것도 같은 사내 녀석.. 어릴 때부터 얼굴보고 자라온 동네 불알친구..이니깐요.“ “......그럼 더 해줘야지.” 규철이 그 아슬아슬한 미소를 힐끗 쳐다보며 마음에 안든다는 듯 투덜거린다. 가윤은 그의 어린애같은 불만에 조금 하하 거렸다. 약간의 취기와 조금 우울한 날씨..뭐 그런 것들이 단단히 한 몫 했던 거다. 보통 때 같으면, 아무리 미성년자라는 걸 들켰다고 해도 규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 사실은, 아무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목욕도 같이 했고..” “..상대에 대해 많이 안다는 건 좋은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 녀석은 잘 되어가는 여자친구도 따로 있어요.” “..그건 좀 문제군. 정정당당해야지.” “........그러니깐요. ..아무리 정정당당하게 내가 몇 십년을 옆에 붙어 있어다 한들.. ......그 녀석이 그 오래된 친구를 새삼 다르게 볼 리가 없죠. ..더군다나 전 여자도 아닌걸요.“ 그건 복수다. 어떻게 보면, ‘친구’..그것도 몇 십년간 잔인할 정도로 이어져 온 그 관계에 대한 복수. 원하지도 않았는데, 줄곧 그 이름이 강요되어 온 사회에 대한 복수. 혹은 그것을 용납하지도 않은 이 사회에 대한 삐뚤어진 자해극. 처음에는 전부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바보같은 녀석과 호호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18년의 무게만큼의 자꾸 삐그덕 거린다. 녀석의 여자..그런 것이 생길 거라고는 신경도 안 썼었는데, 거기서부터 모든 사이의 틈이 벌어진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계속 나영이 이야기를 해왔다. 결국 나영이 가윤 자신에게 더 호감을 갖는 것은 그 성격좋은 바보 녀석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닌 것이다. 이제 틈은 더욱 벌어졌고, 심지어 엊그제 녀석이 자기에게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진심으로 ‘친구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때는 조금의 쾌감마저 느껴졌다. 그래, 난 니 친구 아냐, 친구같은 거 정말 싫어...잘 됐네..라고 생각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사이, 덩치 좋은 녀석의 등 뒤로 대롱 대롱 따라나서는 그 여자, 나영이도 함께 보였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기분이 이토록 추락하는지 미처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녀석의 무대에서 자신이 기껏해야 오래된 친구, 그 조연의 역할로 머무른다는 게 이렇게 패배감 느껴지는지도 미처 몰랐다. 어차피 이젠 잡아줄 사람도 없다. 친구를 사랑하느니, 혹은 자신에게는 숭고한 우정, 그 이상의 것도 없는 그런 녀석을 사랑하느니.. 스스로에게 가혹한 체벌을 가하는 쪽이 훨씬 쉬웠다. 가윤에게 있어 십팔세의 늪은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쪽과 다른 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나영처럼 될 수 없다. 그것은 슬프고도 두려운 일이다. 바로 스스로에게 언제나 ‘포기할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기분 때문이다. 이년 째, 날마다 그 넉살좋은 녀석이 헤헤거리며 ‘오늘은 나영이가 말이지..’라고 말했을 때의 기분 같은 건 정말 엿먹는 맛이었다. 녀석은 순수한 우정에 기대어 털어 놓는 유쾌한 속마음이었지만, 날마다 가윤은 속에서 유리사금파리가 춤추는 기분이었다. 녀석은 자신의 여자에 대해 매일같이 떠들어댔다. 반면에 자신은 얼마나 갈비뼈 아래가 너덜 너덜해졌는지, 아직도 제대로 숨을 쉰다는 게 간혹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이번에는 녀석이 등 돌려주길 바랬다. 제발..그 성격좋은 녀석이 ‘이젠 내 친구 아니다’라고 말해주길..얼마나 얼마나 빌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린 아무런 연관도 없이 모르는 사이다.‘..라고 체념 당하는 순간, 정말 고문과도 같은 이 5년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4> 이건 역시 십 팔세의 늪이다. 돌아갈 곳이 뻔하다는 바로 그 ‘늪’. 결국 규철의 엄격한 몇 마디 경고로 인해, 가윤은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뭔가 작심하고 가출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지협이야 워낙 '유쾌한 바보'다 보니 이런 종류의 일에 크게 쓰지 않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녀석이 실내 트레이닝이라도 끝내고 돌아오려면 밤 9시를 훌쩍 넘겨야한다. 지윤은 그 사이에 집으로 들어와 어두운 거실의 불을 켜고, 간단히 샤워를 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몸을 깨끗한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는 사이, 마치 비밀을 캐는 사람처럼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린다. 좀처럼 보기 힘든 성급한 그 행동에 놀라기도 전에 알아차렸다. 녀석이다. 십팔년의 친구, 지나한 룸메이트, 강지협. 바로 '도대체 이런 녀석이 뭐가 좋을까.'라고 스스로도 한심하게 늘 생각했어야 했던 그 상대. 유쾌하고 잘생긴 바보 강지협. 녀석은 잠시 환한 거실 불에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리다가 주방 쪽에 서 있는 가윤을 힐끔 보았다. 역시나 조금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둘 다 공식적으로 '친구도 뭐도 아니다'라고 말한 그 힘겨운 사건을 떠올리는 듯, 크고 단단한 손바닥을 들어 잠시 머리를 쓸어 올린다. 한동안 거실 이 쪽 끝과 주방에서 마주 보는 듯, 서로 멈춰버렸다. 녀석은 뭐가 잔뜩 불만이 어려 있고, 한편으로는 뭔가 불분명한 시선으로 욕을 낮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이내 가윤에게는 아무런 볼 일이 없다는 듯 차갑게 등을 돌리며, 냉정하게 말문을 열었다. "계가윤.. ...너는..............." "나 귀 안 먹었어. 그렇게 이 악 물고 이야기 할 필요 없어, 잘생긴 바보." "장난치지마. 이 새꺄. 니 눈에는 니 오래된 친구인 강지협이 호구로 보이냐? 니가 밖에서 남자를 껴안든, 여자를 껴안든,.. 니 몸을 팔든, 뭔 더러운 짓을 하든 그건 니 사정이지만............" "...........내 사정이지만?" 차가운 금속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지협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려는 걸음을 잠시 멈춘다. 입으로는 웃고 있고, 말로는 장난스럽게 되받아치지만, 가윤으로써는 그 냉혹한 등에 조금 숨이 막혔다. 거절당하는 것이 싫어서, 혹은 혼자만 상처에 베이고 피투성이가 되는 게 싫어서 이런 관계를 자초했지만, 조금 전처럼 녀석이 경멸과 한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볼지 몰랐다. 자신이 아는 강지협은 그렇게 냉혹한 녀석이 아니다. 냉정하기는커녕, 무르고 물러 터져서 언제나 가윤의 얄미운 잔꾀에 잘 속아 넘어가는 잘생긴 바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날카롭고 또 벌레처럼 쳐다보는 친구의 눈길은 처음 보았다. 그건, 장난 식으로 '넌 나 안을 수 있냐? 난 그렇게 되길 원하는데?'라고 물었을 때보다 더 정도가 심하다. ...........하긴, 강지협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라고 가윤은 생각해왔다. 녀석은 성적이 좀 안 좋고 천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과 굉장히 사교적이고 인간적이며 그러면서도 상식적인 녀석으로 통했다. 이른바 노는 것을 좋아해서 조금의 불량스런 면도 있었지만, 녀석은 결코 세상이 정한 룰 안에서 즐기는 건전한 한량 중 하나다. 한마디로 그는 잘 놀면서도 강직한 바보. 그 자체였다. 한번 정한 답을 절대 바꿀 생각이 없는 너무나 건강한 정신세계의 사내. 바로 그것이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그런 녀석이라는 사실이다. 가윤은 녀석의 상식적이고 유쾌하고 호탕한 면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녀석인지도 다 알고 있었다. 운동으로 체육과에 입학하겠다고 결심하던 때부터 2년간 줄기차게 입에 달던 담배도 끊은 녀석이다. 윤나영이 예쁘다..라고 벙실 거린 그 멍청한 순간부터 2년 내도록 그 여자만 생각하고 결에 있으며 즐거워하는 그런 밝은 녀석이다. 그러니 방금 쳐다본 그 싸늘하고 혐오 가득한 눈길은, 정말 가윤에게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향해 애정 어린 한마디를 쏟아주길 기대한 것도 결코 아니지만, 마음 언저리를 씁쓸하게 짓누르는 비참한 느낌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또한 녀석은 자신에게 더 공격을 퍼붓기 위해 돌아보는 순간에도 이전과 결코 달랐다. 자신처럼 이제 생활이 피곤해 죽겠다는 듯, 거슬리는 미소를 지은 채, '휴우-'라고 짧게 한숨을 내쉰다. 지협은 넥타이 매듭을 가볍게 풀며 천천히, 그리고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가윤을 향해 덧붙인 것이다. "니 남자 냄새 달고 여기까지 오지 마, 계가윤." ".............-!!!!!........." "이만큼 시달리는 것도 좇같이 역겨우니깐, 남자 향수 냄새 달고 집에 돌아오지 말라구, 친구." "......................" "아, 미안~ 우린 친구 아니었지.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냐. 그런 건 친한 사이에나 하는 거지. 난 피곤한 게 싫은 것 뿐이야. "..피곤하다라.. ............하아.. 남들이 뭐라 그러든, 니가 상관없다고 말하면 그만 아냐?" "물론 그렇게 말하고 있지. 니가 뭘 잘 모르는가 본데.." 지협은 입술을 더 일그러뜨리며 오히려 비웃듯 가윤을 향해 지독하게 말한다. 끊임없이 상처, 상처, 상처만을 내는 일만 남은 듯, 어떻게든 이 상황을 도피하고 싶은 가윤이다. 그는 재빨리 식탁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녀석은 모르지만, 움켜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날이 설 정도다. "어이, 계가윤씨.." "...................." "부탁이니깐, 한 집에 살아도 이제 내 앞에서 꺼져 줘. 니 입으로 두 번이나 ‘친구가 아니다‘라고 했으니, 너처럼 똑똑한 녀석이 후회할 리도 없겠지. 나도 이 집에 사는 동안, 니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깐, 너도 이제 이 집에서 내가 없다고 그냥 생각해. 그러는 게 서로 편하잖아?" 더 이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녀석을 향해 고개 끄덕이며 웃는 게 불안해졌다. 가윤은 아주 짧은 순간 시선을 돌린다. 친구놀이의 끝이란, 어린 시절의 단순한 동네 놀이처럼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그런 가윤이었건만, 지협으로써는 당연히 더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강지협은 그래도 의리있는 녀석이다. 그만큼 살 부딪치고 같이 살아왔으니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안다. ..잘 안다. ..언제나 장난처럼 가윤의 머리카락위로 손을 꽂아 마구 헝클어 놓던 겁 없는 탄탄한 손바닥. 그 열띈 체온을 기억해 내며 가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시선을 피한채, 뭔가를 떠올리듯 웃는 자신에게 그는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정말 비수처럼 꽂아대는 한 마디에 가윤은 일순 기억에서 회귀하고 만 것이다.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지난 십팔년 동안, 그나마 너를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 "넌 괜찮은 놈이 되기엔 이미 너무 썩거나 더러워진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런 식으로 사는지 이해도 안되고.. 같은 사내 녀석을 안고 안는다니..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없거든?" "..............그래." "부탁이 있다면, 친구로써의 마지막 부탁인데,...." "............." "제발, 나영이 앞에라도 얼씬거리지 마라. 원래 너라는 녀석이 냉정한 놈이다 보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니가 그 녀석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는 게 나로서는 편하겠어." "..............-!!!!!!!!!!!!!!!" “처음에 니가 나영이 마음 알면서도 그냥 웃으면서 샐샐 받아줬을 때는, 그게 더 잔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보다 요즘의 상황이 더 거슬려. 그냥 서로 없는 셈 치고 살자. 그리고 기왕이면 나영이도 모르는 척 하고 살고.. 나도 내 여자도 병 걸리는 거 싫어.“ 아주 차가운 얼음에 화상을 입는다. 가윤은 한참을 그저 앞만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웃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술에서 세어 나오자, 뭔가 메마르고 퍼석해진 자신의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턱을 다시 치켜들고 묘하게 웃으며 오래된 친구의 눈을 쏘아본다. 정면으로.. 아무에게도 보상받지 못하는 이 거친 감정에 도저히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니가 내 감정을 모른다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냥 웃으며 상대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이 잔인한 일이다’라고 말한 그 장본인이 바로 강지협이다. 그게 바로 지난 2년 동안 가윤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여자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으로 버젓이 꺼내 놓는다. 남은 얼마나 위가 뒤틀리고 신물이 넘어오는데, 잘생기고 유쾌한 바보 따위가 그런 걸 알아!.......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서 가윤은 앞을 쏘아보았다. 녀석의 멋뜨러진 미간이 잠시 그 시선에 불만을 가진 듯 잔뜩 흐려지고 있었다. ***************************** 강지협에게 이것은, 예를 들자면 전혀 예상치 못한 당혹감이었다. 비교적 건강하고 강직하게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한 열 열덟의 어떤 사람이, 문득 새로운 상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바로 딱 그 짝이었다. 거의 만 이틀 만에 외박식을 치루고 돌아온 가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지협은 맥이 탁- 풀리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 화도 나지 않는다. 그 흔한 짜증조차도 나지 않는다. 이제 녀석에게 ‘왜?’ 라고 묻는 것도 지쳤다. 어차피 녀석은 언제나 놀리는 태도일테고, 절대 그 잘난 척하는 입을 열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셈이니깐. 그나마 자신에게는 소중한 우정의 울타리를 근근이 잡아야 하나..라고 고민도 해 보았지만, 가윤 쪽에서 이미 완전히 틀어버린 것이라면 어쩔 수 없다. 지협은 모질게 마음 먹고 한마디 건넨 것이었다. 나영의 이야기까지 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별 거 아니지만, 부모님이 이번 달 말에 집에 오시기로 했기 때문에 그 걱정마저 짐이 되어 던진 일종의 비난이었다. 학교 선생님에게 걸리지 않은 것만도 천만 다행이다. 하지만 거짓말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 가윤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중으로 무언의 고문을 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한마디 건넬 심보였는데 예상치 못하게 공격의 잔인함이 좀 더 강해진 것이다. 그것은 지협 자신이 좀 더 수월하게 표현하기 위해 가윤을 향해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자초한 일이다. 처음, 지협은 잠시 입을 달싹였다. 문득, 막 씻고 나온 가윤의 삐뚤어진 그 미소, 여전히 얄미울만큼 수려한 얼굴을 보며 정말 한마디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협은 대신 아주 짧게 한숨처럼만 입을 열었다. “......계가윤..... ...너는..............” ...이라고. 어쩌면 그 뒤에 더 꺼내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너는 그런 식으로 소문내고 그런 행동을 하고 다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던 나조차도 저절로 의식하게 되잖아’ 식의 말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대신 지협은 녀석이 들어오지 않은 48시간 가까이 자신이 무슨 상상을 했었는지에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 상상. 한국의 막강한 18세, 그 피 끓는 청춘이 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상상. 지협은 자신이 친구가 벌이고 있는 어른의 놀이를 상상했다는 게 스스로 놀랬다. ‘ 맙소사..내가 왜 그 녀석을 상상하지?’와 ‘정말, 얘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윤이 그렇게 한단말야?’..바로 그 둘 사이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왜 자신이 막상 가윤을 보는 순간, 때리거나 욕을 퍼붓는 게 아니라 마음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일종의 분노다. 언제나 웬갖 잘난척으로 방실 방실 자신을 비웃으며, 어느 날 갑자기 ‘난 너와 달라’라고 말한 후에 어른의 세계로 먼저 얄밉게 미끄러진 친구에 대한 분노. 녀석은 지금 막 샤워를 마친 듯, 다소 피곤해 보이는 눈가로 자신을 가만히 쳐다봤는데, 그 얄미운 미소는 변함없지만 물기가 찰랑거리게 떨어지는 머리카락부터가 일단 마음에 걸렸다. ..그것이 웃기는 거다. 십팔년동안 계가윤이 목욕을 한다든지 샤워하는 꼴은 죽도록 보아왔다. 눈여겨 본 일은 없지만..아니, 같은 사내 녀석끼리 샤워하는 걸 눈여겨 볼 리도 없지만, 갑자기 의식하게 된 자신이 놀라운 거다. 말도 안 되고 기묘한 기분에 오싹해진다. 아이들이 녀석의 길고 잘 빠진 목선에 사로잡힌 키스마크를 이야기했을 때도 아무 생각 없었다. 남들 눈에나 이뻐보이지, 아주 아기 때부터 서로 볼 꼬집으며 살아온 사이끼리 그런게 눈에 보일 턱이 없다. 그러니 미치겠다. 지금 딱 환장하겠는게 바로 그거다. 지금은 눈에 보인다. 그것도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선명하게.. 똑똑히 가윤의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이는 거다. ‘할 말이 뭐야?’ 식으로 자신을 나른하게 비웃듯 쳐다보는 저 얄미운...........얼굴. 갑자기 대뜸, 녀석의 젖고 피로한 어깨를 잡고, 정말 얄미워 미칠 지경인 시선을 향해 다그치고 싶었다. ‘너, 도대체 어디에 있었어!!!!!!!!!!!!’ 라고. ..혹은, ‘지금까지 누군가와 이렇게 저렇게 혹은 그 딴식으로 어떻게 ...-!!!!!!!!!!!..’라고 머리 속에 마구 마구 영상이 돌아가는 거다. 사람 돌아버리겠다. 지협은 비록 혐오한 적은 없지만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던 그런 종류의 상상, 즉 누군가 다른 사내 녀석 그것도 어른이 지금 젖은 저 녀석을 안고 마음대로 농락했다.. 라는 것을 머리 속으로 부지런히 망상한다는 것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예전같으면 말을 듣는 순간, 혀를 차고 웃어 넘겼겠지만 막상 눈 앞에서 저렇게 거만한 턱을 치켜들며 자신을 비웃는 가윤은 엄연히 현실이다. 미끈한 몸은 젖어 있었고, 반바지 만을 걸치고 있었을 뿐, 언제나처럼 18년의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향해 놀리고 있다. 그래서 결국 그 이상하게 눈 앞에서 정처없이 돌아가는 좇같은 환상 때문에 지협은 잔인하게 친구를 공격했다. 그냥 내 앞에서 ‘나는 남자가 좋아’라는 정도라도 끝내..부탁이야. 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그럼 그 정도로 이상한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같이 살지만 않고, 얼굴 부딪칠 일이 지금보다 줄어든다면 더욱 그 망할 상상을 안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지난 십팔년 동안, 그나마 너를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 "넌 괜찮은 놈이 되기엔 이미 너무 썩거나 더러워진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런 식으로 사는지 이해도 안되고.. 같은 사내 녀석을 안고 안는다니..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없거든?" ..라고. 꺼내 놓고 보니 심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협은 왠지 며칠 전에 ‘저 녀석은 정말 내 친구 아냐.’라고 말했을 때의 아주 작은 변화. 즉, 오래된 자신이 아니라면 절대 눈치 챌 수 없는 그 미묘하고 섬세한 변화가 녀석에게서 이는 것을 제대로 파악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오만해 보이던 얄미운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지협의 거친 공격에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며 웃고 있는 입으로 어떻게든 허세 부린다. 깨끗한 얼굴, 하나 하나 깔끔한 얼굴 선. 어떻게 해도 망가질 것 같지 않던 그 고고한 녀석이 무척 짧은 찰나 위태로워보였다. 그 순간, 지협은 자신의 내부를 빠르게 스쳐가는 왠지 뜨거운 공기를 의식했다. 저 아무런 오점 없을 것 같이 정갈한 외모로 잘도 타락하고 싶어하는 오래된 친구는.. ...정말 낯선 사내 녀석들이랑 즐기고 그걸 어떻게 표정으로 나타낼까..혹은 진짜 무너질 때가 있긴 한 걸까... 누군가에게 애원하거나 부탁하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치욕적인 상황을 얼굴 붉히며 무너질 수 있을까..하는 실로 엄청난 상상! 왜 사람들이 파멸에의 욕구를 가지는지 순간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더욱 차갑고 잔인하게 입술을 비틀며 그에게 말했다. “그냥 서로 없는 셈 치고 살자. 그리고 기왕이면 나영이도 모르는 척 하고 살고.. 나도 내 여자도 병 걸리는 거 싫어.“ ‘내 근처에도, 내 여자 근처에도 오지마..‘ 라고 은연중에 원나영이 이제 자신의 여자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듯 조금 삐뚤어진 이상한 보복 심리로 몰아친 것이다. 왜 이렇게 엉뚱한 욕구가 들었는지는 설명하기 힘들었다. 사실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머리가 휙- 도는 것처럼 뇌 상태가 심히 이상해진 강지협이 그 순간에 껴안는 욕구는 그게 전부였다. 이 빌어먹을 정도로 거슬리고 얄밉고 그러면서도 오래되어 앙숙처럼 신경 쓰이는 친구. 그 녀석이 보여주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순식간의 무너짐이 지금 필요하다. 오랜 달리기를 마친 것처럼, 이상한 기대감으로 머리 속이 쿵쿵- 울리고 식도 끝이 바싹 타고 입 안이 메마른다. 엄청난 인신 공격에 가윤은 역시 지협의 예상대로 반응하고 만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도도해보이던 그 깨끗한 얼굴이 목덜미까지 붉어지며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린다. 뭔가 잠시 생각하듯 시선을 피한 채, 크게 숨을 들이 마쉰다. 그걸 관찰하는 것, 혹은 생전 처음으로 그 모습을 눈여겨 볼 때의 이 감정이 이렇게 교묘한 통쾌함인지 몰랐다. 오랜 시간, 하도 오랜 시간 이 녀석에게 놀림감이 되고 착하고 좋은 친구로만 살아왔더니, 정말 상처입히고 입을 때는 녀석이 이러리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쏟은 말은 심한 말이었지만, 가윤의 정갈한 얼굴도 조금 고통스러운 듯 찡그리고 숨을 몰아쉰 것이다. 하필이면 그 모습이 오히려 이제 막 지협의 뇌를 침투한 그 망할 놈의 상상- 다른 녀석과 자신의 오래된 친구가 정말 얽혀 있다는 그 쓰고도 짜릿한 상상- 을 더욱 부채질 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문득 가윤의 그 약간의 찡그림과 은밀하게 몰아쉬는 한숨... 그것들로 인해 허벅지가 단단해진다. 공격을 받은 가윤이 잠시 피하던 시선을 돌려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며 다시 입술을 비틀며 웃었을 때는 아예 복부까지 단단해졌다. 정말 싫다. 친구를 상대로 이따위 상상이나 하게 되고.. 아니, 이렇게까지 만드는 이 녀석의 정말 싫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협이 엄격한 시선을 더욱 찌푸렸을때, 서로 시선이 마주친 사이로 가윤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깨끗한 그 얼굴위로 그린 듯 올라간 삐딱한 미소는 몹시 대조적이다. 뜨거운 공기를 받은 붉은 입술이 잔뜩 비틀어진 채, 지협을 향해 웃기다는 듯 중얼거리는 것이다. “니 여자라구, 강지협?” “...............” “재미있네. 그거. 니가 나영이를 니 여자로 만들었어?“ “........-!!!!!!!!!!!!!!” 그리고는 조금 다가왔다. 몹시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낮게 키득거리며 가윤이 젖은 머리카락을 성가신 손짓으로 쓸어 넘긴다. 빗질도 하지 않은 조금 헝클어진 그 머리가 깨끗한 이미지에 얽힌 비밀같은 선정성을 더욱 부각 시켰다. .............지협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너무나 한심해져서 천정을 올려다 본 채, 큰 소리가 날 정도로 한숨을 쉰다. 그 때를 노리듯, 얄미울 정도로 단정한 얼굴이 크게 웃음을 토해냈다. 반격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강지협이 그랬다니..말도 안 돼지. 너 여자랑 자 본 적 있어?“ 진짜 나쁜 새끼..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술술 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더욱 악랄하게 웃으며 덧붙인다. 천사처럼 달콤하게 웃는 것 같지만, 입술만은 독설을 내뿜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세상에서 나보다 널 잘 아는 인간이 있어?” “..........-!!!!!!!!!!!!” 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일을...이라고 퍼뜩 정신이 들기도 전에, 가윤이 자신의 넥타이를 휙- 잡아 당겼다. 지랄같은 교복 넥타이. 짙은 남청색 넥타이가 녀석의 목욕한 향에 파묻혀 손가락 사이로 걸린다. 자신만만하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목이 꺾이듯 녀석과 얼굴을 바싹 붙이고 말았다. 빼 내려고 하면 빼 낼 수도 있지만, 지협은 대신 인상만 더욱 험악하게 굳힌다. 방금 이 녀석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부모님보다 자신을 잘 아는 게 바로 계가윤이다. 그러니깐, 화가 난 자신보다 더 이글 이글 불타는 눈동자로 넥타이를 잡아 당겨 얼굴을 밀어 붙일 정도로 이 녀석은 강다구가 있다. 갑자기 두근 두근.. 일그러지는 얼굴이 이상한 상상을 품게 만들었다면, 이 쪽에서 가까이 들여다보는 - 이 역시 생전 처음으로 이렇게 자세히- 화 난 듯한 시선도 굉장히 어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침묵이 끝났다. 비웃는 거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녀석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키스는 할 줄 아냐, 유쾌한 바보?” 마찬가지로 속이 해일을 만난 듯 뒤엉키며 요란한 심장운동을 일으켰지만, 지협은 끝까지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가 무슨 상관인데?” [장편] 클럽-비우(非友) - 2 “물론 상관없지. 나도 강지협이라는 인간이랑 의리 끊은 지 오래니깐...“ “.....................” “하지만, 직업병이 있어서 그래. 그런 말 들으면 꼭 확인하고 싶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코 밑에서 알짱거리는 긴 속눈썹이나 뜨거운 호흡.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기란 힘들었다. 비록 말로는 퉁명스럽게 ‘니가 뭔 상관이야?’ 라고 쏘아붙였지만, 계가윤이 달리 계가윤인가. 콧 웃음 한번 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은 냉정하게 넥타이를 가까이 잡아당긴다. 일순 녀석의 얼굴이 각도를 비틀었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훅- 하고 단단한 복부가 더욱 긴장했다. 그 순간에야 정신이 번쩍 들은 지협이 다급하게 외친다. “야!...........” .........라는 아주 원초적이고 선명한 거절. 그러나 ‘이게 뭐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가윤의 달콤한 시선이 먼저 자신의 턱 끝을 쏘아본다. 턱 끝이라기보다는 좀 더 위 쪽...그러니깐, 지협이 찡그린 채 닫은 그 입매의 선을 나른하게 흩어갔다. 아마 더욱 일그러지는 쪽은 자신이었던 것 같다. ‘설마..’하는 생각이 빛처럼 빨리 스쳐갔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다. 잘난 척 하던 가윤의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시야가 캄캄해진다. 그리고 쿵- ..아마, 자신이 기억하는 어떤 시간보다 빠르게 혈관들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 계가윤이.. 그러니깐, 자신의 십팔년 지우 계가윤이.. 요즘에는 배로 거슬릴 정도로 엄청나게 얄미운 잘난척 덩어리 계가윤이.. “...............흐응....................” 짧고 미묘한 콧소리를 내며 만족스러운 듯 입 맞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계가윤이.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니라 이런 종류의 일에 기겁을 할만한 강지협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을 그저 단순한 놀림이나 위협을 생각했던 지협에게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조금 전의 이상한 상상들..그 말도 안 되는 검은 유혹이 제대로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물론 그는 한순간 숨이 멈췄다. 자연스럽게 놀란 손이 가윤을 밀어내기 위해 뻗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살짝 입술 선을 따라 부드럽게 부딪치는 질감은.. ....이런, 제기랄!!!!!!!!!!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부드럽고 몽클한 느낌이었다.. 마치 스폰지에 물이 배이듯 촉촉하게 스미어 온다. 스미어온다니....미쳤지. 그런 생각을 하다니..완전히 미쳤지.. 믿을 수 없다! 이 녀석의 그 뾰쪽하고 눈꼴 시릴 정도의 잘난척 하는 도도함에 비하면, 정말 믿을 수 없을만큼 아찔한 촉감이었다. 질끈.. 지협은 눈을 꽉 감은 채, 입 안으로 파고드는 악녀같은 혀에 경악했다. 몰랑 몰랑한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입안을 유린하고 장악한다. 순간적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마구 헤집어 대는 타액에 다시 훅-하고 허벅지 사이가 단단해졌다. 뭔가 더 위급해진 기분을 느끼며 지협이 순간적으로 가윤의 어깨를 잡는다. ‘이 녀석은 미우나 고우나 내 친구다. 지가 아무리 발광을 하고 잘난 척을 해도,...’라고 간신히 정신을 다잡을 때였다. 간절하게 제정신을 회복하려는 지협의 마음을 여전히 비웃듯, 녀석의 매끈한 혀가 자신의 당황한 혀를 감싸며 마구 몰랑거린다. 그 찰나만큼은 정말 지협도 빡 돌 지경이었다. 그건 조금 전의 야릇한 아찔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도가 좀 커진 거다. 아아..라고 지협은 짧게 속으로 탄식했다. 무의식적인 탄식이다. 그 감질 맛 나는 태도..뜨겁고 물기 가득하게 자신의 혀와 얽혀 있는 그 몰캉거리는 느낌. 그것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잡히기만 해 봐라. 니가 나에게 이런 장난까지 친단 말이지..아예 그 얄밉게 몰캉거리는 놈을 씹어주지..’ 라는.. 아니, 그보다는 허리를 향해 무의식 중에 들어가는 힘. 그 미묘한 본능 때문에 저절로 녀석의 숨어버린 혀를 찾아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반응했다. 조금 전의 녀석이 하듯, 요리조리 피하는 녀석을 찾아 애타게 갈증이 났다.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언제나 얄미운 눈, 얄미운 목, 얄미운 팔, 얄미운 다리, 얄미운 코, 얄미운 미소, 얄미운 이 키스!!! 녀석은 정말 계가윤이 맞았다. 그는 후끈할 정도로 잽싸고 감미롭게 자신을 희롱하더니 이내 뒤로 빠졌다. 아쉬울 정도로 뜨거운 공기를 토해내면서 자기 할 건 다 하는 셈 치고 갑자기 입술을 떼고 만 것이다. 지협은 뭔가 쑤욱-하고 뜨거운 공기가 폐를 통해서 밖으로 나가는 기분이었다. 섬세한 안타까움이 갑자기 갈비뼈 부근을 물씬하게 통과한 것이다. 결국 희미하게 지협은 불만을 토해냈다. “..................야....”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다. 마음은 그보다 심하게 갈라져 있다. 조금의 긴장과 조금의 불만, 그리고 약간의 안타까움이 범벅된 전체 요리와 같다. 희미하게 눈을 뜨자, 녀석이 보인다. 여전히 코 끝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떼일 듯 말 듯 여전한 입술 사이로 거친 공기가 달아올랐다. 지협은 그 순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감미로운 시선. 한번도 본 적 없는, 야한 느낌의 친구. 머리 속으로 여러가지 경고음이 함께 울렸다. 마치 코치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강직한 열 여덟, 그래도 딴에는 의리의 사나이 강지협은 거칠게 손을 뻗어 가윤을 밀어냈다. 밀어내는 순간의 녀석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그리고 격렬하게 밀어냈기 때문에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도 못참겠다는 듯, 지협은 거의 불쑥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가윤은 희미하게 웃는다. 어딘가 지독하게 상처 입은 듯한 그 미소는, 어른 거리는 정신 속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입술을 뻑뻑- 닦아내는 자신에 비해, 녀석은 여전히 달콤한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였다. 가윤은 자신처럼 입술을 닦는 대신에, 마치 지협 것으로 보이는 타액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졌을 뿐이다. 바로 조금 전에 미친듯이 얽혔던 그 붉은 입술 위에서 말이다. 둘 다의 공통점은 단 한가지였다. 둘 다 날카로운 눈동자로 서로를 노려본다는 것뿐이다. 지협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이글되는 시선으로, 그리고 가윤은 차가울 정도로 깊은 비웃음으로.. “............미친 놈.” 마침내, 지협이 말했다. 가윤은 그 말에 그저 피식 거렸다. 그리고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천사처럼 달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만원만 내. 그럼 더 뻑- 가게 해줄게.” 그 말에 정말 뻑 돌아버린 건 지협이었다. 정말 얄미운.. ...오래된 친구가 자신을 놀린다는 걸 알아차린 거다. 믿을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일들이 놀리는 거라니.. 거의 실성할 것같이 내부에서 열이 마구 치밀었다. 철썩- 하고 들고 있던 가방을 소리나게 내던지며, 그는 차갑게 가윤에게서 등 돌렸다. 그와 동시에 가윤의 그 어처구니없는 한마디에 질릴 정도로 험악하게 대답한다. “니가 나한테 십억을 줘도 너같은 건 안 안어." “.......................” “..재수없는 새끼......” 쿵- 하고 둘 사이에 경계를 긋듯 문을 닫고 들어설 때까지, 지협은 관자놀이가 튕길 정도로 아플 지경이었다. <5> 지협은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북북 긁었다. 엉겁결에 키스를 당한 그 웃기지도 않는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린다. 그 와중에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지협을 향해 누군가가 신이 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야, 강지협! 우리 내일 너네 집에 놀러가도 되냐?” 같은 반 친구 녀석인 동일이었다. 남동일. 녀석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는 지협은 방금 그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조금 더 난감한 생각, 그러니깐 시도 때도 없이 파고드는 그 날의 영상을 떠올리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것이다. 그 와중을 노리기라도 한 듯, 동일과 다른 두 어 녀석이 우당탕탕- 교실을 가로질러 지협을 향해 뛰어왔다. “우리 너네 집에 가도 되냐구, 내일~..죽이는 비디오 빌려 놨거든.” “..우리 집?” “내일 토요일이잖아?” 아무래도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는 지협의 집은 그 동안 아지트였다. 그러나 녀석들이 노리고 있는 건, 어쩌면 최근에 뒷소문 흉흉한 가윤에 대한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칫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지협은 망설였다. “씨방새야. 야한 비디오라면, 요새는 동영상으로 다운 받아 보면 되잖아?” 한국의 18세. 그들만의 커뮤니케이션. 지협의 시큰둥한 대답에도 그러나 녀석들은 지치지 않고 눈알을 굴려댄다. “야, 같이 보면서 같이 딸딸이치는 재미가 얼만데~~!!..” 씨바, 퍽도 좋겠다..라고 중얼거리며 지협은 더욱 인상을 굳혔다. “몇이나 올건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일 저녁 쯤이면 녀석은 집에 없을 것이다. 최근 몇 달동안 토요일이라고 녀석이 집에 있었던 적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자신이야 사실을 알기 전까지 녀석이 공부하러 간다고 착각했지만..아무튼.. 질문을 던지는 지협의 의도가 마치 승낙처럼 여겨졌는지, 동일이 더욱 신이나서 대답했다. “우리? 셋 다 갈거야. 나랑, 상욱이랑 범기랑......” 무려 셋이나 와서 우리 집에서 야한 비디오 보면서 딸딸이 친다고?...니들이 지금 제 정신이냐?.. 씨바, 사내 새끼들만 우글거리는 반이다 보니 못하는 말이 없군. “가도 돼?” 그만 여러가지 일로 머리 속이 복잡해진 지협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문제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가윤은 집에 있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그리고 같이 온다는 범기와 상욱은 가윤과 자신처럼 일학년 때 모두 한 반이었다. 서로 인사 정도는 나눌 정도의 사이다. 아차..라고 생각해보니, 이번 주 일요일이 바로 월 말이다. 즉, 이 녀석들과 토요일만 좀 견디면 바로 나영과 주말에 영화보기로 약속한 그 날인 것이다. 지협은 그 생각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괜히 오래된 친구 가윤에 대해 생각하다가는 조만간 미처버릴 자신이 두려웠던 것이다. ***************************************** 설마하니, 토요일 오후에도 가윤이 집에 있는지 몰랐다. 지협은 현관에 남아 있는 녀석의 신발을 알아보는 순간, 흠칫 놀란다. 등 뒤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다른 녀석들과 거실을 번갈아 쳐다보며 일순 긴장했다. “뭐야? 왜 안 들어가?” 토요일 오후에 가윤은 대부분 집에 있지 않는다. 이전에는 녀석이 독서실을 간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어디에 가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다. 그러나 하필이면 재수없게......오늘 녀석은 집에 있다. 더군다나 집에서 야한 걸 보겠다고 떠들어대는 다른 녀석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지협의 안색이 변하든 말든 물론 그 녀석들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친구 녀석들은 잡다하게 떠들며 거실에 제각각 주저앉았다. 휙-하고 교복 상의를 벗자마자 지협은 조금 인상을 굳힌 채, 쇼파에 드러눕는다. 지 방에 있는 건 분명한데, 코빼기 하나 비취지 않는 계가윤이다. 녀석이 나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갑자기 민망해진다. 친구들이 이러는 거 한두번도 아니지만, 이전과는 결코 다르다. 가윤이 사내 녀석들과도 즐기는지 몰랐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혈기왕성한 18세들이다. 이 나이 또래에 한번쯤은 겪는 통과의례와 같다. 그런데도 가윤이 있는 집에서 이런다는 게 새삼 찝찝해지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 중에서 가장 성격 급한 상욱이 닫힌 방문을 턱으로 가리키며 소근거렸다. “야...걔 있냐?” 가윤이를 의식하는 건 비단 오래된 친구 지협만이 아닌 것 같다. 다만 세 녀석 중에서 범기라는 녀석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소매를 둥둥 걷으며 벙실거렸다. “그런 게 무슨 상관있어~ 그냥 돌려.” 동일이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묵직한 테이프를 꺼냈다. 화면이 돌아가고, 녀석들은 사발면이며 콜라며 꺼내놓고는 퍽이나 시끄럽게 모션을 지켜본다. 지협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하게 앞만 쳐다보았다. 신경은 끊임없이 닫힌 가윤의 방을 향해 뻗어간다. 오늘 같은 날, 가윤이 클럽에 가지 않았다는 걸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다른 녀석들이 조금씩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흐으응...이라고 화면에서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났다. 분명히 닫힌 저 방에도 들릴 것이고, 가윤은 지금 누가 와 있는지 뻔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치겠다. 지협은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신경 쓰는 녀석의 존재자체가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저 여자 가슴 죽인다...........” 누군가 말했다. 서양 여자들이 흔히 그렇지..뭐..라고 중얼거리며 지협은 팔배게를 하고 누웠다. 이 쪽 저 쪽으로 편하게 누운 녀석들이 점점 말이 없어지는 걸 보니, 아마 점점 달아오르는 모양이다. 화면으로는 참 굉장해 보인다. 그 쥐어짜는 듯한 교성하며, 질퍽한 교접의 향연. 대단하군...이라고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화장지를 찾았다. 지협은 일부러 아래 쪽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상욱이의 뒷목덜미가 붉게 변하는 게 벌써 싸도 한참 쌀 상태이다. 작작들 좀 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화면 속의 여자가 길게 비명을 지른다. ‘저건 다 조작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여간해선 이성적이 될 수 없다. 드디어 앞자리에서 범기가 끄응-하고 작은 신음을 토해냈다. 지협의 입장에서보면 믿기지 않을만큼 집중이 안되는데, 이 녀석들은 정말 대단하다. 아니, 어쩌면 이게 현실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래도 가윤의 오랜 친구가 아닌가. “..야...휴지..............” 하얀 교복 셔츠를 반 쯤 꺼내 놓은 범기가 중얼거렸다. 동일이 자신의 옆에 나뒹구는 휴지를 힘차게 던지는 순간, 여자의 신음소리가 더욱 강도를 높였다. 한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표정 때문에 지협은 저절로 마른 침을 꿀꺽-삼킨다. 그것은, 단지 야하고 선정적인 영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묘하게 일그러지는 여자의 작위적인 표정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까 놓고 인정하자. 문득, 그 위로 교차하는 얼마 전 친구 녀석의 기묘한 표정 때문이었다. 연출된 저 장면보다 훨씬 뭔가 확-하고 정신이 들게 만들던 그 야한 느낌.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야..넌 안 하냐?” 동일이 의아하게 돌아볼 때까지 지협은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멍할 정도의 머리 위로 거침없이 투과되는 영상.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다. 방금 전에 또렷하게 가윤이 스쳐갔다고 말하기도 민망하고, 그렇게 말을 꺼냈다간 이 녀석들이 뭐라고 말할지도 뻔했다. 지협이 대답없이 눈쌀을 찌푸리자, 동일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벌컥- 닫혀졌던 문이 열렸다. “............?..............” 어딘가 벗은 듯, 엉거주춤하는 시커먼 사내 녀석들의 모습과는 이질적인 표정이다. 가윤이 문을 열다 만 듯한 자세로 무심히 자신들을 응시한다. 무리들은 일순 당황했고, 가윤은 더욱 싸늘해졌다. 마치 그 상황을 즐기는 듯, 차갑고 수려한 얼굴. 쵸핏한 눈꼬리가 가늘어지며 여전히 시원하고도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 계가윤은 그들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지협은 방금 전까지 한심할 정도로 자신을 짓눌렀던 친구의 야한 얼굴을 떠올리며 순간 굳어버렸다. 남은 녀석들은 어버버 거리는 이상한 단어들로 가윤에게 제각각 인사를 건넨다. 말이 인사지, 사실은 외계어처럼 버벅거리는 낱말의 조합이다. “........가..가윤아..어디 가냐?” 차마 같이 하자는 말은 못하고, 범기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가윤은 외출을 할 생각이었는지, 초록색 물 빛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분할 정도로 상큼하게 웃으며 녀석이 대답한다. “잘생긴 회사원이랑 원조교제 하러 간다..왜?” “..........-!!!!!!!!!!!!!!!” 쿵-하고 말없던 지협의 심장이 덜렁거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윤은 한심해하는 눈길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런 말을 대 놓고 하는 친구 녀석 때문에 지협은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열심히 포르노에 매진해야 할 녀석들도 심각하게 황당해 했다. ‘잘생긴 회사원’이라는 또렷한 어감자체도 문제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관계를 의미하는 뜻이다. 지협이 홧김에 벌떡 일어서며 이를 갈듯 자신을 노려보는데도, 가윤은 으쓱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 진한 씩씩거림에 상관없이 여유만만하게 문을 닫고 나가 버린다. “.............방금 그거 무슨 말이냐.................” 최근에 돌고 있는 소문을 익히 알면서도 녀석들은 얼음처럼 싸하게 얼어버린다. 이럴 줄 알았다. 가윤이 집에 있고 녀석들이 들이 닥치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저 언제나 얄미운 배꼽 친구가 결국 이렇게 사고칠 걸 뻔히 알았다. 지협은 잘생긴 미간을 잔뜩 구기며 말없이 남은 녀석들마저 노려본다. 마치 애꿎은 곳에 화풀이 하는 자신의 태도가 영 못마땅할 정도였다. 맨발로 현관을 뛰쳐 나간 건 거의 십여초 흘렀을 때였다. 엘레베이터 앞에 서 있던 녀석이 자신을 힐끔 돌아본다. 깔끔한 녀석의 뒷목을 조르듯 한 손으로 확 낚아채며, 지협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자신이 몹시 불쾌하다는 증거다. “내가 말했지.. 니가 밖에서 어떻게 놀든 상관없어. ..그래도 다른 녀석들 앞에서 그 딴 소리를 지껄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니가 무슨 상관이야?” 붉은 입술이 혀를 날름거린다. 마치 별것도 아니라는 그 태도에, 지협의 머리 속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일은 나영이도 올거야. 니가 그런 말 떠드는 거..도저히 내가 못 봐주겠다.“ “뭘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꿀꺽- 갑자기 손바닥에 와 닿는 녀석의 목덜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호흡이 섞일 정도의 거리다. 문득, 이 녀석이 키스할 때가 생각나서 초조해져 버렸다. 지협은 다시 변덕스러운 사람처럼 녀석을 밀어내며 차갑게 잘라 말한다. “상식적으로 놀아, 계가윤.” “....난 충분히 상식적이야, 강지협.” 좋아..그럼..이라고 말하며 지협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긴다. 나야 말로 어쩌면 좋겠니...라고 속으로 몇번 욕을 내뿜는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니 악랄하고 얄미운 구석이 없어질까. 너는 왜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으면서 항상 내가 싫어할 행동만 골라서 해야 해. “내일 나영이가 올 때, 니가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까지 말하게 만들어! 왜 내가 너를 포기하게 만들어...나도 충분히 힘든데, 왜 너만 힘든 것처럼 말하고, 너만 기꺼이 추락해 버리는 건데..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니..가윤아.. “알아들었어? 니가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구!..” 이를 악물고 말하자, 가윤이 긴 속눈썹을 몇번 깜박이다가 미려한 얼굴로 살짝 웃었다. 아주 삐뚤어진 그 미소가 덜컹 마음에 걸린다. 나 너한테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잖아...그러니깐, 제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자, 새꺄.... “왜?” 가윤이 웃으며 반문한다. 아니, 기가 막힐 정도로 얄밉게 미소지으며 반짝이는 눈동자로 속삭였다. “그 기집애랑 아까 비디오처럼 놀려구?” “..............-!!!!!!!!!!!” 그게 나쁘다곤 생각하진 않지만, 그 적나라한 한마디에 기가 막힌 것이다. 지협이 있는대로 인상을 쓰자, 녀석은 그러나 더욱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진짜? 진짜야, 강지협? 정말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이야~..재미있네. 그럼 내가 백번 양보해야지. 당연히 내일 나가줄게. 진작 이야기하지..“ 이번에야 말로 지협은 정말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는 말없이 뒷걸음치며 가윤의 살짝 갈라진 미묘한 음색에 긴장했다. 딩동- 엘레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대로 자동문이 닫히고 가윤이 사라질 때까지 지협은 말없이 문만 노려보았다. 훅-하고 숨을 들이쉬자, 뻑뻑한 갈비뼈가 아프게 죄어온다. *************************** 규철이 안전밸트를 풀어줄 때까지, 가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저녁 내도록 조용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문제의 ‘잘생긴 회사원’이 쓰게 웃는다. 정확히 따지자면 위로겸 심심풀이 저녁 식사다. 사실 그 정도로 심한 말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만 거실에 앉아 있는 녀석들을 보니 너무나 속이 뒤틀렸다. 강지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 것 같다. 마치 보란듯이 그런 녀석들을 집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을 자극하고 갱생의 길로 유도하려는 것이다. ‘봐라, 이게 정상적인 18세다’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어이~..애인!” 규철이 자동차 핸들 위로 얼굴을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마 다운된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부드럽게 놀리는 말투다. “내가 왜 형 애인이야...” 콧방귀를 끼듯 피식 웃는 가윤의 모습에 규철은 재미있다는 듯 뻣뻣한 뒷 목을 젖히며 밝게 대답한다. 역시 그는 어른인 것이다. 홧김에 술을 잔뜩 마셨는데도, 그는 이럴 때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그 점이 정말 편하게 느껴졌다. “왜, 오늘부터 우리 원조교제 하기로 했잖아?” “.........형은 원조만 해줘도 돼요.”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걸 안 뒤로, 규철 때문에 클럽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졌다. 가윤은 클럽에서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단단한 약속 끝에야 겨우 한번씩 놀러가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규철이 제안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원조교제하자..라고. 그 말의 어감이 이 상황에서는 너무 아이러니해서 가윤이 배실거리자, 웃길정도로 진지하게 규철은 약속까지 정한 것이다. 밝고 건전하게 섹스나 한판 땡길까..라고 말하며 탄탄한 몸으로 기지개를 키는 규철은 그러나 괜찮은 형이다. 정말 멋진 남자다. “.......난 교제 쪽이 더 끌려.” 지협 때문에 우울해진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는 큰 손바닥으로 가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들어가라.. 너 너무 마셨다, 오늘.“ “..뭘,..한두번도 아닌데...” “건방지게 굴지 말고 들어가. 그 녀석이랑 해 보고 안 되면.............” “........?.........” 모처럼 토요일 오후 답게 영화도 한판 보고 머리가 띵할 정도로 맥주를 마셨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규철 역시 간만에 가벼운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는 정말 젊어 보인다. 실제로도 단단한 청년이었지만, 그렇게 차려 입으니 말쑥하기 이를 때 없다. 세련되고 건강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아파트 쪽으로 몸을 돌린 가윤을 향해 놀리듯 덧붙인다. “그 녀석이랑 해 보고 안되면, 날 사랑해줘야 해. 알지?” “..........?................” “우리 원조교제 하기로 했잖아?” 물끄러미 자신을 보며 치-하는 표정을 짓는 가윤이다. 규철은 털털 거릴 정도로 크게 웃으며 자동차의 시동을 건다. 규철 때문에 클럽에서 일하진 못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더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그는 왜 하필 오래되고 오래된 친구를 좋아하냐고 한심해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따뜻하다. 마음 든든한 미소다. *************************** 가윤은 꽤 오랫동안 밤 늦은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 건물은 그들이 10살 때부터 살고 있는 곳이다. 가윤은 당시에는 지협의 이 아파트에서 몇 킬로 떨어진 주택에 살고 있었다. 그래도 그 때도 지금처럼 시원한 봄 바람이 불었고, 그 때도 지금처럼 이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았다. 그리고 7년. 내일이 되면 여전이 어린 꼬마들이 이곳에서 활개치며 뛰놀텐데도 시간이 그만큼이나 흘렀다. 자신은 이곳을 너무나 잘 기억한다.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어린 잘생긴 바보 강지협과, 얄미운 모범생 계가윤도 여기서 놀았던 것이다. 언제나 봄 날이었다. ‘야, 계가~ 숙제 좀 빌려줘.’ 언제나 이 놀이터에서 코피 터질도록 놀던 지협은, 7년전에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부탁했다. 그때도 가윤은 늘 녀석에게 못된 태도로 의기양양했었다. ‘너 하는 거 봐서..’ ‘야, 좀 빌려줘. 엄마한테 혼난단 말야.’ 그래, 평생 그렇게 살아라, 강지협. 그리고 작년에도 이 놀이터에서 둘이 그네를 나눠타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교복도 벗지 않고 저녁 바람에 시원하게 날리는 넥타이를 보며 삐그덕-삐그덕 그네를 탔었다. ‘나 좋아하는 여자 생겼다.’ ‘..........!..........’ 바보 강지협은 하나 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 그래서 가윤은 녀석이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한참 후의 일이 될 거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녀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좇나 이쁘다. 몸매도 죽이고~..’ 그래, 평생 그렇게 살아라..친구..라고 가윤은 그때도 중얼거렸었다. 아마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 지협이 자신에게 숙제를 빌려달라고 말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은 녀석을 골탕먹이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고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녀석의 탄탄한 등을 감싸는 눈부신 흰 셔츠가 좋아서 그는 가끔 혼자 자위를 하며 잠이 들어야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절대 말해줄 수없었다. 18세에게 있어, ‘친구’란 자신의 모든 것 이상이다. 녀석은 그 때 이 그네를 타고 갑자기 앞으로 불쑥- 뛰어 내렸다. 부드러운 모래 위로 기분 좋게 착지하며 녀석은 흰 교복 소매를 둥둥 걷어 올리며 건강하게 웃었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계가윤. 니 불알친구가 17년 만에 사랑에 빠졌다니깐...‘ ‘..........어지간히 좋겠다, 그래.’ 갑자기 가윤은 그 날을 회상하는 순간 취기가 잔뜩 올라왔다. 녀석은 마지못해 꺼내는 가윤의 그 대답을 듣고도 기분 좋은 듯, 그 때 한참 웃었었다. 그리고 분명히 그 날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녀석이 그네에 여전히 앉아 있는 자신을 향해 손을 문득 내밀었기 때문이다. ‘가자. 집으로........’ ..라고 말하며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정말 환한 미소와 친절하고 착한 그 태도에 속이 비틀리는 가윤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다 큰 사내 녀석들은 어지간해선 손을 잡지 않는다. 뭔가 위험에 빠진 상황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녀석은 너무나 오래되고 오래되어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그렇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역시 이제 너무나 닮고 익숙해져서 서로의 의미 같은 건 전혀 생각지 않는 평범한 친절함으로 그렇게 덧붙였다. ‘가자, 집으로...’ 일년 뒤에 이제 혼자 앉아 있는 그네 위에서 가윤은 정말 취해버렸다. 친구로써의 따뜻한 그 우정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정말 화가 날 정도였다. 두번 다시 그 탄탄하고 따뜻한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이었다. 두번 다시 자신에게 ‘집으로 가자’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일은 나가 있으라고 말할 정도의 녀석이다. *************************** 곤하게 잠들어 있던 지협은 갑자기 무거워지는 허리의 느낌 때문에 끙끙거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나는 술냄새도 자신을 자극했다. 번쩍- 그때서야 그는 눈을 떴다. 새벽이 올 정도의 희미한 여명이었다. “...................-!!!!!!!!!!” 그리고 자신을 누르듯, 타고 앉은 누군가를 깨달았다. 이 묵직한 허리의 느낌은 바로 가윤의 무게다. 순간적으로 굉장히 놀랬고, 그리고 ‘너 뭐야..’라고 불쑥 외칠 뻔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 “......지혀바.................” 녀석은 취해있다. 그 ‘잘생긴 회사원’과 ‘원조교제’하러 나간 녀석이 아니었나..라고.... 잔뜩 위가 뒤엉키는 기분에 가만히 상반신을 일으키지만, 녀석은 꼼짝도 없이 버티고 있다. 불끈... 순식간에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지협은 더욱 당황했다. 녀석이 자신의 허리를 타고 앉은 채, 그대로 손으로 침대를 집고 엎드리듯 상반신을 굽힌 것이다. 마치 뒤로 피하려는 듯한 자신을 더욱 놀리듯 녀석은 얼굴을 바싹 들이댄다. 뜨거운 취기. 너무나 놀래서 말도 못하는 지협을 향해 녀석의 그 얄미운 미소는 여전히 새파란 새벽 속에서 입을 연다. “나중에..........” “............계가윤..비켜.” “.........훨씬 나중에 니가 이 일을 떠올리고 내가 너무 혐오스럽더라도...” “..가윤아 비켜!.........” 뭘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다. 순간적으로 목덜미로 확-하고 끼얹어지는 뜨거운 숨결. 그 가슴 당기는 묘한 호흡에 지협은 다급해졌다. 이 녀석은 남자다..라고 다시 되내이듯 자신을 세뇌시킨다. 그러나 그 때 가윤이 말했다. “............내가 너무 혐오스럽더라도... ......난 열 열덟 살이잖아..“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계가윤!!! “.......그냥 어려서 그랬다고 이해해.. ..그렇게 해. 내가 너무 어려서... .............어려서 그런 거라고....“ “..........??................” “...응?...” 왜 갑자기 재촉하듯 묻는 그 단순한 일 음절..‘응?’이라는 작은 물음이 그렇게 애타게 들렸을까.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허리에 앉은 녀석이 잔뜩 몸을 구부렸다. 바싹 좁혀진 거리가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손바닥에 땀이 배이며, 머리 속이 쿵쿵- 다시 울려댔다. 문득 이런 상황에서는 늘 처음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가늘게 전율한다. 지협은 숨도 쉴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마치 술기운을 빌려 꿈도 꾸지 못할 애원을 하듯, 가윤이 너무나 아슬 아슬해 보인다. 새벽이라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이 녀석의 이 표정이 너무나 절묘하게 무너지는 기분이어서 그것이 적나라했다면 도저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드럽게 얼굴을 살짝 비틀며 녀석의 호흡이 다가왔다. 질끈- 경악으로 눈을 감은 지협에게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녀석이 들릴 듯 말듯 말했다. 아주 희미하게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그 애랑 자지마....” “..................-!!!!!!!!!!!!!” 그리고 부드러운 녀석의 아랫입술이 닿았다. “..............!!................” 저번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저히 저 얄미운 녀석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토록 부드러운 느낌. 부풀어 오른 입술의 감각이 절실할 정도로 실감났다. 훅-하고 무의식중에 숨을 들이킨다. 더불어 아랫도리도 갑자기 흥분한다. 가윤이 허리 위를 달싹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숨덩이가 겹치고, 가윤이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살짝 흘러내렸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 순간에 지협은 그것마저 아깝다..고 생각할 정도로 뭔가 머리 속이 심하게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달콤한 설탕물을 자꾸 마실 때처럼 갈증이 계속 들었다. 식도가 타고 속이 점점 비워지는 기분이다. 배가 심하게 고플 정도의 허기가 복부를 타고 느슨하게 허벅지 사이로 흘러간다. 매끄럽게 파고 들어와 자신의 혀를 감싸고 농락하다가, 다시 애가 탈 때쯤엔 뒤로 후퇴한다. 환장할 정도의 갈증과 허기가 번갈아 밀려왔다. “...........으응................” 녀석의 목 너머에서 미묘하게 갈라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지협의 입장에서 보면 심장이 딱 멈출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이었지만,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가윤은 입맞춤의 최대한을 의미하듯, 조금 벌어진 입술로 지협의 턱을 쓸어내렸다.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점점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꼭 음미하는 표정처럼 묘하게 색기 어려서, 지협은 갑자기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여전히 목이 마르다. “..........-!!...............” 초저녁부터 그대로 잠드느라 미처 벗지 못한 자신의 교복셔츠. 그것을 하나 하나 푸는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보였다. 그때서야 지협은 가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중에 니가 훨씬 나이 들어 돌이켜 봤을 때, 내가 너무 혐오스럽더라도...’라고 한 말. 이 녀석은 정말 자신과 일을 벌이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다. 게다가 ‘그 애랑 자지마’라니..누구랑 자지 말라는 말인가..아니, 잠깐만..그건 그렇고, 저 녀석 지금 뭘 핥고 있냔 말야!!!........ 지협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쇄골과 단단한 가슴, 그리고 잔뜩 긴장한 티를 내듯 뭉쳐진 복부, 그 옆구리까지 섬세하게 핥아 가는 녀석의 혀를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눈으로 확인까지 하고 있으면서도 정말 믿기지 않았다. 숨이 꽉 막힐 만큼 허리 아래가 빳빳해지는 이 감각을 믿을 수 없다. 녀석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정수리가 보인다. 언제나 보아오던 그 친구의 표정. 아름답고 단정해 보이는 그 표정 못지않게, 내리깐 속눈썹이 음란하게 다가온다. 그 질퍽한 발정의 느낌에 숨이 막혔다. 한마디로, 발정기를 맞은 처녀처럼 유혹적이었다. “........계..가윤...........” 딱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녀석을 부르지만, 가윤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지협의 옷을 벗겨낸다. 그리고는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얄미울 정도로 재빠르다. 의식할 사이도 없이, 드러난 페니스를 입안에 넣어 버렸다. 지협은 순간, ‘훅-’하고 다시 공기를 갈구하며 목을 뒤로 젖힌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충격과 흥분으로 신경이 점점 마비된 것이다. “.................그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거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헐떡거리며, 그는 가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잔뜩 달아오른 자신의 분신이 녀석의 점막에 둘러싸인 게 똑똑히 전달되어 왔다. 확실히 같은 사내라는 것이 민감하게 작용했다. 그 엄청난 금기 같은 기분은 또 한편으로 교묘한 우월의식을 부채질 하는 것이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그 잘난척하던 가윤이 할짝거리다니!!... 더군다나 그 모습에 설득 당한 자신이라니!!!! 지협은 팔꿈치로 몸을 겨우 지탱하고 상반신을 살짝 일으켜 본다. 아래에 있는 녀석이 똑똑히 보였다. 그토록 정갈하고 깨끗한 얼굴이 붉은 홍조를 띄고 있다. 맙소사..라고 지협은 작게 탄식하며 신음했다. 정말 말릴 수가 없었다. 혀로 구석 구석 핥아가는 그 모습이 자신을 이렇게 흥분시킬지 전혀 몰랐다. “.........가윤..........아.......” 녀석을 부르는 음성이 너무나 혼탁해서, 지협은 몇 번이나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꽉 눌러야 했다. 허벅지 사이에 점점 열이 오를 만큼 교묘하게 예민한 부분을 쓸어간다. 귀두를 할짝이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거의 갈 것 같은 기분에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친구의 음란한 모습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자신처럼 강직한 녀석이 지조없이 이렇게 되어버린다는 것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반응해버린 몸 때문에, 지협은 녀석의 머리카락을 꽉 쥔 채 작게 전율했다. 그 순간이었다. “..........-!!!!!!!!!!!.............” 부드럽게 턱을 치켜들며, 녀석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하는 지협의 정액을 천천히 손가락 사이로 핥아갔다. 음미하는 표정이 너무나 탐욕적으로 보여서, 지협은 난데없이 속이 욱씬거릴 정도였다. 손가락 사이에 얽힌 타액을 혀로 낼름거리며 살짝 훔쳐보는 그의 눈길이 느껴졌다. 새침하게 올라간 깊은 눈매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 살짝 웃음끼마저 머금은 입꼬리도 나른해 보인다. 그 표정에 또다시 압도당했다. 저토록 야한 표정을 지으며 얄밉게 웃다니... 저게 정말 계가윤인가..라는 먹먹한 생각이 머리 속에 떠다니지만, 지협은 조금 탁해지는 자신의 호흡을 숨길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지협의 분출물들로 조금 적셔진 손가락을, 자신의 몸 뒤로 가져가며 가윤이 작게 허리를 떤다. 녀석에 의해 완전히 벗겨진 자신과는 달리, 녀석은 아마 하반신만 벗은 상태였던 것 같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아까 외출할 때 속에 받쳐 입었던 하얀 셔츠를 벗지 않았다. 그 상태 였기 때문에, 지협은 녀석이 정말 뭘 할 생각이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 그러나 곧 깨달았다. 자신을 삽입하고 있는 뜨거운 입구와 체온의 느낌을 말이다. 스스로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펴서 지협을 삽입하던 가윤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굉장히 힘겨워 보인다. 설명할 수 없을만큼 묘하게 찡그린 모습에, 또다시 관자놀이가 질끈거렸다. 평상시에 보여주는 온통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얄미운 얼굴만이 아니었다. 그 표정에 덧붙여, 조금 떠도는 곤혹스러운 시선이었다. 그러나 가윤은 입술을 조금 깨물고, 여전히 지협의 허리 아래로 몸을 낮춘다. ‘아...’하고 지협이 작게 신음을 입밖으로 토한 것은, 자신의 페니스를 감싸는 엄청난 압박감과 뜨거움 때문이었다. 조금 전 녀석의 입안에서 혀로 튕겨질 때의 느낌보다, 배로 근육들이 춤을 춘다. “...................이런...............” 계속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자신이 지금 녀석의 몸 안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그런 곳에 몸이 열리리라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으로...그것도 생전 처음 겪는 굉장한 뜨거움이 자신의 분신을 잔뜩 죄여온다. “..........읏..................” 그 뜨거운 죄여옴에 미칠 정도로 요동치는 하반신과는 달리, 머리 속은 충격으로 점점 하얗게 찢어졌다. 이 것이 그 잘난척하는 얄미운 덩어리 계가윤이라니...녀석의 내부가 이런 열기로 자신의 것을 감싸다니...!!! 젠장..진짜 뜨겁잖아...라고 악 문 입술 사이로 욕설이 절로 튀어나온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겨우 헐떡이며 지협이 눈을 떴을 때, 드디어 가윤이 제대로 보였다. 길고 아름다운 두 다리를 벌리고, 마치 자신이 지금 들어간 몸이 같은 사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지 않으려는 듯, 벌어진 셔츠의 깃을 간신히 한 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녀석의 단단한 근육이 가볍게 경련하는 것까지 똑똑히 느껴진다. 뿌리 끝까지 힘겹게 삽입하자, 맞물린 곳에서 물기 부딪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괜찮아...” 너무나 놀란 듯한 자신의 눈동자를 보았는지, 가윤이 가볍게 숨을 할딱이며 턱을 치켜든다. 그리고 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강지협... ................두번 다시 안 할거야... ...그냥.. ...어려서............그런 ...거야. ..그냥 그렇게 생각해 ........“ 언제나처럼 재수없이 가르치는 듯한 말투였지만, 자신의 것을 꽉 죄여오는 그 엄청난 압력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협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대답할 의도가 아니라,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욕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허리를 흔들 때마다, 수축하고 확장하는 마찰소리가 접합된 부분에서 들려왔다. 마침내 지협은 참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 위에 내려앉은 그의 몸 뒤로 손을 가져간다. 마침내 욱씬할 정도로 자신을 지배하는 본능에 타협하고 만 것이다. 가윤의 엉덩이를 앞 쪽으로 바싹 끌어당기며, 삽입된 부분의 이 생생한 감촉을 탐닉하기 바빴다. 앞으로 쓰러질 듯한 자세로 작게 몸을 떠는 가윤 역시 촉촉한 신음이 연신 쏟아진다. 정말 발정기라도 맞이한 걸까..이 녀석... 어떻게 해야 이렇게 교태로워 보일 수 있지?? “...............으응............” 자신의 몸 안을 휘저어 놓는 뜨거운 지협의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고 작게 인상을 찌푸린다. 점점 녹초가 되는 것처럼 녀석의 상반신이 자신을 향해 기운다. 그 때문에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울 것처럼 묘하게 갈라지는 음성과 절묘하게 잘 어울리는 그 표정 때문에, 지협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평상시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런 얼굴. 조금씩 지협 역시 무심결에 몸을 움직이자 그의 신음이 더욱 짙어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느끼는 얼굴이었다. “.......아앗!........아,앗!앗!.........” 꿈틀거리는 자신의 분신 탓에 잔뜩 내부를 유린당하는 듯, 가윤이 가여울 정도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숨기지 못한 신음이 조금 벌어진 도톰한 입술에서 세어 나오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파르르 전율하는 얼굴은 거의 뻑 갈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보통 때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는 살짝 찡그린 표정. 매달리는 느낌처럼 애원하는 듯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댄다. 단정한 얼굴이 쾌감에 엉망이 되어, 절실하게 매달리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얼굴과 몸마저도 미끈하게 젖어 착 달라붙어 있다. 꼭 엄청나게 음란한 기운이 자신을 에워싸며 잡아먹는 듯한 쾌락에 시달린다. “.............히-ㅅ-!!!!!!!!!!...............” 그 표정이 갑자기 너무 굉장해서 지협은 일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성이 백지장처럼 날아가고, 본능만이 살아남아 짐승처럼 몸을 움직이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힘으로 관통당한 모양이었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여유를 찾을 사이도 없이 가윤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흥분에 젖어 있다 해도, 그렇게 섹시한 음성은 생전 처음이었다. 지협도 마침내 복부에 힘이 들어간다. 뇌를 잠식하는 듯한 쾌감이 쿵-쿵-쿵- ..굉장한 발자국을 찍으며 심장으로 세어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살짝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짙은 쾌감에 사로잡힌 아름다운 눈동자가 또렷하게 눈 앞에서 흔들렸다. 내가 정말 돌아버린 것 같군..계가윤이 이럴 때 예뻐보이다니..라고 생각하며 지협은 몰려오는 수마에 굴복하고 말았다. 털썩..하고 자신의 몸을 향해 쓰러지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왠지 모르지만, 조금 손가락으로 걸어 끌어 당겼던 것도 같다. 아아...지금 우리가 뭘 한거지.... 아니, 니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거지.... 이 뜨겁고 온통 축축한 물기는 도대체 뭐지.... **************************** 글쎄.. 하지만 결국 녀석에게는 그 일 역시 그냥 아주 악랄한 하나의 게임이었던 걸까? 일어났을 때는 이미 가윤이 없었다. 젖어 있는 침대 시트와 헝클어진 이불들만이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을 뿐이다. 어제 밤에는 완전히 미쳤다 치더라도, 지협은 이게 또 무슨 일인지 생각하기 위해 침대에 앉아 잠시 끙끙거려야 했다. 뭐냐구.??? ..아아....뻔하다. 어제 자신의 18년 지우와 섹스를 했다. 미치겠다. 돌아버리겠다. 정말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자기 경멸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막 다시 잠들기 직전에 자신의 몸을 향해 쏟아지던 녀석의 갸름하고 젖은 얼굴이 너무나 예뻤다. 분명 그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쾌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늘게 전율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이...좇같다. 지협은 자신이 그렇게 느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좇같아서 기분 더러워졌다. 가끔 사내 녀석들에게 섹스는 배출의 욕구와 같아서 어제는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감정이 개입되면 이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 대형 사고를 친 당사자는 아침이 되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녀석이 바로 계가윤인데도 말이다. 물론 여기까지 생각할 틈도 없이, 나영이 드디어 찾아왔다. 생각해보니 주말이었던 것이다. <6> 오전까지는 날씨가 지랄같이 맑았는데, 곧 있을 여름을 나타내듯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다. 나영과 집에 있었던 시간은 채 2시간도 되지 않았다. 빈 집에 둘만 있기도 머쓱하고 해서, 지협은 영화나 보러 가자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렇게 서너 시간 떼우고 나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찻집에 앉아 이것 저것 이야기도 좀 나누고 하루 해가 언제 지는지 고민해 버린다. 녀석이 아침부터 왜 사라진 건지 새삼 궁금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어제 자신의 입으로 나영이 찾아오니 집에 있지 말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 정신이 들고 나니 그 일이 떠올랐다. “가윤이가 학교 안 나온 날...” ..라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나영이 말했다. “가윤이가 학교 안 나온 날 클럽에 있었다는 거 진짜야?” 망할 놈의 뒷소문. 담임이 부르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아니, 부모님들이 아실까봐 속이 바짝 타 버린다. 그렇다고 문제의 당사자인 가윤이 그걸 해결할 의지가 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욱 큰 사고만 치고 콧배기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모르지..어제 만난다던 잘생긴 회사원을 만나러 갔는지도... “너는 그 클럽이라는데 한번 가 봤어?” 타박 타박- 곧 흐려지는 골목을 걸으며 나영이 중얼거렸다.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지협이 말없이 고개를 젓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은 안쓰러운 표정이 서로 닮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너는 가윤이 친구잖아. 너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 “........너는 걔 친구잖아.” 이 쯤에서 아마, 평상시의 자신이라면 나영이 아직도 가윤에게 미련이 있는가..라고 고민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오히려 그녀의 얼버무리는 말 끝이 갑자기 싸늘하게 숨통을 쥐고 흔들어댄다. "나영아.......“ “너는 걔 친구잖아...그렇지 않아?” 고집스럽게도 묻는다. 18세에게 친구란 굉장한 단어인데도 말이다. 아니..친구 아냐. 친구랑 섹스하진 않아. 어느 누구도 친구랑 그런 식의 관계가 되진 않아. 지협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뭔가 기묘한 기억들이 잔뜩 뇌리를 치고 들어온다. 그것은 하다못해 이 골목길 끝에 있는 자신들의 아파트. 그 앞의 놀이터에서도 항상 묻어난다. “..........생각해보면....” 지협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그의 가방에는 오늘 2년만에 처음으로 담배가 등장했다. 가윤이 어제 자신을 덮쳤다는 그 엄청난 충격을 상쇄하기 위한 흡연의 유혹이다. 나영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표정이었다. 날은 흐렸지만, 서늘한 바람이 무척 시원하게 얼굴에 와 닿는다. “생각해보면,... 그 녀석은 항상 나에겐 최악의 친구였어. 언제나 잘난 척이고, 늘 숙제같은 걸 빌려야 하는 나를 골탕먹이고....“ “.............그래도 친구잖아.” “....그래..” 이전까지는 그랬지.......라고 지협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친구’라는 무게가 이렇게 큰지 몰랐다. 생각도 안 해봤다. 친구를 안을 날이 올 거라고는..아니, 그랬기 때문에 지금처럼 마음이 초조해 지리라고는.. 눈을 돌려 가까워진 놀이터를 쏘아보았다.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가윤은, 그 이쁘장한 꼬마가 참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항상 외로워보였다. 그래, 생각해보니 가윤은 어릴 때부터 엄마가 없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혼자였다. “가윤이는 어릴 때도 재수없는 녀석이었어. 언제나 또래 다른 녀석들보다 책도 많이 읽어서 잘난 척하고...“ 그게 아니잖아, 이봐 강지협. 말은 바로 해야지..너도 스스로 잘 알고 있잖아. 가윤이가 책을 읽었던 건, 혼자 남겨지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러면서도 내가 같이 놀자고 꼬득이면 항상 비웃듯이 쳐다보곤 했어. 그 꼬마가 말야. 맨날 잘난척 하며, ‘너랑은 안 놀아.’라고 말했지.. 나에게 말야. 얼마나 내가 속이 울컹 거렸는지 알아? 항상 가윤이는 한대 패 주고 싶었다구.. 씨바.. 부모님들이 친해서 그렇지, 그렇지만 않았으면...............“ ........그렇지 않았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자신과 지냈더라도 여전히 가윤이는 그 든든한 위장용 잘난척으로 재수없이 버티고 있지 않았을까. 지협이 투덜거리는 듯한 입을 닫으며 쓰게 웃자 나영이 궁금한 듯 눈을 굴렸다. 그리고 그 때에 나영의 등 뒤에서 검은 승용차가 한대 바퀴를 굴리며 다가섰다. 처음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그러나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검은 차는, 그 진한 선탠만으로 미스테리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문제의 차는 천천히 미끄러지듯 다가서며 속도를 늦춰 버렸다. 한마디로 이 쪽에 볼 일이 있다는 증거다. 어리둥절한 나영과 자신을 놀리듯, 값비싼 승용차 창문이 서서히 내려간다. 운전석에는, 굉장히 이목구비 단정하고 잘생긴 청년이 놀리듯 몸을 내밀고 있었다. “....니가 강지협이냐?” 어찌나 대놓고 싸가지 없게 묻는지, 지협은 하마터면 욕을 내던질 뻔 했다. 대신 나영을 생각해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싸가지 없는 잘생긴 청년은, 신경도 안 쓴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 계가윤이랑 원조교제 하는 사람이거든?” “.............-!!!!!!!!!!!!!!!!!!” “이제 서로 자주 볼 사이인데 인사라도 할까 해서 말야. 거 참 잘생겼네... 너도 호스트 할 생각은 없냐?“ 그 때서야 맞은 편 차문으로 내리는 가윤이 보였다. 어제처럼 취해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굉장히 침착하고 싸늘한 표정일 뿐이다. 언제나처럼.. 수십년간 익숙해진 계가윤다운 얼굴. 건방질 정도로 턱을 치켜들며 그럼에도 위선적으로 미소짓듯 살짝 웃었다. 자신만만하면서도 억지스러운 친절을 나타내는 미소다. 그 달콤한 눈빛이다. 언제나 얄미운 새끼..... “나영이 왔네?” 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나영은 청년이 말한 ‘원조교제’때문에 거의 카오스에 빠진 표정이었다. 지협은 머리끝까지 부글거리는 심정으로 청년과 가윤 그리고 나영을 번갈아 쳐다본다. 최악이다, 최악! *************************** 쾅-하고 현관이 닫히자마자, 가윤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긴다. 그 바람에 건방진 이 녀석이 휘청거리듯, 거실 위로 나뒹굴어야 했다. “너 완전히 미쳤냐, 계가윤?” 그러나 피식- 마치 신경을 끊을 듯 노려보는 자신의 시선에도 아랑곳없다. 녀석은 그저 피식거릴 뿐이다. 언제나처럼 얄미운 입술이 오늘따라 붉게 달아올라 숨이 막힐 정도로 혀를 낼름거린다. “난 미친 거 맞아.” “미치려면 너 혼자 미쳐. 나까지 전염시키지 말고.“ 어제의 일까지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계속 어긋나려 필사적인 가윤에게 정말 화가 났다. 설명을 원한다, 설명을.. 지금껏 아무리 가윤이 얄밉게 굴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자신을 도와줬었다. 나영의 문제도 그렇고, 숙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심지어 부모님께 혼날 때에도 가윤은 얄밉게 놀려댔지만, 정작 그 부모님 앞에서는 위선적인 친절한 미소로 자신을 감싸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친구로 남을 수 있었다. 아무리 나쁘게 굴어도 속까지 엉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남자를 사귄단다. 그것도 진짜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라면 십팔년 친구인 자신이 등 돌리지도 않을 거다. 그럴 필요도 없다. 친구가 어려운 선택을 한다는데, 머리 속으로 이해가지 않더라도 백분 도와줄 정도의 의리가 있다. “아까 그 새끼가 그 잘생긴 회사원이냐? 그 새끼한테 정말 돈 받고 그 짓 해주냐?“ 어제 너랑 나랑 한 그 짓 말야. 그렇게 생각하니 더 속에서 천불이 났다. 어제 그건 뭐야, 그럼...얼마나 더 고약한 장난을 걸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냐.. “아~ 그 형? 그 사람 맞아. 그래...돈 받고 그 짓 해 줘. 조금 전에도 얼마나 흔들다 왔는지 허리가....“ 머리 속이 점점 차가워진다. 지협은 말없이 바닥에 누운 채, 악녀처럼 얄밉게 웃어대는 녀석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는 멱살을 쥐듯 머리를 들어올렸다. 이성의 밑바닥으로 잔뜩 가라앉은 분노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의례히 그렇지 않은가. 화가 날 때 무슨 생각이 차분하게 돌아간단 말인가.. 그리고 이 녀석은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 틈도 전혀 주지 않을까. 어쩌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코너에 몰아대는 걸까. 내가 너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냐, 이 십새꺄.... “새삼 그런 거 가지고 왜 화를 내냐, 유쾌한 바보? 이미 알고 있으면서?” 정말은 어느 쪽이 진짜 화나는지 자신도 가늠할 수 없었다. 가윤을 안은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애당초 자신을 상대로 이런 험상궂은 장난을 치는 가윤에게 화가 난 건지, 것도 아니라면 아직도 ‘친구’라는 이름에 시달리는 자신들의 18세에 화가 난 건지... 어쩌면 이 녀석이 정말 돈 대주고 몸 팔고 즐긴다는 그 잘생긴 청년에게 미칠 듯이 화가 난 건지.. “...죽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녀석의 그 선이 아름다운 목을 양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침착한 작은 얼굴이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어서 죽여. 넌...“ “....................” “.......넌 내 친구잖아. ...그러니깐,..이쯤 보여줬으면 죽여도 돼.“ 아아...라고 지협은 낮게 신음했다. 손아귀 아래로 늘 그렇듯, 작게 두근거리는 녀석의 심장이 느껴진다. 어제밤에 그렇게 와 닿던 뜨거운 체온. 온통 뭉텅이져서 알싸하게 재촉하던 그 환장할 것 같은 쾌감. 그것과 자신이 지금 품은 살기는 미묘하게 마주 이어져있다. 그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쳤다. “넌 좋은 녀석이야, 강지협.” “.................가윤아...” “...그러니깐 할 수 있을거야.” 얼마나 침착하게 말하는지 지협은 그 순간 정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 뻔 했다. 살짝 부푼 아랫입술을 열어, 조금 숨이 차 보이는 음색이었지만 굉장히 서늘하게 웃는 가윤이다. 눈을 가늘게 해서, 달콤하게 웃어준다. 말도 안 된다. 그 순간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혈관들이 팽창했다. “넌 좋은 녀석이야..사실. ..나도 알아. 세상에 나만큼 널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야.. 잘생긴 바보.“ “.......계가윤!!!!!!” “........그게 문제야. ..넌 너무 좋은 녀석이야. 어떻게 해도 나빠지지 않을 거야. ...........넌 머리는 좇나 나쁘지만.....“ “.........가윤아...” “..절대 부모님을 배신하지도, 친구를 버리지도, 사회에서 어긋나는 짓을 하지도, 사랑하는 여자를 잊지도 않을 거야. 그럴 거야. 그게 문제지. 그리고 나는..............왜... 왜 하필,.....난 거기까지도 알고 있어야 할까. 왜 니 말처럼 재수없게 너의 그런 점까지 이해하고 있어야하는 걸까?... 넌 나와는 달라.. 넌....어떻게 해도 나처럼은 안 될 거야..“ 부들 부들.. 지협은 갑자기 속이 울컥했다.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뻔하게 알아들었다. 항상 가윤은 그 모양이다. 왜 자신보다 훨씬 영리하고 예민한 걸까. 왜 그렇게 침착하고 조용한 눈빛으로...따뜻한 미소로 나를 욕하는 걸까. 당연히 자신은 이 녀석을 따라잡을 수도, 혹은 이 녀석처럼 타락하거나 망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가윤은 지금 자신에게 게임이라도 벌이고 있단 말인가. 이런 저질스러운 게임이 왜 필요한 걸까. 식도까지 속이 뒤엉키는 느낌에 지협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보다 가라앉은 음성으로 엄격하게 잘라 말했다. “아까 그 사람이랑 정말 사귀는 거냐?” 마지막 확인이다. 제발 계가윤.....차라리 그렇다고 말해라. 너를 위해 뭐든지 해 줄게. 동성애자 커뮤니티를 원해? 그럼 그거 만들어줄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내가 너를 변호해줄게. 넌 나를 알잖아. 난 그만큼 해 줄 수 있는 친구야..그렇지 않아? 제발 그렇다고 말해. 차라리 사귄다든지... 아니 이해할수는 없지만, 사랑한다라고 말해. 그렇게만 말하면 니 말대로 다 해결해 줄게. 니말처럼 그냥 어려서, 마음이 막 열기에 젖은 황당한 18세라서 그렇다고 내가 설득시켜 줄게.. 제발 좀-!!!! “사귄다고? ...하하.. 그런 걸 고상한 용어로 사귄다고 말해야 하는거야? 누굴 위해서? 너를 위해서? 돈 받고 그 짓 해준다고 솔직히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섹스도 하냐? ...............진짜?....” “당연한 거 아냐? 처음부터 한다고 했잖아, 이 돌대가리야! 난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냐. 그 사람의 몸이 좋은 거지.“ “그럼 어제 난 뭐냐...” “.........몰라서 물어? 심심풀이였어, 심심풀이.. 니들이 어제 거실에 앉아서 딸딸이 쳤듯이.. 나도 간만에 해 본 새로운 심심풀이였다. 왜? 정말 무슨 의미라도 둔 거야? 왜? 내가 임신이라도 할까봐 걱정 돼?“ “......이 개새끼......................”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단아하고 깨끗한 얼굴은 정말 순결해 보인다. 하얀 셔츠가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난잡했던 어제의 이 녀석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사실, 사내의 허벅지를 달구는데는 둘 다 좋았다. 깨끗한 얼굴이 흐트러지는 것도 좋았고, 몸살 날 정도로 젖은 채 신음을 참는 자존심도 좋았다. 그러나, 이 얄미운 몸, 얄미운 미소, 얄미운 눈동자, 얄미운 내부가 다른 녀석에게 같은 방식으로 열린다니...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어진다. 무의식적인 증오로 지협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모습을 아무에게나 보이다니....자신도 어제야 겨우 본 모습이었는데,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런 녀석의 얼굴이나 표정을 보고 있다니, ... 정말 환장할 것처럼 명치 끝이 아려왔다. 질끈-..숨이 막힌다. “이제 정말 나 미워하는 거지, 강지협?” ...이라고 목이 졸리는 순간에 가윤이 말했다. 여전히 웃으며, 차가운 미소가 너무나 어울리게 아름다운 얼굴로.. “...............!...........” 그 말에 정신이 번쩍 차려진 지협이 놀라서 손을 뗀다. 방금,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한 가윤의 한마디. 그 절실한 뭔가가 심장 모서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정말 나쁜 새끼.. 일부로 도발하다니...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나, 저게....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목덜미에 붉은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신의 살기가 눌러 붙여준 흔적이다. 한동안 관찰하듯 그 부은 자국을 따라가며, 말없이 지협은 고개를 숙인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한 행동이었다. 비록 재수없어 죽을 정도의 녀석이지만, 부드러운 목덜미에 벌겋게 남은 자국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 어제도 느꼈던 그 매끄러운 피부가 여전한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 목덜미의 흔적에 입술을 댔다. 마치 둥글게 원을 그리듯, 부끄럽게 달아오른 그 상처위에 혀를 굴리자 갑자기 바짝 긴장한 듯 녀석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뭔진 몰라도 그 반응이 신선하고, 한편으로 기대감으로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끄응- 하고 힘겹게 가윤의 목으로부터 얼굴을 떼며, 지협은 침을 삼켰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린 채 자신을 올려다본다. 이런 경우가 요 몇 주 동안 몇 번 있었다. 서로 말없이 응시하던 때가... 그리고 이렇게 위태로운 눈동자가 정말 가윤이 맞는지 안달이 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그 시선이 몹시 탐나는 바람에 계속 쏘아보게 된다.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가윤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실망감이 갑자기 싸하게 지협을 파고들었다. 대신 녀석이 돌려버린 채 자신에게 드러낸 옆모습과 더 긴장감 있게 도드라진 목선이 눈에 띈다. 그것에 화풀이 하듯, 강하게 이를 세워 물어 버린다. “.............아앗-!!.................” 가윤이 험상궂게 욕설을 던졌다. 십새끼..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욕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인데. 정말 놀랬던 모양으로 거칠게 숨을 씩씩거린다. “계가윤....” “.................” “정말로 죽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사람 자꾸 이상한 쪽으로 시험하지 마.“ 천천히 목을 털며 지협이 일어섰다. 이번에는 손자국 대신에 발갛게 부어오른 이빨 자국을 단 가윤의 목이다. 그 벌건 상처를 보는 순간, 왜 낙인처럼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처음보다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적어도 그렇게 물리는 순간의 가윤은, 여느 때처럼 악랄하고 고약하지 못했다. <7> 가장 오래된 친구와 잤다. 그건 쉽게 잊혀질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벌떡- 아침마다 축축해진 이불 위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의례히 지협은 식은땀에 젖곤 했다. 최근에 일어난 몇 가지 현상이다. 더군다나 요새는 가윤도 자주 집에 붙어 있는다. 늘 있는 일이었는데, 이젠 무시할 지경을 넘어섰다. 가끔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샤워를 하고 나올 때마다, 지협은 TV 야구 중계보다 다른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것은 바로 자주 자신에게 보여지는 녀석의 등. 우습게도 그 등에 정신을 빼앗기곤 했다. 등 줄기로 흐르는 몇개의 물방울에 넋을 잃은 듯 집착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눈동자가 그 범위 밖으로 돌려지지 않았다. 그 얄미운 등. 그리고 물방울. 한번 핥아보면 갈증이 사라질까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단지.... 그것은 갈증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보아온 친구. 젖내나는 아기 때부터 부비 거리며 깔깔거리던 친구. 저녁마다 수백번은 서로 스쳐갔을 친구. 그런 녀석에 대해 전에 없이 의식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문득 두렵다. 그러면서도 계속 타들어갈 것같이 목이 말라온다. 아주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녀석의 방문을 두들길지 몰라 겁이 났다. 어떤 이유를 대건, 요 며칠 아침마다 흥건하게 젖은 몽정으로 깨어야 한다는 것도 두렵다. 어지러운 감각, 몇 시간이 지나도 계속 해서 더 또렷해지는 그 감각들이 낯설다. 그런 자극들을 누구보다 오래된 친구에게서 갈구한다는 것이 가장 소름 끼친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욕구불만에 시달렸다. 자신의 처지가 우스웠지만, 웃을 수 없었다. 정말 안고 싶어졌다. 한번만 더 확인해 보고 싶을 뿐이다. 저렇게 시치미 뚝- 떼는 녀석이 가증스러울 정도로 그 날은 애원하는 시선이었는데... 아쉽다. 그리고 점점 더 신경은 난폭해진다. [장편] 클럽-비우(非友) - 3 ********************************** 마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가윤이랑 잘 지내고 있냐?’ 건성으로 대답하며 지협은 닫힌 녀석의 방문 쪽을 바라본다. 녀석은 요새 밖에 나가지 않는다. 클럽도 안 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지협 자신과 자주 마주치지도 않는다. 아까 학교에서 잠시 스쳤을 뿐이다. 그것이 꼭 폭풍 전야 같아서 사실 신경이 더 곤두선다. 지협이 집중하지 않는 걸 아는지, 어머니는 연신 혀를 차고 계신다. ‘가윤이랑 잘 지내. 그래도 그 녀석 정도 되니깐, 너 같이 별 볼일 없는 놈하고 친구 해주는거야.‘ “아으!! 엄마! 그런 거 말 안해도 알아! 고만 좀 해요.“ ‘이 녀석이 성질만 살아가지고...’ 이젠 전화를 끊을까 하는데, 어머니는 그래도 염려가 된다는 식으로 덧붙이신다. ‘잘 하라구, 이 눔아! 괜히 미움 받지 말고!‘ “아, 알았어요! 회는 열심히 팔고 계시죠?“ 언제나 유쾌한 바보. 강지협은 그 씁쓸한 비아냥을 떠올리며 전화를 서둘러 끊는다. 예사와 같은 어머니의 잔소리가 너무 뜨끔했던 까닭이다. 엄마, 나 가윤이랑 잤어요....라고 말하면 우리 엄마 아주 기절하실지도 모른다. 쓰러지시는 정도도 아닐 거다. 차라리 남자를 안았다고 말하려면 생판 모르는 녀석을 말하는 게 나을지도.... 아니지...엄마, 엄마 아들이 살짝 미쳐서 아직도 녀석에게............. “..........-!!!!!!!!!!” 그리고 갑자기 떠올랐다. 어머니의 아무렇지도 않은 마지막 당부와 겹쳐서 기억이 났다. ‘미움받지 말고....’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녀석도 아주 비슷한 어감의 말을 했었다. 자신에게. *************************************** ‘이젠 나 정말 미워할 자신이 있어? 해 봐... 내가 너에게 그 정도 했으니, 넌 나 미워해도 돼. 죽여도 돼. 그래야 진짜 친구지...‘ ...라고 가윤이 말했다. 어머니의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지협은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일순 행동을 멈췄다. 분명히 혼자 방안에 앉아있는데, 머리 속이 온통 윙윙- 울리는 기분이다. 익숙한 자신의 방이 갑자기 거꾸로 회전하고 사방의 벽들이 일시에 다가오는 기분이 든다. 정신이 확 깬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처음부터 녀석은 그렇게 말했었다. ‘너 나 안을 자신있어? 너 나한테 안길 자신 있어?’ .........라고. 물론 그 뒤에 단서처럼, ‘물론 나는 너 아니래도 사내 녀석이라면 다 좋지만...’이라고 덧붙였지만.. 갑자기 그 말들이 떠오르면서 베일이 싹- 걷히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그 말이 이상하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드디어 알았다. 녀석은 정말 자신에게 미움받고 경멸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말들을 마구 끄집어내고, 항상 자신이 진심을 알고 싶어하면 더 없이 악랄하게 굴어 이성을 잃게 만든다. “.................-!!!!!!!!!!!!” 하느님...................... ........이라고 지협이 짧게 탄식했다. 계가윤이 아무리 자신을 비웃어도, 18년 친구라는 타이틀은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녀석은 어릴 때처럼, 지금도 지협을 거뜬하게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한결 날카로워진 지협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쓸쓸한 표정, 비틀어진 자괴감, 상실 가득한 눈동자,...아주 짧게 가윤을 솔직하게 만들었던 그 시선. 그것은 흡사 침묵으로 말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잡아줘’라고 필사적인 몸짓으로 말하면서 행동만은 지협을 떨어내려는 듯 온갖 난잡함으로 위장한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미, 지협은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왜 가윤이 클럽에 나갔는지를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알게 되었다. 만약 입장을 바꿔 자신이 가윤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로 굴었을지 모른다. 판단이 거기에 다다르자 그는 참지 못하고 벌떡- 침대에서 일어섰다. ********************************* 쾅쾅- 가윤은 잠들기 직전에 문 소리를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험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다. 이 집에 저렇게 문을 두드리는 녀석은 강지협 밖에 없다. 그렇다고 수십년 동안 녀석이 노크하는 걸 보건 이번이 처음이다. “뭐야?”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을 여는 녀석도 강지협 밖엔 없다. 무식한 새끼...라고 중얼거리며 가윤은 침대 저쪽의 이불을 확 걷어 자신에게 덮는다. 볼일 끝내고 빨리 나가라는 표시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 갑자기 들어와서 시비다. 목덜미에 남은 손자국을 어루만지며, 가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싸움은 어제 했던 그것으로 오늘 접으면 안될까? 가뜩이나 피곤한데 말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등교해서 담임에게 한참 시달렸다. 그러니 결코 평탄치 않은 하루였다. 그러나 녀석은 격한 손길로 자신이 덮은 이불을 확- 걷어낸다. 마침내 가윤이 포기하고 침대에 제대로 앉을 때까지 녀석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급기야 피로한 얼굴로 가윤은 냉랭하게 비꼬아댔다. “갑자기 왜 시비야?“ 다소 노곤한 시선으로 묻는 말이었다. 심장도 느슨하게 뛰고 있었고, 별다른 경계심없이 피곤했기에 꺼낸 물음이었다. 그러나 이 철벽같은 녀석은 탄탄한 상체에 팔짱을 끼며 문득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에게 안기고 싶다면....” “..............??........” “.........너는 지금 니가 하는 짓들 말고, 다른 선택은 없는거냐?...........” “..............-!!!!!!!!!!!!!!!!!!” 아무리 친구가 아니라고 말했어도 그들은 뼈속까지 파트너였다. 비록 겉으로는 친하지 않았지만, 싫으나 좋으나 서로를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둘다 서로를 놀리고 갉는 걸 좋아했지만, 결정적일 때는 항상 친구였다. 때론 지협이 머쓱하게 말하고, 때론 장난치듯 말하고, 또 때론 진지하게 말하고...심지어는 주어와 목적어를 다 생략한다 해도 알아들을 수 있다. 어떤 식으로 말하더라도 가윤은 그가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문제다. 방금, 이 녀석이 자신의 ‘딜레마’를 이야기 했다. 믿을 수 없지만, 이 강직하고 벽돌같은 녀석이 검은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자신을 쏘아본다. 가면으로 쓰고 있을 미소까지 꿰뚫어 마치 영혼의 깊은 곳을 유린하듯 꿰뚫어보고 있다. 흡사 거짓말을 꺼내면 죽여버리겠다..라는 식으로 쳐다본다. 가윤은 척추 마디를 전율하는 오싹함으로 잠시 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마치 쥐어짜듯 웃으며 한 단어씩 내뱉으려 애썼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굳이 너에게 안기고 싶었던 게 아냐.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였지..“ 아아... 역시 아무리 이성을 잃고 마음이 절박했어도 그 날 이 녀석과 그러는 게 아니었다. 너무나 잘 속이고 위장해왔기 때문에 절대 이 녀석이 알아차릴 리 없다고 여겼던 게 화근이다. 모를 줄 알았다. "그래.................“ ...녀석이 갑자기 입술 끝을 올리며 씨익- 웃는다.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저렇게 칼끝을 세우듯 웃는 걸 보지 못했다. 갑자기 손마디가 다시 벌벌 떨려온다. “..아..그래... ..예를 들고 싶어서 굳이 친구에게 안긴단 말이지.. ...좋은 비유야. 너 처럼 머리 좋은 녀석들이라면 몸으로 가르쳐 줄 정도는 되야지.“ “..............................” “.......하지만, 친구의 그 희생 가득한 가르침을 받고 생각해 봤는데 말야...” “............................” “.....나도 예전같으면 친구놈을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미친 게 아닐까...하고 걱정했을거야. ..하지만 겪고 나니, 정말 친구 놈을 안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니, 안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지. 안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한거지. 그렇지 않아?“ 무슨 말이 하고 싶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얼음같은 미소를 싹 지운 채, 상대방을 지독하게 관찰하는 시선이 된다. “내가 너 안고 싶어서 그 날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구. ........비록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 “솔직히 말해줄까? 그 날 이후로도 계속 생각나서 거의 미칠 것 같아. 그러니 이제 니 상태를 좀 더 이해하게 됐지. 천하의 계가윤이 내 주변을 난장으로 만드는 이 사건들을 저지르는 이유가 뭘까...라고.“ “.........지협아..........” “나쁜 새끼..” 그리고 이를 갈듯 쏟아부었다. 갑자기 달려들어, 멱살을 쥐고 불길이 확 번지는 지독한 눈동자로 으르렁 거린다. 숨이 막혔다. 어제 목을 조를 때보다 더 이유 있는 살기였다. 어제는 비록, 자신이 도발한 탓에 화가 난 것이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의 살기는 진짜다. 마치 자신을 죽이거나, 혹은 벌거벗겨 농락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정도로 필사적이다. 그만큼 흔들린 것이다. 가윤 자신이 녀석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건데...........마지막까지 참지 못하고 녀석에게 안긴 게 미치도록 후회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 좋은 녀석은, 끝까지 모르고 자신을 단념했을 것이다. 바로 친구라는 존재로써의 계가윤을 언젠가는 체념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강철같은 녀석은 또렷한 눈동자로 노려보며 낮게 속삭였다. “안기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안돼?” “.............-!!!!!!!” “하긴...... ...대한민국의 어떤 녀석이 자기의 오랜 친구한테 안기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겠어. 나라도 그렇게 못하지.. 그래..고민했겠지, 너도. 인정해. 그게 고통스러워서 클럽에나 나갔어야 한다면.. 좋아.. 그것도 인정해. 그런데... 왜 갑자기 밤 중에 안기고 지랄이야!!!!!“ “........너에게 안기고 싶은 게 아냐..” 그래도 침착하게 댓구하자, 녀석이 싸늘하게 씹는다. 웃기지 말라는 듯 음산하게 웃었다. “알아, 알아. 이해한다니깐... 나도 하고 싶지 않아, 계가윤. 정말 하고 싶지 않아. 너도 그랬겠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 진짜야. 이해해. 그러니 더 미치지.. 그런데도 하고 싶은 걸 어떻게 해!!!.........“ “..안 들려.....” “나쁜 새끼... 그렇다 하더라도...좀 더 참았어야지, 이 새꺄.. 아니면 끝까지 너만 망치던지... 이게 뭐야..“ “.......안 들려...” “웃기지 말고 들어. 내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얄밉게 안 굴래? 솔직히 말해줄까? 너 때문에 갈증이 나. 아침부터 밤 끝까지 니 지랄같은 행동들과 걱정들 밖에 안 들어. 혹시 원한 게 이거 아냐? 하루 종일, 온 종일.. ...망할 놈의 니 생각밖에 안 든다구............“ “안 들려.........-...........” 몸 전체가 갑자기 힘이 쭉- 빠진 채, 가윤은 안간힘을 다해 노래 불렀다. 그리고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저어댄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녀석이 힘찬 손길로 팔을 뻗는다. 찰싹- 하고 예리한 소리가 얼굴을 후려쳤다. 노래를 부를 힘도 사라진다. “들어, 이 나쁜 새꺄...............” “안 들려.” “들어!!!!!!!!!!!!! 니가 만족할만한 이야기야. 그래, 니가 이겼어. 원래 니가 이기는 게임이었어. 너 때문에 아침마다 사정을 한다구. 니 생각하면서 자위를 하게 돼! 너도 발정났지? 나도 그래! 하기 싫은데도 그렇게 돼. 나도 미치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니가 원하던 게 혹시 이런 거야? 이래서 좋아?!!!!!!!“ 녀석이 악을 쓴다. 가윤은 말없이 지협을 쏘아보았다. 정말 들리지 않는다. 니 말 같은 거 하나도 안 들려............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협의 눈동자가 조금 빨갛다. 정말 고민했을 거다..이 새끼는... ......한심할 정도로 강직하고 사람 좋아서...아마 죽도록 생각했을 거다. 그러니 니가 내 친구지..........라고 가윤은 쓸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지협은 더 기가 찬다는 듯 천정을 바라본다. 사실대로 말하자고 그가 말했다. 그래, 가윤은 그래서 웃었다. 녀석이 맞는 말을 했다. 녀석은 그러고도 남을 줄 알았다. 정말 안기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아닌 것처럼 말하고 아닌 것처럼 얄밉게 굴어도, 그 행동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며칠 전처럼 그렇게 안기진 않는다. 곧 죽어도 자신을 안을 강지협이 아니다. 포기하고 있었지만,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살고 싶었다. 그건 생존 본능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죽을 것처럼 너무나 아프기 때문이다. “가윤아............제발.............” “...............” “......뭐라고 말해 봐...” 인형처럼 눈만 깜박이자, 녀석이 갈라진 목소리로 재촉한다. 그래서 녀석이 좋다. 이 녀석은 자기에게 소중한 것 밖에 모른다. 버릴 줄 모르고, 떠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좋았다. “.........강지협...” “.....................” “.........니가 친구 아니라고 말해줘서 정말 기뻤어.” “...............-!!!!!!!!!!!!!” “난 니 친구이고 싶지 않았어..“ “........................” “그렇다고 연인이 되고 싶은 것도 전혀 아냐..“ 녀석이 힘차게 잡던 목덜미를 스르륵 놓는다. 조용한 자신의 목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삐걱거린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길이다. 고개를 저으며 삐딱한 미소를 억지로 지은 채, 녀석이 중얼거렸다. “지독한 새끼....“ “.................” 뜨거운 기운이 목 너머로 올라온다. 가윤은 겨우 겨우 그것을 꿀꺽- 삼키며 애써 냉정한 웃음을 지었다. 어쩌란 말인가. 이대로 조연같은 친구로 평생 지내는 것도 고통스럽고, 그렇다고 녀석과 희희덕 거리며 둘만 즐거울 수도 없다. 자신은 녀석을 잘 안다. 자신이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절대 친구를 안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했을 저 상식적이고 강직한 녀석은... 지금 당장만 혼란스러울 뿐, 언젠가는 열정만큼 치밀하게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사회와 가족들이 등돌리는 관계로 밀어넣은 자신을 누구보다 미워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경멸에 비할 바 아니다. 그래서 친구로 남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연인이 될 수도 없다. 가윤의 딜레마는 그것이었다. 클럽에 왜 나갔냐니.. 그건 너무 뻔한 이유다. 이제는 저 녀석도 알고 있는 바로 그 이유다. 그저 도망가고 싶을 뿐이다. 한국의 열 열덟 <8> 지협은 그 날 고개 돌렸다. 자신과.. 녀석과, 그리고 이 모든 현실에서 잠시. 물론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바로, 하지 못한 말 사이에 무수한 침묵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지협의 어지러운 판단력도 잠시였다. 감히 그것을 식힐만한 일이 곧 터진 것이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같은 반 녀석들 중 누군가가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구체적으로 가윤이라는 걸 언급한 건 아니지만, 어느 누가 보아도 그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가 된 글은, 학교 학생 중 누군가가 불건전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는 것과 그가 그래도 모범생의 탈을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음해성 내용이라는 이유로 선생에 의해 곧 삭제가 되었지만, 파장은 의외로 심각했다. 지협은 가윤이 곧 교무실에 불려갈 거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더군다나 다른 녀석들의 노골적인 따돌림도 가뜩이나 심각해지는 편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가윤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분명치 않다. 언제나처럼 조금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 편이었다. 늘 그렇듯 똑같은 표정, 늘 그렇듯 깨끗한 얼굴, 추호의 거리낌도 없고, 아무런 감정없는 미소. 도무지 그 뜨거운 몸이 진짜 녀석이었는지 의심이 늘 들만큼 냉정한 웃음. “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문제야...” 범기가 중얼거렸다. 녀석은 조금 전에 교실 창밖으로 스쳐가는 가윤의 반듯한 옆모습을 훔쳐보며 지협에게 넌지시 말한다. 그래도 점심을 먹은 직후였고, 일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녀석과 농구를 하기 위해 나오던 길이었다. “그래.” 지협은 짧고 건조하게 대답하며 가윤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휙 돌린다. 뭔가 불분명한 답답함이 명치 끝에 매달렸지만, 결국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요새는 잘생긴 그 회사원이라는 남자가 자주 데리러 오더라..” 농구공을 튕기며 범기가 작게 속삭인다. 아마, 게시판 사건으로 수근거리는 녀석들을 생각한 것 같다. 뭐, 반응은 여러가지였다. 범기가 구체적으로 가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비꼬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만, 뇌리에 선명하게 박히는 ‘잘생긴 그 회사원’이라는 말에 간이 서늘해진다. 학교, 게시판, 친구들..그 모든 곳에 파장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녀석들의 3대 3 농구를 하는 통에 몇 개의 농구골대가 모자랄 판이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지협은 말없이 학교 건물을 노려본다. “강지협.” 손가락 위에서 공을 돌리며, 범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연다. 이 녀석은 본성이 좀 그런 녀석이다. 가볍고 가벼운 녀석. 그런 녀석이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면 이제 가윤의 문제는 정말 심해진 것이다. “누군가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가족이나, 선생님이나..그 누구든.. 도와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남자를 좋아하다니.. 세상에 호모라니... ..........계가윤.. 아무리 그래도 니 친구잖아.“ “......................” 지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농구공을 빼앗아 마침 비어있는 골대에 격하게 집어 던졌다. 슛- 골인. 1득점. ************************** 과연, 교문 앞에는 한번 보았던 고급 승용차가 서 있다. 아이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여학생들 중에는 적나라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녀석도 있었다. 트레이닝을 가지 않고 이 시간에 남아 있는 게 오랜만이었다. 그 동안 지협은 하교 후에 바로 연습을 가느라 학교 정문 앞에 서 있는 이 승용차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나오던 가윤이 교문 앞에 딱 멈춰선다. 지협이 작정이라도 하고 기다리는 것에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포카 페이스를 유지했다. 드러내놓고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호기심에 가득한 사람들을 적당히 무시한 채 지협이 딱딱하게 내뱉는다. “잠시만 이야기 좀 하자.” 가윤의 보기 좋은 눈썹이 활처럼 쓰윽- 올라간다. 여전히 감정없이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언제나 흔들림없는 이 녀석의 태도에 화가 날 지경이다. 누구는 머리 속이 열기로 지끈 지끈 거리는데, 정작 당사자는 냉정하다. “여기까지 남자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 딱 잘라 경고하듯 말했지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가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이들이 듣지 못하게 좀 더 목소리를 낮추며 지협은 가방을 고쳐 멨다. “저 남자.. 학교까지 오게 하지는 말라구.“ “.....그럼 집에 데리고 오는 건 돼? 나더러는 나영이 올 때 집에도 있지 말라며? 뭔가 불공평 하잖아?“ 여유 가득한 미소. 언제나처럼 얄미울 정도로 건방진 태도. 그 밤에 살짝 말끝을 떨며 간신히 말을 하던 계가윤이 아니었다. 사실 그 날 모습도, 지협으로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녀석의 흔들림었지만 말이다. 아아.. 자신도 모르는 가윤의 어떤 마음이나 모습은 너무나 빨리 스쳐갔다. 남은 것은, 항상 지랄같은 이 얄미움. 언제나 한결같은 그 태도에 질렸다. 그래 니 마음대로 해! 니 마음대로 해! 니가 언제나 원하는 걸 얻어왔듯이 니 좇나 뛰어난 머리대로 살아! 요 며칠동안 내가 홀린 거지. 니가 어떤 녀석인지 뻔히 알면서, 또 한번 니 연극에 놀아나는거지.. 씨바.. 그러면서 왜 그 날의 니 부탁이 아직도 나는 쟁쟁한데? 왜 그게 귓가에서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울려대는 건데? “계가윤.” “........말 해. 귓구멍 뚫려 있어.” “너 연기자 해라. 아주 잠깐 널 동정할 뻔 했는데..친구로써..“ “동정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가윤을 기다리던 그 잘생긴 회사원이 드디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뭔가 위협적인 냄새를 풍기는 지협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순간,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가윤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덕분에 지협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고개를 숙여 녀석의 말을 주워 담아야했다. “착각하지마, 강지협.” 그것은 분명한 선언이었다. “복잡한 표정 짓지마, 잘생긴 바보. 계속 너랑 자고 싶었다고만 이야기했을 뿐이야. 널 사랑한다고 유치하게 말한 것도 아니고, 니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게 좋다는 뜻도 아니었어.“ “..........-!!!!!!!!!” “말했지. 난 너라는 녀석을 너무나 잘 알아. 세상에서 나보다 잘 아는 녀석도 없을 거야. 머리 나쁘고 방탕하면서도 의리파인 강지협이지. 너도 그 날 말했잖아. 한번 겪고 나니깐, 내가 안고 싶어졌다고.. 한마디 해 줄까? 쓸데없는 일에 책임감 느끼지마. 나는 니가 섹스 한번 했다고 책임져야하는 여자가 아냐. 너로써는 한번 한 그 경험이 흥분할만한 일이었겠지만, 난 아냐. 넌 처음이라서 중요했겠지만, 난 아냐.“ “.........계가윤..” “그게 끝이야. 차갑게 대하는 건 친구로써 그런 거라고 이해하겠다는 말이었어. 얼마든지 니가 나를 나쁘게 대해도 이해한단 말이었어. 나머지는 이제 참견하지마. 한번 같이 잤다고 세상 무너지는 거 아냐.“ 그 때, 문제의 원조교제 상대방이 성큼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언뜻 보아도 값비싼 양복 셔츠를 둘둘 말아 팔뚝같이 걷으며, 부유해 보이는 그는 가윤의 어깨를 한번 툭 친다. 지협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런 그를 노려보는 대신, 가윤은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웃었다. 눈동자의 무표정이 너무 깊어서 유리알처럼 다가올 정도였다. “그러니깐, 강지협...” “.............” “......날 욕하든, 때리든, 차갑게 대하고 벌레처럼 다루는 건 상관없어. 그건 니가 친구로써 할 수 있는 아주 멋진 권리야. 그렇다고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놀이까지 참견하진 마.“ “놀이?” 이번에는 다른 녀석들에게 들릴 정도로 조금 일상적인 목소리로 가윤이 딱 잘라 대답했다. “섹스 말야, 섹스. 난 친구녀석과도 자고 싶어서 환장할 정도라구. 너도 알잖아? 넌 그런 미친 놈한테 딱 한번 물린 거고.. 불행하게도...“ “.......닥쳐...이 개새끼.......” 나에게 그렇게 지독한 표정으로 내뱉는 너인데.. ..왜 꼭 지금도 꽉 쥐고 있는 니 주먹에 나는 신경이 쓰이는거지.... “불행하게도, 넌 더 이상 게임을 즐길 수 없어. 넌 너무 진지해. 말했잖아? 넌 나랑 섹스를 하면 할수록..“ “그만해, 계가윤.” “.......하면 할수록 날 경멸할거니깐. 그러면서도 그 망할 놈의 의리를 버리지 못하니깐. 너도 달릴 거 제대로 화끈하게 달린 사내새끼니깐 물론 동하겠지. 그러면서도 즐길 만큼 타락하지 않은 게, 니 잘못이야. 그러니깐 넌 안돼. 니가 해주지 못하는 부분까지 어설프게 참견하지마. 난 너랑도 그 짓을 하고 싶어 안달 난거 맞지만, 굳이 너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그야말로, 아이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물론 부글 부글 거리는 건 지협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입술을 비틀며 따박 따박 잘도 내뱉는다. 저 지나친 조소를 한대 갈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 쯤에서 잘생긴 회사원이 더 이상 관심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가윤의 팔을 잡아당긴다. 목덜미까지 빨게진 지협에게, 그는 더군다나 금박의 명함 케이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명함까지 한장 내밀었다. 지협은 한참 뒤에야 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발끝까지 얼어붙을 정도의 심한 분노에 허를 찔린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 날보다 한결 더 독해진 표정으로,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는지 속이 뒤틀린다. ‘내가 포기할 수 있게 도와줘야지.’라고 말했을 때도 그 애절함에서 끝내 시선을 돌려야했지만, 이렇게 하는 것도 결코 마음 편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지독한 얼굴로 ‘잡아줘..’라고 애원하는 위태로움이 언뜻 언뜻 보이는데, 손을 뻗을 때마다 더 멀어진다. 나더러 이제 어떻게 하라구!!!..........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왜 그렇게 지독하게 내던지면서 눈동자는 떠는 건데! 나에게 안기고 싶었다며!..쭉 안기고 싶었다며! 실제로 안길 정도로 무모해졌었으면, 있는대로 사람 휘저어 놓고는 이제 발 뺌이야? 그냥 장난이었다-...라고 치부하고 싶을 때조차, 가늘게 귀가에 붙잡혀 버린 니 한숨은 뭔데... 아아... 정말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건데... “휴우.............” 지협은 원래 흥분하면 한참 뒤에야 이성을 찾는 편이었다. 그는 험한 손길로 짧은 스포츠 형 머리카락을 벅벅 쓸어올리며, 손안에 잠긴 명함을 한참 뒤에야 들여다본다. ‘Ananomi' 라고 적혀있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고급 양질의 반듯한 명함 위에는 빨간 글씨로 Ananomi라고 적혀 있었다. 뭐하는 회사인지 그런 것은 일체 없이 다만 그 이름과 ‘김규철’이라는 남자의 풀네임만이 전부다. ******************************* “너는 아는 가장 예쁜 거짓말쟁이 중 한명이야.” 규철이 웃으며 말했다. Ananomi의 락커와 주방까지는 들락거릴 수 있었다. 예전처럼 손님을 받는다든지 하는 건 안 되지만, 지금처럼 얼마든지 가윤은 Ananomi 락커에 놀러올 수는 있었다. 무심하게 스포츠 신문을 들추자, 규철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셔츠에서 손을 빼낸다. 굉장히 잘짜여진 몸매다. 비록 테니스를 치는 그 누구 누구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 “형이 아무리 내게 거짓말쟁이라고 말해도...” “말해도?” “두번 다시 그 녀석과는 안 자요.” “.......누가 뭐래?” 그래, .. 김규철이 그런 일로 뭐라고 할 인간도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이 원조교제니 뭐니 하며 도발하고 있지만, 진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정말 잘 해주기 때문에 위로차 만나는 거 뿐이다. 말 그대로 원조는 있지만, 교제는 없다. “내가 견딜 수 없어서 그래요.” “...............”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가윤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솔직히 누군가 묻지 않아도,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상대가 친하고, 누구에게도 정직할 수 없다면 말할 나위 없다. “한번만 더 그 사고를 쳤다간,..” “...........?” “...내가 매달릴 것 같아 겁이 나서 그래요.” “좋아할 때는 언제고...” 아아...지금도 좋아요..라고 말하며, 가윤은 쓰게 웃었다. 다른 호스트 형 중에 하나가 락커를 빼꼼히 열다가, 반갑게 인사하며 문 닫는다. 규철은 바쁜 사람이니깐, 이 쯤에서 대화를 접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윤은 속이 미어질 것 같아 겨우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달칵-... 소매의 단추를 멋있게 잠그며, 규철이 가까운 의자에 앉는다. 마치 ‘마음 놓고 말해. 들어줄게.’라는 식이어서 한결 더 안심이 된다. “많이 생각했거든요. 정말..그 바보같은 녀석이 짐작도 할 수 없을만큼 골백번도 생각했거든요...“ “오죽했겠냐.” “그렇게 많이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예요.” “기대되는 결론이군. 뭐지? 개봉박두~ 두근 두근~”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윤이 밝게 웃었다. 나중에 크면 규철과 같은 어른이 되고 싶을 정도다. 그의 직업이 뭐든지 그건 상관없었다. “아무리 많이 생각해도.. 내가 덥썩 녀석을 덮친게 가장 큰 실수였어요.“ “...사랑이란 위대하군.” “놀리지말고요, 형.. 진짜.. ..덕분에 녀석이 진지해질거라는 거.. 사실..기대 안 한 건 아니지만..“ “..기대했으면 그 결과만큼 누려.” “.......그게 안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이 그 행위로 흔들리는 건 사실이지만.. 녀석은 기본적으로 노말이예요. 그 녀석이 나와 섹스를 하면 할수록 나를 미워할텐데.. 반대로 나는 하면 할수록 마음을 기대하게 될 거예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낫잖아? 처음에는 무인도 운운했지만, 조금은 수월해졌잖아?” 씽긋... 가윤이 간신히 웃자, 그 뻑뻑한 가슴을 들여다보듯 규철이 안쓰럽게 한숨쉰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무 생각없이 녀석을 도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어느 쪽도 원하는 결론이 아니라...이거지?“ ...라고 간결하게 결론 내려준다. 가윤이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그의 말이 맞다. 진퇴양난이다. 어차피 강지협은 죽었다 깨어나도 먼저 자신을 안을 위인도 아니었다. 그저 가윤이 먼저 덮쳤기 때문에 지금은 고민하는 것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이다. 그보다 더 심하게 녀석의 발을 묶을 수도 있겠지만, 결코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 이쯤에서 정말 그만두는 게 맞다. 녀석이 짐작할 수도 없을만큼 정말 많이 고민했다. 결론은 하나다. 어떻게 해도, 둘 사이는 파괴될 것이다. 자신이 문제다. 누군가 한 쪽이 가슴 시릴정도로 깊은 마음인 이상, 서로 타협을 보는 관계란 세상엔 없는 것이다. “가윤아...” 규철이 담배를 몰아피며, 조금 웃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웃음과 진심도, 항상 녀석 앞에서는 가면을 겹으로 두른 것처럼 가시 돋힌다. 그래서 날마다 더 미움받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진심같은 건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잔뜩 비꼬게 된다. “악순환이야. 사랑받고 싶어 도발하고, 막상 관계가 깊어질까봐 겁이 나고.. 이성을 차리면 냉정해지고 있지만, 어느 순간 흔들리면 걷잡을 수 없이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그런 악순환. 제발, 니가 아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까지 사람을 몰아세우는 감정의 악순환.” 규철이 말했다. 바로 그 부분에서 두 사람이 통했다. 같은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조금 휘둥그래진 채 쳐다보자, 그가 말끔하게 웃는다. “너 같은 거짓말쟁이를 한 명 알지. 꼭 너같은 녀석이다.“ “..........누구?............”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다. 규철과 같은 사람은 정말 누구를 좋아했던 적이 있을까..라고. “Ananomi가 왜 아무 탈 없이 잘 버티는 줄 알아?”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규철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했지만, 이상하게 표정만은 조금 쓰게 보인다. “조직이 버티고 있거든. 짐작했겠지만.... 서울 시내에 몇 개나 있고, 하룻밤 새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그런 조직들 말야. 당연히 고급 요정에는 조직이 있고, 조직이 있는 곳엔 몇 개나 되는 돈벌이용 가게들이 있지.“ “............-!!!!!!!!!” “국회의원들도 얽혀 있는 대형 돈벌이지. 최고의 환상을 심어주는 곳이 Ananomi야. Ananomi를 접수한 곳도 역시 그런 최고의 조직이지. 강남 일대를 주름잡는 그 조직은 벌써 몇 년 째 다른 녀석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이곳 물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지키는 조직의 리더에게 장차 그 조직을 이어받을 젊은 아들이 하나 있다는 거야...“ “.....................” “..그 녀석이 꼭 너같이 굉장한 거짓말쟁이지. 곧 죽어 쓰러질 것처럼 안쓰러운 눈동자를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버려’라고 말하지. 굉장히 아름다운 얼굴로, 재수가 없을 정도로 차갑게 말해. 너는 항상 그 녀석을 떠올리게 만들어.“ “.........규철이 형?” 괜한 말을 했다는 듯, 규철이 일어섰다. 그가 룸에 들어갈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줄기 의심처럼 가윤의 마음으로 바람이 흘러들어온다. 그것은 마치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꼭 자신과 닮은 그의 한순간 미소 때문이다. “형이 좋아했던 사람이 그 보스의 젊은 아들?” 갑자기 그 말이 튀어나왔다. 일순, 하얀 셔츠의 등이 갑자기 굳는다.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 규철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정확한 설명을 포기할 때쯤에야 규철은 라커룸을 나가며 여느 때처럼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래. 그 녀석도 너와 그 잘생긴 녀석처럼 나의 오래된 친구야.“ “........-!!!!!!!!!!” “더 심각한 건, 그 녀석이 Ananomi를 접수한 조직의 아들인 반면에,...” “....................” “....나는 녀석을 없애야 할 정도로 라이벌인 다른 조직의 일원이지.” “.............!!!!!!!!!!!!!!!!!!!!” “재수 오지게도 없지. 녀석과 나는 수십년간 친구였는데,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지 못해서 안달이야. 어쩌면 안고 안기는 관계조차 그렇게 파괴적이 되어 버렸고..“ 규철이 조직폭력배 출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여간해서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가윤도 놀라는 바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니가 지협이라는 그 친구에게 다른 마음을 가진 게 2년이 됐다고 했지? 나는 이 망할 놈의 감정의 악순환을 십년 가까이 하고 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지랄같이 ‘날 잡아’라고 말하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어찌나 그렇게 피투성이같은 말 뿐인지... 언제나 다른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결국 우리는 서로가 뭘 찾고 있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어.“ “....................” “그 녀석도 나와는 절대 안 자. 오죽했으면 내가 Ananomi에 들어 왔겠냐. 물론, 나는 .Ananomi에 숨어 있는 정보원이지만 말야.“ 그런 정도의 위험한 발언을 하면서도 그가 웃는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정말 뭔가를 아주 심하게 포기 당한 것같이 상실감 가득한 표정으로 웃는다. “그러니깐...” “................” “......강지협이 그 새끼가 끝까지 안 되면 나한테 와. 내가 원조도 해주고 교제도 해줄테니............. 너와 나는 동지 의식이라도 있잖아? ...아.. 그리고 슬슬 너에게 끌리고 있는 정신나간 어른이니 말야.“ “...........그 형은요?” “.......너도 그 상태에서.....조금만 더 나이들어봐. 내 나이 스물 다섯인데,.. 이제............. ......... ..... 편안한 사랑이 좋다..“ ...라고 말하며 그가 나갔다. 그러나 가윤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 그 부단하고 지리한 감정에 고개를 흔든다. 아무리 편안한 사랑이 좋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규철도 거짓말을 하는 거다. 힘들고 괴롭고 지치고 가슴팍을 짓누르는 이 거대한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기 때문에 좋을 뿐이다. 세상엔 수많은 것들이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할 수 있지만, 사람들에겐 아무리 아파도 버리지 못하는 감정이라는 게 낡은 기억 속에 언제나 존재한다. 그 사랑이 내 것이라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장편] 클럽-비우(非友) - 4 <9> 결국 선생에게 불려갔다. 선생은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안색이 나빠진 모습으로 연신 당황한 기색이었다. 가윤은 겉치례 식으로 짧게 웃었을 뿐이다. 적당히 둘러대면 증거도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뭐라고 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힘겨운 모범생의 가면을 쓰고 교무실을 나왔을 때,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 자신처럼 자주 불려가서 이런 대화를 해야 하는 문제 학생들은 여러번 겪을 현상이다. 그러나, 조용한 복도 끝 믿기진 않았지만 지협이 있었다. 녀석은 계단 끝에 앉아서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심하게 바라다본다. 수업이 시작됐을 텐데도 아직 들어가지 않은 걸보면, 아마 누군가 연락한 모양이다. 보나마나 ‘계가윤’이 드디어 그 문제로 학교에 불려갔다..라고 어떤 얼빠진 녀석이 고자질했을 거다. 뭐..어찌되었건.. 가윤은 녀석의 모습에 사실 적잖이 당황했다. 충분히 시간이 있을 때는 강하고 차갑게 위장할 수 있지만, 이럴 때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당황했다는 걸 쉽게 숨기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며 앉아 있는 지협을 스쳐간다. 한 걸음, 두 걸음이 마치 몇 미터나 되는 듯 길게 느껴진다. 두근..심장이 그 걸음에 맞게 흔들렸다. 비록 모른 척 하고 지나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피하지 말고 제대로 보고 가, 계가윤” 아무도 없는 정막 끝에서 지협이 단호하게 입을 연다. 가윤의 몸이 이미 녀석의 어깨 근처를 반걸음 스쳐갔을 때였다. 희미하게 멘솔 냄새가 갑자기 느껴진다. 녀석이 2년전 쯤에 끊었을 담배. 혹시 최근에 다시 피기 시작했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녀석의 저지에 잠시 몸이 빳빳해졌지만, 가윤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집스레 앞으로 발을 내민다. 그러자, 휙-하고 빠른 바람소리와 함께 앉아 있던 녀석이 자신의 손목을 낚아챘다. 갸우뚱..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다. 그대로 멈춰서야했다. 지금의 지협이 너무나 진지하고 새로워서, 더 이상 오기를 부릴 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녀석은 계단에 앉은 채 자신과 시선이 반대방향이라는 사실 뿐이다. 비록 손목만은 화끈거릴 정도로 강하게 잡혀버렸지만 말이다. “손 놓고 이야기 해.” 냉정하게 잘라 말했지만, 지협은 끄떡없어 보인다. 다만 가윤이 뭐라고 지껄이든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반응이다. “우리 엄마는 니가 어리고 니 아버지가 외국에 나가실 때부터 친자식처럼 너랑 나랑 키우셨어.” “..........................” “오늘 선생에게 불려갔지?” “..................하고 싶은 말만 해.” 목덜미로 따끔거리게 와 닿는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그 시선의 눌린 자국에 화상이라도 남을 것처럼 놀랍게 격렬한 눈동자다. 애써 모른 척 앞 쪽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뭔가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넌 나보다 머리 좋잖아, 계가윤. 무슨 말인지 니가 더 잘 알 거 아냐? 선생에게 불려갈 정도였으면 이제 부모님께 들키는 건 시간 문제라는 말이야.“ “...................” 휴우-...하고 짧은 한숨. 그리고 지협이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녀석이 맨 교복 넥타이가 잠시 흔들린다. 여전히 놓지 않는 녀석의 손을 의식하며 가윤이 살짝 뒷걸음쳤다. 느낄 수 있다. 녀석의 안에서 뭔가 단단해진 것이다. “어제도 그 회사원 녀석하고 잤냐?” 짧게 입안에서 씹듯이 내던지는 질문. 눈을 가늘게 뜨며 탐색하는 듯한 눈빛. 절대 강지협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 갑자기 쿵-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심장은 사각형이다. 그 모서리가 이렇게 날카롭게 흉부를 찔러대는 걸 보니... 그만큼이나 욱씬거릴 정도로 뭔가 진득한 시선이다. 관찰하는 눈빛을 넘어서서 보다 깊은 곳을 구석 구석 질책하는 눈동자다. 그리고 그 때였다. “...........뭐야;.....-!!..........” 가윤이 낮게 탄식을 지르기도 전에, 갑자기 지협이 손을 뻗어 교복 셔츠 깃을 양쪽으로 잡아당긴 것이다. 투두둑- 셔츠에서 성급하게 떨어져 나간 단추가 계단을 마구 뒹굴었다. “..........-!!!!!!!!!!” 언제나처럼 사람좋게 웃고, 말도 안될 만큼 잘생기고 사교성 좋은 친구 녀석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이 날 정도로 차갑게 내려앉은 표정으로 삐딱하게 웃었다. “소리질러봐. 니가 유혹했다고 소문낼 거니깐...“ “.....-!!!!!!!!!” 소름이 돋을만큼 전율이 이는 표정이다. 열려진 셔츠 자락 때문에 벗겨진 가슴으로 차가운 복도 공기가 부딪쳤다. 이 녀석과의 게임에서 거의 매번 주도권을 쥐던 자신이 이번에는 잔뜩 굳어 버린다. 그 서늘한 시선, 아무런 감정을 담지도 않은 눈길로 지협이 가슴을 샅샅이 흩어간다. 정말 규철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확인하고 말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침내, 녀석이 그 강한 손끝으로 단추가 떨어져나간 셔츠의 양 쪽 깃을 확 잡아 내렸을 때는 숨이 막혔다. 어깨까지 드러났다. 심장이 파열할 것처럼 뛰어 대는 바람에 더욱 가슴이 질끈거린다. 더군다나 녀석은 정말 가윤에게서 난잡한 증거라도 잡을 듯, 너무나 집요한 눈길이었다. “그만 둬.” 익숙한 학교 복도, 환한 햇살 아래 매끈하게 드러난 상반신을 의식하며 가윤이 절망적으로 잘라 말했다. 왜 그런 걸 굳이 확인하고 싶은지 모르지만, 이쯤에서 멈춰줘야 한다. 그러나 이 녀석은 지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가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강한 손가락을 매몰차게 턱으로 뻗어왔다. “강지협!” 이를 악무는 듯한 그 표정. 한번씩 눈꺼풀을 닫았다 여는 것도 조금 시간을 들이는 것처럼 숨죽인 행동. 가윤은 훅-하고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명백히 말하자면, 녀석은 도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뭔가를 확인하기 위해 홧김에 그랬던 것인데, 생각에 잠겨버리느라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내민 것이다. 하필이면 그 손가락이 자신의 턱에서 목선을 쓸어내리며, 아슬 아슬하게 쇄골을 더듬기에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 쯤에서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녀석이 기가 막히다는 듯 쓰게 웃으며 중얼거린다. “그 잘생긴 회사원이랑 요란하게 뒹굴다 오는 것치고는 ... 늘 깨끗한 몸이군.. 아쉬워라... 그렇지?...“ “..............!!!!!!!!!!!......”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근에 몇 번이나 조금 약해진 자신을 들킨 가윤으로써는 한계라는 걸 알아야했다. 어제도 교문 앞에서 그렇게 공격했지만, 역시 이 녀석도 알고 있는 거다. “잘 좀 속여봐, 친구. 그래야 내가 안심하지.“ “..........섹스를 한다고 꼭 흔적이 남는 건 아냐. 니가 뭘 알아?” “....아하~...” 너무나 진지하고 한편으로는 찔리도록 아픈 시선이어서, 가윤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더 덧붙이기 위해 입을 열어야 했는데, 그보다 지협의 행동이 더 빨랐다. 녀석이 고개를 흔들듯 자신에게서 손을 떼어낸 채, 쾅-하고 벽을 손바닥으로 내리친 것이다. 더불어 온 구석 구석에 세포를 떨리게 하는 미묘한 열병들이 남겨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 흘렀을 때, 역시나 하지 못한 말들이 두 사람 각각에게 침묵으로 남겨졌다. 그쯤에야 지협이 벽에 이마를 댄 채, 이를 악물듯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 “..................” “..그 잘난척하고 아니꼬운 계가윤이 .. 그래도 내게 어느 날.. ‘넌 내 친구다.’라고 말해줘서 좋았어. 꼭 칭찬받는 기분이었어.“ “.....................” “..알아? 나에게 친구라는 건 내 자존심이야. 아직 얼마 못 살아봤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것 중엔 최고의 칭찬이었어. 넌 내 친구야..라고 말해주는 게 얼마나 인생에서 힘이 되는지 넌 모를 거야. 너에겐.. ..필요한 사람도 필요한 관계도 없이 너 혼자 모든 걸 결정하고 행동해버리니깐..“ 친구가 자기 자신의 자존심이라... ...그건 나에게도 그래..라고 가윤은 들리지 않게 속으로 헤아리며, 말없이 허리를 굽혔다. 단추 몇 개를 줍는다. “나영이와 사귀기로 했다.” “........-!!!!!!!!!!!!”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녀석의 말은 굽힌 허리와, 말없는 목덜미에 와 닿을 뿐이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말처럼 아득하다. “니 말들을 정말 곰곰이 생각해봤어. 안 되는 내 머리로.. 정말 여러번 생각했어. 계가윤.” “.................” “...니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겠어.” “...................” “....그러니깐, 이제 그 따위 거짓말 집어치워. 아니면 정말 치밀하게 잘 속여보든지 너는 나도 속이지 못할 정도로 이제 빈틈이 너무 보여. .......뭔가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위해 계속해서 삐딱해지려고 노력하고.. 계속 타락하려고 노력하고....“ “........아냐.” “니가 아니라고 우기든 말든...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여. 그걸 말하고 싶은 거다, 개새꺄.. 너는 너 자신도 제대로 속이지 못하고, 나도 속이지 못하면서 누굴 속이겠다는 거냐? 선생님? 부모님?“ 그래서 나영이와 사귄다는거냐..잘생긴 바보.. ...그래... ..하긴 그게 가장 빠른 답이지.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하기 까지 했는데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렇게라도 매듭지어야지. 잘했어, 바보! .................참, 잘했어. “잘 됐네. 축하한다.“ 그저 몇 개 남은 단추를 잠그며 가윤은 냉정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그 표정을 유심히 돌아보며, 지협이 쓰게 웃는다. 하지 않아도 아는 말들, 하고 싶어도 꺼내지 못한 말들....친구와 연인의 어중간한 경계선이 너무나 힘들어 작게 한숨 쉬어본다. “축하해?” 가윤의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 지협이 웃었다. 성마른 웃음에 가윤은 뭔가 울컥-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삼킨다. 그럼, 더 이상 뭐가 필요해? 니 여자를 축하하는데 얼마나 많은 수식어가 필요해? 거절할 수 없을만큼 냉랭하게 녀석을 노려보자, 지협이 고개를 흔들며 한참 격해진 어조로 낮게 욕설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듯 가라앉은 시선으로 가윤의 숙인 등에서 확 손목을 다시 낚아챘다. “축하한다구? ...축한하다라...그래..좋아... 다음부터 위세를 부리려면...계가윤..” “...........!!............” “떨지 않고 말하는 법을 먼저 배워.” “.............-!!!!!!!!!!!!!!” “아니면 떨고 있는 걸 내 눈에 들키지 말든지.. 이전 같으면 몰랐겠지만... 친구를 벗어난 내 눈에는 이게 너무나 거슬리거든. 계속 해서 지랄같이 마음에 걸린단 말야, 이 새꺄...!!!!!“ 지협이 재빨리 등 돌려버린다. 뭔가 혓바닥까지 지끈하게 올라왔던 목소리가 묻혀 버린다. 대신 가윤도 고개 돌렸다.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벌벌 떨리기 시작한 손끝으로 간신히 벌어지는 셔츠를 부여잡는다. 다음번에... ...라고 가윤은 시멘트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 친구. 아.... 이 다음에 좀 더 편하게 만나지면, 그 때 목욕탕도 같이 가고 이전처럼 깔깔거리며 같은 침대에서 뒹굴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자.. 니가 나에게 ‘친구는 내 자존심’이라고 했냐.. 계가윤이 강지협의 자존심만한 인간이었냐.. 좋네,.. 나 역시 살면서 그만한 칭찬이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축하하는 거야, 친구. 계가윤이 몹쓸 장난까지 걸며 잠시 널 혼란시켰지만, 꿋꿋이 버텨낸 그 강한 의지를.. 잠시 힘겨워하지만, 결코 나에게 넘어오지 않는 너의 높은 판단력을! .......사랑한다, 친구. 너는 내 18세의 유일한 자존심이다. 18세는 자존심만으로도 턱을 쳐들고 살아가고... ..그래서, 지금의 너는 내가 버티는 유일한 이유라는 말이다. <10> “어이구.., 정말 니가 우리 지협이 여자친구냐?”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달말에 올라오시겠다는 약속을 깨고 무려 이주일이나 넘기신 끝에 올라오셨다. 물론 편치 않는 길이었겠지만, 지협은 어머니가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심하게 들썩인다. 주말이라 놀러온 나영이 쇼파에서 벌떡 일어서서 90도로 인사한다. 원나영은 지협의 댓쉬를 5초만에 승락했다. 그렇게 빨리 승락해버리자, 지협 쪽에서 오히려 허탈할 지경이었다. 내가 뭐하러 얘 때문에 2년 씩이나 마음 고생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빨리 허락하는 나영에게는 애틋한 마음이나 애정같은 것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협으로써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과 가윤의 관계에서 가장 확고한 방어막이 되었다는 것을 확실했다. 계단에서 고백한 그 날을 이후로, 가윤과 자신은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 한마디 인사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 “이름이 뭐라구? 아아...원나영? 어이구..우리 아들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이리 이쁜 애를 데리고 왔노.....“ 어머니는 땀에 조금 젖으신 이마를 닦으시며 나영을 향해 환히 웃으신다. 언제나 딸이 갖고 싶었다는 어머니는, 그래서 이쁘장한 가윤을 어릴 때부터 친아들인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다. 계가윤.. ...빌어먹을, 오늘도 집에 없는 녀석이다. “그래, 너도 테니스 한다고? ..어이구, 잘 됐다. 우리 지협이 머리가 나빠서 공부는 못하지만..“ “엄마!”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심성은 착하거든. 이 녀석이 연애한다고 해도 나나 애 아빠나 안 말린다. 알아서 잘 들 하겠지. 꼭 우리 지협이 손 잡고 둘이 같이 대학가라, 아가.. 아이구, 이쁘다..“ “엄마, 쫌-!” 엄마, 나영이는 며느리가 아니라구요...라고 민망하게 이마를 찡그리며, 지협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어머니는 나영의 등을 한번 토닥거리시더니 제일 먼저 주방 쪽으로 건너가신다. 언제나 있는 주방 검사. 보통 때는 어머니의 습격에 이 주방 검사를 가장 쫄아있었는데, 오늘은 다르다. 주방이건 뭐건 가윤이 문제가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역시, 가윤이가 다 청소해놨지, 이 놈아.” “...내가 한 거야.” “웃기고 있네, 니가 뭔 청소를 해!” 의례히 가윤이는 공부하러 갔다고 여기시는 것 같았다. 부산에서 하는 회 장사는 아무래도 주말이 가장 바쁘기 때문에 여간해선 올라오시지 않는 어머니다. 지협은 말없이 나영의 손목을 잡으며 어머니의 이리 저리 옮기시는 발걸음을 지켜본다. 언제나 이럴 때 가윤도 같이 있곤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쾌하게 미소 지으며, ‘어머니 오셨어요?’라고 친절하게 굴곤 했다. “언제 내려가세요?” 어머니가 과일을 깎는 손을 내려다보며 지협이 낮게 물었다.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입안이 바싹 바싹 말랐다. “왜? 빨리 내려가라구?” “...........엄마...무슨 말을...” “우리 딸내미 얼굴 보고 갈련다.” 어머니가 딸내미라고 부르는 것은, 그 단정하고 아름다운 계가윤이다. 최근의 가윤에 대해 마찬가지로 걱정하고 있는 듯한 나영이 자신을 조심스레 돌아본다. 바닥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곁눈질하는 것이, 할 수 있으면 전화 하라는 신호 같았다. 지협은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게 긴 한숨을 쉬며 말없이 전화기를 집어 든다. ************************ 차라리 부르지 말걸... ...이라고 지협은 혀를 잠시 깨물었다. 정말 차라리 공부하러 갔다고 거짓말하고 부르지 말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윤이 어디 아프냐?” 나영과 나란히 앉은 자신. 그리고 어머니와 나란히 앉은 가윤. 넷이서 이렇게 밥을 먹는 게 속이 답답할지 전혀 몰랐다. “아뇨..어머니 많이 드세요.” 상큼하게 웃으며 가윤이 대답했지만, 그 또한 지협은 괜스리 신경쓰여 조금 인상을 찌푸린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엄청난 공기가 답답했다. 나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가윤과 자신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어머니는 가윤이 연신 걱정된다는 듯 자꾸 대화에 끌어드리려 애쓴다. “아가, 아무래도 이 녀석이 지 친구가 연애질 한다니깐 기가 죽은 모양이네..” 여기서 어머니의 ‘아가’란 나영을 칭하는 말이다. 엄마..제발..나영이는 며느리가 아니라니깐요. 그러나 지협의 점점 굳어지는 표정에도 아무런 상관없이 어머니는 계속 벅차게 웃으시며 나영의 숟가락에 불고기를 올려놓으신다. “하긴, 아기 니가 봐도 우리 가윤이 만한 얼굴이 없지? 어디 괜찮은 친구 없냐? 이 녀석 아버지와 우리 애 아빠가 맨날 같은 날 둘이 결혼시키자고 얼마나 젊을 때부터 말했는지...“ 나영은 좋은 녀석이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이 상황을 자연스러운 미소로 넘긴다. “그럼요, 어머니. 사실 가윤이 만한 친구도 없어요. 지협이도 멋있고, 가윤이도 좋은 친구예요.“ “그러게.. 우리 가윤이는 왜 여자친구가 없을까? 저 강씨 집안의 지협이 같은 녀석도 변변치 않은 게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만드는데 말야.“ 문득.. 어머니와 나영이가 정말 그 나이에 며느리, 시어머니라도 되는 듯 환한 웃음을 터뜨렸을 때.. 왜 하필 문득.. “가윤이는 더 이쁜 여자친구 만들려고 그러죠, 뭐... 쟤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요.” “그래, 우리 양반하고 가윤이네 아빠도 어릴 때 그런 걸로 이상하게 경쟁의식 느낀 모양이데.. 서로 누구 마누라가 더 이쁜가..뭐 이런 걸로.. 사내 새끼들은 왜 그렇게 철딱서니가 없는지.. 근데, 아기네 집은 어른들이 뭘 하셔?“ “어머니는 집에 계시고, 아버지는 대학 강사세요. 아직 정식 교수는 못하고 계세요.“ “어이구..집안도 좋네.. 그러니 이렇게 반듯하게 컸지. 어쩐지.. 지협아, 아까 얘가 밥 푸는 거 봤냐? 어쩌면 그렇게 야무지게 잘 푸는지.. 행주질은 어찌나 그렇게 깔끔한지.. 역시 집에는 여자가 있어야 해. 내 염치는 없지만, 자주 자주 와서 이 사내 놈들 좀 돌봐줘라, 나영아.“ 왜 하필, 밥이 목에 걸릴까. 갑자기 배부른 위장이 쓰게 신물 넘어오는 기분에 지협은 문득 가윤을 돌아보았다. 아니, 차마 가윤의 얼굴을 보지는 않고, 녀석이 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마디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확인하듯 그 때서야 얼굴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올린다. 표정은 정말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 “엄마, 그만 해요. 집에 가윤이 있잖아.“ “에구, 이 녀석아. 그러니깐 니가 허우대만 멀쩡하지 철이 없다는 기야.. 가윤이가 아무리 이뻐도 얘도 대학가고 그러면 나영이만한 애인 달고 다닐 놈이야. 그리고 집안 살림이 여자가 하는 거랑 남자가 하는 거랑 같냐?“ 그래도,.... 엄마가 쥐고 있는 젓가락도 가윤이가 설겆이 한거고, 내가 입고 있는 이 옷도 가윤이가 세탁한거고, 이 집이 이렇게 깨끗한 것도 가윤이가 그래도 자주 청소를... “..맞아요, 어머니.” 웃지마. 이 나쁜 새끼... 그렇게 젓가락을 무슨 무기처럼 꽉 쥔 주제에.. 손마디에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질린 주제에!............. “제가 그래서 지협이 데리고 살면 피해 많이 봐요, 어머니.” “거 봐라, 가윤이도 그렇다잖아, 이 눔아. 가윤아, 너도 얼른 얼른 대학가서 어서 이쁘장한 여자친구 데리고 인사시켜라, 알겠지? 그래야 니 아버지도 나도 안심을 하지. 일년만 더 지금처럼 버텨라. 넌 좋은 대학 들어갈 거야.” 너 부르지 말 걸.. 어머니의 그런 말에 그냥 따뜻하게 웃는 널 바라보느니, 그냥 부르지 말걸.. 이런 일로 내가 갑자기 뭔가 울컥- 넘어올지 알았다면 절대 너 부르지 말걸.... 그런 말들에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지으며, 우적 우적 목구멍에 밥만 미어터지게 넣는 너를 보면.. 배도 고프지 않은 주제에, 반찬도 하나 없이 볼이 터질 때까지 쌀밥만 집어 넣는...너.. 너.......부르지 말걸... 니가 나 사랑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나도 너 그렇게 생각할 마음은 전혀 없는데도.. 이런 상황이 이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절대 부르지 말걸... ..... “사람 처음 봐? 니 밥이나 먹어, 강지협. 남의 밥그릇 탐내지 말고..” 아무렇지도 않게 ...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의 밥상을 챙기는 너는 여전히 웃는다. 그 미소가 얄미운 게 아니라, 이렇게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면.. ..절대 두번 다시 너랑은 밥도 안 먹는다...이 개새꺄... 너는 밥을 먹냐? .........근데, 왜 내 눈엔 니가 억울함을 먹는 것처럼 보이냐. ... ********************************* 새벽 내도록 가윤의 토하는 소리에 지협은 자지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같은 새벽에 부산으로 돌아가셨다. 아침 첫 기차를 타고 나가신다고 서둘러 나가셨다. 어머니의 신조는 횟집에도 여자가 있어야한다 였기에, 지협은 잔뜩 헝크러진 머리, 운동복 차림으로 어머니를 배웅했다. “아침 꼭 챙겨 먹고 다녀라.” “..........네.” “그리고, 가윤이 표정이 많이 안 좋던데 연애질도 좋지만 친구도 좀 다독거리고.” “.....알겠어요.” 아직 해가 뉘엿 뜨고 있는 새벽 공기가 차다. 보라색에서 점점 파랗게 변하는 아침 풍경을 눈에 담으며 지협은 배웅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 때였다. 가윤이 샤워를 막 끝낸 듯 욕실에서 걸어 나온 것은.. “.........?..............” 여느 때라면 ‘어디 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일요일인데 이 새벽부터 어딜 가는지 분명히 물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와 자신의 소란 때문에 깼냐고 물었을 것이다. ..사실은 가장 안쓰러웠다. 누군가가 이렇게 안쓰러워 보인다는 것. 그것도 정말 예상치 못하게 저 얄미운 건방 덩어리 계가윤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 그 사실이 가장 안타까웠다. 녀석이 무엇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어하고, 무엇을 정말 간절하게 버리고 싶은지 잘 알게 되었다. 어제 어머니 앞에서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여느 때처럼 달콤한 미소를 짓는.. ...그 일상을 지키는 것. 그러면서도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 ........그 사실이 너무나 쓰라리게 와 닿아서 사실 지협도 한숨 자지 못했다. 가윤의 구역질 소리와 더불어서 말이다. “욕실 슬리퍼 젖었다.” 그러나 정작 가윤이 자신에게 꺼낸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래......라고 지협은 허탈하게 웃고 만다. 정말 녀석이 이럴 때마다 속이 잔뜩 뒤틀린 채, 기막힌 웃음밖엔 세어나오지 않는다. 공기가 빠져나간 듯한 갈라진 웃음덩어리이다. “넌 괜찮아?” 갑자기 묻고 싶어졌다. 어제 그토록 너 부르지말걸..이라고 새삼스럽게 후회한 시간을 떠올리며, 먹먹한 가슴 팍의 이상한 통증. 그것 때문에 겨우 숨을 내쉰다. 기어이 녀석에게 등 돌린 채 물었다. 이제는 녀석을 제대로 쳐다보며 물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둘이 같이 그 망할 놈의 섹스라는 걸 하고 난 뒤 그렇게 됐다. 새삼 화가 더 날 지경이었다. 니가 죄 지었냐. 그래 잤다, 잤어. 그럴 수도 있지.. ........살다보면 씨바, 이 일 저 일 다 벌어질 수도 있지. 그래서 니가 무슨 큰 죄 지었냐. 왜 사람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 봐. 왜 어머니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비겁하게 미소 따위나 짓고 있어. ..............어제는 내가 소리치고 싶었다. 니가 여자로 안 태어난 게 무슨 큰 죄야!!...떨지 말고 고개 좀 들어!...라고.... 자신이 그런 말을 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그 강한 얼굴, 그리고 아주 섬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지협은 아직도 머리 속이 쿵쿵 울려댄다. “욕실 슬리퍼? 난 괜찮아. 욕실 슬리퍼 젖은 게 무슨 큰 일이라고..“ 씽긋 웃으며, 가윤이 머리를 턴다. 또 한번 가증스럽게 피하는 거다. 지협이 ‘괜찮냐’라고 물은 건 절대 그 뜻이 아닌데.. “클럽 나가는 거냐.” 이젠 노골적으로 묻는다. 그런 말을 묻고 있는 자신도 표정 없는 건 매한가지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탓할 수가 없다. 자신을 유혹해 놓듯 도발하고는 있는대로 도망가 버리는 가윤을 욕할 수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과 사귀어 주겠다고 말한 나영을 욕할 수 없다. 새삼 18년의 윤리의식에 심각한 도전을 받기에 가윤을 따돌린다는 그 반 녀석들을 욕할 수도 없다. 자신의 일 아니라고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범기나 상욱을 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어머니를 욕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남은 것은 끓어오르는 분노, 격렬하게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 욱씬하게 죄여오는 두통. 그런 것 밖엔 없다. ......그래서 묻는다. 마치, ‘너 운동가냐?’라고 말하듯..‘너 클럽가냐?’라고. 이런 날이 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제법이네, 강지협. 니가 그런 말을 대놓고 묻고.“ 가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젖은 머리를 말린다. 그리고는 툴툴거리며 모자를 들고 나왔다. 청바지 샐샐 끌리는 소리가 너무 예뻐서, 지협은 하필이면 그 소리가 너무 예뻐서, 그 새벽의 가윤을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가시자마자 클럽에 간다 이거냐? 그것도 이 새벽에? 그 망할 놈의 클럽은 이 시간에도 그 짓을 한단 말야?“ “귀여운 말 하고 있네. 그 짓하는데 시간이 뭐가 필요해?” 타락한 것처럼 웃는다. .......그것도 목이 잔뜩 갈라진 채 마치 쉰 목소리 크득거리듯 깔깔댄다. 그렇게 토해댔으니 성대까지 잠긴 게 당연하다. 지협은 가만히 열이 오르는 눈두덩이를 닫았다. 얼마나 더 파괴되면 계가윤이 자연스럽게 밥을 먹을지 생각하는 거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저 녀석이 저 따위 놀음에서 지칠지 생각하는 거다. 얼마나 더 아파지면, 녀석이 정말 그 입으로 ‘날 좀 잡아줘..’라고 부탁할지 되내어본다. 눈을 뜨자, 하얀 셔츠...물기가 조금 배인 아름다운 얼굴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리없는 그 얼굴, 무표정한 시선.. 예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던 깔끔한 목선.. 마치, 진흙탕에 주저 앉아 망연히 자신을 쳐다보며, ‘나 좀 도와줘.’라고 ...평소의 가윤이라면 전혀 생각지 못했을 그 애처로움과 떨리는 아쉬움으로.. 하얀 셔츠 깃을 날리며 깃털처럼 따듯하게 품안에 죄여올 그 체온으로... ...정말 그런 가윤을 듣고 싶었다. 가윤의 온 몸이 비명처럼 무언으로 호소하는 질퍽한 도움에 손 내밀고 싶었다. 가슴이 절절할 정도로 녀석이 자신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걸 느끼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자신은 지금 녀석의 피곤에 지친 듯한 몸을 꽉 끌어안고 ‘한숨자자.’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절할 정도로 깨끗한 눈동자로 망연히 바라보는 이 녀석이 한마디만.....단 한번만 ‘날 도와줘.’라고 말한다면.. ......그 상상만으로도 오싹할 정도로 마음이 미어진다. “..............-!!!!!!!!!!!!” 지협은 마침내 자신이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라도 뭔가 행동하고, 잡지 않으면..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손을 뻗는 자신을 눈치 챘는지, 녀석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서로 그럴 듯하게 위장하며 상처 내기 급급했던 말보다 침묵 쪽이 더 나았다. 말하지 않았지만, 둘 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도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녀석이 도망을 갔고, 지협은 더 재빠르게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엉겁결에 잡힌 머리카락에서 손바닥으로 촉촉한 김이 서린다. 그대로 다급하게 비누 향 나는 귓전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이미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잡아달라고 말해. 계가윤..” 머리카락을 잡힌 채, 질질 끌려오듯이 억지로 몸이 돌려세워졌다. 녀석은 당황한 듯 입을 약간 벌리고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한다. 얄미워서 숨이 막힐만큼 .. .........그 모습이 아프다. “말 해!.. 차라리, .... ...........나에게 잡아 달라고 말해.“ “..............” “니가 더 나빠지지 않게,.. 니가 더 아파지지 않게.. 니가 더 힘들어지고 추락하지 않게... ..........나에게 잡아 달라고 말 해.“ “.....................” 울고 싶었다. 서로가 너무 무서워서 좋아하느니 안고 싶으니 어쩌니 그런 말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여느 책이나 영화에서는 그런 말을 수십번도 하던데.. ..이 관계가 너무 무서워서 실상 둘은 아무 말도 못 꺼내도 상관없었다. 그저 녀석이 그렇게 강한 모습으로 위장한 채, 혼자 끄억 끄억 토해내는 신물이 아파서.. ........이젠 못 참겠다. 어린 나이가 자격이 없어서,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저 지금의 내가 너무 아플 뿐이다. “한번만..가윤아..” “.................” “..한번만 내게 부탁해 봐.. 응?.. 제발.............“ 너 잡아 달라고 말 해. 그럼, 죽을 힘을 다해서 널 다시 일으켜 줄게. 어떤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모든 힘을 다해서 그렇게 해 볼게. 한동안 서로 이마까지 닿을 거리에서 녀석은 침묵을 지켰다. 조금씩 엉키는 호흡이 느껴지고, 둘 다에게서 험하게 몰아오는 숨소리까지 녀석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가윤아..“ “..................” 속이 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건조하게 말라붙었는지 모르겠다. 반면에 녀석은 고개를 돌리며 잠시 깊게 한숨을 쉬었다. 또렷하고 유난히 이쁜 옆 모습이 잠시 시선을 떨군다. 그리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내가 넘어져도 밟으라고 했지, 강지협. 쓸데없이 동정하지 마.........“ “......................” “....나영이나 잘 챙겨. .........친구보다는 애인이 우선이야.“ ..라고 말한다. 지협은 그만 견디지 못할 기분이 들고 말았다. 순간 억한 기분에 목이 메어서, 그는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가윤의 얼굴을 가린다. 긴 밤 내도록 참을 수 없이 아프게 선명하던 이 얼굴을 이젠 닫고 싶었다. 자신의 큰 손바닥, 그 단단한 안에 가려진 얼굴이다. 갸름하고 물소리 뚝뚝 날 듯이 아름다운 얼굴. 밤새의 토악질로 조금 피로해 보이는 눈가. 그 얼굴을 손으로 가리자, 지협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정말 이상하게도 목이 메어서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계가윤...” “...............” “..그렇게 시건방지게 굴 정도로 의기양양하면...” “..................”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해도 밥이라도 잘 처먹어.....새꺄.....” “.....................” “..니가 원하는대로 해 줄게. 니가 원하는대로 언제나 해 줄게! 나영이랑 사귀든 말든.. 우리 엄마가 뭐라고 하든 말든.. .......넌 밥이라도 잘 처먹어...이 개새꺄.......“ 사람, 이렇게 아프게 하지 말고...라고 중얼거리며 지협은 조금 눈물이 글썽거렸다. 눈에 잔뜩 힘을 줬지만, 이 강한 녀석이 떠는 게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주 잠깐만..비웃음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눈동자로 촉촉하게 눈물이 베였다. 아주 잠시. 딱 가윤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진 그 시간 만큼만. .....그 시간만큼만 이 아픈 18세를 게워낸다. [장편] 클럽-비우(非友) - 5 <11> 오래만에 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즐긴다. 가윤이 무심코 교실의 시계를 올려다보았을 때, 점심 시간이 중반쯤에 이르고 있었다. 다시 창가 쪽으로 눈을 돌리자, 여기 저기 운동장에 흩어 진 아이들이 보인다. 언젠가 싸움이 붙었던 남지일도 농구를 하고 있었다. 탄탄하게 벌어진 상체를 가지고 짐승처럼 뛰어 올라 정확하게 슛을 던졌다. 만약 그렇게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좋은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지일은 지금도 이따금씩 혐오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지만, 사실 그 이상의 행동은 잘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 이상 오바하는 것도 사내 답지 못한 거다. 아마, 지일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 그리고 하필이면, 그 순간에 나영과 지협이 보였다. 얼추 보아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쌍의 그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책상에 턱을 괸 채, 가윤은 말없이 그 모습을 응시한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가윤은 그저 들리지 않게 ‘아아..’라고 짧게 신음하고 살짝 희미하게 웃었다. .....창 밖의 그 녀석들도 웃었다. 서로 마주보고 뭐라고 떠들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지협의 눈길이 최근에 자신을 보던 것과는 상반될 정도로 따뜻하게 웃었다. 왠지 최근에 우리 두 사람은 항상 아플 정도로 서로를 쏘아보거나, 미친듯이 시선을 피하는 게 전부인데, 저들은 꺼리낌없이 서로를 쳐다본다. ..그것이 바로 자신과 나영의 다른 점이다. 그것이 나영은 되고, 자신은 안 되는 세상의 이유다. 얼마 후에, 자신의 오래된 친구 강지협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내밀던 그 손과 똑같은 손이다. 테니스 채를 하도 움켜잡아서 손바닥에 굳은살이 잔뜩 박힌 탄탄한 손바닥. 마주 잡으면 굉장히 열이 올라서 함께 후끈거리는 그 손길이다. 가윤은 웃느라 가늘어진 자신의 눈꼬리가 경련이 이는 것을 깨달았다. 나영과 손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위로 올렸다 내렸다를 하면서 지협이 열심히 그녀의 말을 듣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등 뒤에서 그런 녀석을 불렀는데, 일학년 때 모두가 같은 반이었던 범기였다. 이범기. 유상욱. 그들은 자주 자신들의 집에 놀러왔었고, 가윤과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지만 또래 녀석들답게 무식하고 장난끼 넘쳤다. 좋은 녀석들이다. 지협의 친구라는 이유로 항상 좋은 녀석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마치 그들은 파워와 에너지로 가득찬 겁 없는 십대들 같은 느낌이다. 하긴 그것은 지협도 마찬가지다. 저 세명은 2학년이 된 지금도 같은 반이고, 가윤과는 달리 언제나 점심 시간이 되면 운동장에서 3대 3 농구를 한다. ..그것 또한 범기나 상욱 무리들과 자신의 다른 점이다. 그것이 범기나 상욱은 친구가 될 수 있고, 자신은 될 수 없는 세상의 이유다. ‘아무래도 비겁하지만... 오늘도 규철이 형을 불러야겠군..’ 이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가윤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쯤에서 웃기는 이 관찰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때 하필이면 아주 빠른 장면 하나가 번개처럼 시선을 붙잡아 버렸다. 모래 먼지가 일만큼 번잡한 운동장 틈에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재빠르게 지협이 나영에게 키스했다. 순식간의 동작이었다. 이번에는 가윤도 웃지 않았다. 그 익숙하고 거만한 웃음도 짓지 못했다. 다만 눈꺼풀만 몇 번 깜박일 뿐이다. 반면에 지협은 아주 환하게 웃으며 나영을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마치 잘가라는 듯, 손도 한번 흔들고 지 무리들이 부르는 농구 골대로 야생마처럼 달려간다. ..........가윤은 아무 말도 없이 그 모습에서 고개 돌렸다. 언제까지 감정없는 인형처럼 자신을 위장할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그러나 녀석에게는 죽을 때까지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조금씩 감정의 동요를 느끼는 녀석을 감당하는 것조차 벅차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그 큰 손. ..그리고 목이 메인 듯, 간헐적으로 크게 몰아쉬던 그 억눌린 목소리. 알고 있었다. 왠지 몰라도 지협은 그 때 울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정도로 좋은 녀석이라서.... .............같이 망쳐질 자신도, 혹은 끌어들일 용기도, 잡아달라는 부탁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내 자신을 파괴하고 나면, 더 이상 밑바닥도 없으니 나도 정신차리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험하지만,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도 했다. ***************************** “계가윤이 방금 교문 밖으로 나갔어. 봤어??!!” 농구공을 패스하며, 범기가 크게 물었다. 엉겁결에 공을 받은 지협이 놀란 듯, 눈을 깜박인다. 다시 한번 땀에 젖은 자신의 셔츠를 벗어 던지며, 지협은 그에게 되물었다. “뭐라구?.“ “방금 가윤이가 학교를 나갔다구!!!” 지협 다시 상욱에게 공을 던진다. 드리블 하던 상욱이 다시 뚝-그 움직임을 멈췄다. 땀으로 흥건한 지협의 상체를 노려본다. 아몬드 같은 눈동자를 가진 범기가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런 상욱을 쳐다보며 고개 저었다. 성격이 급하고 단순 무식한 편인 상욱이. 그리고 잔소리는 곧잘 하지만 친절한 편인 이범기. 그러나 주황색 농구공의 회전이 끝났다. 공을 쥐고 있는 상욱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고, 범기도 디펜스 하지 않았다. 그들과 농구를 즐기고 있던 다른 상대편 녀석들도 뚝- 멈췄다. 놀이는 끝났다. 계가윤은 강지협의 친구다. 그 리고 이범기와 유사욱 또한 강지협과 친구다. 3대 3 농구를 하건 축구를 하건, 그들은 친구다. 따라서 이제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그때서야 범기가 흥건한 땀으로 젖은 이마를 한번 훔치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엄연히 들으면 마치 혼잣말 같았다. “같은 사내 새끼랑 자다니... ..........호모 친구라니..........“ 조금 낮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말도 이내 다른 목소리에 파묻혔다. 상욱과 자신을 뺀 나머지 녀석들이 뭐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농구팀에 붙어 버린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협이 아무렇지도 않게 범기의 말을 씹었다. 이전에도 범기는 저렇게 말했었다. 그 말이 처음 들을 때와는 달리 유난히 마음에 짐으로 남는다. “그럼, 이범기... 너는 내가 같은 사내놈이랑 자도 날 버리겠냐?..“ “...........???!!!!!!!!!!!!.......” “..넌 의리있는 놈 아니었냐?.......“ “...............!!!!!!!!!!” 공이 뚝- 바닥으로 튕긴다. 더 이상 묻진 않았지만, 뭔가 수만가지 질문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범기가 인상을 찡그렸다. 영문을 모르는 것은, 뇌가 없는 유상욱 밖엔 없었다. 녀석은 곰같이 큰 덩치로 두 사람을 덮치듯 어깨동무하며 ‘뭐냐~’만 연발한다. “하지만... 하..하지만...“ 녀석이랑 잤구나...와 같은 표정으로 범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는 띄엄 띄엄 뭔가 혼돈을 정리하듯 대책없이 말을 꺼낸다. “하..하지만.... 남자는..... 가슴도 없고..... .....여자처럼 부드럽지도 않고.... 딱 안기 좋게 작지도 않고........“ 휴우...라고 지협이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그때야 분위기 파악을 한 상욱이 일순 조용해진다. 멋지게 그을린 얼굴로 범기에게 눈을 돌리며 지협은 대답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신도 고민했던 것이고, 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래..........그 녀석은 가슴도 없고, 여자처럼 보드랍지도 않고, 자그맣지도 않고, 거리에서 마음 놓고 안거나 뽀뽀 할 수도 없다. 그러나...그 녀석의 밋밋하지만 열을 띈 붉은 유두를 기억하고 있고, 매끄럽게 부딪치던 탄력성도 기억하고 있고... 무엇보다 아직도 닿고 싶은 그 뜨겁고 물기 젖은 내부를 기억한다. 처음 계기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다. 녀석이 장난으로 안긴 것이었는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그 몸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환장할 정도로 떠올리고 있고, 여전히 갈증나 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이범기....” “..........??” “그렇다고 가슴이 여자는 아니잖아. 여자들에게 가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가슴이 여자는 아니잖아?“ “...........-!!!!!!!!” “...넌 가슴하고 사랑하냐? 키가 작든 크든.. 그럼, 너는 그 키하고 사랑하냐? 그 키가 니가 사랑하는 사람의 전부냐?“ “.........아니..그러니깐, 내 말은............” “..넌 부드러움만 사랑하냐..........? 그 부드러움이 니가 사랑하는 사람의 전부냐?“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햇빛 때문인지 다소의 격앙된 마음 때문인지 녀석이 붉어졌다. 검고 예쁜 눈동자, 희대의 바람둥이 이범기. 씩씩거리며 지협을 향해 강하게 소리쳤다. “그게 아니잖아, 새꺄 ...-!!! 찝찝하단 말야! 누가 봐도 여자랑 남자랑 이어지는 게...자연스럽다구!.. 그건 너도 알 거 아냐, 새꺄..-!!! 너도 그러니깐 나영이랑 사귀는 거잖아? 나도 걱정하니깐 이렇게 말하는 거란 말야!!!“ “......................” “누구는 가윤이가 미운 줄 알아? 계가윤이 어디 미움 받을만한 녀석이야? 그 녀석 좋은 놈이건 나도 알아. 아니깐 답답한 거란 말야, 강지협!! 이해가 안되는 거란 말야. 왜 하필 그런 녀석이 남자를 좋아해? 왜 하필 그런 소문을 만들고 다니냐구!! 나도 좋은 녀석이라는 걸 알고 갑갑하니깐 그렇게 말하는 거야!!!!“ 지협이 농구공을 집어 들었다. 머리 나쁜 상욱만 중간에서 어쩔 줄 모르며 얼굴을 문지른다. 그래..라고 지협은 허탈하게 웃었다. 다들 이 녀석처럼 생각한다. 나쁘지 않다. 얼마 전 까지 자신도 그렇게 여겼으니깐... 하지만, 욱씬- 이제는 참기 힘든 몸의 욕구에 합세해서 감정의 통증까지 자신을 짓눌러댄다. 머리 끝까지 올라온 이 상황에 대한 분노와, 마치 코너에 몰린 듯한 한계감이 치솟았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 이범기가 아니라 누가 그렇게 말을 했다 한들, 아마 지협은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그래..알겠으니깐, 이제 다들 작작 좀 해!.. 가만히 좀 내버려 두라구! 정말 찝찝한 건 늬들이야! .....뒤에서 씹으면 기분 좋아? 진짜 친구였던 녀석도 있을 거 아냐. 그러면서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 건 잘한 짓이냐?“ “.................” 아이들이 하나 둘 농구를 그만두고 의아한 듯 돌아본다. 범기도 이내 자신이 꺼낸 말을 후회하는 듯, 손을 저었다. 정말은 아무도 탓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혹은 자신에게 걸리는 사람은 누구라도 혹독히 탓하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정반대의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거친 숨결처럼 터져 나온다. “그래, 잘 났다, 이범기. 넌 좋겠다. 태어날 때부터 여자가 좋아서..“ “..지협아, 그만 해.” 아이들이 쳐다보자, 상욱이 재빨리 지협의 어깨를 집는다. 그러나 덩치가 큰 상욱도 녀석이 내동댕이치는 손길엔 속수무책이다. 조금 빨간 눈동자, 성마른 목소리가 거칠게 튀어 나왔다. “한번 봐주면 안돼? 한번만 용서해주면 안돼? 그게 무슨 그렇게 죽일 죄냐?..........“ “...야!” “우리라도 그렇게 생각해야지, 그럼 누가 그 녀석을 돌아봐주는데? 찝찝해? 너는 일부러 친구에게 미움 받을 수 있냐?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친구를 남기려고 하는 이 마당에...“ “.............................” “...그 녀석은 계속 혼자인데.. ......가장 친한 친구를 버리는 건 용기가 아니냐? 너 같으면 아무리 타락한다 해도 굳이 자기가 아픈 방식을 선택할 용기가 있어? 넌 외로워질 자신 있어? 그만한 용기를 가질만큼 너에게 절실한 거 없어? 그 새끼의 그런 감정은 ...쓰레기냐?................“ 그 자리에는 언젠가 가윤을 때렸던 남지일도 있었다. 몇 개의 농구공이 또르륵 모래밭을 구른다. 지협의 갈색 상체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어도, 물기 배인 이 녀석의 답답한 듯한 격노함이 모든 걸 대변했다. 그는 정말 진지했던 것이다. 범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천천히 농구공을 집었다. 점심 시간을 끝내는 종이 울린다. 교무실에서 선생들 몇이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늘 천방지축 같던 야생말들이 멈춘 게 궁금해서 였다. 지협의 목울대로 뜨거운 공기가 울컥-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많이 누그러든 목소리로 범기를 향해 입을 연다. “니가 이해 못한다 해도.....” “................” “...자연스러운 건 누가 누구를 만나냐가 아니잖아.” “..............” “........사랑보다 더한 본능이 있냐... ..그거보다 더 자연스러운 게 있냐. 가슴이 여자는 아니잖아? 너는 그 가슴과 사랑에 빠진 게 아니잖아. 나보다 연약한 몸매가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의 전부가 아니잖아. 그 녀석이 누구와 안고 뒹굴건 말건.. 녀석이 사랑받고 사랑한다면.. ...그 녀석도 같은 거 달린 몸에 환장한 게 아니란 말이다. 니들이 구역질 해대는 변태가 아니란 말야. 그 녀석이 남자의 몸과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닌데, 한번쯤은 멋있는 친구들로 남을 수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해 주면 안 되냐..“ “.........지협아.” “..친구로써의 부탁이다. 그래, 그 녀석 호스트 해. 하지만, 니들이 그 녀석을 병자 취급하는 건 호스트를 하기 때문이 아니잖아. ...남자랑 관계하기 때문이잖아. 그래서 부탁하는 거다. 한번만 이해해 줘.“ “..........강지협!....” “..그게 그 녀석의 본능이라잖아!!!!!!!!!! 사랑하는 그 자체 만으로도 힘들텐데.. 왜 살아가는 것까지 이렇게 힘들어!!!!!!!!!!!!!!!“ “.........그래...그만해. 종쳤다. 들어가자....” “이러지마.... .........우린 친구잖아, 이 범기.” 5월의 문턱을 넘어선 어느 날. 학교 운동장에서 지협이 친구에게 말했다. 너는 사랑보다 강렬한 본능을 만나 본 일 있냐..라고. 그 보다 더 자연스런 감정을 만나 본 일 있냐........라고. 그리고 어떤 사랑이건 우린 친구다...라고. 그래서 이범기도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대답했다. “미안하다.”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졸업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이 운동장에서 농구를 할 것이다. ************************ 물론, 한동안 범기와도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사건은 정작 며칠 뒤에 터졌다. 역시나 농구를 한 게임 뛰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김이 모락 모락 날만큼 땀에 젖은 머리를 씻고 교실로 들어섰을 때, 누군가 문을 박차듯 뛰어나온 것이다. “뭐야?” 상욱이 물을 벌컥이다 놀란 표정으로 묻자, 이제 몇 분 안 남은 수업 시간을 남기고 뛰어 나온 녀석이 질린 표정으로 지협을 바라본다. “징계위원회가 열린대.” “.........!!!!!!!” “니 친구 계가윤이... .....어제도 그 남자가 데리러 왔었지? 어제 저녁에 학부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대.“ 상욱 역시 가윤과 친하지 않다. 그러나 녀석은 단순한 만큼 감동도 잘 받는다. 며칠 전 필사적으로 외치던 지협을 생각해서인지 녀석은 그 소식에 금세 흥분한다. 아니나 다를까. 유상욱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어떤 새끼가 쪼잔하게 꼬질렀어!” 그러나 지협을 싸늘하게 만든 건 단지 그 소식만이 아니었다. 막상 징계 위원회가 열린다는 말은 눈앞이 캄캄했지만, 내내 걱정하던 것이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말은 조금 뒤에 튀어 나왔다. “근데..문제는.............” “.................” “...가윤이가 아까 또 학교를 나갔어. 선생님들은 점심시간에 비상회의 한다고 모였는데.. 당사자인 계가 놈이 학교에 없다구!.............. 무단 결석이 몇 번에, 말도 없이 계속 사라지고... 거기다가, 녀석이 호스트 클럽에 나간다는 것부터 해서 .. 선생들이 다 알고 있어. 학부모들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야!!.“ “.............-!!!!!!!!!!” 만약, 계가 놈이 그대로 클럽으로 갔다면.. 이 일을 이제 조사하기 시작한 학교의 눈에 걸린다면... 이거야 말로 큰일이다. 지협은 눈동자가 불에 탈만큼 강하게 말을 하는 녀석을 쏘아본다. 마치 가윤이 거기에 숨어 있기라도 한듯 말이다. ************************ 가윤은 물론 규철을 만날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제가 심각해지면, 지협의 부모님도 이제 사실을 알게 될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윤은 운동장의 지협을 보는 순간, 또다시 그곳을 뛰쳐나왔다. 규철은 그 시간에 자고 있을테니 딱히 깨울 수도 없었다. 잠시 거리를 돌아다녔고, 호스트 바 Ananomi 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6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잠시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규철은 예약이 걸린 룸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대로라면 그를 만나기 위해 새벽까지 기다려야한다. 대신, 가윤은 Ananomi 의 캐셔와 시간을 노닥거리며 보냈다. 캐셔 형도 잘생긴 편이었고, 친절했지만 호스트를 할 생각은 없다고 가윤에게 말하곤 했다. 어쨌든, 기다리다 보니 점점 더 무료해졌다. 학교에서는 자신을 찾기 위해 또 다시 지협을 호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핸드폰은 꺼져 있고, 녀석이 이 곳의 위치를 알 리도 만무하다. 캐셔와 놀던 시간이 조금 지루해지고, 캐셔 역시 바빠질 무렵이 되자 가윤은 비어있는 룸에서 TV를 보기로 결심했다. 이전처럼 손님의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주로 다른 형들의 휴식장소로 쓰이는 이 룸은, Ananomi 사람들이 심지어 ‘가윤이 방’으로 부를 정도였다. 이따금 규철을 기다리며 이 방에서 노는 일도 많았다. 룸서비스 맨들이 가끔 문을 열어 커피도 타주고 남은 과일도 건네주곤 했다. 대부분의 Ananomi 사람들은 그에게 친절했다. “많이 기다렸지? 조금만 더 기다려. 부탁해, 애인~“ 밤 10시 쯤이 되자, 규철이 문을 조금 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윤 역시 부은 눈을 가만히 닫으며 가볍게 고개 끄덕였다. 다만, 뭔가 서두르는 느낌이 드는 규철이 수상해서 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본다. 어떤 손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등 돌린 규철과 로비에서 대화 중이었다. 보통의 손님이라면 룸에 들어가서 접대하는 게 당연할 것인데,...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남자의 모습은 약간의 궁금증으로 문틈을 내다보는 가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규철보다 조금 작은 키였고, 호리 호리한 몸매를 가진 남자였다. 빛깔 좋은 슈트 차림이었는데, 적갈색의 넥타이가 너무나 어울릴 정도로 눈동자가 생생하다. 무엇보다 갸름한 턱선이나 말끔한 얼굴 선이 가윤 자신과 퍽 닮아 있는 기분이었다. “..............!..............” 갑자기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왜 룸에 들어가지 않는지도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규철과 그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사내들이 주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호스트로는 보이지 않았고, 실제로 가윤이 아는 형들도 아니었다. 그래서 알아차렸다. 규철이 며칠 전에 이야기하던 그 남자다..라는 사실을. 그 때 상대방 남자가 규철의 어깨 너머로 한참 떨어진 곳의 자신을 문득 쳐다본다. 얼음같은 눈동자와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확연하게 와 닿았다. 정말 아무런 인간의 표정을 담지 않은 얼굴이다. 순간 오싹해졌다. 마치 지금의 자신도 이런 식으로 몇 년 씩 감정을 버린 채 살다보면, 저렇게 소름끼칠 정도로 무감각한 얼굴이 될지 두려워질 정도였다. 그가 자신을 한번 응시한 뒤, 다시 규철을 쳐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또렷한 붉은 입술이 마치 비아냥거리듯 한 쪽으로 기운 표정이다. 이상할 정도로 엄청난 살기를 담은 표정이었는데, 순간 그가 잠시 고개를 돌린다. 규철도 등 뒤에 몰래 보는 자신을 의식했는지 상대방의 팔꿈치를 잡아 다른 곳으로 잠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해가 되었군..이라고 생각하며 가윤은 다시 자신이 TV를 보고 있던 룸에 들어섰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안 좋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되는 일이 없다. 시간이 몇 분 더 흐르고, 기지개를 펴며 가윤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규철은 오늘 포기해야겠다. 웬만하면 오늘 재워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그 때 갑자기 룸의 문이 벌컥- 거칠게 열린다. 정말 일진이 안 좋은 날이었던 것이다. “여어~..언제 바뀐거지? 화장실 다녀오니, 이런 미인이 숨어 있었네....” ..라고 갑자기 술에 절은 손님이 들어섰다. 이제 20살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은 한눈에 보기에도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에 굉장히 취한 듯 보인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Ananomi에 들락거릴 정도면 굉장한 부자임에 틀림없다. Ananomi는 예사 호스트 룸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로 이 청년은 거물급의 자식이거나 졸부의 아들임이 분명하다. 혀가 잔뜩 고부라진 그의 말에 가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당황해 한다. 손님이기 때문에 자신이 함부로 설치면, 친절한 규철에게 방해가 될 뿐이다. 애당초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곳에 놀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할 줄을 몰라, 작위적인 미소만을 지으며 살그머니 그 방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어깨를 붙잡힌다.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튼튼한 몸이 자신의 어깨를 부러뜨릴 듯 잡아서 내동댕이쳤다. “이봐!.. 손님 안 받고 어디로 내뺄려고? Ananomi에서 그렇게 가르쳤나? 어디보자...“ “..........저기...” “..처음보는 얼굴인 거 같은데, 신입이냐? 하하.. 넌 다행인줄 알아, 새꺄..나 같은 손님 만나서..“ 다행이 아닌 것 같다. 오해인 듯한데, 가윤은 순간 다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의 빈 틈을 살핀다. 어디선가 다른 룸에서 질퍽하게 마쉬다가 착각해서 이 방에 들어온 것 같다. 로비에 아무도 없는지 걱정스러웠다. 까딱하다간 원치 않는 일을 당할 것 같았다. “너 국회의원 장현철 알지? ..그 분이 우리 아버지야, 새꺄.... 고분 고분 말 안 들으면, Ananomi 전체를 꼬질를 수도 있어.“ “............-!!!!!!!!!!” 정말 거물급 정치가의 아들이었다. 전에 없이 당황한 가윤은,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녀석의 옆구리 너머를 살핀다.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이었다. “야, 벗어. 아까 있던 놈은 어디가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더 미인이 들어왔으니 용서해 주지.“ 이전의 자신이라면 위세를 떨 듯 건방지게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충분히 남았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조금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 스스로의 일만으로도 속이 따끔거리는데,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탈칵 탈칵- 취한 녀석이 휘청거리며 일어나 버클을 푸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방을 착각한 것 같다. 어지간한 손님이면 룸안에서 이러지는 않는다. 이 녀석은 정말 최악이다. 그가 바지를 벗으려 용을 쓰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잘 관찰하며, 가윤은 조금씩 뒷걸음을 친다. 몇 발자국만 딛으면 룸 밖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어쩌면 화근이겠지만 말이다. “.............아악-!!!...............” “이 십새끼.. 어디로 도망갈려구....“ 손목이 꺽일 듯 잡혀 버린 것이다. 막을 새도 없이 날카로운 비명이 튀어나온 것과 동시에, 가윤은 눈 앞에서 번쩍- 섬광이 일었다. 다짜고짜 그가 뺨을 거세게 후려쳤기 때문이다. 조금 멍해진 정신으로 고개를 젓자, 입가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입 안 쪽이 부어오르고 입술이 터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퍽-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다시 주먹이 날아온다. “.....................앗-!!!!!!!!!!!” 술에 취한 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갑자기 자신이 풀던 벨트를 휘둘렀다. 통증 때문에 쇼파로 던져진 자신의 몸 위로 가죽끈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른다. 철썩-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릴 때마다, 무방비의 목덜미에서 찢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아...라고 짧게 비명을 지르는 순간, 허리위에 내려 앉는 엄청난 무게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너무나 빠르게 다가오는 폭력의 속도에 놀랬다. 공포에 젖을 사이도 없었다. 이제는 끝이구나..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어렴풋이, 자신의 몸을 타고 누르는 엄청난 무게 뒤로 구원처럼 로비의 불빛이 세어들어온 것이다. 규철이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사내의 등 뒤에서 잘라 말했다. “......그 녀석은 제 애인입니다, 손님.” “............?............” “그리고 저희 영업 끝나면, 손님의 안전도 보장 못합니다.” 스르륵... 험상궂게 가해지던 거친 손끝이 그 냉철한 한 마디에 갑자기 목 에서 사라진다.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 가윤이 콜록거리며 일어서자, 규철이 싸늘하다 못해 섬칫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 “씨바, 원조교제 한번 하기 힘들다.” ..라고 규철은 차를 세운 채, 무지막지한 목소리로 화를 냈다. 입술이 찢어진 자리에서 뚝뚝- 핏물이 흘러나와 가윤의 상의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 뿐이 아니라, 녀석이 야만적으로 내리친 가죽 벨트 때문에 하얀 목덜미에는 붉은 자국이 서너 개 남았다. 누가 봐도 험한 꼴을 당했다는 걸 알만큼, 머리카락도 헝클어지고 얼굴도 창백해 보인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니 그 잘난 룸메이트가 볼 만한 얼굴을 하고 있겠군.” “.......자고 있을 걸...” “.....자고 있으면 깨워서 보여줘. 이전에도 나를 보는 눈빛이 장난이 아니던데.. 그 새끼, 아주 너를 갈아 마실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흐응..이라고 가윤은 낮게 웃었다. 아까의 규철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절도 있고, 딱 부러지는 목소리, 그 차가운 냉정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친절하며 어른스러운 형이 아니었다. 정말 그는 괜찮은 사람일까?.... “그래, 오늘은 왜 찾아온 거냐? 그 험한 꼴을 당하려고 지 발로 온 건 아닐테고.....“ 담배를 빼 물며 규철이 쓰게 웃는다. Ananomi를 나오자마자, 가윤의 집으로 차를 몰았으니 그 화난 듯한 얼굴을 보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제야 조금 기분이 풀린다는 듯, 욕설을 몇 마디 내던지며 그가 물었다. 아아..오늘의 용건. 뭐였더라? “며칠 전에 그 녀석이 여자한테 키스했어.” “........누구? 강지협이? 네 베스트 프렌드? 그걸 왜 이제 이야기 해.“ “그냥.. 원래 충격은 천천히 찾아오는 거잖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자꾸 떠올라서 그래. ........형도 봤을 거야. 그 때 같이 있던 여자애. 그 애랑 사귄대요.” “......씨바, 생긴 것만큼 밝히는 놈이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너는 자존심도 없냐? 그런 말 하며 웃고 있게?.“ 규철이 뭐라고 욕하며 넥타이를 휙-하고 풀었다. “자존심.. 있어. 자존심 있으니깐, 녀석이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지.." "..........그래, 그 녀석 입장에서 보면, 니가 얼마나 골 때리겠냐. 갑자기 18년 된 같이 사는 친구가 그렇게 삐딱해지기 시작했는데.. 어지간한 녀석들도 견디기 힘들거다, 아마.“ “아... ..그래..맞아요. 근데.... 더 기가 막힌 건 뭔지 알아? ..........나에게 잡아달라고 말하래. ...그러면 무슨 수를 써서도 더 타락하지 않게 잡아주겠대... ....그걸 내가 거절했어.... ...거절해야 하니깐, 한 건데.. ....그 녀석이 그 여자애랑 있는 건...더 지켜볼 자신이 없어..” “........................” “............이럴 땐, 나 같은 거 없어졌으면 좋겠어..................”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렸던 것 같다. 규철이 의아한 듯, 셔츠 소매를 걷으며 돌아봤다. 가윤은 여기 말고 갈 곳이 달리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자신은 갈 곳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머리 나쁘고 건달같은 녀석이지만, 지협이 ‘가자 집으로..’라고 말해줬을 때야 돌아갈 곳을 겨우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그 녀석이 좋았고, 또한 좋았기 때문에 미움 받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녀석은 절대 친구로써의 자신을 포기할 줄 모르는...착한 녀석이다. 더듬 더듬...생각해보니 규철을 걱정시키는 것도 못할 짓이다. 그리고 자신과 신파조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가윤은 그저 머리를 감싼 채, 허탈하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어릴 적에 시골에 놀러갔다가... 깊은 개울에 빠진 적이 있는데......” “..................‘ “.....이제 대여섯살 밖에 안 된 저나 그 망할 새끼에겐 깊은 곳이었거든. ...나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그 와중에서도 당연히 녀석이 사람들을 부르러 갈 거라고 믿었어.“ “근데, 안 부르러 갔냐? 씨바, 그런 새끼를 왜 믿어?“ “..................형.” 가윤은 유리처럼 투명한 눈동자로 규철을 돌아보았다. 세상에서 강지협을 그렇게 잘 아는 인간도 나 밖에 없어. 나는 녀석이 왜 달려가지 않았는지 다 알아. 녀석이 왜 안 그랬냐 하면... “..형.. ...그 녀석도 같이 물에 뛰어 들었어. ...그 녀석은 아직도 수영 못하는데 말야. ...정말 골 때리는 녀석이야...“ “..............-!!!!!!!!” 무슨 말인지 알고 있잖아, 규철이 형. “..그럼.. 잡아 달라고 말해, 새꺄... 그리고 좀 웃어, 임마... 하.하.하...이렇게.“ 담배를 입 가에 걸며 규철이 음울한 표정으로 과장스럽게 웃는다. 그 놀리는 표정에 조금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 망할 녀석이..’라고 그 미소를 보며, 규철이 웃음을 거둔다. 그저 말없이 한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팔꿈치 까지 소매를 걷은 그 손은 건강해 보인다. 김규철도 믿을만한 인간이다. 새삼 그 사실을 자주 깨닫는다. “.............형..” “.........말 하라, 오바.” “...나 집 나오면 재워줄 수 있어?” “............-!!!!!!!!!!!” “...이젠 정말 얼굴도 안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래....“ “............계가윤!...” “...나도 내가 항상... 잡아달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는 거 알아.. 나도 내가 항상... 제대로 밥도 못 넘기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도 어쩔 수가 없잖아!!! ...내가 벌린 일이니깐... 어떤 일을 겪어도 나 하나면 족해. 안 그러면 그 녀석은....“ “.......계가윤, 임마....” “...같이 물 속에 뛰어들 녀석이야. 골 때리지. 왜 조금 더 이기적이지 못할까..그 새끼..............“ 곤란한 표정을 짓는 규철을 향해, 가윤이 미소지으며 재빨리 덧붙인다. 숨이 찰 정도로 간절한 음성이다. “부탁이야, 형....“ “............잡아주길 원한다며... 니가 그렇게 한마디만 말해도 녀석이 너를 잡아줄 거라 믿는다며..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냐...“ 매우 빠르게 건네는 말에 규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 물음에 잠시 숨을 딱 멈추며 가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옅은 미소를 비웃음처럼 지으며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수초가 지난 후였다. “..........그게 문제야..형.....“ “..............-!!!!!!!!” “........단 한마디만 하면 되기 때문이야. 내가 녀석에게 나 좀 도와줘..라고 말하면.. ..그 녀석은 필사적으로 나를 잡을 거고..“ “................” “..그럼..나는 다시 친구로 남든지.. 혹은 더 이상 관계가 발전한다 해도 죽도로 원망만 당하든지... ..둘 중 하나야.“ “...............”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 알잖아, 김규철!! 죽도록 노력했는데, 기껏해야 둘 중 하나란 말야!! 죽은 척 하고 살든지, 정말 죽든지!!! 그게 뭐야... 단 한마디로 그렇게 되어버린단 말야!!............“ “.....................” “..그게 문제라니깐..형. 나는 그 ‘날 잡아’라고 정말 미칠 정도로 내뱉고 싶고.. 그 녀석도 그 한마디를 환장할 정도로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 둘은 그 곳에서 같이 못 견뎌.. ..둘 중 하나는 물러나야 해.“ 갑자기 와락- 그 순간, 은은한 남자 향수 냄새가 얼굴을 덮었다. 규철의 셔츠에서 나는 향이었다. 뭐지..라고 깨닫기도 전에 그가 큰 한숨을 쉬며 두 팔을 벌려 옆자리의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은 것이다. “......................-!!!!!!!!!!” 그리고 천천히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울컥할 정도로 매달리듯 애원하고 있었는데, 마치 아기를 달래는 것처럼 조용하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곧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묘하게 찡그린 가윤의 얼굴을 들어, 놀랍게도 규철은 그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꽉-도장을 누르듯, 뜨거운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다. 스르륵-..안도감이 밀려왔다. 이 사람은 진짜 어른이다..라는 것을 정말 깨달았다. 천천히 안전밸트를 풀어주는 몸짓이 느껴졌다. 규철이 가라앉은 친절한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 정말 교제할까, 애인?” “.................?” “..원조말고, 교제만 말야.” 농담처럼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언제나 자신을 환영한다는 인사와도 같아서 가윤은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가 키스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놀랍게도 지협 역시 그 시간에 깨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규철이 차에서 내리는 가윤을 이미 보고 있었다. 실상은, 한 두시간 전부터 그는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제기랄!!!! 2년동안 끊은 담배를 마침내 다시 손가락에 걸게 된 것이다. 이만하면 얼마나 초조했는지 여실히 증명된다. 마침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녀석이 들어섰을 때, 지협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조금 전에 그 ‘잘생긴 회사원 원조교제 철면피’가 자신의 친구 아닌 계가윤에게 키스했다. 그것도 차에서 내리는 가윤의 팔을 잡아 갑자기 끌어당기며 키스했다. 멀리서도 똑똑히 보였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봤을까..하는 것보다 지협은 다른 이유로 심하게 얼굴을 굳혔다. 말라비틀어질 우정. 닮을 대로 닮아버린 우정. 친구 이하의 친구가 되어버린 뒤틀린 감정. 목끝까지 욱씬거리는 위액이 넘어온다. 그 ‘잘생긴 회사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가윤의 턱을 잡아당기며 깊게 키스했다. 가볍게 꺽여지는 가윤의 허리를 어른의 팔이 든든히 두르고, 마치 자신의 것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키스했다. 그에 어떤 느낌인지 똑똑히 기억나는 바람에, 지협은 무의식중에 베란다 철제를 손으로 꽉 쥐었다. 갑자기 하얗게 질려버린 자신의 손마디가 느껴진다. 핏기가 송두리째 발끝으로 빠져나간다. 머리 속에 얼어나는 해일은 커다란 파도처럼 갈가리 찢어졌다. 한참을 거친 숨만 들이키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녀석이 들어섰다. 조심스럽게 들어섰지만, 이내 베란다에 버티고 있는 자신을 본 듯 잠시 걸음소리가 멈춘다. 오늘은 지협에게 정말 최악의 날이었다. 요새는 하루 하루 이 ‘최악’이라는 단어가 갱신되는 기분이었다. 학교에 징계 위원회가 열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가윤은 하루 종일 보이지 않다가 이제서야 저 녀석 차에서 내린 거다. 분명히 자신이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을 녀석이.. ..아니, 모르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똑똑히 가르쳐 줄 수 있다. 두번 다시 그 사실을 잊지 못하게 각인시켜 줄 의향이 있다. 지협은 정말 머리 뚜껑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느 날 ‘난 남자를 좋아해’라고 말하고, 또한 무심하게 웃으며 ‘나 호스트야’라고 선언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장난같이 키스하고, 분풀이처럼 안겼으면서!!... 사실은 그 것이 얼마나 잦은 꿈으로 요새도 자신을 괴롭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심지어는 밤새 잠들었을까..하는 기분으로 요새도 계속 제 방문 앞을 서성거린 기분을 전혀 모르면서... 손을 내밀 수 없는 먼 곳으로 자꾸만 자꾸만 도망간다. 얄싸한 미소와 야한 상상들, 그리고 정말 얄미울만큼 예쁘장하게 웃으면서 청결한 얼굴로 ‘내가 언제 너 랑 잤어?’라는 듯 시치미를 뚝-떼면서.. .........인간이란 숨어 있지 않을 냉정한 표정으로 ‘날 내버려둬’라고 말하고, 상큼하게 웃으며 짐승처럼 꾸역 꾸역 밥만 삼키면서... “.........나 내일부터 다른 곳에서 살게.” ..........이제는 등 뒤에 대고 여유만만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 도망간다. 그 잘난 위선과 가면들을 빤히 들키는 이 마당에도 항상 한결같다. 하루 하루가 피를 말리듯 이렇게 망연하게 얼어붙는 기분이다. 그래..라고 지협은 돌아보지 않고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문제가 뭔지 똑똑히 알고 있다. 조금 전에 다른 녀석이 맛보고 떠난 그 신랄한 입술을 물어뜯고 싶은 거다. 나에게는 그 날 이후 손도 못대게 하고 갖가지 위장들로 항상 도망만 치면서, 그 위세 좋은 녀석에게는 당당히 맛보게 하는, 그 금단같은 열병이 너무나 화가 난다. “...............-!!!!!!!!!” 그러나 휙-하고 돌아보았을 때, 지협은 녀석의 얼굴 때문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핏기 없는 얼굴은 질린 것처럼 유난히 하얗고 입술에는 터진 자국이 그대로 달려있다. 목덜미에조차 선명한 채찍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감히 누군가 믿기지 않을만큼 녀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너!!!!!!..................” 한번에 성큼 성큼 다가서서 거칠게 손목을 잡아당기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얄미운 눈꼬리가 뾰족하게 자신을 노려보았다. 지금 니 꼴이나 보고 말해, 계가윤..니가 지금 나에게 당당하게 이 집을 나간다고 말할 때인지....거울이나 보고 말해. “그 잘생긴 회사원이 좀 난폭하게 노는가보지?” “..................-!!!!!!!!!!!!!” 그때서야 왜 지협이 인상을 싸늘하게 얼리며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지협에게 잡히지 않은 남은 한 손으로 무심결에 입술 쪽을 매만지더니 잠깐 당황한 표정이 된다. 그 흔들리는 시선에 얼음같은 분노를 고정한 채, 지협은 차갑게 몰아붙였다. 이게 니가 원하는 거냐? 이만큼 파괴되었으면 이제 만족해? 그래 잘 했어. 학교도 널 포기하고, 그 회사원도 널 포기하고.. 이젠 나도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정말 잘 했어. 완벽해! 대단해!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칠 수 있어? 친구들에게 그렇게 너를 부탁한 난 뭐가 돼? 니 마음만 철판이냐? 넌 부서질 줄도 몰라? 이렇게 해서 마지막의 나조차 완전히 경멸하길 원하는 게 영악한 니 계획이야? 그럼 떨면 안 되지.. 왜 떨어, 이 십새꺄... 눈을 뾰족하게 세워서 ‘그게 뭐?’라는 식으로 날 쳐다보면, 제발 흠칫 흠칫 놀래지 말라구. 진심을 들키면 안 되잖아? 무슨 말인지 몰라? 그래야 내가 널 포기하지!! 그래야 내가 널 안 믿지!!!!!!!! ............그럼에도 그런 너를 지금 안고 싶어 안달이 난 내 아랫도리도 정말 웃기지. 정말 다른 녀석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내 알량한 18년의 우정이 우습지. 니가 안쓰럽고 불안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 내 안의 아픔이 우습지...너는 그것마저도 부술 정도로 니 멋대로인데... 목이 꽉 막힌 목소리로 거칠게 지협은 그를 몰아세웠다. 이성은 이미 뇌를 튕겨나간지 오래였다. 너를 포기해? 너를 단념해? 그냥 그렇게 세상이 널 부서뜨리게 내버려둬? 누가 니 등을 밀고 무릎을 꺾어도 그걸 보고만 있어? .....................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지협은 녀석을 잡은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며, 낮고 거칠게 속삭였다. 절대...........이제는 안돼, 계가윤. 벌써 여기까지가 한계야. “너야 말로 그 영악한 머리 포기해, 계가윤.” “............-!!!!!!!!!!!” “이 정도 하면 내가 널 포기할 줄 아냐?.“ “............강지협..” “여길 나가? 니가? ...귀여운 계획이야. 그 잘난 회사원 집에 간다구? 이런 꼴을 당했으면서?“ “강지협!!!!!!!!!!!” “웃.기.지.마.. 잘 들어. 넌 하나도 포기 못 시킬 줄 알아. 넌 다시 학교에 다닐 거야. 이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에서 모범생이 될 거고..“ “..................-!!!!!!!!!” “우리 엄마건 아빠건 미안해 할 일 하나도 없을 거다. 니가 뭘 어째? 도망가? 어디로? 내가 말했지.. 넌 아무도 못 속여. 백날 도망가 봐. 니가 원하는 거 내가 하나라도 해 주나!!! 넌 아무도 못 속이고 아무데도 못 가.“ 녀석의 얼굴에서 그 얄밉던 미소가 싹- 걷혔다. 순식간에 놀라울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이 점점 붉게 변해가더니 잡혀 있던 손을 빼 내려는 듯 거칠게 고개를 흔든다. 그러나 지협 역시 싸늘하게 내뱉었다. 이 쯤에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 터진 것이다. “알겠지? 이제 다 집어치워. 이전 같으면 니 말에 고분 고분 설득당해주는 게 의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지협아, 놔. 아파!!” “닥치라 그랬지? 이젠 니 말같은 거 안 들어. 니가 여기를 나가? 학교에서 도망쳐? 너 나 잘 안다며? .........니 눈엔 내가 그걸 봐 줄 인간으로 보여?“ “.............제발................” 뭐라고 거절하려는 듯한 날카로운 신음이 가윤에게서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지협의 행동보다 늦게 터져 나왔다. 이미 머리가 마비된 그에겐 남은 것이 없었다. 이 지지리도 지랄같이 혼란스러운 녀석. 그 얄미운 얼굴을 조금 전의 사내처럼, 아니 그보다 더 난폭하게 잡아당기며 억지로 입을 맞춘다. “..................-!!!!!!!!!!!!!” 이렇게 놀라는 가윤을 본 적이 없다. 충격으로 둥그렇게 떠지는 맑은 동공을 쏘아보며, 눈을 뜬 채로 지협은 다급하게 꽉 닫혀진 입술을 고집스레 씹어댄다. 이빨을 바싹 세우고 잘근 거리는 통에, 도저히 참지 못하는 듯, 가늘게 신음하며 녀석이 마침내 입을 벌렸다. "일이 이 정도 됐으니, 니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최선의 길인 것 같다. 학교?.. 하아~! 내가 질질 끌고서라도 등교시켜 주지. 넌 니 식대로 백날 해 봐. 이제 내가 그걸 용납하나." "..................!" “거절해도 안을 거다.” “.............-!!!!!!!!!” “니가 허락해도 안을 거고....” “...........!!!!!!!!!!!!!!” “..니 말 같은 건 하나도 안 들어줄 생각이다.” "..............." 정말 이번에는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지협은 그 인간성 좋은 자신이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 본능만 광폭해 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다. ‘도와줘’라는 말을 끝내 듣고 싶었다. 잡아달라는 말을 한마디만 해줬어도 어떤 짓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언제나 자신과 어긋나는 길만 철저하게 선택했다.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면서, 제대로 마음을 숨기지 못할만큼 안타까움도 같이 동반한다. 제기랄!!!!!!!!!!!!!!! 이번에는 도저히 못 봐주겠다. 어지간한 녀석의 얄미움에 이력이 난 자신이었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참아지지가 않는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허벅지 사이로 단단하게 솟아오르는 열기, 그 숨 막히는 소유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도 없어지지 않는 목마른 기분이다. 단물을 들이마시듯, 자꾸 자꾸 녀석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가득 빨아들인다. 으으응...이라고 거절할 것같은 기색이 보일 수록 더 집요하게 혀를 놀렸다. 마침내 완전하게 지협안에 사로잡힌 녀석의 혀가 뿌리채 뽑힐 듯 얽힐 때까지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멈춰지지가 않았다. 녀석이 잡아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녀석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게,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제는 그가 언제나 자신의 바램과는 반대로 행동해 왔듯이 고대로 녀석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도망치겠다구? ..........끝까지 가 보자, 그래.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해 주지. ******************************** “...안..........돼................” “한 발자국도 내 말 없이는 못 나가. 니가 어딜가?“ 마치 작정한 것처럼 몇 번이나 갈 때까지 놔 주지 않는다. 가윤은 정말 울고 싶어졌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정신이 파괴될 정도로 계속 얽혀오는 뜨거운 열기는 처음이었다. 싫어....라고 작게 애원하듯 꺼냈지만 냉큼 묵살당한다. 뒤에서부터 꽉 잡힌 허리는 도망갈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 때처럼 자신의 몸을 확인시키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그를 농락할 수도 없었다. 마치 그 때 그랬던 것을 벌하듯, 지협은 더 잔인하게 굴었다. 기절할 것처럼 쾌감으로 온 몸이 벌벌 떨렸다. “...........아아....................” “좀 더 솔직해야지, 계가윤. 진작에 이렇게 하고 싶었잖아? 확실히 말해. 내가 잡아줄게..“ “............아...냐.....................” 고집스럽게 고개를 젖는 가윤이다. 그와 동시에 신음이 튀어나오는 입으로 그 단단한 손가락이 침입했다. 몇 번째 뒤에서 관통당하는 삽입은 적나라하게 애널을 자극해댔다. 일부로 수치심을 자극하듯 불을 켜 놓고 엎드린 자세로 범해진다. 참을 수 없는 굴욕감과 쾌감이 극처럼 오고가며 척추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니가 뭐라고 말해도 이젠 니 말 안 들어..” “지협아.........................” “..알아? 개패듯이 패서라도 내일 학교에 끌고 나갈 거다. 그 클럽인지 뭔지 내가 때려 부셔 버릴 거야. .......그 남자 새끼 한번만 더 만나면 죽여 버릴 줄 알아..“ “........강지협!!!!!!!!!.............” 단단하게 엎드려진 몸. 그 사이를 열어 눈으로 확인하며 지협은 반대로 더욱 달아올랐다. 결국 만족스러울 정도로 애원하는 신음이 가윤에게서 튀어나온 것이다. 안타까울 만큼 색스러운 애원이었다. 이미 눈꼬리에는 젖은 신음이 매달려있다. 엎드린 녀석의 허리를 꽉 잡고 다시 한번 녀석의 내부를 관통한다. 거칠게 삽입되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자지러질만큼 흐느낌이 짙어졌다. “......아악..........-!!!.................” 연결된 부분에서 자신의 굵은 페니스를 빼었다 넣어본다. 숨 막히는 것처럼 엉망으로 흐트러진 비명이 간헐적으로 가윤에게서 쏟아졌다. 그 열기 가득하고 뜨거운 내부는 촉촉한 점막으로 자신의 것을 감싸 안는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반사적으로 꽉 죄여온다. 본능적인 반응인 것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지협의 허벅지 사이도 점점 단단해졌다. 경련이 일어날만큼 가늘게 흐느끼는 가윤의 신음도 크게 한 몫했다. 이번에는 절대 도망갈 수가 없었다. 표정하나 숨길 수 없이 엉망이 된 모습으로 몇 번이나 지협에 의해 억지로 사정 당했다. 하얗게 세어 나오는 자신의 것에 낭패감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 붉힌다. 그것이 바로 질리지 않을만큼 놀라운 욕구를 도발해냈다. 언제나처럼 얄미운 모습이 아니라 애처로움이 감돌아 사랑스럽다. “.........아흑................” 마침내 녀석을 몇번 울리고 말았다. 제발..그만해....라고 말할 때까지 구석 구석 범해진 채 적나라하게 관찰당해진 것이다. 지협은 녀석을 똑바로 누이고 잘빠진 발목을 잡아 높게 위로 들어 올렸다. “...아앗!......................” 마지막엔 그렇게 다리가 들려진 채로, 더욱 심하게 사정당했다. 얼마나 심하게 굴었는지, 가윤의 몸이 벌벌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풀어 오른 유두의 붉은 빛은 온통 타액으로 반짝거리고, 침대보는 몇 번의 사정으로 혼탁하게 젖어 들었다. 그의 애널에서는 자신의 사정액이 넘치다 못해 조금씩 세어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기절한 것처럼 진이 빠져 누워 있는 가윤의 목덜미에 인사처럼 지협은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부풀어 오른 입술, 그 상처 자국을 단단한 자신의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무의식적으로 길게 상처난 목덜미를 혀로 핥는다. 그때까지 녀석은 보는 사람이 넋 나갈만큼 할딱거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 떨리는 어깨를 조금 힘주어 끌어당긴다.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에 엎드린 채, 잘빠진 나신에 온통 지협의 흔적으로 가득차 있었다. 불긋 불긋한 몸으로 배게에 얼굴을 박고 조금씩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욱 애처로워 지협은 쓴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곧 이어 숨소리가 잠잠해 질 때가 되어서야 피곤함으로 눈 아래가 살짝 부풀어오른 녀석의 미묘한 색기가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서야 이불장에서 새로 꺼낸 깨끗한 이불을 덮어 자신과 녀석을 한묶음처럼 끌어안았다. 내일 아침에도 만약 도망간다면, 이번에는 정말 자신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나는 안돼.....” 얼마나 짐승처럼 해 댔는지, 엄청나게 쏟아지는 수마 속에서 지협은 겨우 물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꽉 맞물린 가윤의 몸이 잠시 움찔거렸다.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걸 잘 안다. “그런 녀석이 아니라...” “...............” “...........니가 마지막으로 손 내밀 수 있는 자리에 .. 왜 내가 아냐.. ........왜... ..너는 내가 원하는 거에 반대로만 행동해...“ “......................” 대답은 없었다. 다만 물기에 흠뻑 젖은 몸이 길게 한숨을 쉰다.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가윤은 침대에 이미 없었다. 집에도 없었고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다. 지협은 마침내 테니스 채를 던져 버렸다. 분명히 마지막으로 경고 했는데도 녀석은 지 마음대로 굴고 있다. 머리털 하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만 것이다. [장편] 클럽-비우(非友) - 6 <12> 가윤의 담임 선생이 아주 심각한 얼굴로 지협을 불렀다. “학교에도 나오지 않고, 연락도 안되고,.. 아버님은 외국에 계신다고 들었고... 사실은...“ 가윤이 같은 녀석이 문제를 일으킬 일이 없을거라고 믿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정년퇴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선생의 얼굴이 너무 안쓰러워서, 지협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동안 무단 결석에, 호스트 바를 들락거린다는 믿을만한 정보도 논의됐고... 이건 내 선에서 어떻게 처리가 안 돼. 학부모들 사이에서 의견이 자자해서... 징계 위원회에서 심하면 퇴학까지도 거론되고 있다.“ 역시 그냥 정학이나 이런 걸로 멈출 일은 아닌 거다. 대한민국의 어느 고등학교도 그대로 넘어가지 않으리라. “내일 오후에 마지막 징계 위원회 모임이 있는데.. 그 전까지 가윤이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다. 어떻게 녀석을 만나야 이유라도 묻지.“ 늙수리한 얼굴의 진땀을 훔치며, 선생은 깊은 한숨을 쉰다. 침착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던 지협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교무실을 걸어나왔다. 자신과 이 선생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교무실의 다른 선생들도 서로 자신을 관찰하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 오전 내내 수업을 빠진 채 교무실에 불려나간 지협이 돌아왔다. 잠깐의 쉬는 시간을 틈으로 아이들이 일제히 뒷문으로 고개를 돌린다. 녀석은 그 강하게 잘생긴 얼굴로 잠시 발 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일학년 때부터 친하던 범기나 상욱들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누군가 어떻게 되어가냐..라고 물었어야 하는데, 아무도 섣불리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것처럼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녀석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다. 조금의 시간 후에야, 그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교복 넥타이를 셔츠 주머니 안에 밀어 넣었다. “너 나 따라갈 수 있냐?” 그렇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책가방을 들며 지협이 범기에게 말했다. 마음 속에 잠깐의 저울질이 계속된다. 어디로 어떻게 가자는 설명이 없는 것이다. 이 친구 녀석이 무조건, ‘따라갈 수 있냐.’라고 물었다. 그 때 상욱이 갑자기 교복 상의를 집어 들며 책상 몇개를 뛰어 넘었다. “가자.” 역시 성질 급한 유상욱이다. 덩치 큰 몸을 굴리며 상욱이 다가오자, 지협이 그제야 안심한 듯 살짝 미소지었다. 쭈삣 쭈삣 서 있는 멋있는 스포츠 형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긴 채, 그가 상욱의 등을 한번 쳤다. 범기의 망설이는 틈을 휘어잡듯, 다시 상욱은 더 크게 외쳤다. “야, 가자, 이범기!” ‘어쩔 수 없잖아...’라고 범기가 어깨를 들썩인다. 그것도 모자라서, 상욱은 조금 아연하게 쳐다보는 다른 녀석들한테도 열심히 한 오바하며 지껄여댄다. “싸나이는 의리! 곧 죽어도 의리 아니냐!“ “....................” “친구의 친구도 내 친구! 당연히 악의 소굴에서 구해와야지!!!“ 그런 게 뭐가 의리야....씨바........................라고 중얼거리며 범기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두번 다시 사고치지 않겠다고 엄마한테 말했는데, 인생 심하게 꼬인 것이다. **************************************** 지협이 열 댓명의 무리들과 함께 바로 향한 것은 다름 아닌 가윤의 반이었다. 그는 그곳의 뒷문에 삐딱하게 기대며 남지일을 불렀다. 애당초 가윤과 같은 반으로써 문제를 일으킨 첫 장본인, 남지일. 눈매 날카롭고 주먹도 마찬가지로 날카롭다고 전교에 소문난 녀석. 녀석은 제일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다가 느릿 느릿 걸어나왔다. 여전히 험상궂은 눈빛을 빛내며 ‘무슨 일이냐’ 식으로 턱을 들어 올린다. 이만하면 시비이거늘,... 지협은 그 순간 씩- 웃으며 그런 남지일의 어깨를 툭-쳤다. “너도 가자.” 그 순간, 범기는 저런 좇같은..이라고 중얼거리며 상욱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영 문을 모른 채, 곰처럼 쳐다보는 상욱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성질만 급한 곰탱이, 유 상욱! “어딜?” 남지일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지협은 가방을 고쳐매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니가 가윤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 이해해.” “...........” “나도 사실 못 마땅해.” “그런데?” 씨익- 다시 깊게 미소지으며, 아이들의 궁금한 표정을 뒤로하고 지협이 팔짱을 끼었다. “그래도 패든지 가두든지 뭘 하든지.. 그 녀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녀석을 끌고 나와야지.“ “...............음...................” “....꼬지른 녀석을 나무라는 게 아냐.” “난 안 꼬질렀다, 강지협.” “알아. 그 정도는 되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니깐, 같이 가자고 말하는 거다.“ “.......난 일학년 때도 이미 징계 먹었어.” 그러자 지협이 무지 큰 목소리로 웃었다. 정말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지일이 불쌍했던 것이다. “그럼 한번 더 먹는다고 큰 일도 아니네. 가자, 남지일.“ “..............” “다른 걸 다 떠나서....... 난 이 일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끼어드는 게 싫다. 그리고 분명히 너같은 녀석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아직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닌데, 간섭받고 싶지 않다.” “.............” “..그 녀석은, 우리들 중 누구도 안 믿어.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그래.” “..그러니깐, 우리가 가서 그 새끼 그런 생각에 엿 먹이자구. 너 그 새끼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냐? 그 녀석이 남자를 좋아하든, 호스트를 하든 그런 건 나중에 따지자구, 우리.“ 아아.. 계가윤이 울어? ......거 참.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강지협. 범기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눈이 동그래진 상욱의 발을 꾹-눌러버렸다. “..가자. 남씨. 니 반 녀석들 데리고...“ “..................” “...우리 문제니깐.. ...우리가 해결해야지. 계가 놈 엿도 좀 먹이고....“ 지일이 험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워낙 사교성 좋은 지협이다 보니 거절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18세의 우리. 우리 식으로 해결하자..라는. 어느 세계든지, 그들만의 방식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일이 욕을 하면서도 짐을 싸고 나왔을 때.. 또 녀석이 몇 명의 지 무리들을 데리고 가윤의 반을 나왔을 때.. 범기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 가윤의 친구일지도 모른다...것을 말이다. 비록 공식적으로 지협이 ‘나는 그 녀석 친구 아니다’라고 말한 적 있었지만..어쩔 수 없다. 이 녀석은 정말 가윤을 아끼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행동하진 못한다. 그러나... 그에 반해 이 녀석은.... 이라고 범기는 계속해서 상욱의 뒷통수를 때리며 들리지 않게 소곤거렸다. “씨바, 새꺄... 넌 무슨 생각으로 따라나왔냐?“ 그러자, 이 생각이라고는 눈 뜨고 찾아볼 수 없는 성질만 급한 유상욱. 굵고 잘생긴 눈썹을 쓱- 밀어 올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멋있잖아?” “....................” “왜 요 전날 지협이 새끼도 그렇게 말했잖아. 이해하든 아니든, 그냥 멋있는 친구로 남아줄 수도 있다고.. 싸나이는 의리! ..곧 죽어도 멋있게 살아야지!“ 아아... 언제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친구를 잘 만나야 해.라고. 윗 어른의 말씀 중 틀린 거 하나도 없다. 그러나, 자신들은 실제로 겪지 않으면 모른다고 늘 고집을 부린다. 어른들 말씀이 다 맞는 거 알고 있는데도 늘 이렇다. 불안한 앞 날을 생각하며 범기는 상욱의 탄탄한 등을 정말 시원하도록 한대 갈겼다. 이게 다 니 탓이야, 이 씨부랄 놈아!!!!! 책임져, 이 새대가리야!!! <13> 지협은 명함을 꺼내들어 그 ‘문제의 남자’에게 전화했다. 누군가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김규철이라는 사람은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떤 회사냐고 묻자, 친절하고 깊이 있는 남자 목소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클럽입니다, 고객님.’ 이라고.. 그래서 알아차렸다. ‘잘생긴 회사원 김규철’은 이 명함에 적힌대로 Ananomi라는 호스트 클럽의 호스트였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한 낮에 학교를 이탈한 그들이 도착한 곳도 바로 명품의 거리 압구정동의 Ananomi 바 앞이었다. 한낮에.. 그것도 교복을 제대로 입은 십대들이 바 앞에 죽치고 앉아 있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각각 쳐다본다. 또한 범기도 마찬가지로 불안해졌다. “강지협.” “..........?.............” “..여기서 기다려도 , 우린 저 안에 들어갈 수 없어. 교복을 입고 있잖아.“ 또한 남지일도 여전히 마음에 안든다는 듯, 저쪽 구석에서 계속 바닥에 침을 뱉고 있다. 그러나 지협은 아무 대답없이 물끄러미 자신만 바라볼 뿐이다. “듣고 있냐, 십새야? 우린 못 들어간다구!“ 그리고... 저 악의 무리들 가운데서 가윤을 찾아오려고 해도 무기도 없고 말야...분명히 조폭들이 관계되어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 범기가 빠르게 덧붙이자, 지협은 여전히 눈만 몇 번 깜박였다. “이 범기...” “..........그래.” “...괜찮아. 우린 들어갈 거다.” “............-!!!!!!!!!” 미친새끼의 미친 친구들이다. ******************************** 오후 4시쯤 되자, 멋진 양복을 입은 청년들이 나타났다. 제각각 들어오는 편이었는데, 바 앞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검은 교복의 녀석들을 의아한 듯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머리 꼭지 열린 십대인 법. 그들 중 아무도 지협 무리들에게 ‘뭐야?’라고 묻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어디선가 본 듯한 잘생긴 사내가 값비싼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 범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청년의 정체를 기억해내려 애쓰자, 청년은 일단 차 문을 내려 무리들을 한번 쳐다보았다. 달칵- 지하에 차를 주차하는 듯 보였다. 처음부터 이 청년은 낯이 익었지만, ‘너희들 하고는 볼 일 없다’라는 식의 싸늘함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죽치고 앉아 있던 지협은 달랐다. 청년이 자동차 키를 돌리며 Ananomi 입구로 걸어오자, 그가 벌떡 일어섰다. “아까 전화 한 게 너냐?” 라고 청년이 웃으며 지협에게 말했다. 지협이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더 여유만만하게 웃는다. ..저 광경을 보니 떠올랐다. 그는 바로 범기 자신이 지협에게 일러주었던 그 청년이다. 늘 학교 교문 앞에 가윤을 데리러왔던 그 사내!! .........저 녀석도 호스트였단 말야? “가윤이 데리러 왔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인가 보군..이라고 생각하며 주섬 주섬 다른 녀석들이 일어났다. 솔직히 이 중의 반은 호스트 바에 쌈질 하러 간다니깐 멋있어 보여서 나선 것이다. 그 철없는 영웅주의...그래도 뭐 가끔은 도움된다. 새대가리 유상욱처럼 말이다. “못 들어갈텐데? 저 안에 가윤이가 있는 건 확실하지만...............“ 범기가 했던 걱정을 그대로 꺼내 놓으며, 청년이 놀리듯 웃었다. 갑자기 부아가 받친다. 그러니깐, 이 무리들이 조폭이라도 싸울 태세로 달려온 거 아닌가. 반면, 지협은 처음부터 좀 침착해 보였다. 든든할 정도로 침착하게 녀석은 청년의 미소를 맞받아친다. 가윤이 저 안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녀석은 더 강한 눈빛으로 웃었다. “오늘 데리고 갈 겁니다.” “니가 무슨 수로? 신분증 검사 할텐데?“ 그럼, 처음부터 계가윤은 어떻게 들어갔어!!........라고 범기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이제 각목을 찾아 Ananomi를 부수는 일만 남았다..라고 생각하며 검은 교복의 무리들은 서로 날카롭게 눈빛을 교환했다. 얼굴만 반반한 호스트들이 어디 맥이나 출 수 있나보자. 그 때.... “규철이 형.” “...........?..........” “...여기 제 신분증 있습니다.” ..라고 지협이 뭔가를 그 청년 눈 앞에 내밀었다. “............???................” 각목이나, 소주병이라도 찾고자 했던 교복파들이 일순 굳는다. 지협이 그 잘생긴 얼굴로 반듯하게 웃으며 내민 것은 다름아닌 명찰. **고등학교 2학년 *반 강지협. ..........이라고 적힌.. “...........하...............” “제가 저기 들어갈 수 있는 허가증 입니다.” “......................” “..친구라는 이름의 허가증입니다.” 규철이라는 이름의 청년도 뭔가 재미있다는 듯 한참 웃었다. 지협이 녀석이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명찰 따위를 내밀 수 있단 말인가. ************************************ 한국의 십팔세 중에 거의 몇 퍼센트 만이 장난으로라도 호스트 바에 들어와 봤을 것이다. 범기는 어리둥절해 져서 여기 저기 적나라하게 살펴보는 상욱의 정강이를 다시 걷어찼다. 정신차려, 이 새대가리야. 우린 지금 견학온 게 아냐. “저 방에 있다.” ...라고 규철이라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구석 룸 중에 하나를 가리켰다. 한눈에 보아도 Ananomi 전체는 번쩍거리는 명품들의 일색이다. 도저히 자신들이 상상하던 그 음침하고 음란한 호스트 바 분위기가 아니어서 일단 교복파들은 기가 죽었다. “정말 사귑니까?” 지협이 그 방으로 향하기 직전에 규철을 향해 물었다. 그 표정 역시 강지협 답지 않게 너무 진지해서 범기마저 쫄아붙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규철은 부드럽게 웃었다. 로비에 몰려나오는 다른 청년들을 손으로 저으며 안심시킨다. 그는 계속 웃으며, 그러나 강하게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지만... ..그렇다면 너는 양보할 수 있냐? 나는 그 녀석의 최고의 애인이자, 최고의 친구가 되어 줄건데? 너같은 녀석은 들어설 자리도 없을 거다.” “그래서 며칠 전에 그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 “.........아... ..그건 내가 그런 게 아냐. 어떤 미친 놈이 그런거지. ...니가 걱정할 만한 그런 일은 없었다. 당연히 그런 일을 안 만들기 위해 내가 존재하는 거고.“ 그러자, 지협이 주먹을 꽉 쥐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솔직히 그럴 생각이었다. 니 말처럼.. 점점 진지해지고 있었어. 그리고 아직도 그건 유효해. 하지만.... 그 녀석은 나에겐 절대 말하지 않아.“ “...................” “..붙잡아 달라고 말야. 아쉬운 건 그거다. 그리고 나에겐...“ “...................” “..너처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명찰이 없다.” 갑자기 가슴이 싸하다. 친구. 그것은 어떤 세상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행증이다. 그 때 마침, 성질 급한 상욱이 지협을 향해 빽 소리 질렀다. 딱 녀석이 손잡이를 돌리기 직전이었다. “야! 우리는 뭐해!” 다시 범기가 상욱의 발을 꾹- 눌러야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지협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대답한 것이다. “뭘하긴? 놀아야지, 이 새끼들아!“ ...............그렇다. 노는 곳에 들어왔으니, 놀아야 한다. 그건 너무 당연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 밖에서 이는 소란에 잠시 당황한 것 같았다. 가윤은 경찰이 온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지협이 선명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녀석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었다. 먼저 아무 말 없이 노려보듯 가윤을 쏘아본다. 그래도 학교에 나올 생각이라도 한 건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에 눈을 멈춘다. 갸름하고 아름다운 얼굴. 살이 조금 빠지고,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목덜미며 쇄골에 그 날에 자신이 몇번이나 남겨 놓은 흔적도 여전했다. 잠시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이 녀석이 ‘나 호스트 한다’라고 말한 그 날부터 시시때때로 올라오던 식도의 울컥한 기분은 내내 목소리를 잠기게 만든다. 여전히 잠을 잘 못잔 듯 깨끗한 얼굴의 눈가만이 조금 부어 있었다. 무척 놀란 모양으로 정말, 가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검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비록 그 순간이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고개를 휙- 돌렸지만, 지협은 낮게 탄식하며 손바닥으로 입 주변을 잠시 가린다. 너는 무엇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걸까. 정말 내 당부처럼, 밥은 제 때 먹고 있는걸까. 왜 나를 믿지 못하지.. ..........결국 난 니가 원하는대로 그렇게 뭐든게 망가지게 놔 둘 수가 없는데.. “이런 데 숨어 있는다고 문제가 해결 되냐?...” 겨우 한마디 꺼내며 지협은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내, 휙-하고 빠르게 자신을 스쳐가려는 녀석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당긴다. 그 바람에 털썩- 가윤의 몸이 내던져지듯 앉혀졌다. 쇼파가 잠시 출렁거렸다. 언제나 깔끔한 옆선이 오기를 드러내듯, 절대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 그 얄미운 얼굴 말이다. 얄밉도록 거슬리는 그 아름답고 단정한 얼굴. 그 같은 얼굴이 며칠 전에 밤새도록 자신에게 시달렸다. 이젠, 절대 니 바램같은 거 들어주지 않겠다..라고 말했는데 겁도 없이 다시 도망간 계가윤이다. .......무엇으로부터..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는지.. 이 강한 고집스러움과 당당함이 얄미워 죽겠는데도, 이제 못 보면 안될 정도로 중독되어 버렸는데 말이다. .........그래..라고 지협은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못 놔주겠다. “지금 나가면, 다시 그 규철이라는 놈한테 갈 거냐?” "....니가 상관할 바 아냐." 잠깐 갈비뼈를 들썩이며, 지협은 숨을 몰아쉬었다. 불빛도 단아하고, 차갑기 그지 없는 공간이다. 그렇게 폐쇄적인 기분을 주지 않는데도 답답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사람에게는 충고가 필요할 때와 위로가 필요할 때가 따로 있는데,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들은 그 두 가지를 항상 잘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학교에 모인 그 어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각박한 감성에 필요한 것은 충고가 아니라 그저 위로일지 모르는데 말이다. 지금 이 녀석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 비록 본인은 자꾸 아니라고 우기겠지만... 문득, 아무 생각없이 그 떨리는 손끝을 꽉 쥐었다. 손아귀에 가득 담기는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설명할 수 없이 설레이고, 이상한 긴장감으로 신경이 파닥거린다. 십년도 훨씬 넘는 친구,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지닌 의미, 녀석이 지닌 표정, 그 단순한 것들이 사뭇 달라진 것이다. 한참 그 손끝을 잡은 채로 지협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이 얄미운 녀석을 휘어잡고 싶어 안달이 난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생소한 경험인 만큼 혼란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 격렬한 두근거림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들자, 까만 시선이 서로 얽힌다. 여전히 일그러진 그 얼굴은, 지협이 이 곳에 나타났다는 놀라움과 더불어 흔들리는 녀석의 마음을 결코 숨기지 못했다. 조금은 위장할 수 있겠지만, 절대 숨겨주질 못했다. 살짝 찡그린 채, 필사적으로 대범해지려 우기는 모습이 안됐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언젠가 어머니와 식사할 때 느꼈던 그 단순한 경험. 그 때도 역시 이랬다. 아...젠장. 난 정말 미친모양이다........니가 계속 이뻐보이니.....................라고 지협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울듯 말듯 간신히 입가와 근육에 힘을 주고 있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향해 천천히 중얼거린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약해지면 안될까." "....................." "니가 이렇게까지 강한 녀석이 아니라면 좋겠다." "........................" 가끔은 내게 마음 놓고 기대게.. 가끔은 내게 그렇게 모질 정도로 등 돌리거나, 너 자신에게서 등 돌리지 못하게.. .. 그러나 기어이 가윤이 자신의 시선을 휙- 피해버린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스르륵--.. 부드러운 천이 손마디를 빠져 나가듯, 녀석이 꽉 잡힌 손을 천천히 자신에게서 빼낸다. 멀어지는 것이다. 포기시키려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체념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필사의 힘으로 사양한다. 자신을........그리고 이 상황을. ".................아....." 지협은 마침내 짧게 신음을 토했다. 뭔가 견딜 수 없을만큼 욱씬한 감정이 상반신을 급습했다. 질끈-하고 갈비뼈 안으로 심장이 파편을 튀며 갈라지는 기분이다. 녀석은 자신을 거부한다. 거절한다. 아마 거리를 둘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방식으로 자신을 밀어낼 것이다. 녀석의 그 동안 기억에서, 삶에서, 앞으로의 모든 관계에서 거절한다. 아무리 여기까지 달려온 자신이라 하더라도 환영하지 않는다. 흔들리지만, 결코 아직도 자신이 내민 손을 잡지도 혹은 매달리지도 않는다. 반대로 자신은 더욱 선명해지는 고통에 당황한다. 단지 거절당했을 뿐인데도.. 위로와 도움을 거절당했을 뿐인데도 이렇게 통증이 짙다. 갈증과 고통이 뒤범벅되어 마음 속이 지잉- 울리는 숨가쁜 맥박소리로 가득하다. 두근 두근 두근.........그 심장은 너무 많이 뛰어 아프다. 녀석이 어디론가 가고 싶고, 어떤 인생의 선택을 한다면 그것을 충고하거나 위로하는 것이 바로 친구의 역할이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될 수 없다. 이 거침없고, 걷잡을 수 없이 뛰어 오르는 심장의 세차 운동은, 오직 녀석의 거절만을 떠올리게 만든다. 계속해서 위장을 쥐어짜게 만든다. 그래서 깨달았다. ...십년이 넘는 친구. .....이 녀석을 어느 순간, 돌아본 것이 바로 문제의 시작이었다. 아주 단순한 일상이 무너지고, 아주 단순한 편견들이 갑자기 뒤섞이고, 선택을 강요받고, 결국 자신은 뭔가 선택했다는 것을... "나한테 이러지 마, 계가윤..." 간신히.. 말 그대로 간신히... 지협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미소짓지만 내장이 뒤엉킨 듯, 내부의 질끈한 고통은 여전히 강도를 높여간다. 마치 타이르듯, 그리고 녀석의 거절을 마지막으로 설득하듯 그는 다시 부드럽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한테 이러는 거 아냐...너." ".............가라."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너 때문에 나 아프잖아, 새꺄...................." "...가... 강지협. 학교로 돌아가." ".....너 때문에 아프다고 말하고 있어, 지금. 재수없이 잘난척 해오고.. 뭐 하나 남의 말 들을 필요없이 니 뜻대로 살아와서 얄미운 니가..." ".........가라니깐!!!!!!!!!!!" ".........이상하지. ...그렇게 얄미워 죽겠는데.. ...넌 내 말같은 건 언제나 비웃으며 무시하잖아... 이십년 가까이 넌 내 친구였는데... ....니가 널 안을 수 있냐고 물었던 말.. 그 말 이제는 취소 안돼. 장난으로 되돌릴 수도 없다.." ".........돌아가라니깐!!!!!!!!!!!!!!!!!!............." "..너는 아니냐...?.. 너만 아닌 거냐?... ...너는... ..내가 친구로서 좋기라도 했었니, 그동안? ..그것도 아니면 그냥 놀린 거였냐..." ".............니 자리로 돌아가, 이 새꺄!!!!!!!!!!!!!!!!!!!!" 녀석이 비명을 지르듯 크게 외쳤다. 언제나 포기와 체념을 남에게 강요하는 이 일방적인 녀석. 마음에 안들고 재수없고 얄미운.. .......그러나 끝내 아프고 안타까운 이 녀석. 지협은 계속 욱씬거리는 상체를 어루만진다. 그리고는 가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스치듯 몇 발자국 걸어 나갔다. 녀석은 저렇게까지 소리지르지 않는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돌아갈까, 그럼?." "......................" "..진짜 돌아갈까?.." 시간이라는 게 무게가 있는지 몰랐다. 살면서 어떤 시간은 그렇게 무거울지 전혀 몰랐다.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벌벌 떨려오는 초조함으로 지협이 가윤을 스쳐갔다. 이번만큼은 자신도 서 있지 않았다. 분명히 잡으러 달려왔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가윤은 미동도 없어 보인다. 정말 패서라도 데리고 가야하나..라는 판단의 한계까지 밀려왔을 때, 가윤이 몸을 돌렸다. "........내가 아무리 불쌍할 정도로 매달려도 밟아버리라고 말했지..............강지협." ".................!......." 선이 청결한 목에 핏줄이 설 만큼 턱이 덜덜 떨리는 녀석이다. 믿을 수 없을만큼 동요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믿기지 않는 쪽은 지협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의 눈가에 말갛게 고인 물기가 엿보였다. 계가윤이 정말 울다니... .......자기 입으로 녀석들을 선동했지만 정말 믿기지 않았다. 녀석은 마치 최선의 힘을 다해,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주먹을 꽉 쥐고, 물기 매달린 속눈썹을 깜박이며 미소짓는다. 언제나와 같은 자신만만한 미소. 그러나 내면이 산산이 부서진 사람이 짓는 쓰린 웃음. 그 거만하고 얄미운 웃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눈가의 물기. “널 잘 알아...“ ..라고 녀석이 말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목이 메인 듯, 마치 싸울 사람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며 녀석이 꺼낸 말은 그게 전부다. “..............!............” 울음과 웃음이 반쯤 섞인 그 찡그린 얼굴을 보며 지협은 조금 고개 끄덕인다. 지금에야 알 것 같다. 그것이 정말은 무슨 말이었는지.. 이전에도 녀석은 자주 ‘널 잘 알아. 세상에 나만큼 널 잘 아는 인간이 있어?’라고 물었는데,..틀리지 않았다. 몹시나 익숙한 이 말은, 그러나 십팔 세의 자신들에게는 일종의 고백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만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녀석은 부들부들 떨리는 턱을 들어 이를 악물 듯 노려본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에게 퍼붓듯, 목소리를 높여 계속 소리쳤다. “난 널 잘 안다구, 이 새꺄!!!! 강지협.. ...난 널 누구보다 잘 알아!!!!!!!!!!!! 나는 널 믿는다구!!.. 세상에서 널 가장 믿어!!.“ 그 갈라진 음성, 참혹한 마음 안 쪽에서 비로소 지협은 녀석의 말이 더욱 생생히 와 닿는다. 일종의 그들만의 암호처럼, 푸른 나무같은 그런 고백. 녀석이 말하는 ‘믿는다’와 ‘널 잘 안다’는 결국 그런 말이었다. 넌 우정이상이야, 강지협. 난 널 누구보다 그렇게 여겨왔어. 널 사랑한다구!!!!! 세상에서 가장 널 아껴. “이 세상에 나보다 널 잘 알고.. 나보다 널 믿는 인간이 또 있어?!!!!” 이 세상에 나보다 널 사랑하는 인간이 있어? “그렇다고 그걸 어떻게 말해!!!!!! 나는 안 답답한 줄 알아? 나도 환장할 것 같아.” 그렇다고 좋아하니, 사랑하니..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고작, 널 믿는다..혹은 널 잘 안다..라는 말이 전부인데.....그렇게 표현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법도 없는데!!!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말이 어렵고 무거워서.. ..기껏해야 이 나이에, 이 현실에 할 수 있는 말이란... 너를 잘 알고, 너를 가장 믿는다는 게 유일한데!!!!!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까지가 최선인데.............. 너야 말로 그냥 날 안으려는 게 다 잖아! 그냥 섹스하는 거랑 상대방을 잘 안다는 거랑 착각하지 마.” 너는 그냥 나 안고 싶니?.. ..너에겐 그게 다 이지만..젊은 시절의 짧은 치기이지만,... 나는 그게 아닌데 어떻게 해. 나더러 어떻게 하라구!!!!!!! 나는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죽을 힘을 다해서 이 상황을 버티고 있는데, 넌 내 마음의 반도 몰라. ...넌 날 잘 알아? “너는 몰라. ...나에게 있어 ‘도와달라’는 말이,.. 혹은 ‘잡아달라’는 부탁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그런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 ...내가 너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면...그건...“ 그건, 사랑한다는 의미보다 더한 거야. 너에게 잡아달라고 말하면, 그건. ...날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야. 나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주길 원하는 치열한 외침이 되는 거야. ..그런 말을 어떻게 부탁해... ...그런 말을 내가 어떻게 입 밖으로 내!!.. “.....그러니깐... 함부로 날 도와주겠다고 생각하지마. 입 닥치고 여기서 나가 버려, 강지협 나도 사실은 힘들...어. 나에게도 지금은 ....어려워.. ..나도........ .......쉽지 않아.........“ .....라고 가윤은 고개를 돌렸다. 지협은 그만 참을 수 없어졌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 단단한 어깨, 심플한 등, 수만가지 침묵으로얄밉게 위장하며 버텨왔던 녀석의 세상... 그 뼈 아픈 현실에 견딜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던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결코 가윤은 처음부터 자신을 놀리려는 것도, 혹은 정말 환장해서 호스트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역시 오래된 친구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친구의 믿음을 배신할 정도로 최악의 녀석이 아니었다. 단지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도 답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그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너 그동안 날 우정이상으로 생각해 왔니.. 사랑해 왔어?........라고..지협의 등으로 서늘한 반문이 몇 번이나 스쳐간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는지 너무나 분명해서...그것을 확인하는 이 과정이 너무 지독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참을 수 없어졌다. 손을 뻗어 와락- 그만, 자신과 키도 비슷한 녀석을 마치 품안에 에이듯 안아버린다. .. 더 견딜 재간이 없었다. “.....날 잘 알아?” 휙-.. 녀석의 돌린 몸을 잡아 자신의 안으로 가득 끌어안으며, 지협이 중얼거린다.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고 흡사 미친 놈처럼 거듭 속삭인다. 녀석의 높은 체온이 와 닿는다. 이를 악문 그 흐느낌에 셔츠가 금방 축축해졌다. 한참 어깨위에 녀석의 얼굴을 묻힌 채, 가만히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견딜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뭔가 멋있는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녀석도 자신도 좋아질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정말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그냥 친구가 아니라고만 이야기 해 주면 돼............“ “...................” “다른 헛소리를 하면, 지금 날 죽이는 것과 똑같아. ....그냥 내버려 둬, 강지협. ...이게 옳아. 그냥 버려둬. ...니가 이 이상 날 잡으려 하면.. ..난 얼마든지 미친 듯 날뛸 거다. ..잘 알잖아? 난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눈물이 얼룩진 채,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마녀처럼 녀석이 샐샐거렸다. 그 억지같은 미소를 보면서도 지협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 안쓰러운 감정의 마지막을 살피듯 바라만 볼 뿐이다.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계가윤은 정말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이대로 끌고 나간다면 녀석은 미친 듯이 날 뛸 것이고.. 또한 이 녀석이 겪어 온 감정의 굴레, 그 진지한 고통에 아무런 해결도 되지 못한다. 잡으러 왔지만, 결코 잡히지 않는다. 손가락을 빠져 나가는 희미한 연기처럼 옅은 미소를 띈 채, 여전히 자신의 말을 비웃는다. 그 웃음이 이전에는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고, 이제는 애닮은 기분마저 든다는 게 오로지 차이일 뿐이다. 그래,..차라리 내가 그렇게 말해서 니가 속 시원해진다면.... “가윤아............” “..................” “.........친구로써의 넌, 오늘이 마지막이다.......” 니가 원하는대로 해 줄게. 니가 듣고 싶은 게 그 말이 전부라면..이젠 정말 진심을 담아 해 줄게. .........그 말 하면 편해지니. 니가 원하는 게 그런 가혹한 자유라면 얼마든지 선물해 줄게. ..그러면 그 암흑같은 웃음을 짓지 않고, 세상을 용케 견디지 않을래...?... ..뭔가를 악착같이 지키기 위해 이런 거짓말도 하고, 자신의 고통을 자진해서 희생하기도 하고,.. 웃기게도 상대방의 행복한 얼굴을 기대하고.. ...이런 것이 진심일 때의 마음이구나. ..처음 알았다.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나....간다...계가윤...” “...........!!!!!!!!” 가만히 가윤의 몸을 떼어 내며, 지협이 뒤로 걸었다. 등 뒤에 탄탄한 문이 부딪칠 때까지, 그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는다. 조금 진정되는 듯한 표정. 내가 멀어져야 상대방이 안심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그 혹독함에 숨통이 아린다. 룸 밖으로 나가기 전에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지협은 여전히 자신에게 철저한 동갑내기 친구를 보며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미친 놈처럼 악을 쓸 필요까지는 없어. 니가 가길 원하면 지금 나가줄게. ..하지만..이 말은 해 주고 싶다.“ “..................” “...내 친구가 남자를 좋아해...” “.......-!!!!!!!!!!” “...근데 조금 전에 알았지만, 나도 어쩌면 남자를 좋아해....” “...........-!!!!!!!!!!!!!!!” “친구를 사랑하는 거.. 그것도 오래된 친구를 어느 날부터 다른 시선으로 느끼고 보게 되는 거... ......그건 생각만큼 나쁘니 않아. 가끔 기대할 만큼 멋지기도 해.” 조금 벌어지는 입술이 보인다. 쌕쌕- 거칠게 입밖으로 튀어나는 뜨거운 숨결이 보인다. 녀석의 동공은 지금껏 지협이 듣고보지 못했을 만큼 경악으로 물들어 있다. 당혹감에 빠진 녀석을 보니, 짜릿할 정도의 쾌감이 들었다. 여전히 부드럽게, 그리고 환하고 크게 미소지으며 지협은 룸의 문을 열었다. 걸어 나오기 전에, 아름다운 친구를 향해 한마디 던지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힘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견딜만 해...” 그래, 견딜만 해. 너도 이 말에 뜻을 알거야. 아무리 니가 듣기 원하는 말을 하고, 이 관계를 잘라버리고 싶어도.. 내가 방금 너를 잡은 손, 너에게 내밀었던 내 손은 여전히 니 옆에 있다는 걸. ..나는 아직 너를 잡고 있다는 걸. 그 편이 훨씬 더 즐겁게 견디는 방법이라는 걸. ********************************* 씨바, 이게 뭐야. 범기는 계속 머리 속에 차오르는 두통을 의식하며 상욱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개념없는 녀석이 어딜가나.... 유상욱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 “오늘 밤 만은 그댈 위해서~ 분홍의 립스틱을 바르겠어요~ 그대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분홍의 입술자국 새기겠어요~“ 마이크를 잡고 얼마나 열창을 하는지...범기는 상욱의 그런 모습에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 쳐다볼 뿐이다. 김규철이라는 인간은 정말 냉혈한인 것 같았다. 그는 지협이 없는 무리들을 룸 안 쪽에 다 몰아 놓고, 바의 다른 호스트들을 불렀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말쑥하고 깔끔하게 생긴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리고.. “동작 봐라! 더 크게! 일동 좌우 반동 실시!“ ........그리고 그 젋고 어린 무리들이 예상했던 혈전은 없었다. 그들은 각목이나 깨진 병 대신,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노는 일에 열중할 뿐이다. 강지협이 이 새끼, 정말 미친 거 아냐..라는 생각만 머리 속을 빙빙 돈다. 잘생긴 형들은 이 상황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끼거나 쇼파에 느긋하게 앉아 박장대소를 했다. 일사분란하게 교복을 입은 무리들은 한 명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 부를 때마다, 열심히 좌우로 흔들며 가락에 맞춰 흥을 돋궈야했다. 이건 아냐..이게 아냐!!... 범기는 이 비극적인 상황과 어쩔 수 없이 우정에 팔린 자신의 몸을 생각하며 혀를 깨물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호스트들은 즐기고 있었고...이상하게도 분명히 반쯤은 고객인 자신과 친구들이 이들을 즐겁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 곳을 때려부수지는 못할 망정, 뭔가 심각하게 입장이 바뀐 것이다! “오오~ 내일이 오면 떠나야 하는~ 그대의 스을픈 눈으을 들여다보며언~ 눈물 방울이~~~~~ 얼굴을 적시고~~~~~~~~~~ 자, 다같이..뚜뚜리뚜바~뚜비 뚜밤바~“ 그리고는 전직이 심하게 의심되는 새대가리 유상욱은 개념없이 쭈욱 한 곡조 뽑아댄다. 나른하고 유쾌한 표정으로 그 무대를 즐기고 있는 호스트 형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넉살좋게 상욱이 온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를 때마다, 뒤로 넘어갈 듯 웃으며 박수를 쳐댄다. 덕분에 한끗 고상하고 호텔같은 이 곳은 이상한 반란으로 얼룩졌다. 범기가 옆으로 살짝 돌아보았을 때, 그 무시무시한 뾰족한 눈의 남지일도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열심히 ‘뚜뚜리뚜바’를 하고 있었다. KBS 합창단 코러스도 아닌데, 모두가 코러스 보이가 돼 버린 것이다!! “..이야~ 그 녀석들 물건인데?“ “그러게.. 무슨 생각으로 여기 들어왔냐? 난 아까 니들이 저기 죽치고 앉아 있길래, 오늘 경찰이라도 들이닥치는 줄 알았지...“ “아..나는 그 유명한 압구정동 교복파인줄 알았지~!!” 그리고는 맥주를 마시며 잘생긴 형들은 연신 즐거워한다. ‘딱 호스트 감이네..졸업하고 올 생각없냐?’등등의 실소 섞인 농담을 들으며 범기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이거 해야 하나..뚜뚜리뚜바.. ...그러나 가끔 하루는 너무 길었다. [장편] 클럽-비우(非友) - (완결) <14> 몇몇의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이 굳은 표정이었다. 학교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어른들이 득실거렸다. 미끄러지듯, 가윤의 반에서 자신의 반으로 범기는 뛰어 들었다. ..씨바.. 어제는 영문도 모를 중노동에 시달렸는데,.. 덕분에 호스트 형들의 사랑아닌 사랑을 듬뿍-받으며!!! “가윤이 오늘도 안 왔대. ........지협이 너 , .... 그 녀석 어제 집에도 안 들어왔다며?...“ 어깨가 탈골이라도 된 듯, 근육들이 춤을 춘다. 누구에게 하소연할수도 없는 ‘뚜뚜리뚜바’ 사건 때문이다. 이게 무슨 18세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거냐, 강지협!!! 니 잘난 설득에 반쯤 넘어가고 있었는데!!!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십새야..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조금 있으면 오후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될 것이고 징계위원회도 열릴 것이다. 그러나 어제 그렇게 잔뜩 멋있게 주눅들지 않던 강지협도 눈썹에 잔뜩 힘을 준채 말이 없었다. 어찌보면 아주 낙심한 것 같지는 않고, 어딘가 어제 밤을 꼴딱 샌 듯 파릇한 수염자국도 보였다. ..수염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의리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야!!” 채근하는 목소리를 묻어버리듯, 수업 시작 종이 울린다. 지협의 자리에서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며 범기는 계속 작은 욕설을 투덜거렸다. 이게 뭐야..아무 것도 나아지는 게 없잖아..라는 생각 때문에 어제의 그 수치와 힘든 결심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드르륵.. 잔뜩 욕을 중얼거리며, 시끌 시끌한 녀석들의 분위기 속에 노트를 꺼낸다. 그 때 앞문이 열리고 국어 선생이 들어왔다. 그러나 선생은 간단한 인사 끝에, 곧 ‘자율학습이다’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다. 아마,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그도 지금 열리는 징계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것이다. “야, 조용히 좀 해, 이 좇같은 새끼들아!” 반장이 쑥덕거리는 녀석들 틈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자율학습..그 허울좋은 핑계에 넘어갈 위인들도 없다. 그들은 제각각 어제의 말도 안되는 무용담을 구라치기에 바빴다. 어제 수업을 빼 먹고 다 달려간 걸 아는 녀석들이 자꾸만 묻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거기 갔었냐?...호스트들도 잘 싸워? ....등등.. ...그리고 범기는 알고 있었다. 어제 밤 그토록 잘생긴 형들의 사랑을 받으며 ‘뚜뚜리뚜바’를 하던 녀석들이 오늘은 마치 전사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한다. 허풍과 위세, 그리고 의리를 빼면 할 말이 없는 시절인 것이다. ..쪽팔려 미치겠구만...아아...이제 어떻게 될려나... ..범기는 한숨만 쉬었다. 가윤이 쫓겨나는 건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도 좋든 싫든 어제 따라 나섰던 것이다. ********************************** 그 때, 어떤 녀석이 외쳤다. 아마 창가에 자리잡은 녀석이었을 것이다. 친구들의 위세좋은 구라에 대충 고개 끄덕여주고 있던 범기도, 고개가 꺽일만큼 대단한 외침이었다. “계가윤이다!!!!!!!!!!!!” 그러자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강지협이었다. *************************************** 뒷문이 열렸을 때, 지협은 한참 허공을 쏘아보듯 바라본다. 그 눈길이 여전히 너무나 아파서 가윤이 살짝 고개를 돌릴 때까지. 그리고 제각각의 이유로 흥분한 녀석들이 책상을 우당탕 뛰어 넘어 그들을 둘러 쌀 때까지 한참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학교에서 마주하는 녀석은, 언제나와 같이 깔끔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자신을 쳐다본다. 옥상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녀석이 자신을 버렸던 날. 그때와 변함없는 아름다운 눈동자는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정갈하다. 호기심 가득한 녀석들이 마치 패 싸움을 보듯 둘 사이에서 눈을 부지런히 굴렸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듯, 녀석의 목울대가 한번 움직인다. 그리고 마치 뭔가 생각하듯, 샐쭉한 눈꼬리를 반듯하게 올려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굉장히 아름답고 침착한 표정이었는데, 순간 숨이 훅-하고 들이쉴 정도로 애처롭게 미소지었다. 지구가 몇 번을 돌아갔을만큼 천천히 녀석이 말했다. “....도와줘......” 드디어 말했다. 그리고 실감이 나지 않아 지협이 눈을 똑바로 뜨자, 녀석이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날 좀 도와줘.” “..............!!!............” “......부탁이야.....” “........................!!!!!!!!!!!!!!!!!..........” 짜릿한 쾌감. 순간, 머리 위로 수천가지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한마디에 집중하기는 처음이다.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잡아달라는 부탁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대신 가윤은 긴 팔을 올려, 자신의 교복 소매 끝을 잡고 조금 흔들었다. 마치 아이들이 길을 잃을까봐 엄마의 소매나 옷 끝을 꽉 잡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사랑스럽고 슬퍼보였다. 머리 카락이 쭈삣 설 정도로 지금 당장 녀석을 끌어안고 싶었다. 온 몸에 소름돋힐만큼 자신도 녀석이 필요했다. 그만큼이나 이런 이 녀석을 원했다. “..........가자.” 지협은 단호하게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이 정도면 된 거다. 이 잘났고 고집불통이었던 녀석이 마침내 자신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차마 전체를 끌어안지는 않았지만, 애타게 매달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녀석이 자신에게 뭔가 부탁하거나 이렇게 사랑스럽게 군 적이 없다. 이렇게 파리하고 조금 부은 눈밑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애원한 적도 없었다. 이렇게 진심어린 부탁에 마음이 찡하게 울렸다. 더불어 심장이 부서질 듯 뛰어 오르고 혈압이 상승했다. 그 순간의 자신은 마치 세상의 전부를 바꾸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기분이었다. 진흙탕에 온통 젖은 채 앉아있던 녀석이 자신을 향해 ‘날 좀 일으켜 줘..’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믿기지 않았지만, 녀석이 부탁하고 애원한 것이다. 언제나 도도하고 절대 망가지지 않았을 것같던 그 녀석이....조금 슬픈 듯 웃으며 가늘게 떨리는 그 손끝으로.. 다름아닌 자신의 소매 끝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이 정도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암...당연히 그랬다. 그는 어제 자신과 같이 압구정동으로 갔던 녀석들을 불렀다. 그리고 주저없이 가윤의 손을 잡고 빠르게 교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 가윤은 자신의 반에서 지일과 몇 명을 불러내는 지협을 보았다. 교무실로 걸어가기 직전이었다. 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제 규철에게 바에 온 녀석들이 대략 열 댓명이었다고 들었다. 매우 놀랍다는 듯 지일을 돌아봤지만, 교무실에 들어갈 때까지 녀석은 빳빳이 앞만 바라본다. 교무실 안에는 굳은 얼굴의 어른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교장이나 다른 학부모들은 매우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반면, 생각지도 못했던 가윤의 등장으로, 담임의 얼굴은 반쯤 반가운 표정이다. “너는 반으로 돌아가라, 강지협” ..이라고 지협의 담임이 말했다. 자신만 놔두고 다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불쑥 들이닥치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했다. 그러나 지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들 앞에서 가윤을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그 따뜻하고 큰 손. 체온이 단단한 그 손. ............갑자기 울컥 속이 아팠다. 그리고 따가운 시선이 싫어서 고개를 돌렸는데, 녀석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조금 낮았지만, 충분히 모두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좀 버릇없겠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이 녀석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게 단지 무단 결석과 호스트 출입 때문입니까?“ 무단결석과 호스트 출입은 ‘단지’라는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가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지협에게 보이지 않게 한 행동이었지만, 마치 녀석은 그 순간을 말리듯 손아귀에 힘을 더 꽉 준다. “강지협. ...가윤이가 압구정동 호스트 바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학부모들이 여럿이야. 실제로 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물어보니.. 다들 더 잘 알고 있더군.“ 학생과주임이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눈길만은 똑바로 가윤을 노려보았고, 그 때 지협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오만한 안경을 쓴 학부모 대표가 신경질 적으로 입을 연다. 그녀가 누구의 어머니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가윤과 같은 반에서 자주 석차를 다투던 녀석의 어머니다. 안경을 쓰고, 지일이 가윤을 팰 때 뭔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그 비겁한 녀석!...누가 꼬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뒤에는 다른 학부모들 서너명이 앉아 있었다. 그 분들은 그녀와는 달리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건, 학생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예요. 그리고 문제된 저 학생도 할 말이 없을 거고.. 듣자하니, 편부모에 아버지도 한국에 안 계신 거 같은데... 공부만 잘 한다고 뒤로 딴 짓을 하면 쓰나. 다른 아이들이 영향을 받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니깐....“ “...........하지만...” “가윤 학생 대답해 봐요. 압구정동 호스트 바에 들락거렸다고 우리 애가 그러든데... 정말 아니라고 말할 자신 있어?“ “......................” “솔직히 말해 봐, 계가윤! 우리 선생님들 중에서도 그 소문을 듣고 있었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거짓말이라고 말할 자신 있어? 너 호스트 바에 정말 갔냐?“ 가윤은 조금 더 흠칫- 떨었다. 살짝 떨리는 손가락을 녀석이 하나 하나 엉키듯 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공격에 할 말이 없다. 가윤은 이내 입술을 야무지게 깨물며 대답했다. “갔습니다.” “,,거봐...내 그럴 줄 알았어.” 꼬지른 녀석의 어머니가 회심의 미소를 띈다. 그리고 다른 어른들도 적잖이 놀라고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소곤거렸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성적이 좋으면 정학 정도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학교 위신문제도 있고, 다른 학생들이나 학부모들 시각도 있는데, 가윤 학생이 양심이 있다면 알아서 학교를 그만두는 게 나는 맞다고 봐.“ “............!!!!!!!!!!!” 잠시 숨을 들이키는 순간, 지협이 그 말에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라는 식으로 선생 몇 명과 학부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가윤의 담임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깊게 한숨쉰다. 그러나 그 때였다. 지협은 떨지도 않는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 정말 호스트 바에 들락거린 일 때문에 녀석을 처벌하실 생각이라면...“ “.........?..............” “..이 녀석 하나로 안 끝납니다.” ..라고 말하고 자신의 등 뒤에 쭈삣거리며 서 있는 어제의 무리들을 돌아본다. 놀란 까달게 가윤이 고개를 휙 들자, 녀석이 윙크하듯 눈을 찡긋 거렸다. 뭔가 짓궂고 장난끼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믿을 수 없을만큼 당당해 보였다. “저도 같이 학교에서 나가겠습니다, 선생님.” “강지협!!...........” 지협의 담임이 벌떡 일어선다. 앞날이 유망한 테니스 선수. 언제나 강직하고 의리 있으면서 항상 넉살도 좋고 유쾌해서 선생들이 좋아하는 학생, 강지협. 그가 씩 웃으며 가윤을 잡은 손을 바싹 끌어당겼다. 것 봐, 힘들더라도 둘이 버티는 편이 훨씬 나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놀란 것은 가윤도 마차가지였다. 살면서 이렇게 놀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항상 자신을 못마땅해하지만, 마지못해 친구로 살아온 강지협이!!! 그러나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듯한 웃음을 띈다. “이 녀석만 호스트 바에 간 게 아닙니다. 저도 갔었습니다.“ “...............-!!!!!!!!!!!!!!!!!!” 그래서..어제....찾아온 거.... ..가윤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든 말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더욱 당황했고, 순간적으로 누군가가 학부모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범기야!!..........” 이범기의 어머니다. ‘딱 걸렸다.’라는 듯한 표정으로 상욱의 뒤에 숨어 있던 범기가 쭈삣거리며 나섰다. 설마,...라는 표정이 가윤과 녀석의 어머니 모두에게 스친다. 그러나 범기는 정말 울며 겨자먹기같은 표정으로 뭔가 억울한 듯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딱 한번 갔었어.. 진짜야.................“ 주여......이라고 말하며 범기의 어머니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독실한 크리스천 집사의 아들, 이범기. 신앙의 힘으로 아들을 개화시키려는 노력의 끝을 느끼신 걸까.... 가윤은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자...잠깐만..........” 누군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손을 저었다. 머리가 벗겨진 교장 선생님이다. 그러나 유상욱 쪽이 더 빨랐다.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범기를 노려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게 그렇게 큰 일이예요? 저도 갔었는데?...........“ 교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으로 무리들을 가리킨다. “저....저...-!!!!!!!!!!!!” 허나, 가장 믿지기 않게도.. ..남지일이 씩 웃었다. 그로써는 가윤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어쩌면 학교의 권위였을지도 모른다. 둘다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난 또 뭔가 했네. 왜 다들 호들갑이지? 거기라면 나도 갔었는데...?....“ 교장을 비롯한 몇몇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그러나 녀석들은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채로 뒤에서 웅성 웅성...수학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뭐야, 그거~ 우리 어제도 갔잖아.” “그래, 별 거 없었는데? 형들하고 놀고 노래 부르고..“ “아~ 거기..? 난 뭐 대단한 데라고 이러시는 줄 알았지. 술 담배 안 팔고 노래만 부르고 나오는 거기? 근데 왜 다들 저래?“ “에이~ 난 노래방인줄 알았지.. 아는 형이 있어서 잠시 놀러간 건데, 그것도 문제인가?” “그러게!.. 전화 해 봐요, 선생님! 거기 김규철이라고 있는데, 그 형이 제 아는 형이거든요~ 그냥 형네 회사에 놀러 간 거예요~“ “와~ 넌 규철이 형 아냐? 나는 승훈이 형 아는데~ 그거 참 묘한 인연이네~~ 어떻게 그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냐??“ 갑자기 시끌 시끌한 소란이 가득한 교무실에서, 가윤은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솔직히 그렇다. 이들을 진짜 친구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걔 중에는 정말 얼굴만 아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 때 그 문제의 학부모가 소리쳤다. “하지만, 학교에 안 나온 건!!! 그리고 아무리 모르고 갔었다 해도 학생이 호스트 바에 출입을 한 건...분명히 문제가...............“ 지협이 더욱 느긋하게 웃었다. 녀석이 짓는 따뜻한 웃음이 손끝으로 전달되어 온다. 손끝을 타고 흘러 팔꿈치로, 겨드랑이로, 쇄골로, 그리고 심장으로 천천히 퍼져간다. 역시 둘이 더 낫지? 뭐든 나누는 건 좋은 거야. “아..그건요, 어머니. 제가 가윤이 룸메이트 입니다. 가윤이가 아팠는데.. 저는 테니스 연습한다고 생활이 달라서, 녀석이 결석하는 걸 범기한테 전해달라고 했거든요...“ 그리고는 자신있다는 듯 범기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범기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상욱을 애처롭게 쳐다보며 마지못해 덧붙였다. “예...근데..요.. 그게 저도 바빠서 상욱이한테 전해 달라고 했던 걸....요..“ 그래서 지협이가 범기에게 범기가 상욱이에게 상욱이가 다른 누군가에게..이런 식으로 전하다 보니 전달 못했어요. 그러니깐 서로 게을러서 그렇게 된 거지 이 녀석이 잘못 한 건 아니예요...라고 말하며 다시 와글 와글.. “저도 얼핏 그런 말 들었습니다. 제가 교무일로 바쁘다 보니 정식으로 체크 안 한 게 잘못인가 봅니다.“ ...마침내, 자신의 담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가윤은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한번도 이들을 친구라고 생각해보진 않았다. 비록 잘 지내는 편이었지만, 진심으로 이들이 자신의 편인 친구라고는 여기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학부모가 소리쳤다. “그런 식으로 감싸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냐!! 어디 그런 값싼 게 우정이라고, 학생들이-!!!“ 그러자, 지협이 웃으며 가윤의 어깨를 툭툭 친다. 반대로 가윤은 자신의 발치에 마찬가지 리듬을 툭툭- 떨어지는 눈물자국을 보고 있었다. “........어머님. 저희는 이 학교에서 우정에는 값을 매길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어머님이 가윤이더러 나가라고 하는 이 학교에서요.“ “..........-!!!!!!!!!!!” “......그리고 설사 학교가 이 녀석을 포기해도 우리가 포기 못합니다.” “..........!!!!!!!!!!” “...이 녀석은.......” “강지협!!!!!” “이 녀석은... ......... 제 친구입니다. 우린..이 녀석의 친구입니다. ..이 녀석은 제 가족.......입니다..“ 너는 내 친구. 친구 이상으로 친구고, 친구보다 더한 친구.. 너는 내 가족. 어떻게 해도 널 버릴 수 없고, 언제나 잡아주고 싶은 내 가족... 내 친구, 내 가족, 내 버팀, 내 의지, 내 필요, 내가 가진 모든 감정, 내가 가진 모든 나눔... ..그리고 그 이상의 의미.. 언제나....내 것.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강지협. 그 녀석의 목이 잠시 움찔거리는 것으로 봐서는 녀석도 뭔가 울컥하는 기분을 참는 기색이다. “..............!!............” 그 순간, 가윤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고백을 들었다.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너의 친구다..라고. 니가 아무리 흔들리고 넘어져도, 절대 혼자 넘어지는 일은 없다...라고. 자신이 잡고 있는 손. 그리고 자신의 단 한마디 ‘잡아달라’라는 말이 자신의 고백이듯...녀석의 ‘친구다’라는 말도 천금같은 사랑고백이었다. 누군가 부정한다 해도, 그 말은 적어도 가윤에게 가장 환상적인 사랑고백이다. 그리고 녀석도 조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너는 늪에 빠졌니? ..아,.. ..나도 그래. 18세들은 늪을 보지 못하고 첨벙 첨벙 앞으로 뛰어나가지. 그러니 뭐 어때. 진흙탕에 빠져도 둘이 있는 게 훨씬 나아. 너도 우냐? ..아,..나도 그래. ........친구란.. ..가끔 그런 거 아냐?.... ************************* 교무실을 나오며 누군가가 말했다. “아, 왜 애를 울려!!” 가윤이 이를 물고 흐느끼듯 눈물범벅이 되자, 난처한 누군가가 괜히 지협을 향해 따진 것이다. 모두가 벼르고 있었지만, 막상 가윤이 울자 당황한 것이다. 원래 단순한 놈들이지만, 마음 약한 놈들이기도 하다. “에..?.. 내가 울린 게 아냐!....”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지협이 우는 가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만하면 잘 했어, 수고했어..라는 의미였다. 그 바람에 겨우 학교에 나온 망설임이 더욱 흩어졌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아 진짜, 쪽팔려 죽는 줄 알았네.” ..지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등을 휙-돌린다. 고맙다..라고 가윤이 울다가 웃는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자, 녀석이 민망한 듯한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손을 흔든다. “범기는?...” 지협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 질문에, 누군가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떨어댄다. “아까, 지 엄마한테 잡혀서 조퇴했어.” “..어쩌냐.. 죽도록 기도하겠군..오늘..“ “...아아.. 그래도 좋겠다, 이범기.. 우리는 이제 죽었다. 학교에서 전화 할 거 아냐.“ “좋은 생각이 있어. 엄마하고 아빠하고 조금 화가 누그러졌을 때 집에 기어가는 거야. 어때? 우리 쪽에서 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화가 풀리시지 않을까?..“ 또다시 시끌시끌시끌... 아이들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슬렁 어슬렁 반으로 돌아간다. 마치 조금 전의 일은 별일 아니라는 듯,..아니, 오히려 한번쯤 멋진 친구로 남을 수 있어서 크게 만족했다는 듯.. 마음도 몸도 다 성장해 가는 그 탄탄한 등들을 바라보려니 마음이 출렁거린다. 살짝 휑한 복도 위에서, 그때 지협이 가윤의 물기 어린 손을 잡았다. “이젠 됐지?” “...................”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고개를 들자, 녀석이 햇살처럼 웃는다. 그 건강한 웃음, 이 실감나는 체온. 언제나 강직하고 밝은 녀석이 마치 가윤을 약올리듯 입을 연다. “난 니 친구 아니다, 계가윤.” “.................” “아까 교무실에서 말할 때까지만 니 친구였어.” “............!!......” 가윤이 당황해하자, 녀석은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이젠 니가 친구하자고 매달려도 내가 못해.” “...........강지협.....” “..친구 안 할련다. 못 해 먹겠다, 그거.“ “....................” “...이젠 대충 고집부리고, 그냥 내 거 해라. 바둥거려서 뭐 할래. 이제 넌 그 바도 못가고 학교랑 우리집 아니면 갈데도 없으면서....” “......야!!.................” “...나도 너 잘 알아. 나도 널 믿어. ..........그냥 위태롭더라도 내 거 돼라.“ “......................” “...어때?.. 그래도 둘이면,.. 세상을....버틸만 하잖아?“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변함없이 그는 ‘집으로 가자...’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가윤은 그만 다시 눈두덩이가 뜨거워진다. 돌아갈 곳이 생겼다. 애초부터 떠날 수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니가 말하는 거 하나도 들어줄 생각이 없다..라고 녀석이 말했다. 그리고 너는 나를 잡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가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너졌다. 언제나 녀석을 잡고 매달리는 쪽이 자신이라고만 여겼는데, 녀석은 그 말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쪽에서 잡았으니, 너는 애써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돌아갈 곳을 찾았다. 바로 그 탄탄하고 따뜻한 큰 손. ****************************** 물론, 다음 날 대문만한 종이가 교문 앞에 붙여졌다. 『상기 아래 학생들은, 학교 교칙을 위반하고, 학생의 본분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한 바, 본교의 명예와 전통에 심각한 훼손을 가했다. 따라서, 본교는 징계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학교의 실추된 이름을 회복하고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정화 기회를 주자는 교육의 취지에 알맞게 아래와 같이 30일 정학과 근신에 처한다. 근신에 처한 기간 동안 본 학생들은 교칙에 따라 등하교 하고, 징계위원회의 결론에 따라 학생생활지도부의 지도를 받으며 .... ..... ......명단은 다음과 같다. 2학년 * 반 계가윤, 남지일...................................... 2학년 * 반 강지협, 이범기, 유상욱..........................................』 결론이 났다. 열 다섯명이 넘는 학생들을, 그것도 증거도 없이 퇴학시킬 수 없는 까닭에..그들은 모두 유기정학에 처해졌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그날의 화려한 무용담을 뻥치기에 바빴다. ...그렇다. 그들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친구를 구출하기 위해 호스트에서 전쟁을 벌이다가 자랑스럽게 유기정학을 당한 것이다....라고.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들이 무모할 만큼 치기어리고 열정 어려서 비록 퇴학을 당하더라도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진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비록 그들 모두가 그 일을 잊어도 적어도 한 사람만은 잊지 못할 거라는 점도 변함 없었다. <15-에필로그> 열심히 잡초를 뽑으며 상욱이 실실 웃었다. “야, 이 범기! 너 어제도 새벽기도 나갔냐? 왜 그렇게 병든 닭처럼 빌빌 거려?“ 유기정학들은 수업에 들어갈 수 없다. 대신 하루 종일 반성문 쓰고, 온갖 청소에 가끔은 학교 운동장 돌을 고르고, 잔디의 잡초를 뽑는다. 믿기지 않겠지만, 호스트 바에 가서 적들을 소탕한 이 학교의 영웅들은 야구르트 배달 모자를 쓰고 열심히 잡초 제거의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뭐니 뭐니 해도 따가운 햇볕을 가리고 자외선을 차단하는 데는 이 모자가 최고라고 유상욱이 적극 권했던 것이다. “말 시키지마, 삼각김밥. 내가 얼마나 많이 기도해야 이 과거가 회개되겠냐.“ 투덜거리며 녀석은 잡초 뽑기에 열을 올렸다. 언제부터인가 이범기가 자신을 똑바로 쏘아보지 않는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유상욱은 잡초를 뽑는 일에만 열중하기로 결심했다. 사나이는 의리! 친구는 의리! 잡초 뽑을 때도 의리는 중요하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어떤 녀석들은 짓궂게 인사하며 지나쳤다. 거들먹거리며 ‘여어~’라고 손을 치켜드는 상욱과는 달리 범기는 더욱 땅을 파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인사하지마, 인사하지마. 이 상황에서 제발!!........... “...아.. ....이 씨밸놈의 잡초들은 언제까지 뽑아야 되는 거야..“ 다른 누군가도 투덜거리며 웃는다. 남지일이 바닥에 침을 퉤-뱉으며 그 말을 씹었다. “자, 니들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회초리를 흔들며, 가윤의 담임이 등 뒤에서 소리쳤다. 그도 시말서 썼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이 일에 연관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억울해 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이 범기를 빼고...덕분에 지협은 자신의 플레이 스테이션 2를 양보해야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한 댓가가 아닌가! “자, 가자.” 녀석들은 허리를 일으키며 체육복 무릎에 묻은 흙을 턴다. 가윤도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뭐라고 떠들썩하게 웃으며 들어서는 녀석들 틈에서 지협이 무심결에 자신에게 손을 잡았다. “자, 가자..” “.............” “..집에 가야지.” 언제나처럼 든든하게 잡고 성큼 앞으로 발을 내민다. 밝은 저녁의 햇살이 낯살 뜨겁게 운동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동장을 뛰쳐나오는 아이들이 석양 속에 자전거를 탄다. 아주 많은 아이들의 무리가 색색깔의 저녁 노을 안으로 자전거를 몬다. 넥타이 끝이 펄럭이며 사라지는 그 모습은 단연 이 학교의 장관이었다. 졸업하기 전까지 내내 가장 멋진 풍경으로 기억될 모습이다. 그들은 언제나 노을을 향해 자전거를 몬다. 그러나 그 저녁을 두려워할 필요가 별로 없었다. 아무리 앞이 캄캄해서 자전거가 진흙에 빠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언제나 친구가 옆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갸우뚱- 몸을 가눌 수 없어 진흙탕에 자전거가 쓰러진다 해도, 여럿이 함께라면 훨씬 낫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 “씻어..” 머리를 털고 나오며, 지협이 가윤에게 수건을 던졌다. 자신의 차례가 끝났으니 씻으라는 말이다. “으응.” 더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의를 벗어던진 채로 가윤은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이 독서실에서, 그리고 녀석이 체육관에서 돌아온 것은 밤 늦은 시간이었다. “야, 씻어!” 여전히 게임에 열중하자, 지협이 소리치듯 수건을 가윤의 머리 위에 올린다. “안 치워?” 다시금 쏟아지는 뾰족한 목소리. 그러나 지협은 실실거리며 그 수건으로 가윤의 머리 위에 터번을 말았다. 인도갈까, 인도? “강지협....” “응?...” “좋은 말로 할 때, 하지 마.” 어깨에 묻은 땀방울이 예뻐서 등을 혀로 살짝 핥자, 금방 녀석이 날카롭게 나무란다. 타이판 갈까, 타이판? 야자수 그늘 아래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룰루 랄라~범기랑 상욱이한테 엽서도 띄우고... “그럼 씻어.” “흐응..웃기고 있네. 언제부터 니가 잘 씻었다고 잘난 척이냐, 강씨?“ 씻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비웃는다. 그 웃음이 너무 얄밉고, 또 한편으로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협은 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도 안 되고, 그제도 안 되고.. 아마 오늘도 안 될 거다. ......앞으로 쭉 안 될지도 모른다. 어제도 침대에서 차였고, 그제는 방문앞에서 일격을 당했으며, 그그제는 신문지 뭉탱이로 맞았다. 너무하잖아?..라고 말해도 가윤은 절대 그 오만하고 달콤한 미소로 약만 올릴 뿐이다. “자꾸 그러면 친구로 다시 돌아간다?” 강지협이 턱을 치켜세우며 거만하게 위협했지만, 예쁜 눈은 샐쭉하게 가늘어지며 ‘그러시든지?..’라고 대답했다. “내가 다시 나영이랑 사귄데도 좋아?” “..오홀~.. 그래, 그럼 그러시든지.. 나는 다시 규철이 형이랑 원.조.교.제. 하며 되니깐..“ “씨바.. 너 그 형 한번만 더 만나봐!!!! ...아주 그 형 보는 앞에서 니가 뻑가는 표정 짓게 만들어줄테니!!........“ “..웃기고 있네. 실력도 없는 게 말빨만 늘어가지고...“ 부글 부글... 계가윤은 나쁘다. 어디 한번 져 주면 안되나.... 내가 아무리 테니스 치기 때문에 정력을 소모하면 안된다고 해도 그렇지........... .................. .......나는 사내도 아니냐.. 어떻게 그렇게 나불 나불..사람을 약 올리고 휙휙- 사람 손에 걸리지 않게 도망이나 다니고!!......... .. “나영이 한테 전화 했어?” 지협이 다시 눈을 반짝이며 공격하자. 그 순간에야 비로소 가윤이 움찔- 어깨를 움츠린다. 귀 뒤 쪽을 빨 듯이 혀로 훔쳤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어디로 느끼는지 호시탐탐 연구 중이다. 녀석이 갈 때 짓는 그 표정이 너무 좋아서, 가끔 머리 속이 심각하게 균열하는 자신이다. 심각하다. 좀 많이 그렇다. 그러나 재수-!.. 역시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만큼, 드디어 반응이 살짝 있다. 못말린다는 듯, 조그맣게 뜨거운 한숨을 토하며 녀석이 고개를 치우려 필사적이다. 왜 이렇게 도망만 가냐..너는... ..그러니깐 더 사람 환장하게 만들잖아, 지금..!! “........우응... ...하지마!!............“ “..나영이한테 전화 했냐니깐?... 내일 피자 먹자며, 다같이~” 다시 한번 집요하게 물으며 녀석의 귓속으로 혀를 말아 넣었다. 훅-하고 빨아들이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늘게 떨며 녀석이 저 쪽으로 확 물러앉는다. 이런 젠장. ........조금만 맛보게 해주면 어디 덧나나... ..그 동안 나 좋아해줬다면서.. ..내가 모르는 동안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갈증나 했는지 나는 궁금하고 억울할 지경인데.. ..살짝만 맛보면 누가 쓰러진다냐...이 지독한!!... “니가 전화 해, 이 발정기 짐승아.” 가윤이 머리 위의 수건을 내리며 힐난하게 비꼬듯 깔깔거린다. 그리고는 잘 빠진 몸을 일으키며 혀를 낼름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그 날 내가 나온 건 너 때문이 아니라, 나영이 때문이니깐.” 인도건 타이티건 타이판이건 다 물 건너갔다. 언제나 그렇듯, 싸움의 승자는 늘 계가윤이다. 처량할 정도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과는 상관없이 욕실 쪽으로 걸어간다. 아아..나영이. 그렇다. 그 날..자신과 전설의 압구정동 교복파 무리들이 바 앞에 간 날, 그 날 밤에 나영이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강지협이 좋아. 그리고 너도 좋아. ...하지만 둘 다 친구로 남아있지 못할 정도는 아냐. 그리고 난.. 애인이 아니라 친구가 필요해. 다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결론이 꼭 필요해? 다음에 내면 안돼? 그냥 셋이 다 친구하면 안돼??‘ 쿵쿵- 발소리를 크게 내며 지협은 가윤이 들어간 욕실문을 마구 두드렸다. 그리고 여전히 불만에 가득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그럴 거면, 나영이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말하지, 왜 나한테 왔냐?” 하긴.. 저 얄미운 녀석이 그런다고 덥썩- 나에게 안길 것도 아니었겠지.. 요새는 깜직하게 욕실문도 잠그는데 뭐... 씨바..계가윤이 계가윤이지....그 .계가윤이 어딜 가나. 그러자 물소리와 섞인 채 왠지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대답했다. “너도 나영이 이야기 하면 좋을 거 없을텐데? 그 대낮에 나영이한테 키스한 게 누군데 그래?” 누가 뭐래도 우린 그 녀석에게 빚진 게 있지..라고 중얼거리며 지협은 털썩 욕실 문 앞에 주저앉았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보여주라...씨바..나도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래? ...너 너무 나쁜 거다, 계가윤. “야, 유쾌한 바보!” 한참 물소리 흐르더니 갑자기 빼꼼히 욕실문이 열린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근 두근 하는 지협을 향해 녀석이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아아..예뻤는데.. 그 때 학교로 돌아와서 망설이며 내 소매 끝을 잡았을 때, 정말 예뻤는데.....내가 다시 죽었다 깨어나도 그 때처럼 환장하게 매달리는 일은 없겠지. ..아깝다...씨바.. 침대위에서라면 그렇게 매달리게 만들 자신 있는데.. 사실, 너도 그 때 매달렸잖아. 이제와서 또 아닌 척 하기는.. ..진짜 얄밉다.. “뭘 그렇게 쳐다 봐, 이 정학생아!” 그리고.....진짜 아깝다. 그 때 조금 더 시간을 벌어볼걸.. 녀석은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과 얼굴로 문틈으로 살짝 목만 내민체 샐샐 웃었다. 그대로 손을 뻗고 싶지만, 사나이 체면에 꾹 참을 뿐이다. 그러나 녀석은 그 환상적인 미소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밥먹자!...” “.................................” “야, 밥 앉혀.” 기가 막히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지협이 팔짱을 낀다. 이 나쁜 녀석... .................이제는 아예 부려먹기까지!!............ 그러자 목 너머로 작게 큭큭거리며, 가윤이 갑자기 자신의 이마에 키스했다. 츕-하는 작은 소리에 지협은 잠시 얼어버린다. 정신을 조금 차렸을 때, 이미 욕실문은 쾅-하고 닫혀 있었다. “야!!..이거 너무하잖아!!..............” 그럼 우리 일본갈까, 일본? 노천하러...?.. ...돈이 어딨냐구?.. ....한번만 더 나한테 매달려 봐. 그럼 내가 죽어라 벌어줄게. 암, 그렇고 말고. “밥 해주면 생각해볼게.” .....라고 대답하는 저 즐거운 목소리에, 지협은 어깨를 조금 늘어뜨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누가 뭐래도... ..아무리 자신을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날이 갈수록 뻑 갈 정도로 좋아진다. 자꾸 호흡이 격렬해지는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가윤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알고 있다. 도망갈 여지를 주기 위해서 이다. 후회가 되면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도망갈 수 있도록...다른 기억을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아직도 십팔세는 늪이 빠져 있다. 하지만 두고보라지...라고 쌀을 씻으며 지협은 툴툴거렸다. 절대 안 될거다...라고 또 혼잣말하며 두부를 마구 썰어댄다. 지글 지글..두부가 후라이팬에서 섹시하게 선탠을 한다. “밥 먹자~!!!...............” 어느새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맑은 녀석이 달려왔다. 목욕을 마친 녀석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 계가윤의 냄새다. 왜 가윤이에겐 좋은 냄새가 날까. 날마다 세탁기에 넣어 통째로 피죤 부은 그런 냄새... “...밥 잘 먹어.” 가윤이 젓가락을 건네주자, 지협은 뜬금없이 말했다. 식탁 맞은 편에 팔짱을 낀 채 앉은 자신의 모습이 조금 전과 달랐기 때문인지 녀석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비웃는다. “잘 씹어 먹으라구.” 아냐, 밥 잘 먹어. 딱 그만큼만 서로 행복해지자. 매일같이 먹는 밥인데 네 생각 나지 않을리 없잖아.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나는 니 친구가 될 거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니가 원할 땐 친구, 니가 원할 땐 그 답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 내가 말했지? ...친구에게 찡-하게 마음이 빠지는 거.. 그것도 오래된 친구에게, 동성의 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수만가지 감정을 느끼는 거.. 그거.. “왜 웃어, 계가윤?” “..두부가 맛있어서, 행복하거든. 두부도 행복하대.” ..그거, 겪어보니깐 쑥스럽지만 그렇게까지 못견딜 정도는 아냐. 사실은 아주 괜찮아. 행복해. 딱 두부가 익은 만큼만, 딱 그만큼만......지금은 그 정도라도 좋아. 그러니까...밥 잘 씹어 먹어. 이 새꺄... 시간이 한참 흘러, 너와 내 머리가 희끗해지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이런 저런 일들이 잊혀지는 순간이 되더라도.. 그때도 우리는 가장 좋은 친구, 가장 좋은 남자로 남자. ..그거 괜찮지 않아? 어떤 답이냐가 결국 중요한 건 아니잖아. 사랑이니 뭐니 이런 게 너무 무겁고 어렵다면,.. 그냥 두 손만 잡고 견뎌보자. ..가끔은 이것보다 훨씬 좋아질지도 몰라. 난 너에게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너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어. 너에겐 그 말이 관계의 끝인지 몰라도.. 나에겐 안 그래. 중요한 건 그거지. 넌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어. 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인 내가, 그만큼의 자리를 비워났으니 말야. ..잘 들어. 넌 이제 내 친구 아냐.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넌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어. 언제든지 니가 원할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 사람들이 가끔 잊는데, 그곳에 학교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압구정동의 어느 곳에 멋진 호스트 바가 하나 있었다. 전혀 관계 없는 두 곳일 것 같지만 묘한 공통점이 있다. 언제나 최고의 쾌락과 유희가 넘치는 그 바에도 사람이 있고, 친구가 있었다. 더군다나 할 말 많고, 늘 자극을 찾는 새로운 나이의 그들에게도 물론 친구가 있다. 그 두 장소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에게도 우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 늘 같이 걷는 그 파트너 ..... 누군가가 말했다. 신은 고통과 동시에 친구를 준다고. 그것은 어쩌면 아주 공평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격정에 시달리는 연인도 아니고, 핏줄을 나눈 가족도 아닌데 내 등 뒤에 굳건히 버티어준 그들. 가끔은 생각과 기호도 틀리고, 마음을 정말 상하게도 만들지만 또 사람을 감동시키곤 하는 그들만의 이상한 재주. 언제나 걸쭉한 욕설을 입에 담고 있지만, 가끔 살 떨릴 만큼 영화 속 주인공처럼 멋진 선택을 해 주는 그들.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 혹은 그런 친구를 갖게 된다는 것은 그래서 공평하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너는 내 친구다’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인생이 달라질 때가 있다. 그것은 친구란 가끔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우 (非迂 - *한자로 아니다 ‘비’에 먼 길 혹은 마음이 삐뚤어지다 ‘우’. )- 마음이 가까운 벗이다. 바로 그 오랜 친구와 함께 사랑에 빠지는 것. 우정과 사랑이 뒤범벅된 치열한 그 시절을 즐기는 것. 가끔, 그것도 누군가에겐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나쁘지 않다. 매우 좋다. 그래서 우리들은 곧잘 그런 선택을 하곤 한다. 최고의 가족, 최고의 협력자, 최고의 이해자.. 가장 가까운 거리의 사랑. 바로, 비우(非迂). 어떤 초여름, 그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이 하나있다. 그들은 서로 갉고 싸우고 놀리지만, 가끔 제대로 서로를 응시하고 말없이 서로 미소 지으며 같은 문장을 떠올린 채 대책없이 따뜻해진다. 그 한 줄은 바로 이렇다. ‘친구’란 내 인생 최고의 칭찬이다. -클럽2-비우 終-